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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건주의
형제 동동체는 헤른후트(Herrnhut: 주의보호) 형제교회 창립자이자 제국백작이던 진젠도르프(1700~1760)의 활동으로 이루어졌다. 어린시절 아버지를 잃은 그는 어머니의 재가로 인해 할머니의 양육을 받으면서 가정에서는 슈페너적인 경건주의의 영향을 그리고 할레에서는 프랑케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초기에 할레 경건주의의 특징인 참회와 회개 강조를 수용했으나, 여기서 얻어진 것들이 지속성을 보장해주지 못함을 알았기에 나중에는 이러한 경향을 포기했다.
진젠도르프의 특징은
(1) 그의 공동체 설립 노력이다.
그는 헤른후트교회를 성가대의 이름으로 분류했다(어린이 성가대, 청소년 성가대, 부부성가대 등). 그는 공동체를 가족보다 우위에 두었다. 또한 모든 참된 신자를 물론 그들의 소속교회에서 나오지 않고도 교파의 구분 없이 헤른후트를 중심으로 모이게 하려는 초교파적 목적을 가졌다.
(2) 하나님과의 관계의 토대는 오직 감정에 있다.
이러한 사상의 위험성은 그 자신에게서 볼 수 있다. 진젠도르프에 의하면 신앙이라고 일컫는 신적인 것에 대한 인식은 죽은 것이며, 마귀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경건주의가 지니고 있는 반정통주의적 정서다. 이와는 달리 신약성서가 말하는 신앙은 항상 사랑과 동일시 된다.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기쁨과 결합된 '단순하지만 마음속에 있는 기쁜 신앙'인 그러한 사랑만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스도께 대한 감성적 사랑을 얻게 하고, 새로 일으키는 것이 예배의 주요 과제다. 진젠도르프는 이러한 목적으로 새로운 형식을 도입했다.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된 사람만이 신적인 일을 바로 알도록 그의 눈이 열린다. 그러나 진젠도르프가 신앙의 개인적 사실여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수록 교리의 참 여부에 대한 문제는 흥미가 없었다. 거기에 그의 사상의 약점이 있다.
(3) 할레 경건운동이 가르친 하느님과 인간의 연합(cooperatio hominis cum Deo)을 진젠도르프는 거부했다.
구원에 이르는 첫 단계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다. 이것은 성령이 일으키며, 인간은 다만 수동적일 뿐이다. 사랑만이 성서를 바로 인식하게 해준다. 그는 사랑에서 출발하여 말씀을 통해 인식에 이르는 길을 가르쳤다. 이것만이 확신을 가져다 준다. 이것은 자신의 경험에 달려 있다. 외적인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은 진젠도르프에 의하면 확신을 주는 데는 충분치 못하다. 이것은 루터의 사상과 분명히 모순된다. 루터 신학에 있어서는 하느님의 말씀, 신앙, 사랑의 순서가 지배적이며, 진젠도르프는 이러한 순서를 완전히 벗어나 있다.
(4) 성화론에 있어서도 진젠도르프는 루터와 구별된다.
스페너의 기본사상이 그에 의해서 더 강조되어 그리스도와의 마음의 연합이 인간을 죄에 대해서 죽게 한다고 가르쳤다. 게다가 죄의 유혹성도 그로 인해 없어진다. 유혹들은 인간이 마음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는 표지다. 진젠도르프는 완전주의를 가르쳤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 역시 하느님의 선물이며,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다. 물론 전가라는 말은 루터의 정통주의가 사용한 의미와는 완전히 다른 것을 의미했다. 그 때문에 진젠도르프는 율법의 설교를 거부했다. 감리교의 완전주의는 여기에 그 뿌리가 있다.
(5) 진젠도르프는 할레 경건운동과 분명히 구분되지만, 지속적으로 활동을 공유했고, 특별히 형제 공동체의 선교활동에서 탁월한 일들을 전개했다.
형제공동체는 진젠도르프가 계획적으로 창립한 것은 아니다. 1722년 그는 크리스티안 다비드(1691-1751)를 지도자로 세워 반종교개혁의 여파로 인해 이주를 원한 보헤미아와 뫼렌의 형제단 계통의 사람들에게 후트베르크에 있는 베텔 마을에 정착하도록 거주를 허락했다. 그들을 중심으로 작은 교회(ecclesiola)를 세우려는 시도는 헤른후트의 모든 주민들이 가입했을 때 실패로 끝났다. 작은 교회와 공동체가 하나로 합해졌다. 독자적인 직임을 갖고 고유의 재정 기관을 갖는 것을 불가피하게 만든 선교의 성공은 작센 주교회에서의 헤른후트의 분리를 초래했다. 특별한 중요성은 없었지만 구형제공체로부터 감독직을 넘겨 받았다. 이러한 분리는 공동체와 교회의 관계를 오랜 기간 방해하지는 않았다. 선교활동과 함께 진젠도르프와 헤른후트의 중요성은 슐라이어마허에 의하면 반이성주의적 사고의 성립과 계몽주의 시대동안 활발한 디아스포라적 경향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요약 속에 그 본질이 있다. 또한 요한 웨슬레에게 미친 영향도 과소평가할 수 없다.
[출처] 진젠도르프 (교회사 발췌) (예배의회복) |작성자 래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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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 니콜라우스 루드빅 진젠도르프는 1700년 5월 26일 독일 드레스덴에서 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유년시절부터 예수님과 깊은 인격적인 교재를 가졌다. 그는 그의 일기장에 “나에게는 단 한 가지 열망밖에 없다. 그것은 예수님, 오 직 그 분 뿐이다.” 라고 기록했다. 그는 9살 때에 서인도에 관한 선교보고서를 읽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것을 자기 생애의 목적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학창시절 외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귀국한 선교사들과 접할 기회를 많이 가졌다. 그는 선교사들의 해외 선교 강연에 큰 감명을 받았고, 자기도 그들과 같은 인생을 살고자 결단했다.
이 계획을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해 다섯 소년들과 함께 “겨자씨 모임”이라는 기도 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의 목적은 구성원들이 기도로 하나되어 신앙 문제로 고민하는 형제들을 도우며, 아직까지 복음을 듣지 못한 해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는 졸업할 때까지 비슷한 기도 모임을 7개나 더 만들었다. 그는 신학 공부를 구체적으로 하고 싶었지만 친척들의 강력한 반대로 법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후에 진젠도르프는 할레 대학교로 진학했고1791년 5월 22일 18세의 진젠도르프 백작은 독일 뒤셀도르프의 미술관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그는 도메니코 페티가 그린 가시관을 쓴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이 사람을 보라’ 라는 그림 앞에 동상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때 그는 충격적인 경험을 갖게 되었다. 그 그림 밑에는 이렇게 내용의 비문이 있었다. ‘나는 너를 위하여 목숨을 버렸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
진젠도르프는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오랫동안 당신을 사랑했지만 당신을 위해 어떤 것이라도 행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부터 나는 당신이 이끄시는 어떤 것이라도 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께 일생을 헌신하고자 하는 그의 결심을 확고해졌고, 그때 이후로는 어느 누구도, 어떤 말로도 그의 뜻을 돌이킬 수 없었다. 그는 자기 아내가 될 사람은 자기와 뜻을 같이하며,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의 재산과 장래와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스물 두 살에 자기보다 일곱살이나 나이가 더 많은 도로시 로이스와 결혼을 하였다.
1721년 10월 그는 왕의 사법적 자문위원이 되었다. 일년 후 법정을 떠나 조모로부터 동부 독일에 넓은 베르텔슈도르프라는 영지를 상속받고 종교적 억압으로 고생 당하는 자들을 위한 피난처로 만들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1722년 말, 어느 날 크리스천 다비드라 불리는 모라비안이 그의 문 앞에 찾아온 이후 1722년 12월 모라비안 10명 정도가 처음으로 그의 영지에 정착했고, 1725년 5월에는 90명 정도, 그러다가 1726년 후반에는 300명 정도가 되었다. 진젠도르프는 이미 핍박 받는 모라비안 교회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따뜻하게 영접하고, 그곳에서 거주하고 생활하도록 많은 물질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진젠도르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과 재능과 재산을 쓰셔서 이 유서 깊은 교회를 재조직하고, 또 이를 통해 더욱 큰 역사를 이루고자 하심을 깨닫고 이 부르심을 받아 들였다. 그는 각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던 모라비안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으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로 연합하게 되었다.
진젠도르프는 청년 남녀들을 가정으로부터 분리시켜 엄격한 감독하에 신앙 훈련을 시켰다. 이렇게 엄격한 훈련과 간섭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하여 어디든지 준비된 일꾼을 보내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되면서 이 곳은 ‘주님의 보호’라 불리게 되었다. ‘교회 내에 작은 교회’를 만들기를 원했던 그의 꿈이 성취된 것이다. 그는 이런 말을 늘 했다고 한다. “공동체가 없이는 기독교가 있을 수 없다.”
진젠도르프는 자신의 공동체를 역사적 교회로 강력하게 성장시켜 나갔다. 헤른후트는 결국 모라비안교회로 형성되었다. 그들은 교리보다도 믿음과 사랑을 더욱 강조했다. 그러다보니 다양한 신앙의 소유자들이 들어 올 수 있었고 최초의 ‘초교파주의’를 만들게 되었다.
코펜하겐을 방문하여 크리스천6세의 제관식에 참석한 후 1731년 진젠도르프는 서부 인도인들 중 한 명의 개종한 사람인 안토니 울리히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도움을 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진젠도르프는 헤른후트로 돌아가 그와 함께 갈 사람을 물색했다. 반응은 즉각 나타났으며 대단히 열정적이었다. 두 명의 사람이 자원했다. 그들은 만약 그들 자신이 노예가 되는 것이 흑인 노예를 선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 기꺼이 노예가 되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즉시 선교사로 나갔으며 낮에는 흑인들과 같이 일하고 밤에는 성경을 가르쳤다. 이것이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이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보다 60년이나 앞선 때였다.
당시 개신교 교회는 세계 선교에 대해 잠자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모라비안 교회는 소극적인 경건 생활에서 적극적인 세계 선교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1733년에는 버진열도의 성크로와섬에 선교사를 보냈다. 그들 중 10명이 5년 만에 죽었지만, 그 자리를 대신 채울 사람을 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소렌슨이라는 사람은 그가 라브라도르에 갈 준비가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고 “물론이지요, 내일이라도 구두 한 켤레만 준비된다면”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들은 1930년까지 세계 14개 나라에 3,000여 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그들의 뜨거운 선교 열정의 영향으로 19세기 유럽에는 15개의 선교 기관이 탄생하게 된다.
주위의 시기와 비난으로 진젠도르프는 1763년 고향인 작센으로부터 추방당했다. 그는 오히려 이것이 하나님이 세계 각 곳에 흩어져 있던 선교사들을 위로하며, 복음을 전파하도록 기회를 주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서인도제도에서 감옥에 갇혀있던 선교사들을 석방해주기도 하고, 영국 런던에 가서 존 웨슬레와 휫트필드에게 신앙적 감화를 주기도 했다. 그는 미국의 펜실베니아에 가서 인디언들에게 설교를 하고 필라델피아에서 목회를 하기로 했다. 그는 미국, 영국, 독일 등 세계 각 곳을 쉴 새 없이 다니며 선교사들을 위로하고 직접 전도하여 모라비안 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주위로부터 많은 오해와 핍박을 받고 환난을 당했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도 전 세계에 예수님을 전파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을 막지 못했다. 진젠도르프는 1760년 60세에 열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기 까지 모라비안 교회는 28년 간의 활동을 통해 226명의 선교사를 배출해 내었고, 1760년 당시엔 그린랜드의 13개 지역과 중,북부 아메리카와 서인도제도에 49명의 형제와 17명의 자매들이 약 6,125명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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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진젠도르프(Ludwig Zinzendorf)
- 독일의 형제단 창설자. 모라비아파의 리더
1700.5 독일작센 지방 부유한 백작 집안에서 출생하였으나 6주만에 부친사망, 외조모 남작부인에게서 양육되었으며,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어려서부터 성경도 많이 읽고 기도도 열심히 하였다.
1716. 비텐베르크대학에 입학하여 법률 공부함
1719. 깨우침을 경험함
1721. 드레스덴에서 변호사로 활동함
1737. 형제단 창설
1760. 헤른후트에서 사망
거듭남(깨우침)의 경험
대학을 졸업하고 견문을 넓히기 위해 독일의 여러 지방을 여행하고 있었다.
어느날 뒤셀드르프의 어느 미술관을 구경하던 중 문득 한 그림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 그림 아래의 제목은
"나는 너를 위하여 이 모든 것을 하였노라. 그러나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느냐?"
(All this I did for you,what are you doing for me?)
가시 면류관을 쓴 채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상과 위와 같은 글을 바라보고 있던 청년의 마음에 뜨거운 변화가 찾아왔다.
그때 청년은 그림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죄를 위해 목숨을 버렸으며,자기는 값없이 구속함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7살 때의 일을 회고했다.
3년 동안을 가르쳐 온 가정 교사 에데링크씨가 작별 인사를 하면서 주님의 미쁘심에 대하여 아주 쉽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나는 한참 동안 울었고, 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분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리고 숙모 안리엣트가 나의 이러한 생각을 지지해 주었었던 것을- -.
어린 나이지만 진젠도르프는 자나 깨나 그리스도를 쫓는 생각에 꽉 차 있었고, 그와 똑같은 사람이 되고자 마음먹었다. 어느날은 예수님께 편지를 써서 창가에서 하늘로 던졌는데, 예수님께서 그 편지를 읽어 주실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한다.
16세에 대학에 입학한 진젠도르프는 주위의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학을 연구했다.
그리고 1719년 대학을 졸업하고 전국을 여행하던 중 뒤셀드르프시 어느 미술관에 들르게 되었고 어떤 그림으로 인하여 깨우침을 얻었다.
"그리고 창조주가 자기의 피조물인 인간들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것보다 더 뛰어난 일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인생을 바꾸었다. 아무도 예수를 찬양하려고 하지 않을 지라도 나는 예수를 따르고 그와 같이 살며 또 죽고자 결심하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작센주의 사법관에 취임하였고.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뛰어들어 활동을 했다.
1737년 관직을 그만두고 모라비아파의 감독이 되었고 형제단을 창설했다.
자기 재산을 다 내어 놓았으며, 각 처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해서 피부 종파를 초월한 모임이 되었다.
선교사를 세계 각지에 파송하였고, 특히 영국의 위대한 부흥사 요한 웨슬레도 이 모라비아 교파를 통해서 깨우침을 받은 것은 유명하다.
그림의 일화
어느 화창한 봄날 화가 스텐버그는 뒤셀도르프시 교외의 숲속을 거닐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집시 가운데 용모가 뛰어난 아리따운 소녀에게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끌렀다.
'스페인의 무녀'란 그림의 모델로 정하고 교섭결과 일주일에 3번씩 모델을 서 주었다.
화실에서 소녀는 진열된 많은 그림들을 보고 놀라와 했다,
특히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있는 한 폭의 그림에 와서는 더욱 놀라면서 스텐버그에게 물었다.
이사람이 누구예요?
"그리스도야"
그리스도를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에 못 박는 거야"
옆에 둘러선 저 악한 같이 보이는 사람들은 누구예요?
"지금은 바빠서 이야기 할 수 없구나, 넌 그저 내가 말한 대로 서 있기만 해줘"
며칠 후 다시 물었다.
왜 십자가에 못박고 있어요? 아주 나쁜 사람인가 보죠?
"아냐, 아주 착한 사람이야"
소녀가 너무 알고 싶어하므로 스텐버그는 자세히 이야기 해 주었다.
소녀는 생각할수록 마음이 괴로와져서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아롱져 있었다.
자, 이건 네게 주는 사례금이야
"아저씨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저씨, 그리스도라는 분이 아저씨 때문에 저런 고생을 하셨는데 아저씬 저 분을 퍽 사랑하시겠네요."
화가는 잠자코 말이 없었다.
아저씨 때문에 저런 고생을 하셨는데 - - 이 말이 그의 귓전에서 맴돌고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당황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그 자신도 슬픔을 가눌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일찌기 그리스도를 사랑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화가는 그 뒤에 성경을 읽기 시작하고, 어느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참석했다.
처음으로 구원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자기의 죄를 지고 가신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 놀라운 그리스도의 사랑을 남들에게 알릴 수 있을까?
그렇다, 그림으로 하자.
그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제까지는 다해 보지 못한 최선의 힘으로 그림을 그려 뒤셀도르프시 미술관에 전시하고 그 밑에 "나는 너를 위하여 이 모든 것을 하였노라, 그러나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느냐?"라는 제목을 달았다.
어느날 화가는 한 초라한 집시 소녀가 그 그림 앞에서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페피타였다.
선생님, 예수님이 나 까지도 저렇게 사랑해 주신 걸까요?
예수님은 돈 많은 사람이나 이름 있는 이를 위해서 뿐 아니라 가난하고 외로운 집시 소녀를 위해서도 죽으신 사실을 설명했다.
소녀는 즉시 믿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읍하면서 돌아갔다.
수개월이 지난 어느날 밤 스텐버그에게 낯선 사람이 찾아와, 따라가서 소녀 페피다의 임종을 지켜보게 되었다.
아무 근심도 슬픔도 두려움도 없었고 이제 주님과 영원히 함께 지내 시려고 자기를 불러 가시는데 대한 감사와 기쁨과 평안 뿐이었다.
그 후 화가도 주님 곁으로 갔으나 그 그림만은 그 미술관에 언제나 걸려 있었다.
그 그림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그리스도께로 인도되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 중의 한사람이 바로 진젠도르프 백작이었던 것이다.
형제단과 모라비아파
진젠돌프 백작을 이야기하려면 모라비안 교도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고 모라비안 교도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모라비안 교도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개혁가 존 후스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존 후스는 교황의 면죄부 판매와 성직자들의 부패를 공격하여. 교회의 머리가 교황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이며,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복음주의자였다.
이에 대해 교황은 그를 이단으로 몰아 1415년 화형에 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1457년 핍박을 피해 성에 숨어 들어가 신약성경을 모델로 복음적인 신앙 공동체인 "형제회"를 설립, 모라비안교회의 전신이 되었다.
그러나 카톨릭의 박해는 계속되어. 모라비안의 후스파인 형제회를 잔인하게 핍박하여. 형제들은 재산몰수와 지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당해 추위와 굶주림으로 굶어 죽어갔지만 신앙을 결코 포기되지 않았다.
그러나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견고해졌다..
또한 그들은 가는 곳마다 학교를 세웠는데, 그 나라 최상의 학문은 그들로부터 나왔다.
1558년 모라비안 교회에 호의적인 왕들로 60년 동안 참으로 오랜만에 평화와 번영의 시기를 갖게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30년 전쟁을 통하여서 그들은 거의 사라질 위기에 처하였다.
모라비안 교도이면서 목수였던 크리스챤 데이비드의 인도 아래 형제단은 새로운 부흥을 꽤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위한 피난처를 프로테스탄트가 지배하는 땅에서 찾게 되었는데, 이것이 모라비안 형제단과 진젠돌프의 만남이었다.
1722년진젠돌프는 그들에게 거주와 생활에 많은 물질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이때 데이비드는 허렌후트라는 공동체를 진젠돌프의 에스테이트에서 설립하게 되었다.
이곳의 위치가 현재 뒤셀도르프이며 이 곳은 각 나라에 흩어져 살고있던 모라비안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으며, 청년 남녀들을 가정으로부터 분리시켜 엄격한 감독 하에 신앙 훈련을 시켰다.
1727년부터 진젠돌프는 허렌후트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고 10년이 지난 후 그는 정식적인 목회인증을 받게되었다.
진젠돌프의 선교에 대한 열정은 모라비안을 개신교 역사상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처음의 단체가 되었다.
1731년 그는 왕의 대관식이 있는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그는 서인도 제도로 부터 온 흑인을 만나게 됨으로 노예가 된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 지에 관해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되고 그 결과로 1732년 첫번째 모라비안 선교사가 허렌후트로부터 서인도 제도에 있는 세인트 토마스로 파송이되었다.
그후로 다른 미션 조직들이 설립되게 되는데 그린랜드, 립랜드, 조지아, 아프리카 구이니아 코스트, 남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실론, 알제리아 등등에 그들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첫댓글 긴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내용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