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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순서 9 영화(榮華) (2)
누가복음 16:19-31절에 예수님께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삶의 결과를 천국과 지옥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도 거지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말은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 믿는 기독교인입니다. 부자 신앙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세상 사람처럼 먹고 마시고 입고 사는 육체의 일에 집착하며, 이 세상이 삶의 전부이기 때문에 현세 중심으로 살고, 육체의 욕망과 욕심을 채우며 살았습니다. 또한 자신이 자기인생의 주인이기 때문에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습니다.(롬1:28-32) 그 결과 부자 인생은 육신의 죽음으로 지옥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아버지 품에 안겨서(천국)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죽음은 또 다른 시작임을 깨닫게 됩니다. 육체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눅 16: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天使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富者도 죽어 葬事되매 눅 16:23 저가 陰府에서 苦痛 中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눅 16: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苦難을 받았으니 이것을 記憶하라 ! 이제 저는 여기서 慰勞를 받고 너는 苦悶(괴로움)을 받느니라 눅 16: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거지’라 이름 한 나사로의 삶은 어떻습니까?
부자의 삶과는 정 반대입니다.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을 따려는 선수처럼 고난을 감수하며 오직 믿음과 인내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이겨내는 삶입니다. 나사로의 외모는 헌데 투성이로 버려진채 심지어 그 헌데를 개들이 핥았습니다. 아무도 거둘 떠 보지 않고, 돌봄을 받지 못하는 거지입니다. 부자의 대문에 누워있으나 부자는 나사로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웃이 보이지 않는 맹인입니다. 어쩌면 거지가 자기 집 대문에 누워있다고 심중에 멸시천대 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부자에게 천국에 들어갈 기회를 주었는데도 앞 못 보는 맹인인지라 불쌍히 여길 줄 몰랐습니다. 영안이 열린 자는 성령을 좇아 행하여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으나 부자는 어둠의 자식, 죽은 신앙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부자는 돈 많은 부자일 뿐 이름이 없으나 거지는 나사로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되어 그 이름이 생명책에 올려있는 나사로와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부자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서정을 생각할 때에, 부르심(소명)→거듭남(중생)→회개(회심)와 신앙(믿음)→의롭다함(칭의)→양자(수양)→거룩함(성화)→굳게 믿음(견인)→그리스도와 연합→영화, 이렇게 9단계로 볼 때 5번째 단계인 하나님의 아들(양자)로 생명책에 등재 되지 못한 종교인이 바로 부자신앙입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도 생명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여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함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나사로와 같은 형편에 있다 해도 끝까지 성령님의 인도 역사하심으로 구원의 완성을 이루게 됩니다.
히 10:19
“그러므로 兄弟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聖所에 들어갈 膽力을 얻었나니”
사람이 하나님계신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의 보혈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로는 성소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예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사과나무에 사과 열리듯, 선악나무에 죄가 열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수련을 하고 도를 닦아도 마음속에서 나오는 죄, 인간의 본성적인 죄성 때문에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죄가 끊어지는 것은 육체가 죽어야 끝이 납니다. 죄는 육체가 살아있는 한 언제 어디서나 항상 나옵니다. 거듭나지 못한 유대인들이 어둠속에 있으면서 그토록 율법을 지키고 의롭다하여도 빛이신 예수님께서 임하시니 그 죄악상이 들어나게 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8:24) ‘죽으리라’는 영혼의 죽음, 지옥을 말합니다. 이는 “너희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9:41) ‘본다고 하니’ 이 말씀은 ‘안다고 하니, 죄 없다 하니’ 이런 뜻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죄 사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인(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법,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대로 죄가 있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롬6:23) 지옥을 면할 수 없습니다. 부자신앙은
예수의 보혈이 없습니다. 자기의 의를 믿는 신념입니다. 인간의 의로 성소에 들어갈 줄 믿었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믿는다고 믿음이 아닙니다. 부자신앙은 자아파쇄가 없습니다. 자기 부인은 아담 안에서 태어난 인간의 의는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예수의 피를 힘입어 담대하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히10:19).
성도의 육적인 죽음은
개인적인 종말로서의 특별한 의미를 어떤 이는 말하기를 “우리가 죽는 것은 죄의 결과가 아니고 죽음은 인간의 자연스런 현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죄가 아니라도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살아 숨 쉬는 존재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창3:19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지니라” 육체를 가진 인간은 어느 누구든지 죽습니다. 예수 생명으로 거듭나지 못한 모든 사람은 첫 사람 아담의 형상을 입은 자요, 흙에 속한 자입니다. 고전 15:47 “첫 사람(아담)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예수)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전 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아담)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예수)의 형상을 입으리라” 요 8: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은 아담의 형상이고,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나면 예수의 형상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흙에 속한 자가 하늘의 속한 자로 되는 과정에서 꼭 알아야 할 것이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가입니다. 자기 부인은 자아파쇄(破碎)입니다. 이 말은 아담의 형상을 입은 옛사람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율법준수자)가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나지 못한 육체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 나라 천국에 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자아파쇄와 육체의 죽음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42문은 성도의 죽음은 영생에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신자에게 죄 짓는 삶의 종료를 뜻합니다. 성화의 완성, 영화의 단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사모하는 것은 이 죄의 몸을 벗어버리는 것 아닌가? 바울 사도도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했습니다. 현재 우리들의 삶에서 자아파쇄, 자기부인으로 죄의 세력에서부터 부분적으로는 자유 할 수 있으나 부패성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는 마지막 날에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자아파쇄의 삶에서의 죽음은 본격적 축복의 삶에 대한 시작입니다. 서론이 막을 내리고 이제 본론이 시작되는 죽음입니다. 영광스런 새 출발이요, 영광의 관문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인간의 최대의 불행을 최대의 축복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죽음을 죽이는 죽음이다”(John Owen: the death of death). 예수의 죽으심은 죄의 쏘는 것, 사망의 독기를 제거해 버림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축복의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셨습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고난의 시작이지만, 죽음은 고난의 끝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생각할 때 담대해지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받는 고난은 우리들이 장차 누릴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어떤 교인들 중에는 질병에 걸려서 기도했는데 결국 죽었을 때 실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죽음이 완전한 치유입니다. 질병이 나아도 또 질병에 걸릴 수 있으나 죽음은 완전한 치유입니다.
롬 8:30
또 미리 定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義롭다 하시고 義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榮華롭게 하셨느니라.
첫댓글 예수의 죽음은 죽음을 죽이는 죽음이다 (John Owen: the death of death).
부르심(소명)→거듭남(중생)→회개(회심)와 신앙(믿음)→의롭다함(칭의)→양자(수양)→거룩함(성화)→굳게 믿음(견인)→그리스도와 연합→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