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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문제의 진화(L'évolution du problème de la liberté)
- 벩송의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04-1905)
- 프랑스와(Arnaud François, 1978-) 편집, PUF, 2017, P. 384.
- 9강, 스토아학파(145-161); 10강, 에피쿠로스학파(163-176)
아테네의 주요 개념인 누스와 알렉산드리아 주요개념인 로고스 사이에 간격만큼이나, 세계(우주)를 사유하는 관점이 다르다. 알렉산드리아의 학문이 좀 더 현실적 사물(생명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 제자 계보들 중에서 식물학과 생리학 관심과 히포크라테스 제자들의 의학이, 스토아학파의 사유와 더불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협력하였다고 한다. 왕조의 근간을 이루는 세 부류들 중에 다른 한파는 천문학과 측지술에 관한 것을 다루는 전통 파라오의 사제단인데, 아마도 이들이 기하학 원론을 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셋째 그룹은 지구의 둘레, 지구의 자전을 알았다는 학자들과 기록들이 있다. 그런데 왜 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과학이 중단되고, 지구는 움직이지 않고 평평하다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이라고 부르는지 알 수가 없다. - 서울 안 가본 사람이 서울에 가본 사람을 이긴다는 것인데, - 태초에 말씀이 있다고 하는 그 말씀은 원어가 로고스인데, 로고스에 대한 오해도 크리스트라는 독단적 관념과 더불어 생긴 불상사가 2천년동안 지배해 왔던 것 같다. 천문학과 물리학에서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에 의해 이런 독단이 무너지고, 지혜의 사랑은 과학 실증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다. 생명에 관한 한, 하나는 생물학과 의학의 도래로 새로운 세기를 마련할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몽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은 생태계와 연관하여 사유해야 할 것이며, 숙주와 바이러스 관계를 해명할 때 또 다시 한 시대를 열 것 같다. (54PLE, MB)
스토아의 필연성은 전체와 부분이 연동되어 있다면, 에피쿠로스의 필연성은 부분의 조합의 구축에서 필연성이고 숙명론이다. 즉 에피쿠로스의 학설은 기계론으로 외적 신을 데려와야 완성체가 되는 것으로 부분의 조합으로 전체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스토아는 개념작업은 부분이 작동해도 전체가 영향을 입는다는 유기체적이고 생명적인 것을 포함하고 있다. 전자에는 외부적이고 기계적인데 비해, 후자는 의식 내재적으로 직관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54PLF)
§09. 1905년 02월 17일 회기(145-161)
스토아철학은 숙명 철학이다. 스토아학자들은 보편적 결정론 즉 숙명성의 학설에 대한 가장 분명하고 가장 의식적인 개념작업을 하였다. 이들은 이런 이론의 모든 귀결들을 깨달았다. (145)
이 철학은 형이상학이며, 스토아학자들이 말하듯이 자연학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은 이원성(에이도스와 휠레)의 원리를 인정한데 비해, 스토아철학의 목적은 이원성의 원리를 유일한 원리로 대체 했으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둘 사이의 중간참(mi-chemin)에 위치해 있다. 이 원리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렀으나 한마디로 로고스(ὁ λόγος)이다. (145-146)
이 로고스는 [첫째] 담론(le discours), 말투(la parole), 장소(공간)와 시간을 갖는 음절들과 단어들의 병치(la juxtaposition)이다. 이때 소리는 공간 속에 물질적인 어떤 것이다. .. 따라서 담론이라는 것은 물질화된 근거(la raison matérialisée)이며, 합리적 물질(matière rationelle), 지성적 물질이라 한다. (146)
로고스는 [둘째] 또한 추론(un raisonnement)이며, 추론적 이유/근거(la raison discursive)이며 어떤 것을 증명을 향해 수렴하는 명제들이기도 한다. .. 논의하는 추론은 하나인 다수성(une multiplicité une)이고 다수인 통일성(une unité multiple)이며 이중 측면을 지닌 실재성이다. (146)
셋째로고스는 배우의 역할을 지칭한다. 배우의 정신 속에 감겨져 있는 어떤 것이 있고 구경꾼에게 펼쳐지는데, 배우가 행한 역할의 일체를 구경꾼에게서 이루어질 때, 구경꾼의 정신 속에 새로이 감겨지는 어떤 것이다. (146-147) [세 가지는 8강에서 설명했다.]
간단히 요약하면, 로고스는 이중 측면을 지닌 실재성이다. 전개되고, 펼쳐지고, 길어지는 물질적인(matériel) 어떤 것, 그리고 하나이며, 자기 속에서 긴장(팽팽)하며, 불가분이며, 합리적인 어떤 것, 심지어는 지성적인(intelligent) 어떤 것이다. (147) [양자를 신체와 영혼의 연관에 닮았다.]
스토아학자들에게 우주는 물질인 동시에 지성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필연적으로 배제됨이 없으며, 이들은 서로 상호침투하며, 심지어 정신 안에서 혼재되어 있다. 그래서 스토아학자들에게서 우주는 신체적(corporel)이다. 현존하는 모든 것은 신체, 즉 소마(τὸσώμα)이다. 이러한 관점은 헤라클레이토스의 관념[사유]을 재현한 것이다. 만물을 설명하는 것은 이 동일한 원리의 무한한 변형들이다. 이 원리란 신체적, 물질적 불[πῦρ]이며,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던 예술적[기술적] 불(le feu artiste)이다. .. 우주는 그들에게서 생명있는 어떤 것, 즉 지성있는 어떤 것이다. 우주의 영혼을 그들은 신이라고 불렀다. 신은 모든 것을 가로지르고 모든 것을 가로질러 순회한다. ..이것이 유물론 학설이었던가? [신에 관해서] 애매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신과는 구별된다. (147-148)
스토아학자들의 신은 애매한[여러 가지로 해석될] 소지를 키웠다. 그들의 신은 우주이지만, 우리가 오늘날 물체적[신체적]이라 부르는 것이 아닌 측면에서 생각된 우주이다. 이것은 긴장의 측면에서 통일성의 측면에서, 즉 정신의 측면에서 생각된 우주이다. (148)
벩송은 그들에게서 신이란 세계의 의미화(la signification)이다 라고 말했다. .. 그들이 신체[물체]들은 총체적으로 서로 침투하고 있다고 말했고, 이 상호침투할 수 있는 물질은 어떤 측면에서는, 우리가 오늘날 심리학적 현존이라고 부를 있는 현존의 측면에 닮았다. 왜냐하면 심리학적 삶은 항들의 연속성이며 상호 침투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들은 적어도 자신들이 “우주적(보편적) 공감(la ‘sympathie universelle)”이라 불렀던 것을 강조했다. 따라서 보편적 연대성, 보편적 공감이 있다. (148-149)
크뤼시포스가 말하기를 바다에 떨어진 물방울은 대양 전체를 변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주전체를 변하게 한다. 사람들이 우주 전체에서 일어나는 것을 한 권의 책 속에서 읽을 수 있는 우주의 대상도 현상도 없다고 한다. (149)
스토아학자들은 세계 속에 신을, 물질 속에 정신을, 깊이 들어가게 했으며, 그들은 우리가 정신, 심지어는 신성(la divinité)이란 부르는 것으로 향하여, 길의 절반(moitié)을 물질로서 만들었다. (149) [스토아학파의 유물론에 관하여, 물질에게 정신 또 심지어는 신적인 것에 향하는 길의 절반을 만들게 했다. (149)]
스토아학자들은 우주 또한 신성의 개념작업으로부터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필연성으로 결론을 내렸다. .. 내가 생각하기에, 이들에게 필연성은 우주 안에 현존해 있어야만 했다. 이런 필연성 속에는 비결정도 우연도 없다. 결과적으로 인간에게 자유를 위한 자리도 없다. (149) [고대에서 데카르트까지 우주의 총량은 불변이며 필연성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관여할 수 없는 필연성으로 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연성(la contingence)을 인정했다. .. 사물들은 영속적인 변형 중에 있으며, 이것은 있는 것과 있어야만 하는 것 사이의 틈, 간격이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 틈을 우연에 의해 측정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인간의 자유는 우연(le hasard)도 운수(la chance)도 아니지만, 그러나 인간의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사물들의 근본적 우연이 있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자유는 우연과 운수와 동일한 원리이다. 이런 우리 의지의 기능[자유]은 사물들을 가능적인 정도에서 자리에 다시 두는 것이고, 사물들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 되게 하는 것이다. (150) [사물들을 에이도스에 두게 또는 가게 만드는 것이 자유인 셈이다.]
그런데 담론은 본질적으로 움직이는[동적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전개되는 어떤 것인데 하나의 항에 도달하는 것이며 하나만의 의미, 하나만의 의미화가 있다. 이런 원리는 지성적이지만 운동하는 중인 원리이다. 세계는 정확히 있어야만[존재해야만] 할 것이고, 이때부터 모든 것은 합리적이며, 지성적이다. 이렇게 모든 것은 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고, 이런 귀결에서 우주 안에는 우연성(la contingence)의 자리가 없고, 인간에게는 자유의 자리가 없다. / .. 이것이 스토아학자들의 필연성이다. (151)
아프로디지아스(Alexandre d’Aphrodisias, 150경-215경)는 운명에 대하여(Du destin, Περὶ εἱμαρμένης, De fato)에서 스토아학파와 크뤼시포스를 반박한다. “아무 것도 원인 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 (151)
네메시우스(Némésius, 350경-420경)도 마찬가지로 설명한다. .. / 근대에서 스튜어트 밀(Stuart Mill, 1806-1873)도 이 원리를 끌어냈다: 동일한 원인들은 동일한 결과를 생산한다.인간 적 자유의 부정, 즉 인간에서 임의 자유의 부정. (152)
보편적 필연성의 정확한 긍정이 있다. 스토아학자들의 다른 원문들에서 이런 필연성은 전체에 대한 전체의 공감에 의해서, [모든] 사물들의 절대적 연대성에 의해서 특징지워진다. 즉 이 특징은 다른 곳에 그 반향이 없이는 우주의 한 점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152-153)
이런 자연적[물리적] 결정론은 오늘날 에너지 보존과 같은 정식이다. .. 이런 필연성은 스토아학파의 공감과 어느 정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결정론의 법칙은 현상들을 계산가능하게 하는 정도에서 수학적이다. 그런데 스토아학자들이 말하는 연대성은 보다 인류학적이고 보다 유기체적이다. 그들은 우주를 - 그것은 그들의 이미지들 중의 한 이미지인데 – 거대한 동물처럼 표상되었다. 마치 사람들이 동물의 한 점을 찌르면, 그 신체 전체가 반향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말하는 스토아 원전이 있다. (153) [생체에서, 기억과 면역은 이와 같지 않을까?]
만일 사람들이 우연을 받아들이고 귀결로서 자유를 받아들인다면, 보편적 결정론과 보편적 필연성을 제기하는 대신에, 우주 안에는 인간적 존재들 또는 살아있는 존재들의 행동과 연결된 변화와 더불어이들에 의해 표상된 닫힌 체계들과 변화들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는 것이다. 우주 전체는 유일한 닫힌 체계(un seul système)이지만, 자연 내부에는 닫힌 체계들도 독립 체계들도 없다. (153)
우주의 필연성의 원리는 특히 인간에게서 임의 자유의 부정을 끌어냈다. 스토아학자들에게는 로고스, 세계영혼, 누스 포이에티코스(νοῦς ποιητικός, 능동적 지성)란 운명과 동일한 것이다. 운명(le destin)이 자연 현상을 지배하는 한, 유일한 법칙이 전 자연뿐만이 아니라 인간에게도 지배한다. (154) [따라서 임의 자유는 없다.]
우선 스토아학자들은 메가라학자들의 논쟁을 다시 받아들인다. 이 논증에 따르면, 미래에 관계하는 상반된 두 명제들 중의 어느 하나는 필연적으로 진리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메가라를 반박했고, 스토아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반박했다. 스토아학자들 모두가 메가라 학자들의 관점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며, 특히 크뤼시포스에 관한한 유보되었다. 그러나 후천적(a posteriori) 논증은 스토아학자들 대부분에게서 수용되었다. (154) [미래는 두 갈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두 갈래일 경우 배중률에 의해 하나만 진리라고 후천적으로 주장할 것이다.]
벩송이 보기에는, 선천적인 구축은 실험적 진리에 대해 겉보기, 즉 착각적 형식을 덮어씌운 것이다. 고대인들이 미래의 예견이 가능하다고 여긴 것은 이러한 구축의 하나이다. 이러한 것은 선천적 가설들 또 정신의 구축작업들일 뿐이다. 고대인들이 예견[점치기]을 끌어낸 것도 마찬가지이다. (155) [미래를 당겨서 과거로 놓고 현재에서 결정하는 후천적 예견은 허구이며 착각이다. 수학과 물리학의 법칙에서 되돌려 놓고 실험하고 증명한다. 생명에서는 되돌림이 불가능하다.]
스토아학자들은 인간적 자유에 반대하는 논증들을 제시했다. 그런데 이들은 임의자유와 자유로운 선택의 주제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반박하였다. 고대인에게서 임의자유의 관념과 우연성의 관념은 섞여 있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선택을 우연(le hasard)과 운수와는 구별했다고 했다고 원전에서 말하지만, 선택이 가능하려면, 그에 따르면 운수와 우연을 생성하는 자연 속에서 그 우연성(la contingence)이 제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스토아학자들은 우연(le hasard)은 실재성이 아니고, 우연의 용어는 주관적이고, 우연은 진실한 원인, 즉 결정하는 원인을 무지로 덮는 단어이라고 한다. (155)
스토아 학자들은 임의 자유를 반대했다. 크뤼시포스는 다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의 논제들이 보존되어 있지 못하다. 그도 모든 사물들의 절대적 필연성을 믿었다. 그런데 그는 자유가 숙명적 이론 속에 보존되어있다는 것을 제시하고자 애썼다. .. 이것은 매우 신기한(curieux) 것이지만, 마치 라이프니츠가 이런 증명을 하듯이 처신했다는 것을 본다: 그의 결정론은 자유와 등가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156)
자유를 믿는다는 것, 자유를 주장하는 것, 세 가지 다른 사물[사실]을 주장하는 것이다. 1) 사람들이 행동할 때, 다른 행동이 가능하였다. 2) 사람들은 자기 행동의 주인이다. 3) 자유를 믿는 것은 행동에 대해 찬사와 비난을 받을 만하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크뤼시포스에 따르면, 세 가지 주장은 보편적 필연을 주장하는 이론 속에서도 정당하고 합법적이며 또한 진리이라는 것이다. (156-157)
첫째주장에서, 크뤼시포스의 논증은 극단적인 치밀함(상세함)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라이프니츠 만큼 치밀하지 못하다. 그는 가능성에 관한 논제를 4장으로 다루었는데, 우리가 가능성이라 부르는 것은 스스로 생산되는 것을 아무것도 막을 수 없을 때 생산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행동은 결정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하든 잘못하든 우리 스스로 생산하는 다른 행동이 있다. 따라서 우리 행동은 우연성이다. 다른 것이 가능하다는 방식으로 생산되는 것을 “우연성”이라 불러야 한다. (157)
간단히 크뤼시포스의 논증은 개연성(probalement)에 귀착했다. (157)
라이프니츠의 것은 정확한데, 변신론(Théodicée, 1710)와 다른 곳에서도 말한다. .. “자유로운 행동들은 특히 그러한 이유로 절대적 필연성으로부터 필연적이지 않다. 절대적 필연성은 진실로 우연성과 더불어는 양립불가능(incompatible)하리라”
둘째주장에서, 우리가 ‘자유롭’다고 부르는 행동들을 성립하게 하는 것 우리가 작자들(les auteurs)이 있다고 믿는 행동들이다. 행동의 작자가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행동이 성향, 결심 선택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자유로운”행동이란 나의 의지로부터, 의미들의 자발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우리가 “자발적(volontaires)”라고 부르는 것은 행동이 우리의 의지에 부합하는 것이고, “자유로운”이라 부르는 것은 우리의 동의에 부합하는 것이다. (159)
이리하여 스토아학자들이 말하듯이, 숙명성(fatalités)들과 상호숙명성들(co-fatalité), 즉 파탈리아(fatalia)와 콘파탈리아(confatalia)가있다. 이는 숙명뿐만이 아니라 나의 성향과 나의 동의도 있으며 내가 자유롭다는 것은 이런 요소들과 정확하게 협력한다는 것이다. (159)
라이프니츠는 55절에서 동일한 논증을 한다.
셋째, 스토아학파에 따르면, 마치 찬사와 비난이 존속되어 있었던 것처럼 사람들은 행동한다. 아프로디지아스에 따르면, 찬사와 비난은 작동들에게, 행실들에게, 선택과 임의 자유가 필연적으로 있지 않은 존재들에게 향한다.
라이프니츠에게도 보다 많은 구절들이 있으나 여기서 읽을 시간이 없다. 그리고 슈트어트 밀은 헤밀턴의 철학(La philosophie de Hamilton, 1865)의 26장 “의지의 자유”라는 소제목에서 썼다. (160-161)
다음 강의는 자유에 관한 플로티노스의 흥미있는 강의가 될 것이다. (161) [플로티노스는 11강의에서 전개된다.] (54PLE)
§10. 1905년 02월 24일 회기(163-176)
자유에 관련 있는 네오 플라톤의 이론에 들어가기 앞서, 에피쿠로스의 자유와 필연 에 대해 한 마디 해야 한다.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 다음에 온다. 필연성에 관한한, 데모크리토스 다음 에피쿠로스는 오늘날 기계적 필연성(la nécessitémécanique)의 주제라 불리는 주제를 제시했다. (163)
기계적 필연성에는 도식(un schéma)이 주어진다. 물질적 우주는 빈 간격들에 의해 흩어져 있는 불연속적 요소들[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들이 각각은 파괴될 수도 없고 변질될 수도 없으며, 이것들의 접근에 의해서 움직일 수 있다. 아톰들의 조합은 여러 다른 현상들을, 물질의 다양한 표시들을 생겨나게 한다. (164)
이런 원자론은 근대 원자론과, 특히 화학적 원자론과 닮았다. 근대인들은 원자들의 성질에 의해 화학적 조합의 양상들을 설명할 수 있다. 다른 한편 근대인들은 고대인들이 가정하지 못했던 원자들 사이에 인력과 충력을 가정했고, 고대인들이 끌어낼 수 없었던 가설, 수학적 인식의 상태를 부여하는 가설을 만들었으리라. 이런 차이들은 원자론과 근대 과학 사이에 깊다. (164)
기계적 필연성에 대한 생각은 데모크리토스에 의해, 다음에는 에피쿠로스에 의해 그리고 근대철학에서 다시 나타난다.
스토아학자들은 보편적 필연성(la nécessitéuniverselle)을 제시했고, 자연현상의 필연성은 오로지 우주의 부분들의 연대성에 있다. 이 연대성은 유기체적 연대성이며 합리적 연대성이다. 스토아의 필연성은 전체의 결정성에 있다. 우주는 하나의 담론인데, 이 담론에는 음절, 철자, 엑센트도 있다. 부분의 변화는 전체의 변화 없이 없다. 그 필연성은 전체에서 부분으로 내려간다. (164-165)
다른 필연성이, 에피쿠로스학파의 기계적 필연성(la nécessitémécanique)이 있다. 이 필연성 전체에서 요소들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거슬러 올라간다. 담론에 의해 결정된다는 생각은 없다. 부분(요소)들의 조합에 의해 전체를 구축한다. 이 담론에는 알파벳의 철자들만 있다. 전체의 필연성은 철자들[아톰]의 필연성의 집합이다. 우리는 철자들의 만남의 결과들을 읽을 수 있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 필연성은 단순한 우연(un simple hasard)이다. (165-166)
스토아학파에서 필연성은 전체에 대한 결정론에 나온다. ... 이에 비해 에피쿠로스에서 필연성은 요소들에 매여있고 이것들의 진행(la) marche)에 달려 있다.전체의 필연성은 어느 정도에서는 요소들의 필연성의 합이다. (165-166)
에피쿠로스에게서, 데모크리토스가 말했던 원자들의 필연적 운동에게, 길에서 벗어나는 원자들의 우연적이고 변덕스런 운동을 덧붙였는데, 루크레티우스는 이것을 운명(le destin)이라 불렀다. 따라서 철학사가들은 에피쿠로스의 학설이 필연성의 학설이 아니라 우연(le hasard)의 학설이라 말할 수 있었다. (166)
에피쿠로스에서는 우연의 학설이 있고 거기에 필연의 학설이 보태져 있다. 그는 아마도 원자들의 빗금운동(la déclinaison)을, 즉 원자가 소유한 변덕스런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166)
루크레티우스의 시에 따르면, 에피쿠로스는 숙명성을, 자연현상들의 절대적 필연성을 강조하고 있고, 많은 싯구들이 있다.
“Certum ac dispositum est...” “il est déterminé, il est fixé une fois pour toutes,”
그의 시의 목적에 대해 설명할 때,
“Doceo dictis quo quoeque creata / Foedere sint, in eo quam sit durare necessum”, “ce que j’enseigne, c’est certain, il est nécessaire que chaque chose continue d’être ce qu’elle a été au moment de sa formation” (166-167)
원문은 훨씬 더 단호하다(formel, 형식적). 패두스(foedus)란, 계약(un traité, 취급)이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들을 보존하려는 일종의 계약에 의해 참여되어 있다. 나(루크레티우스)는 가르친다: “Ce qui peut se produire, ce qui ne peut pas se produire et comment chaque chose a une puissance déterminée et une détermination qui a ses racines profondes”, “Quid possit oriri, / Quid nequeat, finita potestas denique cuique / Quanam sit ratione atque alte terminus hoerens.” (167)
루크레티우스는 에피쿠로스의 충실한 제자이다. 그는 에피쿠로스가 했던 것보다 더 필연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에피쿠로스에서 유래한 원전 속에서 사람들은 필연성의 믿음에 대한 표현을 발견한다. 특히 모든 메카니즘의 기원에 있는, 즉 모든 결정론의 기원에 있는 원리의 진술을 발견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167)
결국 만일 모든 원자들은 법칙에 복종한다면,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원자는 어떤 순간에 가로지르기(횡단하는) 운동(un mouvement transversal, παρεγκλίνειν,)을 비스듬히 실행한다. 이 그리스 단어는 “빗금운동(declinaison)”으로 번역된다. 이 빗금운동은 사람들이 조롱했던 현상이다.사람들이 조롱했던 이 관념은 만일 학설의 그럴듯한 기원들에 거슬러 올라간다면, 충분히 잘 설명될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인간적 자유를 지지했고, 그러한 것은 실천적 질서 이유들 때문이다. (167-168)
에피쿠로스에서 인간 영혼은 신체들처럼 아톰들로 이루어졌다. 즉 영혼은 물체(un corps)이다. 인간 영혼은 다른 것들 보다 더 잘 움직이는 아톰들로 되어 있다. 영혼의 상태들, 관념들, 감정들, 표상들 이 모든 것은 아톰들의 어떤 모임들이다. .. 아톰들은 기계적 필연성이 그리는 선으로부터 가볍게 빗겨가고(obliquer) 이탈한다(dévier). 영혼의 아톰들도 이런 성질을 소유한다면, 파랭클리네인(παρεγκλίνειν, parenklinein)은 자연 즉 우주를 구성하는 원자들의 일반적인 성질이 된다. (168)
데카르트철학에서도 우리는 물질적 우주의 토대에서 필연성을 발견한다. 우주는 그가 정식화한 법칙, 기계적 법칙에 종속된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 선택이라는 의미에서 자유는 있다. (168)
데카르트는 자유를 인간에 의해 완수된 운동에 한정했다... 현대인들에는 자연 속에 도처에 현재하는 우연을 믿는다. 즉 요소들에 내속적인(inhérent, 타고난)인 근본적인 우연을 믿는다. .. 결국 근원적인 법칙, 즉 규칙성이 있고, 그럼에도 인격들 중에 어떠한 이도 다리위를 가도록 강요하지 못하지만, 다리위에 통행에 사고라는 어떤 것이 있으며, 그것은 우연이다. .. 예로서 초 단위의 작은 부분 동안에도 제자리에서 수억조(des trilliond de trillions)의 진동이 있다. (169) [말하자면 초단위에도 우연이 있을 수 있다. 겉보기에 아무일 없이 필연적으로 하나인 것 같지만.]
그럼에도 매우 이상한 현상이 생긴다. 에피쿠로스는 우선 근대학설들의 생성에서, 출현에서, 발전에서 쓸데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에피쿠로스 자연학은 관념들의 진행에서 영향 없이 대략 그대로 남아있었다. .. 그래서 자유와 필연의 주제에서 에피쿠로스의 관념들은 진화되지 못했다. (170)
이 강의 시작에서 필연성 이론들의 존재 이유는 이론이 반성적 사고의 요구들에 줄 수 있는 만족에 있다고 했다. 추론하는 지성은 사물들을 필연성의 틀 속에 표상되는 데 만족한다. .. 이런 개념작업은 근대 역학(la mécanique)에서 암시되었다. 이 역학자체는 르네상스의 과학적 발견물에서 나왔다.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의 발견물이다. ..이런 매카니즘은 설명적 매카니즘이고, 사람들은 역학적 필연성의 도식과 함께 결정된 현상을 고려한다. (172)
역학적 메카니즘이라는 측면에서, 스토아학파에서 필연성의 개념작업은 여러 다른 현상들에서 인간형태적 본성의 설명을 부여하기를 적어도 고대인에게 허락한다. 이들에게 우주는 유기체의 겉모습를 제시한다. 반대로 에피쿠로스 학파에서 필연성의 학설은 겉모습들을 고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톰들의 운동을 결코 보여지지 않기 때문이고, 그 학설을 어떠한 결정된 사실들도 설명할 수 없다. 이 학설은 스토아적 필연성의 개념작업보다 시대적으로 덜 과학적이다. (173)
자유학설의 존재 근거가 어떤 것인가? 필연학설의 존재근거가 반성적 사고의 요청들에 만족을 주는 것이라면, 자유의 학성은 “무매개적 의식”이라는 불리는 것에 만족을 주어야만 한다. 다소 넓은 의미에서 이 학설은 직관의 작품이다. 만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우리가 발견하는 자유의 이론이 풍부했다면, 또 그것이 진화했다면, 그것은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적 영감의 어떤 것이고 소크라테스의 내적 삶의 어떤 것이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173)
그런데 에피쿠로스에게는 내적 삶에 호소함이 전혀 없다. 그의 제자들은 그의 정식들을 외우고 있었다.그 학설의 기원들에는 직관적인 것이 없으며, 에피쿠로스의 필연학설에는 설명적인(explicatif) 것도 없다. (173-174)
무엇이 철학적 관념이 기원에서 어떤 도약을 만드는가? 무엇이 침투의 힘을 갖게 했는가? 철학적 관념을 발전하고 진화하고 정신에 영향을 주는데, “실증성의 정도(degre de positivité)”라고 불리는 것에 비례해서 이다. 비판일 뿐인 비판, 부정일 뿐인 부정은 불모성과 무능으로 타격을 입는다. (174)
만일 우리가 철학사 속에서 가장 상당한 비판 작품을 예로 든다면, 칸트의 비판이 형이상학에 반대하여 상상했던 가장 굉장한 공격인데, 거기서 무엇이 나왔는가? 그것으로부터 가장 과감한 형이상이 나왔고, 헤겔 철학의 나왔다. 칸트의 비판에서 형이상학을 배아(씨앗)을 찾으러 간다면, 비판으로부터가 아니라 비판이 포함한 독단으로부터 이다. .. 철학사에서 일반법칙이 있는데, 정신은 긍정으로 사는 것이지 부정들로서 사는 것이 아니다. 부정은 항상 분명하지만, 긍정보다 훨씬 더 분명하지만, 부정 속에는 정도(차)가 없고, 긍정 속에 정도차가 있다. 부정은 긍정보다 더 정확하고 보다 더 분명하지만, 불모성과 무능으로 타격을 입는다. (175) [벩송이 자기 저작 속에 헤겔 언급은 없지만, 칸트 비판은 분명하다.]
철학사가들은 어떤 관념[이데아]에 속지 않고, 본능적으로 기질자(le caractère. [특이자])가 된다. .. 형상이 아무리 부정적이라고 해도, 그럼에도 이런 관념은 진화한다. 데모크리토스에 이어서 에피쿠로스는 자연법칙의 근본적 필연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의 주장은 자기 사고에는 자연 속에 신들의 개입만이 있을 뿐이다. 에피쿠로스의 메카니즘은 그러한 것일 뿐이다. (175)
에피쿠로스가 자연학에 집착하는 중요점은 자연학이 미신(la superstition)에서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정도에서 이다. (176)
만일 에피쿠로스의 자유학설과 우연학설을 다룬다면, 그것은 동일한 것이다. 왜 에피쿠로스는 인간이 자유롭다고 주장할까?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가 전하는 원문을 보자. “자연학자의 필연성에 노예가 되는 것보다, 신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연약한 자들을 믿는 것이 훨씬 더 낫다.” (176) [맑스의 자유]
에피쿠로스가 자연으로부터 신을 추방하기 위하여 자연 속에 필연성을 제기했을 때, 그는 자연으로부터 숙명론을 추방하기 위하여 원자들의 운동의 우연성과 인간의 자유를 긍정한다. .. 나는 도덕론에 관해서 말하지 않고 자연학의 관점에서 말하는 데, 그의 학설은 순수 부정의 학설이이다. 그래서 이 학설을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진화하지 못했다. 그 학설은 근대과학이 도달해야만 하는 결과들과는 더욱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것이 반대로 그 학설이 매우 고상한 운수(la chance)를 가졌던 것이다. (176)
(54P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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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4 헤라클레이토스(Héraclite d'Éphèse, Ἡράκλειτος ὁ Ἐφέσιος, 전544경-480) 그리스 철학자. « Panta rhei(Πάντα ῥεῖ) » « Toutes les choses coulent » (dans le sens de « Tout passe »).
470 소크라테스(Socrate Σωκράτης, 전470/469-399) 그리스 철학자. 자유와 양심(의식)의 철학 창안자. 진리추구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노력한 철학자.
460 데모크리토스(Démocrite d'Abdère, Δημόκριτος, 460-370), « choisi par le peuple ») 그리스 철학자, 원자론자. 우주는 아톰과 빈 것으로 되어있다(Univers constitué d'atomes et de vide.)
428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전428/427-348/347) 아테네 철학자. 소크라테스 제자.
384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 전384-322) 고대 그리스철학자. 뤼케이온 창설자. 생물학, 물리학, 형이상학, 논리학, 시학, 정치학, 수사학, 윤리학 등 제반 학문의 선구자.
342 에피쿠로스(Épicure, Ἐπίκουρος, 전342-270)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 학파를 창설하였다. 경험론의 시초이다.
281 크뤼시포스(Chrysippe de Soles, Χρύσιππος ὁ Σολεύς, 전281-208) 스토아학파 철학자. [제논의 창설에 이어] 클레안티스 다음으로 스토아 2대학장.
[387 플라톤 아카데미아(L’Académie, Ἀκαδήμεια)[마흔]는 전387년에서 전86년까지 존속.
335 리케이온(Λύκειον, Le Lycée, Lykeion)[서른아홉] 아리스토텔레스가 전335년 세움.
306 에피큐로스(35살) 아테네에서 학교(Jardin, école à ciel ouvert)을 열다.
301 스토아학파 제논(34살), 회랑(Portique) 학교 세움]
98 루크레티우스(Lucrèce, lat. Titus Lucretius Carus, 전98-55)[마흔셋] 라틴계 시인, 철학자. De rerum natura (De la nature des choses) 이 책은 에피쿠로스에 따른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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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아프로디지아스(Alexandre d’Aphrodise ou d’Aphrodisias, Ἀλέξανδρος ὁ Ἀφροδισιεύς 150경-215경) 카이로 태생, 아리스토텔레스 주석가. 운명에 대하여(Du destin (Περὶ εἱμαρμένης, De fato), Du mélange: De mixtione
2??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Diogène Laërce Διογένης Λαέρτιος / Diogenês Laertios, Diogenes Laertius, 3세기경) 역사가, 철학자 시인 학설사가. 철학에서 유명한 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350 네메시오스(Némésios ou Némésius, 350경-420경) 시리아 에메즈 주교, 크리스트교 신학자, 철학자.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De la nature de l'homme, 400경)(그리스어로)
1646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 독일 철학자. 수학자, 논리학자, 외교관, 도서지기, 문헌학자. 형이상학 서설(Discours de métaphysique, 1686), 변신론(Essais de Théodicée, 1710), 단자론(Principes de la philosophie ou Monadologie, 1714),
1806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 영국 철학자, 논리학자, 경제학자. 연역과 귀납논리의 체계(Système de logique déductive et inductive, 1843), An Examination of Sir William Hamilton's Philosophy and of the Principal Philosophical Questions Discussed in his Writings 1865(f,r La philosophie de Hamilton),자유론(On Liberty, 1859), 사회주의론(Socialism1879)
1791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 전자기학과 전기화학 분야에 기여한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화학자.
1824 톰슨(William Thomson, Lord Kelvin, 1824-1907), 아일랜드 출신 영국 물리학자. 열역학에 공헌하였다.
1831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 스코틀랜드 물리학자, 수학자. 전기, 자기, 감응을 하나의 방정식으로 통일하였다.
1854 기요(Jean-Marie Guyau, 1854-1888)[서른넷], 프랑스 철학자, 시인. “프랑스의 니체”라는 별명이 있다.
(11:15, 54PLF)(11:19, 54P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