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지 않는 시간
나영순
혼자일 때 더 흔들리는 이파리처럼
달은 맑은 하늘에서 더 외롭다
멀리 떠나온 바람이 길을 잃듯이
제 그림자조차 지우지 못하는 파도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을 때
가을 산은 늘 그 자리를 지킬 테지만
낮은 구름이 하늘을 더 그리워하는 것처럼
바람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꿈은 내가 쫓기도 전에 다가와
채 붙잡을 새도 없이 지워지듯이
그래도 나는 돌아가지 않을 테다
내가 나에게 나를 적어넣은 그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나는 나만의 빛을 키울 것이다
그 끝이 수평선에 닿을 때까지
언덕에서 오래도록
하늘이 열릴 때까지
나는 그렇게 잊혀지지 않게
서 있을 테다
빛의 시작
나영순
그림자가 지워지기 시작했다
물 밑에 세워놓은 짙은 기억까지
숨을 오래 참아야
가을을 오래 견딘 늦 사과 같은
빛들을 잡을 수 있다 했는데
별이 한 움큼씩 빛을 들이는 데도
나는 숨을 참지 못했다
허수아비 같은 시간들이
너부러진 가을의 들녘 끝에서
나그네처럼 발을 접는다
어둠이 어둠 속에서 더 깊은 그림자를 삼키듯이
빛은 또 누군가를 부르겠지
아무도 없는 공터를 휘두르는 바람처럼
슬그머니 눈을 뜨겠지
아직도 숨을 참지 못하는 나에게
천천히 속삭이겠지
가을빛은 늘 그렇게 다가올 거라고
숲에 잠긴 시간들을
붙잡고 있을 거야
언제나처럼 그림자를 꺼내놓을 때까지
거울
나영순
넌 지금 한쪽만 바라보고 있잖아
너에게 난 늘 그 한쪽이었어
네가 말했을 때도
나는 기다릴 수 있다고 했고
네가 내 눈을 바라볼 때도
나는 오래 기억될 수 있다고 했어
너는 나에게서 거울일지도 몰라
네가 하루도 보이지 않으면
나는 벌써 세상이 어두워져
그림자를 잃어버린 듯
기억들을 더듬을 수밖에 없어
나는 차갑게 식지 않을 거야
거울을 봐 입김은 사라져도
너는 그대로잖아
너는 그렇게 나에게 왔어
네가 나를 바라보는 것처럼 말야
나는 네에게서 소리가 될거야
네가 내 발자국을 듣는 것처럼
언제든지 네 곁에서
나를 바라볼 거야
카페 게시글
♥ 나영순 시인방
덕향문학 15호 원고(3편)
靑鏡 나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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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15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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