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지하상가를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반포역에 닿았다. 서울 살 때 자주 다니던 곳이었지만 이렇게 지하로 걸어가보기는 처음이다. 보통은 터미널에서 신사동까지 아주 너끈하게 걸어[....]가버렸으니까. (먼산) 습도가 낮아서인지 땡볕에서 한 발짝 비껴 서서 나무그늘에 들어가니 좀 시원하다. 그런데 임마 이거는 와 이리 안 오는기고? 하늘은 새파랗게 물들어 흰 뭉게구름이 둥실둥실 떠 가는 것을 보니 여름이 맞긴 맞는가 보다. 아니, 그 이전에 서울 하늘이 이렇게 맑은 날이 보통은 잘 없는데... (웃음) 손전화가 신나게 라이브 와이어를 울어젖힌다.
"니 오데고? 나는 반포역인데."
"아따, 언제 또 그쪽으로 가 계시오? 덥구만."
"야, 니가 오라 캤다이가! 흐이그 이 화상아. 나 3번출구니까, 좌우간 빨랑 튀 온다. 실시."
"하이고 와 또 3번 출구여 하필이면...."
사츄가 데리고 간 곳은 킴스클럽 동관 2층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한 냉면집이었다. 아니, 실은 얘기에 정신 판다고 거기가 어딘지도 처음엔 잘 몰랐다. 뭐 시킬라우? 하고 물어보는데, 지한테 얻어먹을 약속이 있던 고로 그때까지만 해도 그냥 동네 상가에 중국집인줄 알고 - 동생뻘인 놈인데 내가 뭘 얼마나 처먹겠다고, 그 삼겹살 얘기도 원래 반농담이었다 - "짱깨."라고 해버렸던 것이다. 놈이 므엉한 얼굴로 형,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우? 하는 표정이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휘 둘러보니 뭔가 인테리어 때깔부터 다르다. 어허허허. 어쨌거나, 그럭저럭 괜찮았다. 고맙다 이놈아, 마산 오면 연락해라. 바닷바람을 안주 삼고 광어에 도다리를 25도 무학과 함께 목구멍을 알싸하게 태워 보자꾸나.
심심해서 신림동까지 놈을 끌고 가고 싶었지만 민폐될 거 같아서 빠이빠이 보냈다. 한 권당 1400페이지(두께만 약 12cm)나 되는 양장본 책 여러과 56EA 테이프 두질을 잔뜩 지고 땡볕에 돌아다니는 건 나 하나로 족해서다. 사츄와 헤어지자마자 폰이 뚜욱 하고 울었다. 치마로부터의 문자메시지. [서울역도착, 타격지점과 시간을 알려주십시오] 신촌 6시라고 일단 답을 날린 후 289-1을 기다린다. .... 아 맞다. 명박이가 지랄염병 시스템으로 바꾸는 통에 번호가 바뀌었지. 그나마 찾아보니 노선 자체는 남아있다. .... 30분 걸리던 게 한시간이 걸려서 문제지. 전체적으로 노선의 평균 표정속도가 뚝 떨어진 느낌이다.
신림동 고시촌, 여전히 인상좋은 법문서적의 주인 아저씨 - 권노갑과 동기 동문인 법대(당시는 법정대학)의 까마득한 선배뻘이다 - 가 오랫만에 왔다고 반가워한다. 오래 되어서 잊어버리신 줄 알았는데, 역시 저번에 국제법학회 심포지엄 할 때 스폰싱 뛴 걸 기억하시는겐가. 그렇다면 부끄러운 기억인데. [....] 어쨌든 뜻 아니게 냉커피까지 얻어 마시고, 좀 더 에어콘 바람에 쉬어 가라는 아저씨 아주머니 말은 고맙다 카고 일단 나섰다. .... 스스로 생각해도 참 가방에 어찌어찌 잘 우겨넣었다 싶은데, 책들이 잔뜩 들어가 있는 통에 가방이 숫제 각이 딱딱 질 지경이다. 무게로 가늠하건대 이 정도면 20Kg는 될 거 같다 - 빈 가스통이랑 무게가 똑같다.[.....]
신림동에서 신촌으로 바로 가는 142번이 사라져 버렸다. 이거, 한강 넘어가는 노선은 29번 빼놓고는 전멸이구만?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아니, 시작이었다. 명박이의 [지랄염병]은 지금부터였던 것이다.
496번 마을버스를 기다려 탔는데 - 역시 초록색으로 도색되어 있고 꽁무니에는 영문모를 G라는 이니셜이 박혀 있다 - 500원도 아니고, 현금은 550원이란다. 뭐하자는 플레이냐? 마산도 승차권은 780원, 현금은 800원이라고. 거스름돈 주워 담기가 불편하다. 서울대입구 역에서 전철로 갈아타기 전에 "신촌 한 장 주세요"라고 천원짜리를 하나 내밀었더니 거스름돈이 돌아오지 않는다. 퍼뜩 노선도를 보니 신촌까지 1,000원이다. 마지막으로 수도권 전철을 탔던 게 작년 크리스마스이니, 무려 67% 인상인 셈이다. 허허허. 아 젠장, 열받아. 어쨌거나 신촌 가서 어디 피씨방에나 앉아 있어야겠다, 무거운 거 지고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려니 너무 덥다.
당산철교를 건너는데 듀크형에게서 문자가 온다. 타격시간이 몇시냐고 묻는다. 오후 6시, 본인은 곧 신촌 도착이라고 하니 자기도 그렇다 한다. 그런데 항상 초면인 사람과 만날 때는 그렇지만, 엇갈렸다.[....] 옷가방을 군장 모포 싸듯 똘똘 말아서 배낭에 결속했다 말았다 하고 있는 사이 못 보고 지나가버린 모양이다. 어쨌든, 만나서 어딘가 시원한 PC방에라도 앉았으면 좋으련만, 듀형이 볼 일이 있다길래 쭐래쭐래 따라갔다. 여전히 무거운 책가방을 지고서. 2호선 신촌역에서 경의선 신촌역까지 걸었으니 조금은 운동이 되었으려나. 보니까 건물과 건물 사이, 1평도 채 되지 않을 법한 공간에 도장가게가 하나 있는데 찍어놓은 견본들을 보니 참 패셔너블하다. 하지만 듀형, 책에다가 찍을 용도라면 그냥 고무인이 더 싸요.~_~
문자의 러쉬, 러쉬, 러쉬. 슈리오형은 출발했다 하고, 좀비는 전철 놓쳤다 한다. 가뜩이나 안산에서 오려면 시간 잔뜩 걸릴 텐데... 아미타불. 사츄는 아주 원츄스럽게도 2호선을 거꾸로 탔다고 문자가 왔다. (므엉) 레제에게는 전화를 해 보니 아주 중후한 목소리의 어르신이 받으신다. "어~ 현준이 지금 나갔는데~?" .... 레제가 춘부장더러 본좌 본좌 하는 게, 전파를 타고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실린 내공으로 단박에 이해가 되었달까. (먼산)
접선 포인트인 맥도날드 앞에 서 있기가 너무 더워 일단 안으로 들어갔다.음료를 하나 시켜 놓았는데, 아무래도 콜라 하나 딸랑 시켜놓고 리필하기엔 낮빤대기가 너무 얇아서 그냥 지하 2층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듀형은 TRPG에 버닝하고 나는 무거운 가방을 내려 놓고 "읽어 보슈."하며 오늘 구매한 책을 꺼내 놓아다. 물론 그는 벙쪘다.
"그런데 이렇게 지하에 처박혀 있으면 사람들이 알기나 알까?"
"걱정 마. 신촌 맥에서 모인다 하면 원래 다들 이리 오게 되어 있다고."
... 라지만, 역시 모임을 제언한 자로서는 염려가 되게 마련이다. 해서 일단 듀형더러는 여기서 죽치라고 하고 지상으로 올라와 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내 상식으로는 그냥 맥도날드 앞이라고 하면 지상 입구인 것 같으니 말이다. 아니나다를까, 앞치마군이 거기서 서성대고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냐고 물으니 다섯 시 좀 넘어서부터였다고 한다. 어허허허.[.....] 조금만 시간이 맞았으면 만내일 뻔 했구먼.
"형 그거 뭐에요?"
"응? 아, 이거. 못알아볼까봐 들고 나왔지 뭐..."
....고시계 8월호 뒷면에는 김준호 교수의 [民法講議] 선전이 세로로 1/3이나 차지하는 대활자로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먼산)
기다림, 기다림. 약속의 시각이 다가옴에 따라 전뇌공간에서 문자와 0과 1의 조합으로만 내게 인사하던 자들이 현실적으로 구체화되어 다가온다. 내 뇌리에 투영되는 시선에 담긴 그들의 모습과, 내 오감으로 받아들이는 말소리, 숨소리, 체향, 버릇들. 스물네 개의 눈동자는 각각 짝지어 모두 다른 말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쓰보이 사카에? 아니면 오오이시 선생님? 확실한 것은 여기 생각하고 있는 나 역시 실존하고 있지만,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은 내 앞에 서 있다. 나는 그들을 본다. 그러므로서 그들은 전뇌상에서 인격으로만 존재하지 아니한다. 내 앞에 실존하고 있는 거다. Cogito, ergo sum, et, Video, ergo est!
해가 많이 기울어졌다.
빌딩 그림자가 산 땅거미처럼 몰려와 신촌로터리를 어둑하니 감싸 덮었다.
(계속)
P.S.
철도관련 이야기는 마지막날에나 나올지도 [.....] (수원->마산간 새마을)
Cogito, ergo sum - 유일하게 제 뇌리에 각인되는 말이로군요....저 말을 윤리선생이 풀이해 줬었는데....저건 책에 있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닌....존재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고무인이라...
그래도 조금 럭셔리하게 만들어 보고 싶었을 뿐...
블랙// 그 말도 맞아. 정확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해 나가더라도, "지금 생각하고 있는 주체인 [나]가 실존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다. 라는 논리이지.
민법.. 뭐유?-_-;;;
아직 메인스토리가 안올라왔군 모큥
흐응 ㅇ _ㅇ , 서울나들이군요.
서울안가본지 한 이년지났나아.. 흐응..
고모님들이 오라고 손짓하시는데도 학원덕에 못가본.
아아 ㅂ , 서울가고싶어.
기행문은 자기가 느낀대로 확 쓰는 것이 최고지. 어허허;;; 하여간 너도 어쩔 수 없는 글쟁이인 듯해.
...허리가 많이 아팠었어요.[음울]
교통 노선 문제가 크긴 큰 모양이로군요 -_-;
크억! 이제 메인인가 싶었는데 짤리다니! [버럭]
'지랄염병'에 올인 [...]
[흐늘흐늘]
명박개편이 참 압박이군.....불편하겠어;
....메..메인내놔!!!..;ㅂ;
사츄 사진 멋지구랴; 으어, '손전화'의 어감이 좋다
명바기 나빠요!!
DG// 만들긴 만들었수?~_~
적돌// 민법강의. 아마 곽윤직 교수 책 이후 최대의 힛트상품일걸[...]
레제// 사진이 있어야 그 지옥도를 그리지[...]
시에// 대학을 4대문 안으로! (실제로 4대문 안에는 우리학교랑 서울대 의대밖에 없..-_-)
슈리오// 어쨌든 뇌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중. 쓰기 쉽네 억수로.~_~
치마// 헉. 허리는 남자의 생명!
eienEst, 유루, savants// 명바기 개새끼! (실제로는 배의 아들이라고 적고 싶었으나...~_~)
야옹이, 치야// 여러분을 미져리 1, 2로 임명합니다아(...)
verisimo// 어감 좋지?(웃음)
후와~언제나 장편의 기행문 재밌습니다>_<)/
본 스토리는 아직 안나왔다니 어떤 클라이막스가...;;
...부럽!!
GRYB 노선은 실로 살인적인 돈을 잡아먹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