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골주사 맞고 언니 보고
박래여
연골주사를 맞으러 갔다. 양 무릎 모두 인공관절 해야 한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은 지도 십 수 년이 지났다. 사십대 말부터 아팠었다. 무릎에 좋다는 약도 많이 먹었고, 민간요법도 시행했었다. 그럭저럭 견뎌낸 것은 상노인의 길을 가는 두 어른을 모신 덕이 아니었을까. 두 어른 돌아가신지 한 해가 지났다. 농부는 인공관절 하라고 채근한다. 막상 관절수술을 하려고 마음먹다가도 ‘여태 견뎠는데. 좀 더 견뎌 보지 뭐.’ 이러거나 의사가 ‘요새 사람들은 오래 사는데 칠십 넘어서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말을 들으면 또 망설이게 된다.
젊은 정형외과 의사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해야 낫다하고, 내 또래 풋 늙은 의사는 칠십이 넘어서 하란다. 노인이 수술을 하고 병실에 눕게 되면 있던 근력도 금세 빠지게 된다. 수술 후 재활을 제대로 못하면 병원신세 질 일만 있단다. 주변 사람들 근황을 보면 수술하고 고생하는 사람은 수술해도 아프고, 안 해도 아프니 수술 하지 말라하고, 예후가 좋은 사람은 삶의 질이 달라진다고 수술은 빠를수록 좋다한다. 내 경우는 어떨까. 인공관절하고 몇 달 고생하면 걷는 데는 지장 없다는 말도 듣는다. 일단 안 아프니 살 것 같다고도 한다. 산에도 다니고 골프도 치러 다니는 사람도 있지만 여전히 절뚝거리며 생활전선에 빠져 사는 사람도 있다.
연골주사도 6개월 단위로 꾸준히 맞는 것이 좋단다. 지난해부터 장기전으로 연골주사를 맞기로 했다. 밑져야 본 전 아닌가. 언젠가는 인공관절을 해야겠지만 일단 농사일을 줄이니 일상생활은 그럭저럭 견뎌낸다. ‘더 견뎌 보지 뭐. 이보다 더 힘들 때도 버텼는데.’ 그런 마음이 더 강하다. 통증도 만성이 되자 참는 방법도 강해져 그런가. 어지간한 아픔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데 연골 주사 맞을 때가 됐다는 간호사의 전화를 받고 진저리를 친다. 무릎에 꽂히는 주사바늘의 아픔이 정수리까지 뻐근하게 한다. 나는 어떤 아픔도 잘 참는다고 믿었다. 주사 정도야 따끔 하는 수준인데. 그걸 못 참아. 그랬지만 연골주사는 맞을수록 아프다. 주사 맞기 전에 긴장부터 하게 된다.
일단 수영장에 갔다가 정형외과에 갔다. 내 또래 의사선생님은 인상이 좋다. ‘안 아프게 놔 주세요.’ 의사는 사진 찍은 지 일 년이 됐다며 그동안 얼마나 진행됐는지 봐야겠단다. 무릎 사진을 찍었다. ‘많이 나빠졌어요? 인공관절 해야 해요?’ 사진을 현상해 살펴보는 의사에게 물었다. ‘관리를 잘 하셨네요. 일 년 전보다 조금 나빠지긴 했지만 주사 맞으면 일상생활은 괜찮을 것 같네요.’ 의사의 말이 고마웠다. 좋아질 수는 없는 퇴행성관절염이다. 퇴행성은 나이 들수록 심해지지 좋아질 수는 없다. ‘인공관절 하는 게 나을까요? 인공관절 하니 삶의 질이 좋아진다는 사람도 있던데.’ 의사의 눈을 직시했다. 의사는 ‘해도 되고, 좀 더 있다 해도 괜찮을 것 같네요. 무슨 운동을 합니까?’ 물었다. 나는 수영을 꾸준히 하고 있고, 수영장에서 자세 바로해서 걷기 운동에 모둠발해서 뜀뛰기도 30분 정도 꾸준히 하고 있다고 했다. ‘잘 하고 있네요. 물에서 하는 운동은 충격이 덜 가니 무릎관절에 효과적입니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양쪽 무릎에 연골주사를 맞고 나오니 고향집에 있는 작은언니가 보고 싶다. 인공관절 한지 두어 달 돼 간다. 병원에 있다가 집으로 온지 얼마 안 된다. 혼자 절뚝거리며 잘 지내고 있는지. 밥이나 잘 챙겨 먹는지. 수술은 잘 됐다지만 너무 아프단다. ‘너는 가능하면 수술하지 마라. 나는 안 권한다.’는 언니다. 운전이 편해지면 나를 보러 온다는 언니, 늘 병치레하는 내가 더 걱정이라는 언니다.
농부에게 언니가 보고 싶다고 했다. 병원을 나서는 길로 한 시간 여 걸리는 고향으로 달렸다. 친정엄마가 좋아하던 추어탕 집에 들러 포장한 추어탕을 샀다. 혼자 먹는 밥은 맛이 없다. 환자일 때는 모든 게 귀찮다. 추어탕 끓여 냉장고에 넣어두면 추어탕에 밥 한 술 말아 뜨면 배고픔은 면하지 않을까. 뼈에 좋다는 추어탕이다. 남부지방은 추석이 되면 집집마다 추어탕을 끓인다. 나도 시집 온 이래 평생 마당가에 큰 솥을 걸어놓고 추어탕을 끓였었다. 시어른과 농부의 형제자매들은 내 추어탕 솜씨를 높이 샀었다. 포장한 추어탕꺼리를 가슴에 꼭 안았다.
친정 가는 도로가에는 추석을 위해 나온 햇과일 전이 여러 개 생겼다. 도매로 청과물 시장에 올리는 것보다 길거리 판매가 낫다. 물론 온종일 길섶에 진을 치는 것은 고단한 일이지만 그만큼 수익이 나면 힘들지도 않다. 돈이 힘이라는 말이다. 해마다 고구마를 심어 그 자리에서 파는 단골이 있다. 올해도 여러 종류의 고구마를 무더기 째 파다 놓고 다듬고 있다. 할머니는 고구마를 다듬어 박스에 담고, 젊은 아낙을 판매를 한다. 추석빔으로 밤고구마 한 박스를 더 샀다. 하천부지에 너른 고구마 밭을 가졌던 친정집, 그때 먹은 고구마 맛을 기억하기 때문일까. 고구마에 대한 향수가 밀러온다. 나는 고구마를 싫어했지만 작은언니와 남동생은 고구마를 좋아했었다.
친정집 삽짝에 들어섰다. 지팡이를 짚은 언니가 절뚝거리며 나온다. 살이 쏙 빠져버렸다. 친정엄마를 마주 본다. 피는 못 속인다던가. 나이 들수록 부모 모색을 닮는 자식들이다. 언니는 ‘와, 니가 또옥 옴마다. 우째 그리 닮았노?’하며 손을 잡는다. ‘언니도 엄마랑 같은 걸. 언니는 주워온 앤 줄 알았는데 살이 쏙 빠지니 영판 엄마네. 씨 도둑질은 못한다더니.’ 자매끼리 마주보며 웃었다. 엄마가 가꾸던 마당은 사라지고 풀과 여름 꽃들이 제멋대로 자랐다. ‘그래도 내가 퇴원하기 전에 아들내외가 와서 온종일 청소했단다. 풀도 쳤는데 그 새 또 풀밭이 됐다.’ 무성한 풀밭을 바라보는 내가 슬퍼보였나 보다. ‘내비 둬. 이젠 풀도 저절로 지칠 때가 됐잖아.’ 언니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한 달이 넘도록 비워뒀던 집이니 오죽 하랴. 아직 환자인 언니가 마당을 다듬을 수도 없고.
언니랑 수다를 떨다가 ‘우리 어둡기 전에 가야해. 0서방이 눈이 나빠져 밤길 운전은 힘들어.’ 그랬더니 ‘저녁 먹고 가라. 네가 운전하면 되잖아. 나도 온종일 뭘 먹기가 싫어 안 먹었다.’ 그런다. 환자가 혼자 있으니 밥 챙겨 먹기 어렵다. 누가 챙겨주는 밥도 먹기 싫을 텐데. 손수 밥 차려 먹는 것이 어디 쉬운가. 그래서 인공관절 수술하거나 허리 수술한 사람들이 요양병원이나 재활원에 입소해 몇 달을 산다고 했다. ‘딸집에 좀 더 있다 오지. 혼자 있으니까 먹는 게 부실하잖아. 잘 먹어야 되는데.’ 그랬지만 내 집이 제일 편한 것은 나도 안다. 언니를 승용차에 태우고 소문난 맛 집을 찾아갔다. 언니를 만나러 올 때마다 가는 음식점이다. 나오는 음식이 깔끔하고 친환경적이라 부담이 없다.
저녁을 먹고 나와 언니를 다시 친정집에 내려주고 고향마을을 돌아 나왔다. 낯선 길이 되어버린 고향이지만 골목길은 어릴 적 추억이 배어 있다. 논이었던 들은 온통 감나무 밭이 되었다. 군데군데 저장고를 겸한 작업장이 생겼지만 고향은 고향이었다. 곶감마을로 자리 잡은 고향, 어려서 떠난 고향에 늙어서 들어온 자식들이 사는 곳, 엄마의 친구였던 이웃 할머니는 백 살이 넘었는데 아직 살아계신단다. 물론 아흔 중반에 요양원에 입소했지만. 그렇게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좋을까. 노망에 잡혀 사실 텐데.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잘 죽는 법을 터득해야 하리라. 연골주사 맞은 자리가 알싸하게 아파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