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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경요집 제19권
29.9. 제사연(祭祠緣)
가만히 듣건대 금이나 옥은 다른 보물이나 사람에게 있어서는 모두가 보배요, 불교와 유교의 다른 이치도 멀고 가까운 사람이 다 함께 따르나니,
어찌 꼭 공자[尼]가 제 나라에서 태어났다 하여 곧 스승으로 삼고자 할 것이며, 부처님께서 먼 나라에 살고 있다고 하여 마음 속으로 버릴 생각을 하겠는가?
일의 절박함을 견디지 못해 문득 어리석은 견해를 진술하지만 옳고 그른 이치에 대해서야 감히 스스로 독단할 수는 없다.
옛날에 공구(孔丘)가 다니던 사당은 천 년의 규모요, 석가(釋迦)께서 다니셨던 사찰은 만대(萬代)의 신령스런 탑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형상을 보고 생각을 극복하고 형상을 바라보고 마음을 귀의함으로써 스승을 공경하고 임금에게 충성케 하는 것은 그 이치가 마찬가지이다.
정란(丁蘭)이 속대(束帶)하고 나무로 만든 어머님 형상을 효도로써 섬긴 것과 같은 일이요, 무진(無盡)이 영낙[瓔]을 풀어 다보불탑(多寶佛塔)에 받들어 올린 것과 같은 경우이다.
아득히 먼 옛날을 살피고 막막하게 청진(淸塵)을 생각하며 이미 발자취를 이어 숲을 이룩한 것도 이 이치를 벗어나지 않는다.
또 『예경(禮)』을 상고하여 말하면 이러하다.
“천자(天子)는 일곱 대까지 제사를 지내고[七廟]제후는 다섯 대까지 제사 지내며, 대부(大夫)와 경사(卿士)는 각각의 계급이 있다.
그래서 하늘은 신(神)이라 하여 원구(圓丘)에서 제사를 지내고
땅을 기(祇)라 하여 방택(方澤)에서 제사를 지내며,
사람은 귀(鬼)라 하여 종묘(宗廟)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용귀(龍鬼)가 비를 내리는 노고와 소[牛畜]가 쟁기를 끄는 효용에 대해선 혹은 마을 저자거리에 형상을 만들어 세우고 그 모습을 성문(城門)에 세우거늘
어찌 천상과 천하의 삼계(三界)대사이시며, 이 세계와 저 세계의 사생(四生)의 자부(慈父)로서 그 위엄과 덕은 만억 중생이 따르는 바요, 풍속과 교화는 백령(百靈)의 본보기가 되는 것에 있어서야 두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착한 사람의 회향은 온갖 갈래의 지류(支流)가 넓은 바다로 돌아가는 것과 같고
큰 광명이 포섭하여 받아들이는 것은 해와 달이 온갖 별을 이끄는 것과 같다.
월지(月支)에서 그림자를 남기고 나갈(那竭)에서 몸을 불살라 얻은 사리가 두루 퍼져서 기환(祇桓)에서 드디어 그 형상이 만들어졌다.
성인과 현인이 이 경복(景福 : 큰 복)에 의지하니, 혹은 존중하고 혹은 귀하게 여기면서 여기에서 편안함 얻기를 바라고 있다.”
『장아함경(長阿含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모든 인민들이 살고 있는 집[舍宅]에는 모두 귀신이 있어서 빈 자리가 없다.
거리ㆍ골목ㆍ길ㆍ밭두둑 길ㆍ푸줏간ㆍ시장ㆍ가게와 온갖 산 속 무덤에도 다 귀신이 있어서 조금도 비어 있는 곳이 없다. 모든 귀신들은 다 의지하는 바를 따라서 곧 그 이름이 있게 된다.
가령 사람이 처음 날 때부터 다 귀신이 그를 따라다니면서 그를 옹호하며, 만약 사람이 죽으려고 할 때에는 귀신이 정기(精氣)를 거두어 들인다.
열 가지 악을 실천한 사람은 천이건 백이건 다 한 신 (神)이 보호하고, 열 가지 선을 실천한 사람은 마치 백천 사람이 국왕을 모시고 호위하듯이 그를 호위 하고 모신다.”
또 『시방비유경 (十方譬喩經)』에서 말하였다.
“천상이나 천하의 귀신들은 당장 닥치거나 앞으로 다가올 사람의 수명과 죄복(罪福)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사람을 살려낼 수도 없고 죽일 수도 없으며, 또 사람들을 부귀(富貴)하게 하거나 빈천(貧賤)하게 할 수도 없다.
다만 남을 시켜서 악을 짓거나 살생을 범하게 할 뿐이다.
사람이 쇠모(衰耗)해질 때를 틈타서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가지고 그에게 재앙과 복을 이야기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게 와서 제사를 지내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부질없이 귀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현세의 복을 구하려고 해도 그 힘을 얻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또 『보요경(普曜經)』에서 말하였다.
“그 때 가섭(迦葉)이 게송으로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스스로 생각해 보면 제사를 지내온 지
이미 팔십 년이 지났네.
바람ㆍ물ㆍ불의 신과
해ㆍ달ㆍ산ㆍ냇물의 신 받들기를
밤이건 낮이건 게을리하거나 폐하지 않고
마음 속에는 다른 생각 없었지만
끝끝내 얻은 것 아무것도 없고
부처님을 만나고야 곧 일들이 편안해졌네.”
또 『잡보장경(雜寶藏經)』에서 말하였다.
“옛날에 어떤 바라문이 있었는데, 사당의 하늘신을 섬겨 밤낮으로 받들어 모셨다.
그러자 천신이 그에게 물었다.
‘너는 무엇을 구하느냐?’
바라문이 대답하였다.
‘저는 지금 이 천사(天祀)의 주인이 되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천신이 말하였다.
‘저기에 소 떼가 있다. 너는 그 중 맨 앞에 가는 놈에게 물어보라.’
곧 천신의 말대로 가서 그 소에게 물어 보았다.
‘너는 지금 어떠하냐? 고통스러우냐, 즐거우냐?’
소가 곧 대답하였다.
‘나는 지금 너무도 괴롭다. 가시는 나의 양쪽 갈비를 찌르고 시목(柴木)은 뒤틀려서 척추가 다 부서졌다. 그런데도 멍에를 메고 무거운 짐을 싣고 끌고 다니며 잠시도 휴식할 때가 없다.’
또 물었다.
‘너는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소의 폼을 받았느냐?’
소가 대답하였다.
‘나는 천사의 주인이었을 때 스스로 방자하게 내 마음대로 천사의 물건을 썼다가 목숨을 마치고는 소가 되어 지금 이런 고뇌를 받고 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곧 천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천신이 그에게 물었다.
‘너는 지금도 천주(天主)가 되고 싶으냐?’
바라문(婆羅門)이 말하였다.
‘제가 이 사실을 관찰해보니 이젠 정말로 천사의 주인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천신이 말하였다.
‘사람들은 선과 악을 행하여 스스로 그 과보를 받는 것이다.’
그러자 바라문은 잘못을 뉘우치고 곧바로 온갖 선행을 닦고 전생의 악을 고쳤다.”
또 『잡보장경(雜寶藏經)』에서 말하였다.
“옛날에 어떤 노인이 있었는데 그의 집은 큰 부자였다. 이 노인은 갑자기 고기가 먹고 싶은 생각이 들어 거짓 방편을 써서 밭가에 있는 나무를 가리키면서 그 아들에게 말하였다.
‘우리 가업(家業)으로 큰 부자가 된 이유는 이 나무신의 은혜와 복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너희들은 마땅히 저 양떼들 중에 양 하나를 잡아서 제사를 지내야 할 것이다.’
그 때 여러 아들들은 아버지의 분부를 받들어 조금 후에 양을 잡아 이 나무 신에게 기도하고 정성을 드리기 위해 곧바로 나무 아래에 천사(天祀)를 짓고 제사를 지냈다.
그의 아버지가 뒤에 목숨을 마치고는 지은 업에 쫓겨 자기 집 양의 무리에 환생하게 되었다. 그 때 그 아들들이 나무의 신에게 제사 지낼 때가 되자 곧 한 마리 양을 붙잡았는데, 우연히 그의 아버지[후]를 붙들어 죽이려고 하였다.
양은 곧 ‘매에 매에’하고 울다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 나무에 무슨 신령함이 있겠느냐?
내가 과거에는 고기가 먹고 싶어서 너희들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도록 하여 너희들과 함께 이 고기를 같이 먹은 적이 있었다. 이제 그 죄갚음을 나 홀로 먼저 당하게 되었구나.’
그 때 마침 어떤 아라한이 우연히 밥을 얻으려고 그 집에 이르렀다가 그들의 죽은 아버지가 양의 폼을 받은 것을 보고 곧 그 양의 주인에게 도안(道眼)을 빌려주어 스스로 관찰하게 하였다.
그들은 마침내 그 양이 자기 아버지임을 알고 마음속에 괴로움이 생겨 곧 니무 신을 파괴하고서 잘못을 뉘우치고 복을 닦아 다시는 살생을 하지 않았다.”
또 『우바새계경(優婆塞械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아들이 착한 법을 닦으면 아버지가 착하지 않은 일을 하더라도 아들이 선을 닦음으로 인하여 그의 아버지는 세 갈래 악한 세계에 떨어지지 않는다〉 고했다.
그러나 그 뜻은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몸과 입과 뜻으로 지은 업이 부자(父子) 간에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아버지가 죽고 난 뒤에 아귀(餓鬼)의 세계에 떨어졌을 때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복을 벌면 장차 그 아비는 천상에 태어 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천상에 태어나더라도 그는 인간 세계의 물건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는 천상(天上)에서 뛰어나고 절묘한 보배를 성취하였기 때문이다.
또 지옥에 떨어져서도 온갖 고뇌를 받기 때문에 생각하고 기억할 겨를이 없으니, 그런 까닭에 그렇게 될 수가 없다.
축생이나 인간 세계에서도 그 일은 또한 그러하다.
만약 그렇다면 무슨 까닭에 유독 아귀만 명복을 벌어주면 복을 얻을 수가 있는가?
그것은 본래 가지고 있는 애욕ㆍ탐욕ㆍ간탐ㆍ인색함 때문에 아귀에 떨어졌고, 이미 아귀가 되었으면 늘 본래의 잘못을 뉘우치고 명복 얻기를 사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명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가 지은 업 때문에 다른 세계에 태어나고 그 나머지 권속들이 아귀의 세계에 떨어졌으면 그들도 다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마땅히 아귀를 위하여 복덕을 지으라고 권유해야 하느니라.
[『政法念經)』의 내용도 그 대의는 역시 이와 같다.]
만약 사당에 제사를 지내면 누가 그것을 받는가?
그 사당이 있는 곳을 따라서 받는 이가 있게 된다.
가령 나무 숲 가까이에 있으면 나무신이 받고 집ㆍ강ㆍ우물ㆍ숲ㆍ언덕 등도 역시 이와 같다.
이 사람은 제사를 지낸 뒤에 또한 복덕을 얻게 된다.
왜냐 하면 그 제사를 받는 이로 하여금 기쁜 마음을 내게 하였기 때문이니, 이렇게 제사를 지낸 복덕으로 그의 몸과 재물을 보호해 준다.
그러나 만약 살생을 하여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얻은 복은 그 이치가 그러하지 못하다.
왜냐 하면 세상 사람이 이란(伊蘭)의 씨앗을 심어 전단(旃檀)나무가 나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중생의 목숨을 끊고서 어떻게 복덕을 얻겠는가?
만약 제사를 지내고자 하는 사람은 마땅히 향ㆍ꽃ㆍ우유ㆍ낙(酪)ㆍ소(蘇)ㆍ과일 등을 써야 한다. 죽은 사람을 위하여 명복을 벌어주는 데에는 세 때[時]가 있으니, 몸에는 정월(正月)이요 여름에는 오월(五月)이며, 가을에는 구월(九月)이다.
또 집이나 방ㆍ침구ㆍ탕약ㆍ원림(園林)ㆍ못ㆍ우물과 소ㆍ양ㆍ코끼리ㆍ말 등 갖가지 생활용품들을 다른 사람에게 보시할 경우, 그렇게 보시한 뒤에 목숨을 마치고 나면 이 사람의 복덕은 보시한 물건을 따라 오랜 시간이 지난 뒤나 가까운 시일에 복덕이 항상 생긴다.
이 복이 사람을 따르는 것은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느니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목숨을 마친 뒤에는 그것이 다 없어진다〉고 하나, 그 뜻은 그럴 리가 없느니라.
왜냐 하면 물건이 파괴되어 쓰지 못하게 된 것은 두 때 사이에 사라지고 목숨이 다할 때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출가한 사람이 속가에 있는 사람을 본받아 해마다 절일(節日)에 음식을 버리는 것은 세간법을 따르는 것이므로 진실이 아니다. 이것은 또한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믿기 때문이다.
만약 집안에 간직하고 있는 좋고 나쁜 것을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보시하면 그것을 일체시(一切施)라고 말하고,
만약 자기 몸에 지니고 있거나 처자(妻子)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들을 남에게 보시하면 이것을 부사의시(不思議施)라고 이름한다.’”
또 『바사론(婆沙論)』에서 말하였다.
“아귀를 위해 복을 지으면 아귀는 그 음식을 얻고 또한 몸이 더욱 불어나고 냄새를 맡으면 향내를 얻고 나쁜 빛깔도 다 좋은 빛깔로 변한다.”
또 경전에서 말하였다.
“모든 귀신들이 먹는 것이 같지 않다. 어떤 귀신은 고름을 먹기도 하고 어떤 귀신은 똥을 먹기도 한다.
이들은 보시를 얻고 나면 이 모든 것을 가장 절묘한 색깔과 맛으로 변화시킨다.
만약 귀신이 다른 곳에서 태어나더라도 친히 보시를 받을 때에는 그 귀신은 업의 힘으로 멀리서 그것을 알고 기쁜 마음을 낸다.
만약 속가에 돌아와 있으면서 괴로운 과보를 받을 때라도 친히 보시를 받으면 귀신도 친히 보고 기쁨을 낸다.”
또 『바사론』에서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법에 맞지 않게 재물을 구하거나 재물을 얻었을 때에 그 재물을 탐하고 아끼기 때문에 자기의 권속들에게도 오히려 주고 싶은 마음이 없거늘 더구나 다른 사람이겠는가?
남에게 보시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 몸이 무너지고 목숨을 마치면 아귀의 세계에 떨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만약 그 집 부근에 있는 깨끗하지 못한 변소 같은 곳에 머물게 되면 모든 친척과 이웃들이 고뇌(苦惱)하는 마음을 내어 이와 같은 생각을 한다.
‘저 사람은 재물을 저만큼 모아 쌓아 두고도 스스로 쓰지도 않고 또 남에게 보시하지도 않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고뇌에 빠지기 때문에 그 음식을 보시하려고 하여 모든 권속과 친우(親友)ㆍ지식(知識)ㆍ사문(沙門)ㆍ바라문(婆羅門) 등을 청하여 그 음식을 보시하면, 그 때 아귀(餓鬼)는 직접 스스로 그것을 보고 권속들의 재물에 대하여 자기의 소유라는 생각을 내고 또 이와 같이 생각한다.
‘이 재물은 내가 전에 모아서 쌓아두었던 것인데 지금 남들에게 보시하는구나.’
그리고는 마음으로 크게 환희하면서 복전(福田)의 처소에 대하여 믿고 공경하는 마음을 낸다.
그러나 만약 다른 세계에 태어나면 대부분 힘을 얻지 못한다.
가령 죽은 사람이 이 복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를 위해 선행을 닦으면 스스로 큰 이익을 얻나니, 마치 자비를 일으켜 스스로 늘 복을 얻는 것과 같다.”
또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하였다.
“만약 자비한 마음으로 모든 중생들을 염려하여 그들로 하여금 쾌락(快樂)을 얻게 하면 중생들이 비록 얻은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한 사람은 그 복을 많이 얻는다. 만약 보시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비록 천상에 태어나거나 성인이 되었더라도 도리어 의복과 음식이 모자라게 되리라.”
그러므로『우바새계경(優婆塞械經)』에서 말하였다.
“계율을 잘 지켜서 비록 아라한이 되었어도 배고픈 괴로움을 막지 못하나,
만약 보시 행하기를 좋아하면 비록 귀신이나 축생의 세계에 떨어져도 늘 배 부르고 부족한 것이 없을 것이다.”
또 『미증유경(未曾有經)』에서 말하였다.
“어떤 왕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우리 아버지인 선왕은 외도를 받들어 섬겨서 항상 보시를 실천하변서 범천(梵天)의 복을 구했습니다. 이와 같이 한 공덕으로는 어떤 하늘에 태어납니까?’
부처님께서 왕에게 말씀하셨다.
‘전왕(前王)은 그 과보로 지금 지옥에 있습니다. 왜냐 하면 훌륭한 시기를 만나지 못하고 좋은 벗을 만나지 못했으며, 좋은 방편도 없었으므로 비록 공덕을 닦았지만 죄를 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보시를 한 공덕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니,
뒤에 죄를 마치고 나면 그 때야 비로소 복을 받게 될 것이니라.
복을 닦는 것은 죄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합니다.
선제(先帝)대왕께서는 다섯 가지 악한 업이 있었기에 지옥에 태어났습니다.
첫째는 오만하고 질투하며 폐악하여 일의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곧바로 회초리로 매질하고 벌하면서 인욕(忍辱)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보물과 재산을 탐내고 사랑하여 일의 판단이 공평하지 못해서 천하로 하여금 원한을 품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이리저리 다니면서 사냥을 하며 기뻐한 것이니, 인민(人民)들을 괴롭게 하고 고달프게 하였으며 중생들이 가장 사랑하는 목숨을 상하거나 해쳤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여색에 빠져 집착하는 것이니, 새 것을 얻으면 옛 것을 싫어하면서 어루만져 대접함이 공평하지 못하여 원한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는 계율을 깨뜨린 것입니다.
이 글로 증명할 수 있으니,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삿된 것을 섬겨 복을 닦는 다는 것은 선과 악은 항상 달라서 괴로움과 즐거움 두 가지 과보는 서로 섞이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영리한 근기와 많이 들음으로써 삼보(三寶)를 바르게 믿었는데 어찌 괴로움의 과보를 초래하겠는가?”
또 『유무삼매경(有無三昧境)』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사람으로서 도를 구하고 선정(禪定)에 안주(安住)하려면 먼저 꼭 잡념부터 끊어야 한다.
사람이 이 세간에 태어나 도를 증득하지 못하는 까닭은 다만 앉아서 생각하되 더러운 잡념이 많기 때문이다.
한 생각이 오면 한 생각이 가니 하루 낮 하룻밤 동안 팔억 사천만 생각이 일어나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쉬 질 않는다.
한 번 선을 생각한 사람은 또한 선한 과보를 얻고, 한 번 악한 것을 생각한 사람은 그 또한 악한 과보를 받는다.
그것은 마치 메아리가 소리를 따라 호응하는 것과 같고 그림자가 형상을 따라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런 까닭에 선하고 악한 것과 죄와 복은 각각 다른 것이니라.’”
또 『중아함경(中阿含經)』에서 말하였다.
“만약 죽은 사람을 위하여 제사를 지내 음식을 보시하면, 아귀에 태어난 이는 그 음식을 얻어 먹을 수는 있겠으나 다른 세계에 태어난 중생들은 제외되어 얻어 먹지 못하나니, 그것은 저마다 먹고 살아가는 음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친족으로서 아귀의 세계에 태어나지 못한 이는 다만 보시하면 그것은 보시한 사람만이 그 복을 얻고 나아가 시주(施主)가 여섯 갈래 세계에 태어났을 때에도 보시하는 물건이 항상 따른다.
계율을 잘 지켰기 때문에 비록 사람의 몸을 얻긴 하겠지만 반드시 다른 복으로 도와주는 과보가 있어야 하느니라.”
또 『왕생경(往生經)』에서 말하였다.
“죽은 뒤에 그 죽은 이를 위하여 복을 지으면 죽은 사람은 그 복의 칠분의 하나를 얻고 나머지는 현재 복을 벌어 주는 이에게 속한다.”
또 『관정경(灌頂經)』에서 말하였다.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만약 사람이 목숨을 마치면 산이나 들로 전송하여 그곳에 무덤을 만들고 탑을 세운다면 죽은 사람의 정기와 영혼은 거기에 살고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거기에 있기도 하고 혹은 있지 않기도 하느니라.
만약 사람이 살아 있었을 때 선근(善根)을 짓지 않고 삼보(三寶)를 알지도 못했었으나 그래도 악한 짓을 하지 않았다면 선으로 받을 복도 없고 악으로 받을 재앙도 없으며 선지식(善知識)이 그를 위하여 복을 닦아주는 일도 없으면,
이 때문에 정혼(精魂)이 그 무덤이나 탑 속에 있나니 그것은 그 혼령이 아무데도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곳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혹 그가 전생에 어떤 세상에 살았을 적에 복과 선을 크게 닦고 부지런히 도를 실천하면 혹은 천상에 태어나 삼십삼천 안에서 복을 받으며,
혹은 인간 세계의 부호(富豪) 집안에 태어나서 그가 가는 곳마다 자연 마음대로 모든 것이 생기나니 그 또한 있지 않는 것이요,
혹은 그가 전생에서 살았을 적에 삿된 도에 기도하고 제사를 지냈거나 참되고 비른 것을 믿지 않고 나쁜 직업으로 스스로 생활하면서 아첨하고 거짓말하며 남을 속였으므로 아귀나 축생의 세계에 떨어져서 온갖 고통을 갖추어 받거나 지옥을 두루 돌아다니면 그 때문에 무덤이나 탑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또 있지 않는 경우를 말하자면
혹은 다섯 가지 곡식의 경우 곡식의 뼈대가 아직 썩어 문드러지지 않았을 때에는 미세한 영(靈)이 있다가 그 뼈대가 다 썩어 문드러지면 이 영은 곧 사라져서 아무런 기세(氣勢)가 없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을 위하여 온갖 화도 복도 지을 수 없다.
영이 아직 없어지지 않았을 때라 하더라도
혹 고향의 친한 사람으로서 목숨을 마친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런 복이 없거나 또는 삿되고 아첨만 일삼으면 마땅히 귀신 세계에 떨어지고,
혹은 나무나 잡된 물건의 정기[精]가 되어 받을 만한 하늘의 복도 없고 지옥에서도 거두어 주지 않으면 비록 세간을 버렸더라도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을 떠돌아 다니게 된다.
그들에게는 이미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을 두렵게 하고 충동하여 온갖 변괴(變怪)를 지어 사람의 마음을 선동한다.
혹 요망한 도깨비나 삿된 스승에게 의지하는 것으로써 복이 된다 하고 온갖 복을 찾아 오래 살기를 얻으려 하며, 어리석고 삿된 소견으로 생물을 잡아 제사 지내다가
죽어서는 지옥ㆍ아귀ㆍ축생 세계에 떨어져 벗어날 기약조차 없거늘 삼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만약 어떤 사람이 목숨을 마치는 날에는 마땅히 향을 피우고 등불을 늘 켜두어 밝히며,
탑사(塔寺) 가운데 찰간(刹竿) 위에 표시하고 명과번(命過幡)을 달고 존귀한 경전을 읽으면서 삼철일 (三七日)을 마쳐야 한다.
왜냐 하면 목숨을 마친 사람은 중음(中陰)으로 있으면서 그 몸이 어린아이 같고 죄와 복이 결정되지 않았으므로 마땅히 그를 위하여 복을 닦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죽은 이의 생신(生神)이 시방의 한량없는 찰토(刹土)에 태어나게 되기를 원하면 이 공덕을 이어 틀림없이 왕생(往生)할 것이다.
죽은 이가 세상에 있었을 적에 만약 죄와 허물이 있어서 꼭 여덟 가지 환난에 떨어질 처지라 하더라도 번기와 등의 공덕으로써 반드시 해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선(善)한 서원이 있으면 마땅히 부모에게 태어날 것이나, 다른 세계에 있게 되어 빨리 태어날 수 없는 처지라도 번기와 등의 공덕으로써 모두 빨리 태어날 것이며 머물러 있어야 하는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만약 태어남을 얻고 난 뒤에는 마땅히 사람이 되는데 복덕이 있는 아들로 태어나 삿된 귀신들이 틈을 엿볼 수 없게 되고 그 종족도 또한 호강(豪强)할 것이니, 그런 까닭에 복과 선이 되는 번기와 동의 공덕을 닦아야 하느니라.
또 만약 네 부류의 남녀(男女)로서 목숨을 마치려고 할 때나 또는 이미 목숨을 마친 뒤에 그가 죽은 날 누런 번기를 찰간 꼭대기에 달아서 죽은 이로 하여금 복덕을 얻게 하고, 팔난(八難)의 고통을 여의게 하면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깨끗한 국토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번기와 일산을 공양하면 마음 속에 원하는 바를 따라 마침내 보리를 이룩하게 한다.
번기가 바람을 따라 움직여 모두 파손되고 다하여 마침내 작은 먼지로 되어버리면 바람이 그 작은 먼지를 불어 날리어 그 복은 한량없이 많게 될 것이다.
번기가 한 번 펄럭일 때 전륜왕(轉輪王)의 자리와 나아가 티끌처럼 많은 작은 왕의 자리까지 불어버리면 그 과보는 한량없이 많을 것이다.
사십구 일 동안 온갖 유명(幽冥)을 비추고 만약 고통받는 중생이 있으면 그 광명의 힘을 입어 다 서로들 보게 될 것이다.
이 복덕을 연(緣)하여 저 중생들을 구제하여 다 휴식(休息)을 얻게 할 것이니라.’
또 『정도삼매경(淨度三味經)』에서 말하였다.
“팔왕일(八王日)에는 모든 천제석(天帝釋)의 진신(鎭臣) 서른두 사람과 사진대왕(四鎭大王)과 목숨을 맡은 관리[司命]와 기록을 맡은 관리[司錄]와 오라(五羅)대왕과 여덟 왕의 사자가 다 나와 덮여진 그의 행업을 찾기 위하여 사방에 포고령을 내린다.
또 네 왕이 보름날과 그믐날에 아뢰는 백성들이 행한 선과 악을 조사하며 지옥의 왕도 또한 보신(輔臣)과 작은 왕들을 보내고 그들은 동시에 함께 나와 죄가 있으면 곧 기록하곤 한다.
먼저 여덟 왕의 재일(齋日)에는 죄를 범해도 복의 힘이 강하므로 구원을 받아 안온해지고 다른 복의 힘을 벌지 않아도 용서를 받는다.
뒤의 재일에 이르러 중한 죄를 범한 수효가 많으면 수명이 감해지거나 이름을 기록하였다가 꼭 죽인다.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 어느 때라고 적어 지옥에 내려주면, 그 지옥에서는 그 문서를 받들어 곧 지옥 귀신에게 보내 그 이름을 기록하여 지니게 한다.
지옥 귀신은 자비가 없어 죽을 날이 오기도 전에 강제로 재촉하여 악을 짓게 하고 그의 목숨을 앗아가며 복이 많은 이는 그 수명을 더욱 늘려준다.
하늘은 선신(善神)을 보내 그의 몸을 보호하여 비록 지옥에 내려보내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죄명을 없애어 죽음을 제거하여 결정코 살게 하며 그는 나중에 천상에 태어나게 된다.
또 『관불삼매경(觀佛三昧境)』에서 말하였다.
“그 때 광야(曠野)의 귀신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는 항상 사람을 물어 먹는데 이제 살생하지 말라 하시니 그러면 장차 저는 무엇을 먹어야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귀왕(鬼王)에게 타이르셨다.
‘너는 단지 살생만은 하지 말라. 내가 내 제자들에게 경계하여 항상 너에게 먹을 것을 베풀어 주고, 나아가 법이 멸하는 지경에 이르더라도 나에게 힘이 있기 때문에 너로 하여금 늘 배가 부르도록 하리라.’
귀왕은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면서 부처님의 오계(五械)를 받았다.”
그러므로『열반경(涅槃經)』에서 말하였다.
“여러 성문(聲聞) 제자들을 시켜 중생들에게 먹을 먹을 것을 내어 주고 광야의 귀신들을 구제하게 하였다.”
또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하였다.
“귀신은 사람들로부터 음식을 조금 얻으면 곧 그것을 변화시켜 많게 만들어 귀신들을 배불리 먹인다.”
또 『비유경(譬喩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아난(阿難)과 함께 강가에 이르러 거닐고 계셨다. 그러다가 오백 명의 아귀들이 노래를 부르며 가는 것을 보셨고 또 수백 명의 좋은 사람들이 울면서 지나가는 것을 보셨다.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귀신은 무엇 때문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울면서 다닙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대답하셨다.
‘아귀 집안의 아이들과 친속(親屬)들은 그들을 위해 복을 지어 해탈을 얻었다. 그런 까닭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사람들의 집안 아이들과 친속들은 오직 살생만 하고 어느 한 사람도 복을 짓지 않다가 훗날、큰 불이 그들을 핍박하였다. 그런 까닭에 울면서 다니느니라.’
또 『숙원과보경(宿願果報經)』에서 말하였다.
“옛날에 어떤 바라문 부부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에겐 자식이 없었다.
재물은 풍부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 목숨을 마치려고 할 때에 제각기 서로를 보고 말하였다.
‘우리 각자 꼭 돈을 삼켰다가 저승가는 길에 자량(資糧)으로 삼읍시다.’
그런데 그 나라 풍속엔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지 않고 다만 나무 밑에 그대로 놓아두곤 하였다. 그들은 저마다 돈 오십 전을 삼켰었는데 시체가 썩어 문드러지자 그 시체에서 돈이 나왔다.
그 나라에 어떤 현인 한 사람이 있었는데 길을 가다가 이것을 보고 불쌍하게 여겨 눈물을 철철 흘리며 그들의 간탐에 대하여 매우 상심해했다.
그리하여 그 돈을 가지고 그들의 복을 벌어주기 위하여 부처님과 스님들을 초청했고 그 돈을 다 써서 음식을 장만하여 부처님 앞에 공양을 올리고 주문을 외우며 발원을 하였다.
그 때 인색했던 바라문 부부는 아귀로 있으면서 고통을 받다가 곧 천상에 태어나게 되어 사배(四輩)를 초청했다.
[사종승이란 부처님이나 독각(獨覺)처럼 스스로 도를 깨달은 승도사문(勝道沙門), 사리불과 같이 법을 말하여 도를 보이는 시도사문(示道沙門), 아난과 같이 계ㆍ정ㆍ혜 삼학으로 목숨을 삼는 명도사문(命道沙門), 죄가 많은 비구인 오도사문(汚道沙門)을 말한다.]
천상에 태어난 이 부부는 곧 천안(天眼)을 얻어 그 사실을 알고는 복을 짓기 위하여 천상에서 내려와 변화로 나이 젊은 사람이 되어 단월 (檀越)을 도왔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주방의 나이 젊은 사람이야말로 정말 참다운 단월이로구나.’
부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시자 그들은 곧 도적(道跡 : 須陀洹)을 증득하였고, 어진 이도 또한 도적을 증득하였으며, 대중 스님들도 기뻐하였고 모두들 천상에 태어났다.”
또 『백유경(百喩經)』에서 말하였다.
“옛날에 어떤 상인들이 있었다. 그 상인들은 큰 바다로 들어가려고 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길을 인도할 사람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곧 함께 길을 인도할 사람 하나를 구하여 서로 데리고 길을 떠났는데 넓은 들판에 이르렀을 때 어떤 천사(天寺)를 만나게 되었다.
이 천사는 꼭 거기에 사람을 죽여 제사를 올리고 나서야 지나갈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 때 여러 상인들은 함께 생각을 말하였다.
‘우리는 똑같이 친한 사이인데 어떻게 죽일 수가 있겠는가? 오직 이 길잡이를 죽여 제사를 지낼 수밖에 없겠구나.’
그리고는 곧 길잡이를 죽여 제사를 지냈다. 하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난 뒤에 길을 가다가 길을 잃어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몰라 극심한 고생을 하다가 다 죽고 말았다.
세상 사람들도 이와 같아서 법해(法海)에 들어가 보배를 취해 오려거든 먼저 꼭 선행 (善行)을 닦고 그것으로 길잡이를 삼아야만 하느니라.
그런데도 선행을 헐어 깨뜨리고 나고 죽음의 황량한 벌판에서 영영 벗어날 기약조차 없이 세 갈래 악한 세계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고통 받음이 길고도 멀구나.
그것이 마치도 저 상인들이 장차 바다로 나아가려고 하면서도 그 길잡이를 죽여 버리고 나루를 잃어 끝내는 고생하다가 죽고 마는 것과 같느니라.”
게송을 읊는다.
고당(高堂)은 진실로 여행하는 사람을 맞는 곳이요
마음 속에 품은 업의 이치는 항상 서로 끌어당기네.
옥갑(玉匣)은 바로 관(觀)에 맡기고
금대(金臺)도 더 이상 늘리지 말게.
상두 노래[挽聲]는 길을 따라 멀어져만 가고
송자의 그림자[蘿影]는 소나무에 걸려 있네.
어찌 열 가지 생각[十念]에 머무를 수 있으랴.
오직 네 가지 연(緣)만을 따라야 하네.
환공(幻工)이 같고 다름을 교묘하게 만들어
변화하고 희롱하며 많은 폼 만들 적에
어리석은 세속 사람 나니 남이니 다투거늘
어느 누군들 또한 진실이라고 말하지 않으리.
그릇된 사람은 오래 가고 견고하리라고 의심하나
깨달은 사람은 허깨비요 나그네임을 안다네.
승침(升沈)과 고락(苦樂)이 이미 다르거늘
부질없이 푸른 하늘에 제사 지내며 곡(哭)을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