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고후 6:14-18
제목/멍에를 같이할 자
「同床異夢」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침대에 누워서 다른 꿈을 꿀 때 이런 표현을 씁니다. 네 명의 도둑이 있었습니다. 갑부의 집을 털어 일확천금을 손에 쥐게됩니다. 뒷산에 올라가서 분배키로 하고 산으로 올라가는 중에 마음이 맞는 세 도둑이 눈짓으로 상의했습니다. 한 놈을 죽이면 몫이 커질 것 아니냐 그러니 가장 힘없는 놈을 죽이자 그렇게 합의가 되었습니다.
세 도둑이 힘없는 말째에게 상점에 가서 술을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술을 사러간 도둑은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세 놈을 한꺼번에 처단하고 내가 몽땅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술병에 청산가리를 넣고 세 도둑에게 왔습니다. 죽일 모의를 하던 세 도둑은 술을 빼앗고는 힘없는 도둑을 죽여버렸습니다. 그리고 기분 좋게 술을 나누어 먹고는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성경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그것입니다. 그 해 농사를 지어 보니 엄청난 풍년입니다. 심중에 생각합니다. 올해는 더 큰 창고를 짓고, 더 많은 머슴을 들이고 더 큰집도 짓고, 더 좋은 자동차도 사고 상상의 날개를 펼칩니다. 그러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오늘밤에 그 영혼을 불러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구약 에스더서에 보면 하만 이라는 못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대인들을 멸절 시키기로 작정하고 에스더의 오라버니 모르드개를 처형하려고 음모를 꾸며 50규빗(1규빗은 약45cm, 약 22.5cm)이나 되는 높은 장대를 세웠더니 자기가 세운 장대에 자신이 달리게 됩니다.
그 이유는 전에 모르드개가 왕을 시해하려던 것을 고하여 시해를 모면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궁중일기에 적혀있었고 잠이 오지 않아 궁중일기를 살피던 중 모르드개에 관한 일을 알고 논공행상을 물으니 아무 것도 베푼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시종을 부르니 마침 하만이 모르드개를 장대 끝에 달기를 간청하기 위해 밖에 있다가 왕이 부르니 기회는 이때다라고 왕 앞에 부복을 했습니다.
자기의 간청을 아뢰기도 전에 왕에 묻습니다.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는 자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뇨 물으니 하만이 심중에 이르기를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는 자는 나 이외에 누구리요 하고
「왕의 입으시는 왕복과 왕의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취하고 그 왕복과 말을 왕의 방백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붙여서 성중에 다니면서 왕이 존귀케하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
이에 왕이 하만에게 이르되 너는 네 말대로 속히 왕복과 말을 취하여 대궐문에 앉은 유다사람 모르드개에게 행하되 무릇 네가 말한 것에서 조금도 빠짐이 없게 하라. 누구의 명이라서 거역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대로 했고 모르드개를 달려 고한 장대에 자신이 달리게 됩니다. 참 극적인 드라마 같은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지금이야 농사를 짓는 일도 기계의 힘을 빌어합니다만 수천년동안 사람의 손을 빌리고 짐승의 힘을 빌려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소는 농사짓는데 필수적인 동물이었습니다.
멍에는 바로 소의 목덜미에 고정 시켜 그 뒤에 수례를 달기도 하고, 쟁기를 달기도 하고, 쓰례를 달아 사용하기도 합니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한 마리의 소로 일을 시키지만 강원도지역에서는 소 두 마리에게 멍에를 지워 일을 시킵니다. 중동 지역에도 그런 현상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마리의 소가 마음이 달라 엇길로 가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 그림을 연상하시면서 본문을 읽어야 현장감이 삽니다. 이혼이 참으로 많은 사회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이혼 사유의 첫 번째는 「성격이 맞지 않아서」입니다. 마음만 맞으면 가난쯤은 아무렇지 않게 이겨나갈수 있습니다. 여간 고생이 되도 마음이 편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마음이 갈라지면 한 집에 살기가 어려워집니다. 동상이몽이 되지 않으려면 마음을 같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불신자들과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첫째-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사상입니다. 신념체계요, 가치체계를 말합니다. 사람은 가치와 신념 속에서 행동이 나옵니다.
복의 개념도 다르고, 믿음의 개념도 다르고 사랑의 개념도 다릅니다. 자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보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시편 1편을 볼까요?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요한 게시록에는 일곱 가지 복이 나오는데
1.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계1:3 ).
2.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계15:13).
3.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 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계16:15).
4.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계19:9).
5.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이 복이 있고(계20:6).
6.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계22:7).
7.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계22:14)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 복도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등으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의 개념과는 근본적 차이가 있습니다.
믿음도 세상사람들의 생각 속에 있는 믿음과 성도의 믿음은 다릅니다. 우리의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인데 그들의 믿음은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도 우리는 아가페를 말하는데 그들은 애로스적 쾌락적 사랑을 추구합니다. 그러니 철저히 동상이몽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같이 멍에를 멜 수가 없단 말입니다.
둘째-조화를 이룰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빛과 어두움,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물과 기름을 아무리 썪어려고해도 안되지 않습니까? 저도 초등학교 동창회를 오랜만에 나가 보았는데 몇 번 가다가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생각이 다르고 쓰는 말이 다르고, 행동이 다릅니다. 갈등만 깊어져서 고민하다가 나가지 않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조화가 되질 않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복음률이 가장 높은 도시가 여수입니다. 기독교인구 45% 의회장악이 95% 시장 및 공무원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입니다. 그런 곳이니까 의회가 시 예산을 들여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 일대기를 그린 뮤지컬을 만들어 전국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대구에도 한다고 하니 중직자들은 꼭 한 번 관람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왜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우리 대구도 그런 날이 속히 오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셋째-혼합은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좋은 물은 변질이 안됩니다.
우리 교회 물을 컵에 담아 한 달 동안을 서재에 두었는데도 이끼가 끼지 않았습니다.
진리는 썪어면 약화됩니다. 지금 교회 안에는 너무나 세속적인 것들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조금씩 양보하다보니 낙타가 주인을 몰아내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좌경화 사상이 조금씩 침투하더니 그들이 중심부를 차지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행사를 통해 쓰라린 기억을 되새김질하듯 원래의 순수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악의 세력이 연대하듯 선한 세력들도 연대하여 함께 멍에를 메고진리의 파숫군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