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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편(Mordern Philosophy) in 서양 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1945)(러셀, 최민홍, 집문당, 1996(원, 1945, 수정 1961), I 722, II 489.) .
-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영국 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
*** 현대편(Mordern Philosophy) 하권
제1부 르네상스에서 흄에 이르기까지 11-269
제2부 루소에서 현대까지 271-487
근대의 형이상학자로서 마지막 형이상학자이라고들 한다. 나로서는 그가 상층 형이상학자들 중에 마지막 형이상학자이다. 존재와 현상에 대한 구조적 설명을 한 라이프니츠는 존재에다가 역동성을 불어 넣으려는 장점이 있다. 미세한 실체(모나드)에도 에너지가 있다고 보았다. 그 모나드들 중에는 표현될 수 없는 기억을 가진 모나드가 있다고 하여 어쩌면 만물에 심리(영혼)이 들어있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심리가 에너지(벡터 힘)의 일부분으로 상정하였다. 벩송은 이 에너지를 생명으로 보고 만물을 관통하는, 또는 질료에서 솟아나는 생명이 있다고 보았다. / 그러면 칸트는 형이상학자가 아닌가? 그는 형이상학의 불가능성을 이야기 했고, 헤겔은 형이상학에 도달(극한)로서 절대지를 인정하였다. 형이상학이 형상이나 관념으로서만 있는(존재) 것이 아니라는 것을 논하는 것이 19세기의 과제가 되는 된다. 운동(흐름)을 존재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은 질료(hyle)가 흐름인지 무규정적인 것인지, 비결정적 실체인지, 또는 생명인지는 아직도 아무도 모른다. 그럼에도 질료를 설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상층론자들이 관념을 설정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후자(상층)는 기표적인 데 비해 전자(심층)는 자기 생성적이다. 이 차히의 철학을 들뢰즈가 다시 논하며 심층의 흐름 또는 생성(자)를 상정하게 될 것이다. (50S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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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라이프니츠 138-159
라이프니츠(Leibniz, 1946-1716)는 역사상 가장 숭고한 지자(知者)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존경할 만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는 유명한 고용인(雇傭人)이 갖추어야 할 그런 종류의 덕(德)을 소유하고 있었다. 즉 그는 부지런하고, 검소하고, 절제 있고, 금전 문제에 결백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스피노자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고귀한 철학자로서의 덕은 결여되어 있었다. (138) [지자(知者)일지언정 현자(賢者)는 아니었다? 이런 평가라면, 서양 철학사에서 현자는 소크라테스, 안티스테네스, 플로티노스, 스피노자, 벩송, 들뢰즈 정도 일 것이다.]
라이프니츠에게는 두 가지 철학체계가 형성되었다. 하나는 그가 외부에 발표한 것으로 낙관적이며 정통적이고 상상적이며, 천박한 것이고, 또 하나는 그의 원고에서 근래의 편집자들의 손에 의해 차츰 발견된 것으로 심오하고 논리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으며, 대체로 스피노자의 색체가 많고, 놀랄 만큼 이론이 정연하다. (138)
이 세계가 가능한 모든 세계 중에서 가장 좋은 세계(die beste aller möglichen Welten)라는 학설을 발견한 것이 라이프니츠였다. 브래들리(F. H. Bradley)는 이 학설에 대하여, “그의 세계에서 모든 것은 불가피한 악(惡)이다”라고 조소하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리고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팡글로스 박사(Doctor Panglos)로서 풍자한 것도 라이프니츠에 대해서였다. (138) (상층 사고는 질서있는 세계가 있고, 다른 가능성들은 허구 또는 가상인 셈이다. 스피노자가 여러 속성들이라는 표현 이후, 라이프니츠는 가능성의 세계들이 많다는 것을 인정한 것 같다. 그 중에 가장 좋은 세계를 택한다. -> 다윈이 나올 수 있는 기반이며, 가장 잘 적응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것도 상층사고이다. (50SLA))
라이프니츠는 30년 전쟁(1618-1648)이 끝나기 2년 전에 태어났다. ..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다. 1666년 알트도르프(Altdorf) [대학]에서 「까다로운 문제(De Casibus Perplexis)」 박사학위를 받고 그 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그는 “전혀 다른 일을 계획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 자리를 거절했다. (138-139)
1667년 마인츠 대주교(Johann Philipp von Schönborn, 1605-1673)의 보좌역이 되었다. .. 그는 대주교의 찬동을 얻어 프랑스 왕을 설득하여 독일 침략보다 이집트를 정복하게 하려고 하였다. ... 그는 1672년에 이 계획과 관련하여 파리로 갔으며, 그 후 4년 동안 파리에서 살았다. (139)
그가 미적분을 발견한 것도 파리에서 있었던 일(1675-1676)이었다. 이 미적분은 뉴턴이 이미 발견한 것이지만 출판을 하지 않았으므로, 라이프니츠가 뉴턴의 그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1684년에 먼저 공개하였으며, 뉴턴은 1687년에 공개하였다. (139) [베르누이 가(La famille Bernoulli1) : Jacques (1654-1705) et Jean (1667-1748), 그리고 나중에는 Daniel (1700-1782)도 있다. / 쟈끄는 라이프니츠] 편지교환으로 미분계산의 길을 이끌었다고 한다.]
그는 파리에서 데카르트의 철학과 가상디(Gassandi)의 유물론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 양자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이 대 그는 스콜라주의를 가리키는 사소한 학파를 버렸다고 말하였다. .. 그리고 말브랑쉬(Nicolas Malebranche, 1638-1715)와 아르노(Arnauld, 1612-1694)를 알게 되었다. 끝으로 그의 철학에 영향을 준 것은 스피노자 였다. 그는 1676년에 스피노자를 방문하여 한달 동안이나 그와 자주 만나면서 토론하였다. .. 그는 말하기를 스피노자와 단지 한번밖에 만나지 않았으며 당시의 스피노자는 정치학에 관하여 몇가지 좋은 일화를 들려주었을 뿐이라고 하였다. (140)
그가 하노버 가문과 처음 맺은 것은 1673년이었다. 그는 그 후 남은 생애를 하노버 가문에서 일했다. .. 브룬슈비크의 역사를 쓰기도 한다. / ... 브룬슈비크 공이 영국 왕으로 부임할 때(1714년) 라이프니츠를 하노버에 그대로 내버려 두었던 것이다. 그 까닭은 그가 뉴턴과 싸웠기 때문에 영국과 불화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140) [그가 늙었기도 하지(68세)]
라이프니츠의 인기 있는 철학은 단자론(Monadologia, 1714)과 이성에 기초한 자연과 은총의 원리(Principes de la nature et de la Grâce fondés en raison, 1714)에서 찾아 볼 수 있다. .. 그의 신학적 낙관주의는 변신론(Théodicée, 1710-14)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저술은 프러시아의 샤를로테(Sophie-Charlotte de Hanovre, 1668-1705)를 위해 썼던 것이다. (141)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나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철학의 토대를 실체의 개념 위에 세웠다. .. / 각 실체는 비연장적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무수한 실체가 있다고 믿었다. 이와 같은 실체 하나하나를 “모나드(단자, 單子)”라고 불렀다. 이 모나드는 어느 의미에서는 물리학의 점(點)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추상적으로 생각할 때에 그렇다는 것이며, 실제에 있어서 각각의 모나드는 하나의 혼(魂)이다. 이것은 연장이 실체의 속성이 될 수 없다는 데서 자연히 내려지는 귀결이다. 나머지 유일한 본질적인 속성은 사유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라이프니츠는 물질의 실재성을 부인하고 여기에 영혼의 무한한 집합으로 대치하였다. (141)
실체와 실체는 서로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데카르트 학설을 그의 후계자들이 더욱 발전시켜 왔으며, 라이프니츠도 이것을 받아들여 특히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는 두 개의 모나드가 서로 인과관계를 가질 수 없다고 한다. 그것들이 외관상 서로 인과관계를 갖고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나드는 “창이 없다”고 표현한다. (141-142).
이와 같은 주장은 두 가지 난점이 있다. 그 하나는 역학에서 일어나는 난점이다. 물체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그 물체들이 서로 충돌할 때에 그렇다. 둘째로 지각과 관련된 난점이다. 지각은 지각하는 자에게 미친 지각된 대상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142) [감성(지각)은 들고 나는데 보태지는 것이 있다]
라이프니츠는 모든 모나드들은 우주를 반영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 신이 자동적으로 이러한 결과가 되도록 하기 위해 그와 같은 성질을 각각의 모나드에게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 하나의 모나드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다른 모나드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 사이에는 “예정조화(une harmonie préétablie)”가 있다고 한다. 이 예정조화로 말미암아 서로 영향을 주는 듯한 외관[현상]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 이것은 분명히 동시에 울리는 두 개의 시계의 [이론을 이어받은] 연장과 같은 것이다. (142)
인간의 육체는 완전히 모나드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모나드가 각각의 혼(魂)들이며, 또한 불멸(不滅)이다. 그러나 모든 모나드 중에서 하나의 지배적인 모나드가 있는데, 이것을 흔히 인간의 영혼이라고 부른다. [또한] 이 모나드도 인체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며 두 가지 의미에서 지배적이다. (143)
공간에 대하여 고찰해 보자. 감각에 나타나고 물리학에서 가정하는 공간[사이]은 실재하지 않는다. .. 그것은 모나드가 배열되어 있는 차원의 질서이다. 이 배열의 기준은 각각의 모나드가 세계를 반영시킬 수 있도록 되어 있다. .. /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진공(眞空, 빔, 무)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시점은 각각 하나의 모나드에 의해 점령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하고 하나의 시점[관점]이 한 모나드일 것이다. 어떤 모나드도 엄밀히 말해서 동일하지 않다. 이것이 라이프니츠의 “식별할 수 없는 것의 동일성(principe d'identité des indiscernables)”에 대한 원칙이다. (143)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와 달리 자유의지를 중요시하여 자기 철학 체계에 이를 인정하였다. 그는 충족이유율(principe de raison suffisante)을 갖고 있었다. ... 인간이 하는 일에는 반드시 논리적 필연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143)
신의 행위에도 마찬가지로 자유를 갖고 있다. 신은 언제나 최고의 선을 위해 행동한다. 그는 논리적으로 강요를 당하여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144) [상층이 표면을 조작하는 자유(liberal)은 상업 자유주의로 연결되어 자본주의 발달로 신자유주의로 간다. 심층에서 표면으로 솟아나는 자유, 그 필연성을 감내하는 자유, 자연의 이법을 따르는 자유, 즉 자연대로 하는 자유(libertaire)는 공동체(공산사회)의 길로 갈 것이다. (50SLA)]
구약의 신은 힘의 신이요, 신약의 신은 사랑의 신이다. 그러나 신학자들의 신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칼뱅에 이르기까지 지성에 호소한 신이다. 이 신의 실재는 우주를 이해하는데서 일어나는 논리적 난점을 해결해 준다. [구약의 신은 이중성이 있다. 하나는 전제적이고 다른 하나는 무리를 이끄는 것이다. 후자가 사제(예언자, 이사야)들의 출현의 근거이라고들 한다. / 지성에 호소하는 신을 이신론(理神論)이라고도 한다. 이신론의 신은 소쉬르의 견해에 비추어 보면 기표(le signifiant)와 같다. 이것은 들뢰즈에 의하면 의미생성(la signifiance)의 차원이라는 점이다. (50SLA)]
신의 존재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증명에는 네 가지가 있다. / 즉 1) 존재론적인 증명, 2) 우주론적인 증명, 3) 영원한 진리에서 증명, 4) 예정된 조화에서 증명이다. 이 넷째 것은 일반적으로부터의 증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칸트는 이것을 자연신학적인 논증이라고 불렀다. (145)
존재론적인 증명은 존재와 본질의 구별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 햄릿은 실재하지 않았지만 일정한 본질은 갖고 있었다. 그는 우울하고 결단성이 없고 재질(才質)이 풍부하였다. .. 이 본질은 존재를 뜻하지 않는다. 신의 경우에는 – 안셀무스가 정의를 내리고 데카르트가 계승한 것처럼 – 가장 완벽한[완전한] 존재이고, 따라서 본질이 존재를 의미한다.
이 증명은 헤이그에서 스피노자를 만났을 때 이 증명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 이 증명은 신을 가장 완전한 존재로서, 다시 말해서 모든 완전한 것의 주체로서 정의한다. 완전이란 “그 성질이 적극적이고 절대적이다. 또한 그 성질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거나 아무 제한도 없이 의미할 수 있는 하나의 단순한 성질이다.” .. 결론을 내린다. “그러므로 모든 완전한 주체, 즉 가장 완전한 존재는 존재하며 또한 인식될 수 있다.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존재는 많은 완전한 것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 칸트는 이와 같은 주장에 반대하였다. 칸트가 반대한 이유로 “존재란 술어가 아니라는 점을 들고 있다. 또 하나의 반대 주장은 기술론(記述論)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146) - [러셀의 기술론 즉 지시이론으로 자기자체를 서술하는 것이 모순되기 때문이다. 럿셀의 지시이론에는 자기를 빼야만 무한에서 언어 논리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50SLA)]
우주론적 증명은 존재론적 증명보다 더욱 그럴 듯해 보인다. 이 주장은 제1원인론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 우선 유한한 한 것은 다 원인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원인도 원인을 가질 것이며, 이렇게 해서 소급해 올라간다. 이 같은 원인들은 결코 무한할 수 없다. 이 계열의 첫째 항(first term) .. 곧 신이다. (146) [목적론적 설명도 마찬가지이다. / 경계의 무한정한 확장 또는 한계의 지연(지불유예) 등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지불유예에 관한 논의 스토아학파에도 있다. ]
“제1원인론”은 모든 계열이 제1항을 가진다는 가정 위에 있다. 그런데 이것은 참일 수 없다. 가령 진분수(眞分數)의 수열은 첫째항을 갖지 않는다. (147) [첫째 원인이 하나라는 것은 논리적이지 현실적이지도 실재적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논리상으로 성립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한정된 위상(범위)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연(hasard)의 배제는 이미 전제하고 있기도 하다]
이 주장은 라이프니츠의 충족이유율이 용인되는 한, 언제나 정당하지만 이 원리가 부인되면 이 주장도 성립되지 않는다. / 그의 “충족이유율”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문제 삼을 가치가 있다. 꾸뛰라(Couturat, 1868-1914)는 말하기를 이것은 모든 참된 명제는 분석적이라야 한다는 의미나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즉 명제의 모순은 자기모순이라는 뜻이다. (147)
칸트가 이 주장을 가리켜 존재론적인 증명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말한 것은 정당하다. 만일 세계의 존재가 단지 필연적인 존재자의 존재에 의해서만 설명된다면, 그와 같은 존재자가 존재해야 한다. (147) [헤겔은?]
영원한 진리에 의한 신의 존재의 증명은 정확하게 진술하기가 좀 곤란하다. ... / .. 이 비슷한 주장은 이미 플라톤에게서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는 이데아의 영원성에서 불멸성으로 연역하였다. ../ .. 이것은 신의 정신 속에 있는 사유들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 이 주장은 실제로 우주론적 증명의 또 하나의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148)
라이프니츠가 말하는 “예정된 조화”에 의한 증명은 단지 우주를 “창 없는 단자”를 인정할 경우에만 참인 것이다. .. 즉 모든 시계는 피차에 아무 인과관계 없이 모두 같은 시간을 지키므로, 이 모든 것을 조정하는 하나의 외부적 원인이 있어야 한다. (148-149)
만일 모나드 사이에 아무 관련이 없다면, 어떻게 그것들 중에서 하나가 다른 모나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 그는 모든 모나드는 동시에 같은 꿈을 꾸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물론 공상적인 주장이다. (149) [심하게 이야기하면 모든 이들이 호접몽을 꾸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럴 리가!]
이 철학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는 여러 가능 세계에 관한 주장이다. 한 세계는 만일 그 세계가 논리적 법칙에만 어긋나지 않으면 “가능”한 것이다. .. 신은 선이 악을 이기고 남은 세계를 가장 좋은 세계라고 생각한다. .. (150)
[럿셀] 다만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견해나 라이프니츠의 주장이 모두 다 환상적(幻想的)인 것임을 지적하고자 할 따름이다. (151)
사람들은 이 우주를 좋게 생각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151) [플라톤이래로 질서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리만에 의해 1859년 비유클리트 기하학의 등장과 칸토어(Cantor, 1845–1918)로부터 무한의 종류의 다양함이 등장하다.]
이제 라이프니츠의 비전(秘傳) 철학을 고찰하자. 우리는 이 철학에서 그의 공개적으로 발표된 철학이 어찌하여 그처럼 자의적이고 환상적인 것처럼 보였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그의 비전(秘傳) 철학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자료는 거의 다 1901이나 1903년에 이르러 루이 쿠튀라(Louis Couturat)에 두 작품 속에서 비로소 출판되었다. 이 작품 중에서 하나는 “나는 이 부문에서 놀라운 진전을 보았다”는 라이프니츠의 말로 시작한다. ..[또한] 아놀드[아르노]에게 보낸 그의 편지들이 19세기에 와서 출판되기도 하였지만, 이 자료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환기시킨 것은 나(러셀)이었다. (151-152)
[아르노의 편지] “이 사상 중에서 많은 것이 나를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것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누구나 다 충격을 받을 것이다. 나로서는 온 세계가 다 반대할 것을 굳이 쓸 필요가 있는지 알 수 없다.”[혹평이다] / ... 그 후부터는 철학 문제에 대한 자기 본래의 사상은 비밀로 덮어 두게 만들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다. 고유명사 .. / 이러한 낱말들이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 “소크라테스”에게 일어나는 일[사건]은 모두 “소크라테스”가 주어인 한 문장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이 경우 이 사건을 서술하는 낱말들이 술어가 된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이 모든 것은 당연히 그에게 속한다. 이 모든 것으로 서술할 수 없는 실체는 소크라테스가 아니고, 다른 어떤 사람일 것이다. (152-153) [인간이란 일반명사가 실체가 아니라, 개인 즉 인격이 실체라는 것이다. 아르노가 놀랐겠지만, 20세기의 기호학자들도 놀랐을 것이다. 불가분간성의 원리(기준설정 불가능)는 이 문제거리에 속한다.]
라이프니츠는 그의 철학을 두 가지 논리적인 전제를 토대로 하고 있다. 모순율과 충족이유율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원칙은 모두 분석적 명제라는 개념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154) (인간의 사건은 논리적 귀결로서 아담이 아니다. 다른 사람인데 다른 사람이 없으면 아담이 필연성을 지닌 무모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담 속에 모든 사건이 있을 수 없기에 이를 만든 신으로 소급해서 올라간다. 신(인격적인)은 다른 모든 사건의 필연적 귀결이다. 이렇게 신을 규정하면 분석적이고 주지주의에 빠진다. 다른 생명체들을 포함하는 모든 것(비인격적)의 귀결은 사건들, 지층들, 기억들이 된다. 내가 보기에 스피노자로 간다. (50SLA))
그의 형이상학의 기초에 대한 가장 명확한 설명은 아르노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 “모든 참된 명제에 대하여 지금까지 갖고 있던 개념을 자세히 살펴보고, 나는 아래와 같은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즉 모든 술어(述語)는 – 그것이 필연적이든 우연적이든, 과거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또는 미래의 것이든 간에 - 그 주어(主語)의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이 문제를 더 깊이 취급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 이 명제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명확히 확립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점에 대하여 결론을 내릴 수 있으니까요. 모든 영혼은 각각 하나의 세계를 이루어 서로 독립되어 있으며[이것임으로 있음] 신 이외에는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되어 있습니다[특이성]. 그리고 이 영혼은 불명이고 무감각일 뿐만 아니라, 그 영혼에게 일어날 모든 것의 흔적을 미리 그 실체(實體) 속에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다양체].”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실체는 서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고, 각각 자기 시점에서 우주를 반영함으로써 일치하고 있다. 상호작용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각각의 주체에 일어나는 것은 모두 그 주체의 개념 속에 한 부분을 이루고 잠재하고 있으며, 그 실체가 존재하면 영원히 결정되기 때문이다. (154-155) [세 꺽쇠의 주인: 둔스크투스, 스피노자, 들뢰즈]
“각 개인에 관한 개념에는, 그에게 있어서 미래에 일어날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 .. 라이프니츠는 아르노가 언짢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이것을 공개하지 않고 간직해 두었던 것이다. (155) [러셀이 잘 보았듯이 이 체계는 스피노자와 마찬가지로 결정론적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리와 경험 사이에 일어나는 차이는 인간의 무지와 무능의 한계로 인하여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며, 신에게는 찾아볼 수 없다. 신은 아담이라는 개념에 있어서 모든 무한한 복잡성을 다 이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담에 대한 모든 진실 명제를 분석적으로 알아 낼 수 있다. 신은 아담이 존재할 것인가의 여부도 선험적으로(a priori) 확인 할 수 있다. (155-156) [러셀: 결정론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의 주장에는 매우 기이한 점이 있다. 창조를 신의 자유로운 행동으로 보고 신의 의지의 행사를 언제나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점이다. ..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이 존재하려고 투쟁하지만 모든 가능한 것들이 다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다 “공존(共存)할 수” 없기 때문이다. ../.. / “어떤 사물의 존재는 자기와 모순되는 것보다 모순되지 않는 것이 더 많을 때에 결정된다.” (156-157) [*]
“형이상학적인 완전성”은 존재의 양을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것을 “엄밀한 의미에서 적극적인 실존[현존]의 양(量)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할하고 있다. (157)
그에 의하면 신은 되도록 많은 것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그가 진공(眞空)을 부인하는 이유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존재하는 것이 더 낫다는 일반적인 신앙이 있다(나는 이것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 .. 그리고 우주를 가급적 충만하게 창조하는 것이 신의 선(善)한 성품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였다. (157) [스피노자: 선도 악도 아니다.]
[평가]
형이상학의 열쇠로서 논리를 사용하는 가장 좋은 하나의 예를 라이프니츠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철학은 파르메니데스에게서 시작하여 플라톤으로 전달되었으며, 논리 이외의 여러 가지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이데아론”을 사용한다. 스피노자도 이 부류에 속하며, 헤겔도 그러하다. (158) [나로서는 스피노자는 다른 부류이다. 스피노자는 주지주의자의 계열이 아니라 자연주의자의 계열에 속한다]
라이프니츠는 특히 “주어-술어 논리학”을 다원론과 결합시키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많은 모나드가 존재한다”는 명제는 “주어-술어 논리학”의 형식이 될 수 없다. 논리적 일관성을 가지려면 모든 명제가 다 주어-술어 형식이라고 간주하는 철학자는 스피노자와 같은 일원론으로 기울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역학에 관한 관심으로 말미암아 일원론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58)
그는 무미건조한 철학자였다. 그리고 그의 영향을 받은 독일철학은 한결 현학적인 경향을 띠고 무미건조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의 제자 볼프(Christian Wolf, 1679-1754)는 칸트(Kant 1724-1804)의 순수이성 비판(1781)이 나올 때까지 대학을 지배하고 있었다. (158)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독일 이외에의 지역에는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그와 같은 시대의 사람인 로크(Locke, 1632-1704)는 영국 철학을 지배하고 있었으며, 프랑스에서는 데카르트가 계속하여 군림한 후에 볼테르가 등장하자 데카르트를 뒤엎고 영국의 경험주의를 보급시켰다. (158-159) [제대로된 평가가 아니다]
그의 모나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지각(viewing perception)의 가능한 한 방식을 암시하는 것으로서 오늘날에 있어서도 유용성을 자는다. .. 내가 그의 모나드론에서 흥미있게 생각하는 것은 두 가지 종류의 공간이다. 하나는 주관적인 공간으로 각각의 모나드의 지각 속에 있으며, 또 하나는 객관적인 공간으로 많은 모나드의 시점이 종합되어 이루어지고 있다. (159) [관념적 공간개념과 실질적 공간은 차히다]
(8:13, 50SLA)
#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
1646 라이프니츠 라이프찌히에서 루터파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때 이후로 데카르트(1596-1650)는 4년 더 살았다. 아버지(Friedrich Leibnütz 1597-1652), 어머니(Catherina Schmuck 1621-1664),
1652(여섯) 아버지의 죽음(아버지 라이프찌히 대학의 도덕 철학교수)
1661(열다섯) 부활절 학기에 라이프치히대학교에 들어가 법학을 공부. 대학에서 토마지우스(Jacob Thomasius, 1622-1684)에게 배웠다.
1663(열일곱) 5월에 나온 학사학위 논문 「개체의 원리(De Principio Individui)」
1666(스물) 알트도르프(Altdorf)에서 「까다로운 문제(De Casibus Perplexis)」 박사학위, 대학교수로 임명되었으나 그 자리를 거절.
- 뉘른베르크에 머물면서 당시 가장 유명한 독일 정치가인 보이네부르크 남작 요한 크스티안(Johann Christian von Boyneburg, 1622-1672)을 만났다. [장미 십자단 가입?]
- 교회의 재통합을 지지하기 위해 「가톨릭 논증(Demonstrationes Catholicae)」을 썼다.
La Dissertatio de arte combinatoria 1666
1667(스물하나) 마인츠 대주교(Johann Philipp von Schönborn, 1605-1673)의 보좌역이 되었다.
1671(스물다섯) 광학, 공간, 운동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물리학의 가설(Hypothesis Physica Nova)」을 출판했다.
1672(스물여섯) 3월말 라이프니츠는 선제후가 파견한 외교관 자격으로 파리에 갔다. 그해 9월 라이프니츠는 예수회를 반대하는 글로 유명한 얀센주의(수많은 엄격한 도덕형식을 만들어내는 비정통 로만가톨릭운동) 신학자 앙투안 아르노(Antoine Arnauld, 1612-1694)를 만나 교회 재통합을 위해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1672년 12월 보이네부르크 남작이 죽고, 1673년 2월 마인츠 선제후가 사망하자 후원자를 잃고 곧 파리를 떠났다.
1673 하노버 가문과 인연을 맺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Ernst August von Braunschweig-Calenberg, 1629-1698)가 공작 지위(Braunschweig und Lüneburg)를 이어 받은 것은 1680년이다.
1675(스물아홉)년말 라이프니츠는 적분과 미분의 기초를 세웠다. 이 발견으로 시간과 공간을 실체로 보지 않게 된 것은 단자론으로 가는 또 하나의 단계였다.
1676(서른) 역학으로 알려진 데카르트의 운동법칙을 비판하면서 라이프니츠는 1676년 운동보존을 운동에너지로 대체하는 동역학이라는 분야의 새로운 정식을 만들었다. [양적(점, 힘, 부피) 개념에서 질적(에너지) 개념으로, 벡터]
1676년 10월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요한 프리드리히에게 일자리를 얻었다. 요한 프리드리히(Johann Friedrich, 1625-1679)는 1651년 루터교에서 가톨릭교로 개종한 자로서 1665년 하노버 공작이 되었다. 라이프니츠는 사서직을 얻었으나 1677년 2월초부터 고문관 자리를 간청하여 마침내 1678년 고문관이 되었다.
1676년, 라이프니츠가 스피노자(Spinoza, 1632-1677)를 방문했다.(라이프니츠는 이미 5년 전에 그에게 편지를 썼다.)
1679(서른셋) 년 3월 2진법 체계를 완성했고(De progressione dyadica est daté de 1679), 그해 말에는 오늘날 일반 위상수학(位相數學 : 일정한 물리적 요소 또는 추상적 요소들로 이루어진 집합의 선택적 속성을 다루는 수학의 한 분야)으로 알려진 위상분석의 기초를 제시했다. 역학과 철학 연구도 계속하여 그의 철학은 점차 반(反)데카르트주의로 나아갔다.
- 1680년 1월 7일, 요한 프리드리히 공작(Johann Friedrich, 1625-1679, 12월말)이 죽고, 동생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Ernst August von Braunschweig-Calenberg, 1629-1698)가 그 직위를 계승했다.
1680(서른넷) 수력압착기, 풍차, 램프, 잠수함, 시계 등 갖가지 기계장치들을 연구했고, 완벽한 수송수단을 고안하여 인(燐)으로 실험을 하기도 했다. 또 풍차로 작동하는 물 펌프를 개발하여 하르츠 산맥의 광산개발을 개선했고 1680-85년에는 이 광산에서 여러 번 기술자로 일했다.
1681(서른다섯) 원과 외접 4각형 사이의 비례관계를 연구했다.
1684(서른여덟) 고체의 저항을 연구했다. 같은 해 미분 해설서 극대·극소를 위한 새로운 방법(Nova Methodus pro Maximis et Minimis, 1684)을 출판했다.
-인식, 진리, 관념에 관한 성찰(Meditationes de Cognitione, Veritate et Ideis)
1685(서른아홉)년 라이프니츠는 브라운슈바이크가(Braunschweig 家)의 사가(史家) 곧 '호프라트'(Hofrat : 궁정고문관)에 임명되었다.
- 프랑스에서는 낭트칙령 폐지(1685. 10. 18)
1686(마흔) 년 2월 라이프니츠는 형이상학 서설(Discours de métaphysique)을 썼으며, 악타(Acta) 3월호에 「자연법칙에 관하여 데카르트 및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중대한 오류에 대한 간략한 논증(Brevis Demonstratio Erroris Memorabilis Cartesii et Aliorum Circa Legem Naturae)」이라는 논문을 기고하여 자신의 동역학을 소개했다.
1686 그는 미분 계산의 근본적 규칙을 제시하였다. (L'Allemand G. W. Leibniz expose les règles fondamentales du calcul différentiel).
1691(마흔다섯) 라이프니츠는 볼펜뷔텔(Wolfenbüttel)에서 사서로 임명되었으며, 여러 과학잡지에 논문을 기고하여 자신의 발견을 널리 알렸다.
1693(마흔일곱) 라이프니츠는 수학에서 결정자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Leibniz introduit la notion de déterminant en mathématiques.
1695(마흔아홉) 새로운 체계(Système nouveau)에서 자신의 운동 동역학 이론의 일부를 설명하면서 실체들 사이의 관계 및 영혼과 육체의 예정조화를 다루었다.
1697(쉰하나) 궁극적 근원에 관하여(De Rerum Originatione)에서 사물의 궁극적 근원이 바로 신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 했고, 1698년 자연 그 자체에 관하여(De Ipsa Natura 에서는 자신의 동역학 이론으로 자연의 내적 활동을 설명했다. 이 모든 저작을 통해 라이프니츠는 신앙을 해롭게 하는 데카르트주의에 반대했다. 독일 아카데미 설립계획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 1700년 7월 11일 독일 과학 아카데미가 베를린에 설립되었다. 조피 샤를로테(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딸로 1701년 1월 최초의 프로이센 여왕이 됨)의 도움을 받다.
1701(쉰다섯) 중국에 활동하였던 제수이트 신부 부베(Joachim Bouvet, 白晋/白進, 1656-1730)는 복희(Fuxi 伏羲)씨의[주역의] 64효(hexagrammes)를 라이프니츠에게 보냈다.
1703(쉰일곱) 이진법 체계 발표: Leibniz publie son exposé sur le système binaire devant l'Académie des sciences de Paris dans les Mémoires.
1704(쉰여덟) 인간 오성 신론(Nouveaux Essais sur l'entendement humain),
1710(예순넷) 라이프니츠는 신의 정의(正義)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변신론(Théodicée, 1710-14)을 쓰느라 다른 책은 거의 출판하지 않았다.
1714(예순여덟)년 9월까지 빈에 머물면서 황제로부터 '라이히호프라트'(Reichhofrat: 제국고문) 지위를 얻었고 '프라이헤르'(Freiherr: 남작) 칭호를 받았다. 이 무렵 라이프니츠는 이성에 기초한 자연과 은총의 원리(Principes de la nature et de la Grâce fondés en raison)를 써서 자연과 은총이라는 두 질서의 예정조화사상을 피력했다.
1714 단자론(Monadologia, 1714), 모나드 이론과 예정 조화설을 제시했다. 변신론(Théodicée)의 철학을 집대성했다. 1714년 8월 앤 여왕의 죽음으로 게오르크 루트비히는 조지 1세라는 이름으로 영국 왕위를 물려받았다. 라이프니츠는 하노버에 돌아와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에 있으면서, 또 한 번 더 서구제국의 브라운슈바이크 연대기(Annales Imperii Occidentis Brunsvicenses, 1843-46)의 집필 작업에 착수했다.
1716년 6월 바트피르몬트에서 마지막으로 표트르 대제(Pyotr Alekseyevich, 1672-1725)를 만난 뒤, 통풍으로 크게 고생하다.
1716(일흔)년 11월 14일 하노버에서 사망. (3:11, 50SLA)
1906 하노바 묘지에서 사진가 알페르스(Georg Alpers)에 의해 라이프니츠 두개골 촬영.
(10:10, 50SLA) (10:30, 50SL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