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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정씨 화이팅 원문보기 글쓴이: 정철중(23세)
나의 조상이야기 ③ 10세 증판서(贈判書) 정연(鄭演, 1541~1621) 공
□ 행적(行蹟)
영사당(永思堂) 연(演)공은 1541년 서해(瑞海) 응규(應奎)공이 34세로 경상도 남해현령(南海縣令)으로 계시던 해에 태어나셨다. 아우로 택(澤)공이 계셨다고 하나 무후(无后:후사가 없음)이시므로 외아들이 되셨다. 아버님이 1565년에 별세하시니 그 때 나이 25세이다. 수사공(水使公)이 남해 연안의 수령과 진장, 도신(道臣)으로서 왜구를 방비한 공으로 경기도 광주에 사패지(賜牌地, 왕이 하사하는 토지)를 받으시고 정착하시어 자작촌(自作村)이라고 불렀는데 광주시의 문현산(門懸山) 남쪽에 자리한 오포면 추자리 일대이다.
영사당 공은 일찍이 과거공부를 접고, 넉넉한 재산을 돌보며 지내면서 인왕산 인근으로 추정되는 한양의 성서(城西)에 집을 두고, 만년에 문인들과 교류하시면서 풍류를 즐기며 지내시니, 그 모임이 「팔선계(八仙契)」와 「구로회(九老會)」이다. 아버지의 공덕으로 음직(蔭職, 과거급제 없이 나간 벼슬)에 나가 용양위 부사직(龍驤衛副司直)을 지내셨는데 오위도총부의 종5품 무관직 벼슬이다. 실제로 직책을 받아 근무하신 실직(實職)이 아니고, 녹봉(祿俸 : 급여)만을 받은 산관(散官, 품계(品階)만 있고 실직(實職)이 없는 벼슬)의 직책으로 생각되는데, 승자하여 종2품관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사후에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셨다. 과거에 급제하지 않으셨는데 음직으로 이렇게 현달하신 것은 영향력 있는 집안이거나 문벌과의 관계가 크거나 재력의 후광도 있었겠지만 인품과 기국(器局)이 없었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장인께서는 당시 시예(詩禮)와 서예에 일가(一家)를 이루고 문무를 겸비하여 함경도 남병사(南兵使)와 경기도 및 경상도관찰사를 거쳐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신 국창(菊窓) 남응운(南應雲) 공이시고, 배위이신 의령남씨(宜寧南氏) 사이에 6남 7녀를 두셨는데 거의 모두가 크고 작은 벼슬자리에 나갔다. 이 모든 즐거움과 만년의 영광에 대해 세간의 부러움을 받게 된 것도 타고난 복록(福祿)이요, 조상의 은덕(恩德)이다. 공과 더불어 배위이신 의령남씨는 응교공 후손의 번영을 이룬 장본인이시다.
□ 족보기록(族譜記錄)
자(字)는 거원(巨源)이고 호(號)는 영사당(永思堂)이다. 중종 신축(辛丑)년인 1541년 11월 21일에 태어나셨다. 음직으로 용양위 부사직(蔭 龍驤衛副司直)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승자하였다. 일찍 과거를 그만두고(早廢擧業), 만년에 한양의 서쪽에 은거하여 살면서(城西隱居) 덕망 있는 은퇴한 선비들과 사시 모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풍류를 벗하니 사람들이 장안의 훌륭한 일이다 하였다(與耆英諸公風流徜徉人稱洛中盛事). 양 계첩이 집에 전한다(兩契帖藏于家). 광해(光海) 신유(辛酉)년인 1621년 4월 19일에 졸하시니 향년 81세이고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셨다.
○ 배위 : 의령남씨(宜寧南氏, 1541~1605), 부 참판 남응운(南應雲), 조 참판 세건(世健)
○ 묘소 : 고(考:부친) 수사공 묘 아래, 묘갈은 5세손 오규(五圭)공이 짓고(撰), 음기(陰記:비의 뒷면 글)는 중국 안노공의 글자를 모아 썼다(集顔魯公字 書)
○ 자녀 :
- 흥문(興門)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
* 별제 : 교서관(校書館)ㆍ상의원(尙衣院)ㆍ군기시(軍器寺)ㆍ예빈시(禮貧寺)ㆍ도화원(圖畫院)ㆍ활인선 등(等)에 딸린, 종6품(從六品) 벼슬
- 창문(昌門) 선교랑(宣敎郞), 14세에 겸재(謙齋) 선(敾) 공 배출
* 선교랑 : 종친부(宗親府)·돈령부(敦寧府)·한성부(漢城府)·봉상시(奉常寺)·종부시(宗簿寺)·사옹원(司饔院) 등의 종6품 상(上) 벼슬, 선무랑 보다 위
- 보문(保門) 웅천현감(熊川縣監)
- 영문(英門) 사헌감찰(司憲監察)
- 광문(光門) 장릉참봉(章陵參奉)
* 김포소재 인조(仁祖)의 친부 원종(元宗)과 비 인헌왕후(王后)의 능
- 진문(振門) 습독(習讀)
* 훈련원(訓練院)의 종9품(從九品) 무관직(武官職)
- 여(女) 칠원(漆原) 윤경원(尹慶元) 한성서윤(漢城庶尹), 부 헌민(憲民)공 탁연(卓然), 자 참의(參議) 계기(啓基) 등 4남
- 여(女) 정돈(鄭敦), 봉사(奉事)
- 여(女) 청송(靑松) 심영(沈詠), 판관(判官)
- 여(女) 남양(南陽) 홍서린(洪瑞麟), 목사(牧使)
- 여(女) 나주(羅州) 정호공(丁好恭), 정랑(正郞), 부 대사헌(大司憲) 윤복(胤福)
- 여(女) 거창(居昌) 신득의(愼得義),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부 부사(府使) 준(雋)
- 여(女) 김비(金秘)
< 증 호조판서 정연공 및 배위 의령남씨 묘소 : 광주시 오포면 추자리 >
□ 정연(鄭演)공의 팔선계(八仙契)와 구로회(九老會)
「평산신씨 ≪가장기영첩 家藏耆英帖≫에 대하여(윤진영, 한국학중앙연구원)」 라는 논문에 신암(申黯)이란 분의 만년(晩年)의 기영(耆英)에 대한 이야기가 포함되었는데, 바로 공이 계원으로 참여하신 「팔선계」와 「구로회」의 활동에 대한 것이다.
● 팔선계(八仙契)
팔선계에 대해서는 ≪가장기영첩≫의 첫 면과 둘째 면에 좌목과 그림 한 면 만이 실려 있다. 팔선계에 참여한 정연(鄭演)에 대해 “만년에 도성(都城)의 서쪽에 은거하여 덕망이 있는 여러 노인들과 함께 팔선계(八仙契)와 구로회(九老會)를 닦았다는 기록이 있어 구로회에 앞서 팔선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계원 좌목(座目)은 다음과 같다.
① 신벌(申橃:1523~1616, 94세 졸), 호 우송(友松) 관(官) 동지(同知)
② 이의건(李義健:1533~1621, 89세 졸), 호 동은(峒隱), 관(官) 직장(直長)
③ 신암(申黯:1537~1616, 80세 졸), 호 불여당(不如堂), 관(官) 경력(經歷)
④ 김극효(金克孝:1542~1618, 77세 졸), 호 사미당(四味堂), 관(官) 동지(同知)
⑤ 정연(鄭演:1541~1621, 81세 졸), 호 영사당(永思堂), 관(官) 동지(同知)
⑥ 심암(沈嵒), 관(官) 정(正)
⑦ 권성이(權成已), 관(官) 첨정(僉正)
⑧ 유탁(兪逴), 관(官) 정(正)
계를 결성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구로회가 1614년(광해군6)에 시행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팔선계에 참여한 8명 가운데 신벌, 이의건, 신암, 김극효, 정연 등 5명은 1614년의 구로회에도 들어 있어, 구로회가 팔선계의 연장선에서 시행되었고, 그 사이에 계원의 변동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 그림은 팔선계의 실제 모습이 아니라, 1779년(정조 3년)에 ≪가장기영첩≫을 만들 때 상상으로 재구성한 장면을 그려서 실은 것이 다. 만약 팔선계첩이 당시에 존재하였고, 여기에 들어간 그림이라면 17세기 초 회화양식을 취해야 하는데, 이 그림은 전형적인 18세기 후반기 화풍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 구로회(九老會)
‘구로회 좌목(九老會座目)’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만력 갑인(甲寅) 광해(光海) 육년 수계 용인이씨족보(萬曆甲寅 光海六年(1614)修稧出龍仁李氏族譜)”라고 적었다.
1799년 ≪가장기영첩≫을 만들 당시에 좌목은 용인이씨족보 龍仁李氏族譜에서 옮겨 썼다는 것이다. 구로회 좌목(계원명단)은 다음과 같다.
① 신벌(申橃), 1523.12.24. ~ 1616.7.9, 호 우송(友松) 고령인(高靈人)
② 이의건(李義健), 1533.1.29. ~ 1621.11.24, 호 동은(峒隱), 전주인(全州人)
③ 신암(申黯), 1537.4.2. ~1616.9.20, 호 불여당(不如堂), 평산인(平山人)
④ 정연(鄭演), 1541.11.21. ~ 1621.4.19, 호 영사당(永思堂), 광산인(光山人)
⑤ 김극효(金克孝), 1542.9.16. ~ 1618.2.3, 호 사미당(四味堂), 안동인(安東人)
⑥ 정응탁(鄭應鐸), 1542.11.6. ~ 1617.2.12, 초계인(草溪人)
⑦ 이조민(李肇敏), 1543.1.6. ~ 1615.11.28, 용인인(龍仁人)
⑧ 이원(李瑗), 1543.1.17. ~ 1618.7.6, 완산인(完山人)
⑨ 유탁(兪濯), 1544.6.30. ~ 1618.윤4.11, 창원인(昌原人)
구로회를 결성할 당시 신벌(申橃)은 92세였고, 이의건(李義健)이 82세, 신암(申黯)이 78세, 가장 연소자가 유탁(兪濯)이 71세이다. 장수한 자만이 참여할 수 있는 모임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교유관계를 자세히 알려주는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즉, 누가 모임을 주도했으며, 어떤 연유로 친분을 맺고 모임을 갖게 되었는지, 그리고 구로회가 이루어진 배경이 무엇인지 파악하기가 어렵다. 문집을 남긴 사람들의 기록에도 교유관계에 대한 정황은 찾을 수 없다.
좌목 다음 면의 그림은 구로회의 장면으로 그려 넣은 것이다. 1614년 당시 개인별로 구로회첩을 만들어 나누어 가졌겠지만, 거기에 그림이 수록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좌목의 내용을 용인이씨족보에서 채록한 사실로 볼 때, 화첩의 원본은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1614년(광해6) 4월 8일에 ‘김첨지가(金僉知家)’에서 첫 모임을 가졌다고 되어 있다.[歲萬曆甲寅(1614) 四月初八日 作契始行于金僉知家 九老眞率會]. 여기에서 ‘김첨지가(金僉知家)’란 김극효(金克孝)의 집을 말한다.
구로회의 일정과 장소를 기록한 내용에 따르면, 1614년 4월 8일에 시작된 이래, 1617년까지 총 14회 모임을 가진 것으로 파악된다. 1614년(광해군6)에 5회, 1615년에 6회, 1616년에 2회, 1617년에 1회로 되어 있다. 대부분 4월에 시작해서 10월 사이에 모임을 가졌다.
여기에서 이조민이 1615년(광해군7) 11월 28일에 사망하므로 1616년에는 구로회의 구성원이 8명이 되었고, 1616년에는 신벌과 신암이 세상을 떠나 1617년에는 6명만이 남았다. 또한 정응택이 1617년 2월에 사망하였으므로 그 해 8월 18일의 모임에는 최종 5명이 참여하였다. 이 날이 구로회의 마지막 모임이었다. 구로회를 맺은 첫 해인 1614년과 이듬해인 1615년의 구로회 때 가장 활발한 교유가 이루어졌다.
구로회의 장소와 관련하여 살펴보면, 계첩에 기록된 14회의 모임 가운데 김극효의 집에서만 5회의 모임을 가졌다. 김극효의 집이 모임을 갖기에 좋은 위치와 거리 등의 환경을 갖추고 있었던 듯하다. 그 다음은 정연의 집에서 3차례, 유탁의 집에서 2차례를 가졌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신암의 집에서는 한 차례도 모임을 갖지 않았다.
9명의 구로회 회원 가운데 거주지가 확인되는 사람은 김극효, 이의건, 이조민, 정연(鄭演) 등 네 사람이다. 김극효의 집은 명통방의 청음고택(淸陰古宅) 자리로 추정되고, 이의건은 삼청동(三淸洞)에 살았다고 한다. 이조민은 세심대(洗心臺)에 집이 있었고, 정연의 집은 인왕산 인근일 것으로 추측된다. 이 4명의 거주지는 삼청동에서 백악산과 인왕산 인근에 걸쳐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만으로 구로회의 구성원들이 모두 이 권역에 살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1) 정봉림 편, 광주정씨세보(1928뇬 광주정씨보소), 권1 을편(1판 주부공파). “~~ 만은성서 여기영제공 수팔선계구로회~~ 鄭鳳林 編, 光州鄭氏世譜(1928, 光州鄭氏譜所), 卷1 乙編(一板 主簿公派). “…晩隱城西, 與耆英諸公, 修八仙禊九老會…”
* 신벌(申橃, 1523~1616). 본관은 高靈. 자는 濟伯. 申叔舟의 현손이며, 좌의정 申用漑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결사 申瀚이고, 아버지는 가평군수 申汝柱이다. 1552년(명종7)에 효자로 천거 받아 司宰監參奉이 되었다. 1594년(선조27)에 世子翊衛司司禦와 繕工監判官이 되었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향리에 돌아갔다. 80세에 당상으로 오르고, 1612년(광해군4)에 同知中樞院事가 되었다.
* 이의건(李義健, 1533~1621)의 본관은 全州. 자는 宜中, 호는 峒隱.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廣平大君 璵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배천군수 守漢이며, 어머니는 慶州崔氏이다. 1564년(명종19)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뒤에 학행으로 돈녕부직장이 되었으나 親喪으로 사직하였으며, 1610년(광해군2) 李恒福의 주청으로 공조좌랑이 되고, 이어 공조정랑에 올랐으나 사퇴하였다. 廣州 秀谷書院과 永平의 玉屛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峒隱遺稿가 있다.
* 유탁(兪濯, 1544~1618)의 본관은 창원, 자는 여신, 호가 신곡이다. 교위 세건의 증손, 정자 돈의 손, 참봉 필홍의 자, 1582년(선조15) 문과에 급제하였다. 증조는 兪世健이고, 조부는 兪燉이며, 부친은 厚陵參奉 兪必弘이다. 1573년(선조6) 식년시에 생원으로 입격되었고, 1582년(선조15)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593년(선조26)에 京畿都事, 1601년(선조34)에 禮曹佐郞에 제수되었다. 三司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관직이 承旨에 이르렀다.
* 김극효(金克孝, 1542~1618)의 자는 希閔, 호는 四味堂. 본관은 安東이다. 증조부는 尙州判官를 지낸 金永銖이고, 조부는 平壤庶尹 金璠이며, 부친은 信川郡守을 지냈던 金生海이다. 林塘 鄭惟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그의 가문에 장가를 들었다. 1562년(명종17)에 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고, 1564년(명종 19) 갑자 식년사마시에 進士 3등으로 합격 한 후, 내외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에서 장남인 金尙容은 右議政, 4남인 金尙憲은 左議政에 오르는 등 그의 가문에서 고관대작이 조선말까지 배출되었다.
* 정연(鄭演, 1541~1621). 光州鄭氏世譜에는 鄭演에 대한 다음의 기록이 실려 있다. 陰敍로 龍驤衛副司直을 지내고 同知中樞府事에 올랐는데 일찍이 科擧를 포기하고 만년에는 都城의 서쪽에 은거하여 德望이 있는 여러 노인들과 함께 八仙契와 九老會를 닦으며 사철 酒宴 모임을 갖고 풍류로 逍遙하니, 사람들이 서울 안의 아름다운 일이라 일컬었으며, 두 개의 稧帖이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 이조민(李肇敏)의 집은 세심대(洗心臺)에 있었는데, 산수와 경치(천석 : 泉石)가 빼어남이 서울에서 제일이었는데 光海君이 빼앗았다고 한다. 李宜顯, 陶谷集 권14, 「唐津縣監李公(李貞敏)墓碣銘幷序」“…所居洗心臺 泉石之勝 甲於都中 光海主奪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