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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워>, 미개봉작에 대한 격려
2004.10.22 김영진 편집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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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되지 않은 영화, 아니 실은 개봉되지 못했던 영화를 미리 언급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이다. 시나리오를 읽고 그 비정형화된 상상력에 적지 않게 놀랐으며, 촬영현장에 들렀을 때도 꽤 괜찮은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기대를 품게 했으나,몇 차례 제작이 중단되고 결국 완성된 후에도 미운 오리 새끼처럼 개봉관을 잡지 못한 영화가 한 편 있다. 김수현의 데뷔작 <귀여워>는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 출품됐고 올해 부산영화제 뉴커런츠 부문에서 처음으로 국내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 대중에게 선보인다고 해도 이 영화가 환영받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아니, 거꾸로 이 영화는 몰이해와 무심함 속에 묻힐 가능성이 더 크다.
미리부터 긍휼하게 여길 필요는 없지만, 모스크바영화제 출품 직후 일부 관객을 상대로 모니터 시사회를 연 이 영화를 보고 느끼는 심정은 양면적인 것이다. 오랜만에 대형 신인 감독의 영화가 출현했으나 장사는 어렵지 않을까라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새로운 재능을 발견했다는 흥분을 주지 못했던 대다수 한국 신인 감독들의 영화들 틈에서 <귀여워>를 끄집어내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좀 과장해 평자의 비평적 명운을 걸고 말한다면, <귀여워>의 흥행 여부와 상관없이 김수현은 향후 10년간 가장 중요한 한국 영화감독의 목록에 오를 이름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정의되지 않는 인간의 삶을 묘사하는 데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 준다. 어디론가 튈지 모르는 인간들의 면면을 다루면서 고무공처럼 사방으로 튀어다니는 방사형의 이야기 구조를 지닌 이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긴 어려울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귀여워’란 촌스런 제목이 붙은 이 영화를 좋아하고 싶어진다. 이것은 정해진 레일을 타는 기차처럼 제작자와 관객이 원하는 영화를 만드는 데 봉사하는 대다수 신인 감독들의 도구화된 지성 사이에서 돌멩이처럼 튀어나온 빛나는 미덕이다. 궤도를 벗어나 마구 달리는 기차에 탑승해 덜컥거리는 의자에 앉아 있으면서도 묘한 해방감을 느끼는 기분인 것이다.
<귀여워>는 곧 철거될 낡은 아파트에 사는 네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다. 한물 간 박수무당 장수로는 배다른 두 아들과 함께 사는데 곧 아들이 한 명 더 늘어난다. 그가 사는 아파트를 부수러온 철거 깡패의 행동대장 머시기가 언젯적인지 모르겠지만 장수로가 뿌린 씨라는 것이 밝혀진다. 제일 맏이인 963은 퀵서비스로 호구를 삼는 청년이다. 외모가 준수하고 일기도 곧잘 쓰는 내성적인 청년으로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초월적 욕망이 있다. 개코라 불리는 둘째는 레커차 기사로 일하며 뭐든 닥치는 대로 부딪치며 살아간다. 경이적인 생명력을 지닌 이 인간은 순이라는 이름의 천방지축인 젊은 여성을 집안에 끌어들이고 천하의 바람둥이인 아버지 장수로를 비롯해 그 피를 이어받은 세 아들이 호시탐탐 순이를 노리는 엽기적인 상황이 그때부터 펼쳐진다.
패륜에 가까운 이야기인데도 <귀여워>는 어디로 튈지 모르게 천방지축 발랄하다. 부적을 팔며 중년 여인네들의 몸을 탐하는 사이비 교주 같은 아버지와 그 아버지 밑으로 모여든 세 명의 배다른 아들이 한 젊은 여자를 놓고 경쟁을 벌인다. 누가 봐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기이한 상황이지만 여기서 이 영화는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블랙코미디의 영역으로 걸어 들어간다. 남자들은 순이를 서로 먼저 누가 건드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지만 순이는 그런 것엔 아랑곳하지 않고 이 사람 저 사람 건드리며 나풀나풀 인습의 경계를 넘나든다. 도덕 대신 삶의 에너지로 충만한 이 영화는 지독하게 어두운 철거촌을 현실적인 시선으로 비추면서도 그걸 무지막지한 초월적 에너지로 덮는다. 사방이 꽉 막혀 있는 삶의 후미진 곳, 철거 직전의 아파트에 사는 영화 속 주인공들은 어디로 튈 데가 없지만 다른 곳으로 튀려는 의지만은 강력하다. 퀵서비스맨 963은 근사한 오토바이를 타고 어디론가 떠날 것처럼 폼을 잡지만 그저 말뿐이다. 개코는 레커차를 몰고 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 눈치 보며 뜯어먹을 궁리만 한다. 뭐시기는 인생 계획과는 거리가 먼 생활 태도로 매사에 주먹이 앞서는 사고뭉치여서 직속 부하로부터도 버림받는다. 이 세 아들에게 씨앗을 뿌린 아버지 장수로는 마치 신의 재림을 집전하는 능력이 있는 듯이 온갖 허세를 부리지만 실은 여자에게 온통 마음이 쏠려 있다. 그런 와중에 등장인물들이 사는 아파트 주변은 계속 무너져내리고 있다. 철거 깡패들이 하나 둘씩 건물을 무너뜨린다. 이들 틈에 낀 여주인공 순이는 이 난세를 고통스러워하기보다는 즐긴다. 낄낄대고 웃으면서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즐긴다.
이게 흥미로운 것은 윤리라고는 쓰레기통에 처박은 듯이 보이는 등장인물들이 서로 누가 에너지가 제일 센지 경쟁하기 때문이다. 막무가내로 각자 돌진하지만 방향이 전혀 없어 보이는 이들은 전혀 정의될 수 없는 영역으로 걸어 들어가 결말에 이르러서도 별로 수습되지 않고 있다. 김석훈이 연기하는 퀵서비스맨 963은 여자를 안 좋아하는 척하는 문제아이고 뭐시기는 시대가 요구하지 않는 건달이다. 개코는 아비를 우습게 아는 효자이고 순이는 누구에게나 몸을 허락할 것같지만 실은 아무한테도 허락하지 않는 여자다. 아버지 장수로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철없는 가장이다. 원인과 결과가 어긋나는 정의에 따라 <귀여워>의 등장인물들은 이렇게 살았으니 이런 인간이 됐다, 는 공식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괴짜 기질을 잿빛의 아파트 철거촌이 감싸고 있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고 거의 인적의 자취는 끊겼으며 맹랑한 꼬마들이 불장난을 하며 돌아다니고 있는 이곳에서 죄의식과 도덕은 일찌감치 매장된 것같다. 그 절체절명의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같은 분위기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낯설게 꺼내는 욕망이 슬퍼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다른 카드가 없다. 쌍소리를 내뱉으며 상대를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고 자신을 상대에게 접수시키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저 내키는 대로 행동하지만 가끔 이래도 되나, 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 방치된 영혼의 스케치에서,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방치된 세상의 풍경에서 <귀여워>는 예치기 않은 슬픔을 끌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본받을 만한 인물과 누구나 수긍할 만한 이야기의 결말을 통해 관객의 만족을 구하는 대중영화의 관습에서 좀 떨어진 낯선 모험의 성취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 순이는 주변 사람들의 넋을 나가게 하지만 그녀 자신은 누구에게도 묶이지 않고 나비처럼 한없이 가벼운 존재의 무게로 어떤 경계에도 묶이지 않는 여성이다. 그녀는 진흙탕 속의 초라한 여신 같은 이미지로 남자들을 제압하며 각자 자기 기준의 초월을 꿈꾸는 남자들을 저 위에서 내려다본다. 거꾸로 남자들 역시 자기만의 과대망상에 빠져 삶의 탈출구를 꿈꾼다. 대신 그들은 그 꿈을 누구에게든 과시하지 않으며 스스로 그 꿈을 정의할 능력도 없고 다만 벗어나고 싶다는 맹렬한 의지만으로 삶을 버티는 것이다. 그들의 삶에 대한 집념 때문에 <귀여워>는 지저분한 현실을 파고들어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저 높은 천국을 보는 양수겸장의 드라마다. 세상에서 가장 복잡하고 난잡한 가족사에서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끌어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프로젝트지만 김수현은 이 무모한 프로젝트의 8부 능선 정도는 넘는다.
영화의 상당수를 롱테이크로 찍어낸 이 감독의 스타일은 관조적인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곁에서 얼쩡거리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 쓱 그들에게 다가서서 잠시 그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을 듯한 착각에 빠트린다. 이 영화의 롱테이크 스타일이(아마도 세계관에선 비슷한 지향을 보인다고 할 수 있을) 에밀 쿠스트리차의 잔치 복판에 온 것같은 흥에 취한 스타일과 다른데도 힘이 넘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신중하게 보이지만 관객의 배를 잡고 마구 밀어붙이는 느낌의 박력으로 영화를 끌고 간다. 그 스타일의 일관성이 앙상블 드라마의 이 영화에서 완벽하게 지켜진 것은 아니다. 영화는 종종 덜컹거리며 출연 배우들의 호흡도 고르지 않다. 정재영과 가수 출신 박선우의 연기는 발군이지만 그에 비해 다른 배우들은 시나리오의 두께를 감당하기 버거운 흔적을 드러낸다. 그렇더라도 이 미완의 신인 감독의 역량이 종래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신기한 이야기의 나라를 창조한 미덕이 가시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세인들의 통념과 맞서는 배짱이 있는 영화이고 그만큼 대가를 치를 가능성이 큰 영화지만 극장에 걸리는 그때까지 미리부터 토론을 제안할 가치가 있는 영화다. 그것이 올해 부산영화제에 출품된 이 영화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서둘러 평을 쓰는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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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빠연기만은 탁월했지... 귀여워 대박나라~~~~ 아자아자 홧팅!!!
하나같이 흥행면에선 별로일거라는 예견들,,하지만 대박날거에요!
ㅋㅋ재영오빠의 연기력은 역시..! 어딜가도 빛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