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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순정리론 제60권
6. 변현성품 ④
3.5. 별상념주(別相念住)
1) 4념주의 수습과 원만한 성취
이와 같이 ‘수(修)’에 들어가는 두 가지 방편(부정관과 지식념)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러한 두 가지 방편에 의해 마음은 곧 바로 선정[定]을 획득하게 되는데, 마음이 선정을 획득하고 나면 다시 무엇을 닦아야 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미 지(止)를 닦아 성취하였으므로
관(觀)을 성취하기 위해 ‘염주’를 닦아야 할 것이니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으로써
몸과 수(受)와 마음과 법을 관찰하는 것이다.
依已修成止 爲觀修念住
以自相共相 觀身受心法
그것의 자성은 문(聞) 등의 ‘혜’이고
그 밖의 근거는 상잡(相雜)과 소연이며
설한 순서는 ‘생’에 따른 것으로서
전도를 대치하기 때문에 오로지 네 가지이다.
自性聞等慧 餘相雜所緣
說次第隨生 治倒故唯四
논하여 말하겠다.
이미 지(止, 즉 奢摩他)를 닦아 성취하였으면, 그것을 소의로 삼아 관(觀, 즉 毘鉢舍那)의 신속한 성취를 위해 4념주(念住)를 닦아야 하는데, 선정[定, 즉 止]을 획득하지 못한 자는 능히 참답게 관찰[如實見]할 수 없기 때문이다.25)
4념주는 어떻게 수습하는 것인가?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으로써 몸[身]과 수(受)와 마음[心]과 법(法)을 관찰해야 한다. 이를테면 ‘관’을 닦는 자는 오로지 마음을 한곳에 모아 자상과 공상으로써 몸 등의 경계대상을 각기 개별적으로 관찰하는 4념주를 닦아야 한다. [여기서] 이러한 법과 그 밖의 다른 법을 차별적인 뜻으로 분별하는 것을 일컬어 ‘자상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이러한 법과 그 밖의 다른 법을 차별이 없는 뜻(즉 공통의 뜻)으로 분별하는 것을 일컬어 ‘공상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하였다.26)
먼저 신념주(身念住)의 자상을 관찰한다고 함은, 몸의 내외 10처(處, 5근과 5경)의 자성이 각기 다름을 관찰하는 것을 말하니, 안(眼)으로부터 촉(觸)에 이르기까지 각각은 모두 처(處)의 자상을 갖기 때문이다. 이같이 그러한 각각의 개별적 법에 대해 정지(正智)가 생겨나는 것을 일컬어 ‘자상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상의 관찰이 원만하게 성취될 때, 도(道)의 색(色, 도에 수반되는 무표색)이 일어나는데, 그 때 비로소 ‘자상 종성(種性)의 신념주(身念住)’라는 말을 설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그러한 법의 자상을 두루 알고, 이에 따라 각기 별도의 정지가 생겨나는 것이지, 온갖 경계대상에 대한 하나의 단일한 지(智)가 총체적으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러한 [신념주의] 자상관(自相觀) 중에서는 무표색을 관찰하지 않으니, 무표색은 무색(無色)의 품류와 지극히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러한 관에서도 역시 무표색을 관찰하니, 역시 별도의 무표색에서도 도의 색이 생겨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고 설하였다.
다음으로 신념주의 공상을 관찰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몸의 각각의 처(處, 즉 내외의 10처)의 상(相)에는 비록 차별이 있을지라도 몸의 상[身相]으로서 동일하다고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그 때 11처(5근ㆍ5경과 法處所攝의 무표색)는 다 같이 색의 상[色相]으로서 어떠한 차별도 없다고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즉 그 모두는 다 대종소조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같이 그러한 동일한 종류[一類]의 법에 대해 정지(正智)가 생겨나는 것을 일컬어 ‘공상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공상의 관찰이 원만하게 성취될 때 도(道)의 색(色)이 일어나는데, 그 때 비로소 ‘공상 종성(種性)의 신념주’라는 말을 설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그러한 법의 공상을 두루 알고, 이에 따라 하나의 단일한 정지(正智)가 총체적으로 생겨나는 것이지, 온갖 경계대상에 대한 별도의 지[一智]가 각기 [개별적으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27)
혹은 신념주의 자상을 관찰한다고 함은 몸의 각기 개별적인 자성을 관찰하는 것을 말하며, 다음으로 신념주의 공상을 관찰한다고 함은 몸과 그 밖의 유위법이 다 같이 무상한 것[無常性]이며, [몸]과 그 밖의 유루법은 다 같이 괴로운 것[苦性]이며, [몸]과 그 밖의 일체법은 공(空)이고 무아(無我)라고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만약 어느 때 몸은 두 찰나[念]로 머무는 일이 없기 때문에,28) 오로지 극미의 [화]집(和集)이기 때문에 각각으로 차별되는 것이라고 관찰하였다면, 이때를 ‘신념주가 [원만하게] 성취된 때’라고 말한다.29)
이와 마찬가지로 수념주(受念住) 등의 상과 그것의 원만한 성취도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마땅히 알아야 한다. [다만 수념주 등의 소연은] 모두 그 자체 색이 아니기 때문에 극미로 차별되는 일이 없다.
혹은 앞에서 [논설한 부정]관의 완전한 상[究竟相]과 같다.30) 즉 다음다음의 단계[後後位]인 [4]선근으로 증장하는 것을 [‘염주의 원만한 성취’라고 하니], 마치 논둑에 물이 철철 흘러넘치는 것과 같다.31)
그러나 어떤 이는 [이같이] 말하였다.
“문득 비애(非愛)의 상이 일어나는 것을 [‘염주의 원만한 성취’라고 하는데],32) 여기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두 가지라고 함은 무엇인가?
“첫째는 능히 진에(瞋恚)를 일으키는 것이며, 둘째는 좋아하지 않게 되는 것[不樂]인데, 여기(4념주가 원만하게 성취되는 상태)서는 다만 좋아하지 않게 되는 상만이 존재할 뿐이다.33) 즉 익힌 바가 자재하지 않을 경우, 그것의 원만한 성취를 추구하기 위해 기뻐하고 좋아하는 마음[欣樂]을 일으킬 것이지만, 이같이 [염주가 원만하게 성취될 때에는] 익힌 바에 대해 이미 자재를 획득하여 더 이상 희구할 것이 없기 때문에 기뻐하거나 좋아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2) 4념주의 본질
이러한 4념주에는 각기 세 종류가 있으니, 자성(自性)과 상잡(相雜)과 소연(所緣)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34)
자성념주(自性念住)는 혜(慧)를 본질로 하니, 계경에서 [그것을] 설하여 ‘일취도(一趣道)’라고 하였기 때문이다.35) 여기서 ‘일’이란 ‘홀로[獨]’의 뜻이다. 즉 싸움에서 승리를 추구하는 자는 이에 따라 “이것은 번뇌라는 원적(怨敵)을 해치는 것이다”고 주장하고, 이에 근거하여 능히 원적(圓寂, 열반)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취도’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으며, 오로지 이것만이 독존(獨尊)하는 것이기에 ‘일취도’라고 이름하였다. 즉 여기서 ‘이것’은 바로 ‘혜’이니, 번뇌를 끊고 열반으로 나아가는 것 중에서 ‘혜’가 가장 뛰어난 것이기 때문으로, 계경에서 “자매여, 마땅히 알라. 모든 성 제자들은 지혜의 검(劍)을 빼들고 능히 일체의 결(結)과 박(縛)과 수면(隨眠)을 끊고서 바로 열반으로 나아가니,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고 설한 바와 같다.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만약 어떤 이가 몸에 대해 순신관(循身觀,kāyānupaśin:몸의 서른여섯 가지 구성물을 차례로 쫓아 부정한 것이라고 관찰하는 것)으로 머무는 것을 신념주(身念住)라고 이름하며, 그 밖의 수(受)ㆍ심(心)ㆍ법(法)에 대해 설하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고 하였다.36) 즉 ‘쫓아 관찰하는 것[循觀, anupaśin]’이라고 이름하는 모든 것은 오로지 ‘혜’ 자체에 근거한 것이니, ‘혜’가 아니고서는 어떠한 것에도 [몸을] 쫓아 관찰하는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본론(本論)에서도 역시 설하기를, “신념주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몸을 반연하는 ‘혜’이다. 그 밖의 다른 세 염주에 대해 설하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오로지 ‘혜’만이 ‘염주’라는 명칭을 획득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혜’ 중의 어떠한 것을 자성념주라고 이름한 것인가?
오로지 문(聞)ㆍ사(思)ㆍ수소성(修所成)만을 취하여 [자성념주라고 이름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여기서 청문(聽聞)의 가행에 따라 일어난 것으로서, [말과는 다른] 별도의 뜻[義]을 반연하는 ‘혜’를 일컬어 ‘문소성’이라 하였으며, 만약 뜻을 사택(思擇)하는 가행에 따라 일어난 것으로서--[그렇다고] 말에 근거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역시 선정에 의한 것도 아니다--, [말과는 다른] 별도의 뜻을 반연하는 ‘혜’를 일컬어 ‘사소성’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만약 선정 중에 머물면서 [말과는 다른] 별도의 뜻--이는 말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에 따라 관찰하는 ‘혜’를 일컬어 ‘수소성’이라고 하였다.37)
그리고 바로 이러한 [‘혜’의 차별을] 3종의 염주라고도 이름한다.38)
상잡념주(相雜念住)는 ‘혜’와 그 밖의 구유(俱有, 동시존재)하는 법을 본질로 하니, ‘혜’와 구유하는 법은 ‘혜’와 동시에 서로 뒤섞여 머물기 때문으로, 예컨대 계경에서 “필추들은 마땅히 알라. 선법취(善法聚)라는 말을 설하는 것은 바로 4념주를 설하는 것이다”고 설한 것과 같다. 즉 이미 염주에 대해 ‘선[법]취’라는 말을 설하였기 때문에, [상잡념주는] ‘혜’와 구유하는 다수의 법을 본질로 삼는 것이다.
본론(本論)에서도 역시 “신(身)의 증상(增上)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선도(善道)로서 유루와 무루에 통하는 것을 역시 신념주라고 이름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하였는데, 이 문구에서는 “‘혜’와 상응하고 구유하는 제법을 일컬어 ‘염주’라고 한다”고 총체적으로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구에서 ‘몸을 반연하는 도’라고 말하지 않고 [‘신(身)의 증상(增上)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도’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자성념주의 본질처럼 오로지 상응하는 도(관법)만을 취하여 그 본질로 삼는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연념주(所緣念住)는 ‘혜’의 소연이 되는 모든 법(즉 신ㆍ수ㆍ심ㆍ법)을 본질로 삼는다.
일체의 법으로서 ‘혜’의 소연이 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마땅히 ‘혜주(慧住)’라고 말해야 함에도, 어떠한 까닭에서 경에서는 다른 명칭(즉 ‘염주’)으로 나타내고서 [이와는] 다르게 널리 해석하였던 것인가?39)
여기에도 역시 과실이 없으니, 앞서 [논설한] 세 종류에 근거하여 ‘염주’라는 명칭을 해석하더라도 [그것들은] 모두 오로지 ‘혜’[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자성(自性)에 근거하여 염주라는 명칭을 해석하면 [이러하다]. 이를테면 제법 중의 어떤 하나의 법이 염(念)으로 말미암아 [소연에] 머물[住] 수 있을 경우, 그것을 일컬어 ‘염주’라고 하였다.40)
이것은 바로 어떠한 법인가?
이것은 바로 ‘혜’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혜’는 요컨대 ‘염’의 힘으로 말미암아 머물게 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염’을 갖지 않은 자보다] ‘염’을 가진 자의 ‘혜’가 더욱 분명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혜’가 머물 수 있는 것은 ‘염’에 의해 유지되기 때문으로, 이는 곧 ‘염’의 힘이 자조(資助)할 때 비로소 [‘혜’가] [소연에] 머물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염주’라는 명칭을 나타낼 때도 그것을 해석할 때도 오로지 ‘혜’에 근거한 것으로, 다른 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타낸 명칭대로 널리 해석하여도 말[名, 즉 명칭]과 뜻[義, 해석]이 서로 부합하거늘 여기에 무슨 과실이 있다는 것인가?
만약 상잡(相雜)에 근거하여 염주라는 명칭을 해석하면 [이러하다]. 이를테면 ‘혜’와 함께 하는 ‘염’이어야 비로소 머물 수 있다. 즉 ‘염’으로 하여금 머물 수 있게 하기 때문에 ‘혜’를 ‘염주’라는 명칭으로 말할 수 있는 것으로,41) 염주와 상응하고 구유하는 법은 염주와 서로 뒤섞여 있으므로 상잡념주라고 이름하였던 것이다.
[그럴 경우] 선정 등도 역시 ‘혜’와 함께 할 때 비로소 안주할 수 있으며, 그런 즉 ‘혜’ 자체는 선정 등으로 하여금 머물게 하는 것이므로 ‘정주(定住)’ 등의 명칭으로 말할 수 있다고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42)
그렇지 않다. 여기서는 ‘염’과 ‘혜’가 서로를 자조하는 힘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다만 한쪽에 치우쳐 ‘염주’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다. 이를테면 ‘혜’가 만약 신(身)ㆍ수(受)ㆍ심(心)ㆍ법(法)을 자상과 공상으로써 반복적으로 관찰[循循觀]할 때, 요컨대 ‘염’의 힘이 유지[持]되어야 비로소 명료해질 수 있다. 즉 이러한 지(地)에서 반복적으로 익히고[串習] [그것을] 분명하게 기억[明記]하여 유지할 때, 비로소 능히 아직 익히지 못한 그 밖의 다른 지(地)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혜’가 법을 간택할 때 ‘염’은 거기에 보조적으로 수반[助伴]하는 가장 견고하고 강력한 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염’이 신(身) 등에 안주할 때, 요컨대 ‘혜’의 힘이 유지되어야 비로소 능히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다. 그래서 세존께서도 설하기를, “만약 어떤 이가 몸에 대해 순신관으로 머물 때라면, ‘염’도 틀림없이 머물게 된다”고 하였던 것이다.43)
존자 무멸(無滅)도 역시 이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어떤 이가 능히 몸에 대해 순신관(循身觀)으로 머물 때라면, 몸을 반연하는 ‘염’이 머물 수 있다.--(내지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44)
혹은 만약 행자가 신(身) 등을 관찰하는 것을 마치고도 무간에 수(受) 등을 능히 관찰하지 못하는 경우, 마땅히 이전에 가행을 닦을 때 일찍이 닦았던 ‘수’ 등의 행상을 추념(追念)해야 한다. 즉 추념함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수’ 등의] 상이 현전하며, 이로 인해 능히 ‘수’ 등에 대해 관찰할 수 있는 것으로, 그래서 “‘염’을 가지면 ‘혜’는 더욱 분명해진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염’은 이전의 ‘혜’의 힘으로 말미암아 생겨나기 때문에 ‘염’과 ‘혜’는 뛰어난 조반(助伴)이 되는 것이다. 혹은 이러한 두 종류의 법에 존재하는 공능은 항상 서로에 따라 수승해 지기도 하고 저열해 지기도 하기 때문에, 두 종류는 서로를 자조하는 힘이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소연(所緣)에 근거하여 염주라는 명칭을 해석하면 [이러하다]. 이를테면 ‘혜’는 ‘염’에 의해 [머물며], ‘염’으로 하여금 머물게 하기 때문에 ‘혜’ 자체에 대해 ‘염주’라는 명칭을 설정할 수 있는 것으로, ‘염’이 머무는데 소연이 되는 신(身) 등의 제법은 바로 염주의 소연이기 때문에 소연념주라고 이름하였던 것이다.45)
따라서 앞서 [논설한] 세 종류에 근거하여 ‘염주’라는 명칭을 해석하더라도 그것들은 다 “‘혜’가 강성하지만, 다만 ‘염주’라고 이름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에 따라 염주[의 본질]은 바로 ‘혜’라는 이치가 성취되며, 따라서 해석(즉 ‘혜’를 본질로 한다고 해석한 것)과 나타낸 [명칭(즉 ‘염주’라고 이름한 것)에는] 서로 위배되는 과실이 없는 것이다.
(1) 염주의 본질은 ‘염(念)’이라는 분별론자 설 비판
분별론자(分別論者)는 이와 같이 말하였다.
“염주는 바로 ‘염(念)’을 자신의 본질로 삼으니, 여기에 염근(念根)을 [방]치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며, 나타낸 명칭[標]과 해석[釋]의 두 글귀에서 다 같이 ‘염’을 설하였기 때문이며, 이를 ‘혜주(慧住)’라는 말로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말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비록 여기에 ‘염[근]’이라는 개념[名想]을 [방]치하였을지라도 [그것의] 작용[業用]에 근거하여 혜근(慧根)을 [설]치하였던 것이니, 마치 신(信)ㆍ정(定)ㆍ혜근의 경우도 비록 순서대로 증정(證淨)ㆍ정려(靜慮)ㆍ요별(了別)의 진리[諦] 중에 [설]치하지 않았을지라도 공능에 의해 그 뜻이 이미 [설]치된 것과 같기 때문이다.46)
[또한] ‘나타낸 명칭’과 ‘해석’의 두 글귀에서는 분명하게 ‘혜’를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앞에서 이미 ‘염주’라는 명칭으로 나타낸 것은 ‘혜’에 근거한 것이지 다른 것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 분별하여, ‘나타낸 명칭[標]’도 ‘혜’에 [근거하였다는] 사실을 밝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석 중에서도 다 같이 순관(循觀)과 정지(正知)라는 두 종류의 ‘혜’라는 말로써 다시금 ‘혜’에 대해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나타낸 명칭’과 ‘해석’은 전혀 상위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를 ‘혜주’가 아니라] ‘염주’라는 말로 설하게 된 뜻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앞에서 어떻게 설하였던 것인가?
이를테면 앞에서 “여기서는 ‘염’과 ‘혜’가 서로를 자조하는 힘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다만 한쪽에 치우쳐 ‘염주’라는 명칭 등으로 설정하였다”고 말하였다.47) 또한 세 종류의 염주를 모두 나타내기 위해 [‘염주’라는 말로 설하였던 것으로], 그래서 이를 ‘혜주’라는 말로 설하지 않은 것이다. 이를테면 ‘염’이라는 말을 설하여 상잡념주를 나타내었고, 다시 ‘주’라는 말을 설하여 소연념주를 나타내었으며, ‘순관(循觀)’이라는 말을 설하여 자성념주를 나타내었던 것이다.48)
그러나 만약 [이를] ‘혜주’라고 말하였다면, 오로지 ‘혜’ 자체에 국한되어 [상잡념주와 소연념주는] 자상을 버리지 않았음에도 ‘혜주’라는 명칭을 획득하게 된다. 즉 이러한 [‘혜주’라는 말은] 단지 자성념주만을 밝히는 말이기에 상잡념주와 소연념주를 배제[棄捨]하게 되며(다시 말해 상잡념주와 소연념주를 포섭할 수 없으며), 그런 즉 그것들을 다 같이 ‘염주’라고 말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마땅히 이 같은 사실은 인정되지 않으니, 계경이나 본론(本論) 중에서는 모두 [염주로서] 세 가지를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이유[證]에서 볼 때, “‘염주’라는 말은 ‘혜’에 근거한 것이지 다른 것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는 사실은 결정코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3) 세 종류의 염주와 단혹(斷惑)
[계경에서는] 어떠한 이유에서 세 종류의 염주를 설하게 된 것인가?
행상(行相)과 자량(資糧)과 소연(所緣)에 어리석은 세 종류의 유정을 위하여 세 종류의 염주를 설하였다. 혹은 근기[根]와 승해의 분위(分位)에 각기 세 가지 [차별이] 있어 그 형편[機宜]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세 종류의 염주를 설하였다.
그런데 세 종류의 염주 중에서 상잡(相雜)은 능히 번뇌를 끊을 수 있지만, 다른 두 가지는 능히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자성과 소연은] 지나치게 감소한 것이고 증가한 것이기 때문이다.49) 즉 ‘혜’와 뒤섞여 머무는 것[雜住]이기에 ‘상잡’이라고 명칭을 얻게 된 것으로, 이치상 다만 마땅히 ‘혜’와 구유하는 법에 대해서만 ‘상잡념주’라고 말할 수 있으니, ‘혜’와 ‘혜’는 서로 뒤섞일 수 없을 뿐더러 어떠한 경우에도 동일한 소의신 중에 두 가지 ‘혜’가 구기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혜’는 상잡념주에 포섭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오로지 “상잡념주는 능히 번뇌를 끊을 수 있다”고만 설해서는 안 된다. 이치상 “자성념주와 상잡념주는 능히 번뇌를 끊을 수 있다”고 하여 [자성념주를] 함께 말해야 할 것이니, 번뇌를 끊는 데에는 ‘혜’가 으뜸[首]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과실이 없으니, 번뇌를 끊을 때, ‘혜’에 대해서도 역시 ‘상잡’이라는 명칭을 설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지(止)와 관(觀)이 평등하게 운행되는 도를 획득할 때 능히 번뇌를 끊을 수 있는 것으로, 그 이치는 결정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밖의 일체의 심ㆍ심소법 등에는 지품(止品)에 포섭되는 것도 있고, 관품(觀品)에 섭수되는 것도 있는데, 이것(止觀)이 평등할 때 그것(심ㆍ심소)도 역시 평등하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일체 [제법이] 서로 뒤섞여있다는 이치는 한결같은 것[齊]으로, 번뇌를 끊을 때에도 상잡의 이치가 평등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이미] 나타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혜’에 대해서도 역시 ‘상잡’이라는 명칭을 설정할 수 있으니, 다수의 법에 의해 성취된 것이라야 [번뇌를 끊는 데] 수승한 공능을 갖기 때문이다.50)
그렇지만 자성념주는 그렇지 않아 “[이것] 역시 능히 온갖 번뇌를 끊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으니, ‘혜’만을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즉 ‘자성(自性)’이라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다른 법과] 관계[待]하는 일이 없이 [존재하는 것]으로,51) 번뇌를 끊을 때에는 반드시 다른 법과 관계해야 하기 때문에 번뇌를 끊는 상태의 ‘혜’에 대해 ‘상잡’이라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앞서] 말한 “상잡념주만이 능히 번뇌를 끊을 수 있다”고 한 사실은 이치상 잘 성립되는 것이다.
이(상잡념주) 중에서도 번뇌를 끊을 수 있는 것은 다만 수소성(修所成)에 의한 것뿐이다. 그렇더라도 이 중의 문ㆍ사소성에 의한 것이 쓸모없는 것은 아니니, 그것들은 수소성에 수순(隨順)하는 것이기 때문으로, 마치 나무의 뿌리를 심는 것과 같다.
수소성[에 의한 상잡념주] 중에서도 오로지 법념주(法念住)만이 능히 번뇌를 끊을 수 있으니, 4온이나 5온을 반연하거나, 혹은 열반을 반연하여야 능히 번뇌를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법념주 중에서도 공상작의(共相作意)만이 능히 번뇌를 끊을 수 있으며, 자상작의(自相作意)는 일부분의 경계대상만을 반연하기 때문에 이러한 [번뇌를 끊는] 공능이 없다.
즉 4념주 중 앞의 세 종류는 오로지 부잡연(不雜緣)이지만, 네 번째(법념주)는 두 가지(잡연과 부잡연)와 통하기 [때문에 번뇌를 끊을 수 있다].52)--그렇지만 세 가지 제지(諦智, 즉 苦ㆍ集ㆍ道諦智)는 오로지 잡연이지만 능히 번뇌를 끊을 수 있으며, 오로지 멸제지(滅諦智)만은 비록 부잡연이라 할지라도 역시 번뇌를 끊을 수 있다.--그러나 [법념주의] 잡연(雜緣) 지(智) 중에서도 세 가지 온을 반연하는 것까지는 역시 번뇌를 끊을만한 어떠한 공능을 갖고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여기서는 일체의 유루와 무루, 유위와 무위 등을 총체적으로 반연하기에 역시 결정코 번뇌를 끊을 만한 공능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만 [법념주의] 부잡연의 경우, 적게 섞인 것이든 많이 섞인 것이든(다시 말해 약간의 법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든 다수의 법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든) 번뇌를 끊는 데 전혀 무용한 것은 아니니, ‘[번뇌의] 능단(能斷)’을 인기하여 낳기 때문이며, 신기(身器)를 수습 대치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그 자체 번뇌를 끊는 것에 대해 다만 가행(加行)과 승진(勝進)의 두 가지 도(道)가 될 수 있을 뿐으로, 오로지 처중(處中)인 잡연의 법념주와, 오로지 멸(滅, 열반)을 반연하는 법념주만이 역시 또한 무간도(無間道)와 해탈도(解脫道)의 본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번뇌를 끊는 것이 오로지 법념주뿐이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 법념주만이 무간도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무간도가 현전할 때 어째서 그 밖의 다른 세 염주도 능히 닦는 것인가? 만약 [그 밖의 다른] 세 염주가 단대치(斷對治)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면, 무간도에 편승하여 미래에 닦는 것[未來修]이라고 해야한다. 즉 [무간도로써] 유정지(有頂地)의 염오를 끊을 때 마땅히 세속지(世俗智)로서 닦아야 할 것이니, 온갖 무간도 중에서는 마땅히 타심지(他心智)를 닦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엇이 장애하여 그것을 미래에 닦는 것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따라서 이에 대해 그 이취(理趣)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동일한 대치도라야 비로소 미래에 닦을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닦는 것에 어떠한 제한[限齊]이 없는 것도 아니니,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지(智)를] 닦는 것[修]에 대해 분별하는 곳에서 널리 해석하게 될 것이다.53)
신(身) 등의 염주에는 각기 세 종류가 있으니, 내적인 것[內]과 외적인 것[外]과 두 가지 모두[俱]를 반연하는 등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신념주의 세 종류 중에서, 자상속(自相續)을 반연하는 것을 일컬어 ‘내적인 신념주’라 하고, 다른 이의 몸 등을 반연하는 것을 일컬어 ‘외적인 신념주’라 한다. 그리고 두 가지를 모두 반연하는 것을 일컬어 ‘내ㆍ외적인 신념주’라고 하는데, 아애(我愛)를 가졌을지라도 그것이 완만(緩慢)한 자는 마치 외적인 몸을 관찰하듯이 내적인 몸을 관찰해야 하기 때문이다.
혹은 내적인 신념주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고, 무집수(無執受)를 반연하는 것을 일컬어 ‘외적인 신념주’라 하며, 타상속(他相續)을 반연하는 것을 일컬어 ‘내ㆍ외적인 신념주’라고 하는데, 이는 무집수에 근거하고, 아울러 자신의 몸에 근거한 [신념주이기] 때문에 두 가지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54)
혹은 근(根)과 경(境)과 두 가지 모두를 반연하는 염주를 일컬어 [신념주의] 세 가지라고 하였다. 혹은 유정과 비정수(非情數)를 반연하고, 두 가지 모두를 반연하는 염주의 차별을 [신념주의] 세 가지라고 하였다. 혹은 유정과 외적인 비정수와, 아울러 머리카락이나 터럭 등을 반연하는 염주의 차별을 [신념주의] 세 가지라고 하였는데, 그것(머리카락 등)들은 모두 내적인 몸으로부터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근을 떠나 머무는 것이기 때문에 두 가지 명칭(즉 내ㆍ외적인 신념주)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혹은 유정의 현재를 반연으로 하는 것을 일컬어 ‘내적인 신념주’라 하고, 외적인 비정수의 삼세를 반연하는 것을 일컬어 ‘외적인 신념주’라 하며, 유정의 과거와 미래를 반연하는 것을 일컬어 ‘내ㆍ외적인 신념주’라고 하는데, 이는 유정수의 종류이기 때문에, 법수(法數)에 떨어지는 것(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에 [두 가지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또는 그것의 미래는 마땅히 유정수에 떨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의 과거세는 법수에 떨어지는 것으로, 일찍이 유정수에 떨어졌다가 바로 법수에 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불생법(즉 미래존재)은 바로 생겨날 종류이기 때문에 [두 가지 명칭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수(受)’ 등의 세 종류의 염주에도 각기 세 종류가 있으니,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앞에서 설한 바에 준하여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4) 염주의 순서가 신ㆍ수ㆍ심ㆍ법인 까닭
이러한 4념주를 설한 순서는 [그러한 관법이] 생겨나는 순서에 따른 것이다.
다시 어떠한 연유에서 이와 같은 순서로 생겨나게 된 것인가?
이와 같은 순서로 생겨나게 된 것은 [네 가지가] 서로 수순(隨順)하기 때문으로, 유정들은 대부분 온갖 색을 즐거이 수용(受用)하기 때문이다.55)
[그렇다면] 뛰어난 법[勝法]의 수용이 색을 즐거이 수용하는 것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어떤 까닭에서인가?
이를테면 [색을 즐거이 수용하는 것은] ‘수’에 대해 깊이 흔락(欣樂)하였기 때문이며, ‘수’에 대해 흔락하는 것은 마음이 조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마음이 조화되지 못한 것은 온갖 번뇌(즉 법) 때문으로, 마음은 신(信) 등으로써 이를 조복(調伏)시킬 수 있다. 즉 이러한 이치를 따라 관찰함으로써 4념주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혹은 [4념주의 순서는] 소연의 거칠고 미세함에 따라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치에 따를지라도 마음을 최후로 관찰하는 것은 아니니, [제]법 가운데 열반이 가장 미세하기 때문이다.56)
그리고 그것(색)의 상(想)과 사(思) 등은 수(受)를 순관(循觀)할 때 뜻에 준하여 그 상(相)을 이미 알았을 것이니, 다 같이 마음에 근거하여 일어나 안온하고 위험하다는 [생각과 조작을] [등]기(等起)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57)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4념주의 순서에 대해] 이같이 설하였다.
“색은 모이고 흩어질 수 있고, 취할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으며, 서로 유사하게 상속하여 부정(不淨)한 것ㆍ괴로운 것 등이라고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유정들은] 대부분 몸을 반연하여 탐 등을 낳기 때문에, 남녀로 전전(展轉)하여 탐을 일으키는 처소이기 때문에, 부정관(不淨觀)이나 지식념(持息念), 그리고 분별계관(分別界觀)이라고 하는 수(修)에 드는 세 가지 방편은 모두 다 몸을 소연의 경계로 삼기 때문에,58) 염주를 닦는 단계에서도 그것을 가장 먼저 관찰해야 한다.
이러한 관찰을 원인으로 하여 경안(輕安)의 촉(觸)이 생겨나며, 경안의 촉에 의해 낙수(樂受)가 인기되어 생겨나니, 경에서 ‘몸이 편안하면 즐거움을 향수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낙수는 마음에 근거하여 생겨나며, 청정한 마음을 원인으로 하여 해탈이라는 결과를 획득하니, 이에 따라 ‘수’ 등도 [이와 같은] 순서로 관찰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염주도 이와 같은 순서로 생겨나게 된 것이다.
5) 염주가 다만 네 가지인 까닭
이러한 4념주는 그 수가 증가하지도 않고 감소하지도 않으니, 이는 ‘청정한 것[淨]’이라고 하는 등의 네 전도를 능히 대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59)
즉 “몸은 부정(不淨)한 것이다”고 관찰하면, ‘부정한 것을 청정한 것이라고 여기는 전도’를 대치한다. 비록 청정한 것이라고 하는 전도는 [색온의 몸뿐만 아니라] 5온을 모두 반연할지라도 단지 “몸은 그 자체 청정한 것이 아니다”고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능히 [5온] 모두를 조복시킬 수 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이미 똥 자체가 부정한 것이라고 관찰하였다면, 똥으로부터 생겨난 것에 대해서도 역시 기뻐하거나 즐거워[欣樂]하지 않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이미 몸 자체가 부정한 것이라고 관찰하였다면 몸으로부터 생겨난 것에 대해서도 역시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않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몸을 부정한 것이라고 관찰한 자는 5취온 모두에 대해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않지만, 몸을 청정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미혹한 자는 바야흐로 몸에 근거하여 생겨난 것에 대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그렇기 때문에 몸을 부정한 것이라고 관찰한 자는 몸에 근거하여 일어난 것에 대해서도 역시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이가 부정관에 안주할 때, 비록 직접적으로는 소리 등의 경계대상을 관찰하지 않을지라도 노래 등을 똥의 더러움과 같다고 여겨 내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신념주에 안주하였을 때에는 비록 직접적으로는 ‘수’ 등의 경계대상을 관찰하지 않을지라도 몸 자체를 부정한 것이라고 관찰하였기 때문에 ‘수’ 등의 세 가지 경계대상에 대해서도 끝내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비록 색ㆍ무색계의 경계대상을 부정한 것이라고 관찰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러한 경계대상에 대해서도 즐거워하지 않는 [불락(不樂)의] 행상을 인기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한 것을] 청정한 것이라고 여기는 전도는 비록 5온을 [모두] 반연한 것일지라도, 신념주가 성취되면 능히 [5온을 청정한 것이라고 여기는 전도를] 모두 조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뒤의 세 염주도 비록 각기 다른 관찰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예(例)에 따라 능히 [5온을 즐겁고 상주하고 자아라고 여기는 전도를] 모두 조복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즉 “‘수’는 괴로운 것[苦]이다”고 관찰하면, ‘괴로운 것을 즐거운 것이라고 여기는 전도’를 능히 대치할 수 있다. 이를테면 만약 어떤 법으로서 진실로 기쁘게 추구할 만한 것이라면, 이것이 바로 즐거움의 뜻인데, 많은 허물과 환란이 뒤섞인 제행(諸行)에 대해 참으로 기뻐할 만하고 수승한 공덕이 있다고 관찰하는 것을 일컬어 ‘괴로운 것을 즐거운 것이라고 여기는 전도’라고 한다. 이러한 전도는 필시 먼저 ‘수’에 대해 탐착한다. 즉 ‘수’에 대해 깊이 탐착함으로써 바야흐로 핍박과 뇌란[逼惱]의 근거가 되는 일체의 유루행에 대해서도 그릇되게 즐겁다는 생각[樂想]을 낳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수’를 괴로운 것이라고 관찰할 때, 즐거운 것이라고 여기는 전도를 모두 조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은 무상한 것이다”고 관찰하면, ‘무상한 것을 상주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전도’를 능히 대치할 수 있다. 이를테면 관행자(觀行者)는 ‘수’를 미워하고 싫어하기[憎厭] 때문에, 그것의 근거가 되는 마음에 대해서도 온갖 품류의 차별이 있음을 관찰하고, 무상관(無常觀)을 인기하여 현전시키면, 유위에 대해 더 이상 상주하는 것이라는 생각[常想]을 낳지 않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무상한 것이라고 관찰할 때], 상주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전도를 모두 조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법은 무아이다”고 관찰하면, ‘무아를 자아라고 여기는 전도’를 능히 대치할 수 있다. 이를테면 어떤 부류의 유정들은 “자아는 무상한 것이다”는 말을 듣고도 마음으로 기뻐하지 않고, 마침내 이같이 생각한다. “누가 이러한 마음에 수많은 차별이 있게 하였을 것인가? 그것은 바로 자아이다.” 이 같은 생각을 막기 위해 다시금 앞의 세 가지를 제외한 그 밖의 존재도 역시 오로지 바로 ‘법’이라고 살펴 관찰하면, 그러한 일체[법]에 대해 자아라는 생각[我想]을 일으키지 않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법을 무아라고 관찰할 때], 자아라고 여기는 전도를 모두 조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혹은 단(段)ㆍ촉(觸)ㆍ식(識)ㆍ사식(思食)을 대치하기 위해 순서대로 신(身) 등의 4념주를 설정하였다.60)
그래서 염주의 수는 오로지 네 가지뿐으로, 더 많지도 않고 더 적지도 않은 것이다.
아비달마순정리론 제61권
6. 변현성품 ⑤
3.6. 총상념주(總相念住)
이와 같이 부정관(不淨觀)과 지식념(持息念)이라는 두 가지 가행을 완전히 닦고 나서 소연이 뒤섞이지 않은[不雜] 신ㆍ수ㆍ심ㆍ법의 염주를 차례로 인기하여 현전시키고, 다시 소연이 뒤섞이지 않은 법념주와 무간에 소연이 뒤섞인[雜] 법념주를 인기하여 낳았다면, 다음으로 마땅히 공상(共相)을 총체적으로 반연[總緣]하는 법념주를 닦아야 한다.
이러한 법념주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그(관행자)는 법념주에 머물면서
네 가지 소연을 모두 관찰하니
무상(無常)과 고(苦)와 공(空)과
무아(無我)의 행상을 닦는 것이다.
彼居法念住 總觀四所緣
修無常及苦 空無我行相
논하여 말하겠다.
잡연(雜緣)의 법념주에는 모두 네 종류가 있으니, 그것의 경계가 두 가지 온과 세 가지 온과 네 가지 온과 다섯 가지 온으로 차별되기 때문으로, 여기서 닦아야 하는 것은 오로지 5온을 총체적으로 반연[總緣]하는 법념주이다. 즉 그(觀行者)는 여기(법념주)에 머물면서 네 가지 행상(行相)을 닦는데, 일체의 신(身)ㆍ수(受)ㆍ심(心)ㆍ법(法)에 대해 이른바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라고 총체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1)
그런데 이러한 염주(즉 총상념주)를 수습할 때, 그 밖의 다른 선근을 능히 방편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는 마땅히 그것을 차례로 닦아 현전하도록 해야 한다. 이를테면 그가 이미 잡연의 법념주를 완전히 닦고 나서 장차 이러한 염주를 수습하고자 할 때에는, 먼저 그 모두(염주의 네 소연)를 반연하여 무아의 행상을 닦아야 하며, 다음으로 생멸(生滅)을 관찰하고, 다음으로 연기(緣起)를 관찰해야 하니, 관행자는 먼저 제행은 인[연]에 따라 생겨나고 멸하는 것이라고 관찰하여야 인과의 상속(相屬)을 관찰하는 문(즉 4선근)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연기를 먼저 관찰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이 후 [이러한 총상념주의] 인연(방편)이 되는 3의관(義觀)을 인기하며, 이러한 [3의]관과 무간에 7처선(處善)을 닦게 된다.2) 그리고 7처선에 대한 선교(善巧)를 획득함으로써 능히 이전부터 내려온 관찰해야 할 온갖 경계대상을 인과의 진리[諦, 즉 4제]로 설정하여 차례로 관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지(智)와 정(定)을 완전히 닦고 나면 [비로소] 능히 ‘현관(現觀)에 수순하는 진리’를 세울 수 있으니, 이를테면 욕계와 상계(색ㆍ무색계)의 고제(苦諦) 등의 각각의 차별이 바로 그것으로, 이와 같은 여덟 가지의 진리(욕계와 상계의 고ㆍ집ㆍ멸ㆍ도제)를 순서에 따라 관찰하여 일찍이 닦은 적이 없었던 16행상(行相)을 닦게 되는 것이다.3)
즉 그는 [이 때] 문소성혜에 의해 여덟 가지 진리에 대해 처음으로 그와 같은 16행상을 일으키는 것으로, 이는 마치 얇은 비단으로 가리고서 온갖 색을 보는 것과 같은데,4) 이러한 단계에 이르게 될 때를 문소성혜가 원만하게 된 상태라고 한다. 사소성혜에 대해서도 이에 준하여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 생사에 대해 깊은 염환(厭患)을 낳고 열반적정의 공덕에 대해 흔락(欣樂)하며, 이 후에도 수많은 염환의 관찰[厭觀]을 인기 현전시켜 방편으로서 부지런히 닦아 점차적으로 증장되고, 점차적으로 뛰어나게 될 때, 능히 결택(決擇, 견도)에 수순하는, 이와 같은 사소성혜에 포섭되는 가장 뛰어난 선근(善根)을 인기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여기서] 닦아야 할 [제법의] 공상(共相)을 총체적으로 반연하는 법념주이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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