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역사에서도 새로운 정권이 출범하면 가장 고민이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반대 정파의 핵심 인물에 대한 처리 문제이다. 전통시대 역시 이러한 고민이 컸다. 정권 창출에 장애가 되었던 인물에 대한 회유가 성공하지 못할 경우 그를 제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고려 최고의 충신이지만 조선건국에는 눈의 가시가 되었던 인물 정몽주(鄭夢周:1337~1392). 이성계 세력은 그에 대한 회유를 계속하였지만 정몽주는 끝까지 거부하였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피의 보복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몽주의 죽음에 대해 이방원이 휘두른 철퇴에 의해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그 피가 아직도 선죽교에 그대로 남아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알고 있다. 과연 『조선왕조실록』은 정몽주의 죽음을 그렇게 기록하고 있을까? 『태조실록』 총서에는 정몽주가 죽게 된 원인이 그가 연명(連名)으로 글을 올려 조준(趙浚)ㆍ정도전(鄭道傳) 등의 목 베기를 청한 것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정몽주가 선공을 가하자,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이방원(李芳遠:1367~1422)이 나섰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제거할 것을 청하였으나, 이성계가 이를 허락하지 않자 직접 휘하의 군사들을 이끌고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실록의 기록을 보자.
(조)영규(英珪)ㆍ조영무(趙英茂)ㆍ고여(高呂)ㆍ이부(李敷) 등으로 하여금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들어가서 정몽주를 치게 하였는데, 변중량(卞仲良)이 그 계획을 정몽주에게 누설하였다. 정몽주가 이를 알고 태조의 사제(私第)에 나아와서 병을 위문했으나, 실상은 변고를 엿보고자 함이었다. 태조는 정몽주를 대접하기를 전과 같이 하였다. 이화가 전하1)에게 “정몽주를 죽이려면 이때가 그 시기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미 계획을 정하고 나서 이화가 다시 말하기를, “태조께서 노하시면 두려운 일인데 어찌하겠습니까?”라 하면서 의논이 결정되지 못하였다. 이방원이 말하기를, “기회는 잃어서는 안 된다. 태조께서 노하시면 내가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아뢰어 위로하여 풀도록 하겠다.”라 하고는, 이에 노상(路上)에서 치기를 모의하였다. [使英珪、趙英茂、高呂、李敷等, 入都評議使司, 擊夢周, 卞仲良洩其謀於夢周。 夢周知之, 詣太祖第問疾, 實欲觀變也, 太祖待之如初。 和白我殿下曰: “誅夢周, 此其時矣。” 旣定計, 和復曰: “公怒可畏, 奈何?” 議未決。 殿下曰: “機不可失。 公之怒, 吾當陳大義以慰解之。” 乃謀擊於路上。]
1) 전하:『태조실록』은 태종대에 편찬되었으므로 당시의 왕인 태종을 전하로 지칭한것이다.
당시 태조는 정몽주 제거에 반대했으나, 이방원은 휘하의 사병들을 동원하고 독자적으로 정몽주 제거에 나선 것이다. 이어지는 기록을 보자.
전하는 다시 조영규에게 명하여 상왕(上王:정종)의 저택(邸宅)으로 가서 칼을 가지고 곧바로 정몽주의 집 동리 입구에 이르러 몽주를 기다리게 하고, 고여ㆍ이부 등 두서너 사람으로 그 뒤를 따라가게 하였다. 정몽주가 집에 들어왔다가 머물지 않고 곧 나오니, 전하는 일이 성공되지 못할까 염려되어 친히 가서 지휘하고자 하였다. 문 밖에 나오니 휘하 군사가 말에 안장을 얹어 놓고 밖에 있는지라, 드디어 말을 타고 달려 상왕의 저택에 이르러 몽주가 지나갔는지의 여부를 물으니, 지나가지 않았다고 하므로, 전하(이방원)가 다시 방법과 계책을 지시하고 돌아왔다. 이때 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유원(柳源)이 죽었는데, 정몽주가 지나면서 그 집에 조상(弔喪)하느라고 지체하니, 이 때문에 영규 등이 무기(武器)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되었다. 정몽주가 이르매 영규가 달려가서 쳤으나, 맞지 아니하였다. 몽주가 그를 꾸짖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나니, 영규가 쫓아가 말머리를 쳐서 말이 넘어졌다. 몽주가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서 급히 달아나니, 고여 등이 쫓아가서 그를 죽였다. (『태조실록』, 총서) [殿下更命英珪至上王邸取劍, 直抵夢周家洞口以要之, 呂、敷等數人隨之。 夢周入, 不留卽出。殿下恐事不濟, 欲親往指揮。出門, 有麾下士之馬具鞍在門外, 遂乘之, 馳至上王邸, 問: “夢周過否?” 曰:“未也。” 殿下更授方略而還。 時前判開城府事柳源死, 夢周過弔其家遲留, 故英珪等得備兵器以候之。 夢周至, 英珪馳擊不中, 夢周叱之, 策馬而走。 英珪追擊馬首, 馬蹶, 夢周墜地, 起而急走, 呂等追殺之。]
▶ 개성 선죽교 (사진출처: 영일정씨포은공파종약원(迎日鄭氏圃隱公派宗約院)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정몽주는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이 휘두른 철퇴에 맞아 단번에 쓰러진 것이 아니라, 처음 철퇴를 피해 달아나다가 말에서 떨어진 후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가 흘린 핏자국이 선죽교에 남아 있었다.’는 전언은 실록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처럼 조선의 공식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는 정몽주의 죽음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르게 평범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태조실록』을 편찬한 것이 태종 때인 사실과도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정몽주 제거의 핵심인물이었던 이방원이 현왕(現王)으로 있는 상황에서 기록한 실록인 만큼 설사 정몽주의 죽음이 극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할지라도, 평범하게 서술 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조건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정몽주 참살의 주역 이방원은 왕이 된 후 정몽주의 충절을 인정하는 아이러니를 보이게 된다. 1401년(태종1) 태종은 권근(權近)의 건의를 받아들여 정몽주를 영의정으로 증직하였다. 자신이 정몽주의 참살을 주도했지만 유교국가 조선에서 정몽주의 충절은 체제 유지에 매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후대에도 정몽주는 표창의 대상이 되었다. 16세기 사림파는 그들의 사상적 연원에 정몽주가 있음을 강조하였고, 영조는 정몽주에게 제사를 지낼 때 이름을 부르지 말고 공(公)이라 할 것을 칭했으며, 1740년 선죽교에서 ‘도덕과 정충이 만고에 뻗어갈 것이니[道德精忠亘萬古] 포은공의 곧은 절개는 태산처럼 높구나![泰山高節圃隱公]’라는 열 네 글자를 써서 유수로 하여금 비석에 새겨 세우게 하였다. 그럼 아직도 남아 있다는 선죽교의 핏자국의 진실은 무엇일까? 아마도 정몽주가 피살된 직후 선죽교에는 붉은 흔적이 있었고, 이것을 정몽주의 피라고 인식하는 믿음들이 후대에 퍼져 나가면서 거의 진실로 확정되었다고 판단된다. 후대의 시인, 묵객들도 이러한 사실을 당연시하면서 시를 썼다. 허균의 시문집인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의 ‘포은(圃隱)의 구택(舊宅)을 지나면서 노래하다.’는 시에서도 선죽교의 피는 당연히(?) 정몽주의 흔적임을 노래하고 있다.
포은이라 정 선생은 고려 말엽 그 시절에 圃隱先生在麗末 충절이 늠름하다 어느 뉘 빼앗으리 忠節凜然不可奪 어찌 이학만을 전하였을까보냐 豈惟理學傳不傳 공이 조정에 계실 땐 나라도 살았거든 公在巖廊國幾活 송악산의 왕기는 오백 년에 끝이 나고 神嵩王氣五百終 몽금척(夢金尺)은 하룻밤에 수강궁으로 내려갔네 金尺夜下壽康宮 공께서 은띠 드리우고 태연자약 그 자세로 公也垂紳不動色 호랑이가 깊은 숲에 도사린 듯 앉아 있네 隱若虎豹蹲深叢 선죽교라 다리 위 뿌려진 한 줄기 피 善竹橋頭一腔血 이름은 우뚝 솟아 서산과 나란하니 名與西山並崷崒 성읍이 남으로 옮겨 조정과 시전은 비었지만 城邑南遷朝市空 옛 사당의 향화는 상기도 끊임없네 遺祠香火猶芬苾 나는 사내 형을 따라 집터를 찾아보니 我從四耐尋宅基 무너진 담장이라 풀 덩굴만 엉기었네 頹垣野蔓生離離 <『성소부부고』, 시부(詩部)1, 무술서행록(戊戌西行錄)>
18세기의 학자 김창협(金昌協:1651~1708) 역시 ‘선죽교’라는 시에서, 시냇물은 콸콸콸 물가 풀은 파릇한데 溪水濺濺溪草綠 시냇가 작은 비석 고려 왕조 기록일세 溪邊短碣記麗朝 지금까지 장홍의 피 남아 있는 듯한데 至今疑有萇弘血 만고토록 예양교 그 슬픔과 마찬가지... 終古悲同豫讓橋...
라 하여 주 영왕(周靈王)의 충신 장홍(萇弘)이 모함을 받아 촉(蜀)으로 쫓겨나자 할복자살을 하였는데, 그때 흘린 피가 3년 뒤에 푸른 옥으로 변한 상황과 전국 시대 진(晉)나라 예양이 조양자(趙襄子)에게 죽은 왕 지백(智伯)의 원수를 갚기 위해 비수를 품고 숨어 있다가 조양자에게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상황을 정몽주와 비교하고 있다.2) 장홍의 피나 예양교에 남아있는 피처럼 선죽교의 피도 정몽주의 피임을 당연시하고 있다. 정몽주의 충절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이 민간에서도 지속되었음은 이중환이 쓴 『택리지』의 팔도총론(八道總論) ‘경기(京畿)’의 다음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2)예양이……있다: 중국 태원부(太原府) 양곡현(陽曲縣) 분수(汾水) 위에 있던 예양(豫讓) 다리는 전국 시대 진(晉)나라 예양이 조양자(趙襄子)에게 죽은 본래의 임금 지백(智伯)의 원수를 갚기 위해 비수를 품고 숨어 있다가 조양자에게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곳이다. 《사기 권86 자객열전(刺客列傳)》 정몽주가 새 임금을 섬기지 않고 절개를 고수하다 살해당한 선죽교가 예양교의 경우와 비슷하다.
선죽교는 정몽주가 죽임을 당한 곳이다. 공양왕 때 정공이 재상으로 있으면서 혼자만 태조에게 아부하지 않았다. 그래서 태조 문하의 여러 장수가 조영규를 시켜 다리 위에서 철퇴로 때려 죽였다. 그러자 고려의 왕업(王業)이 드디어 옮겨지게 되었다. 그 후 본조에서 추증하여 본조의 직함인 의정부 영의정으로서 용인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자, 곧 벼락이 내려 부서져 버렸다. 정씨의 자손이 고려의 문하시중이라는 직명으로 고쳐 쓰기를 청했더니 지금까지 무사하다. 충성스러운 혼과 굳센 넋이 죽은 뒤에도 없어지지 않았음을 볼 수 있으니, 이는 또한 두려워할 일이다. [善竹橋 卽鄭夢周遇害處也 恭讓時 鄭公以相臣 獨不附於太祖 太祖門下諸將士趙英珪 以鐵堆 殺於橋上 而麗祚遂移矣 後本朝追贈 以本朝職銜議政府領議政 立碑龍仁墓前 卽雷擊碎之 鄭氏子孫 請改書高麗門下侍中職名 而至今無事 可見忠魂毅魄之死 後不泯也 其亦可畏也]
위의 기록에서는 정몽주에게 조선의 관직을 추증하자 비석이 벼락을 맞고, 고려의 관직을 추증하자 무사했다는 기록이 흥미롭다. 자신의 소신과 원칙을 지켜 정권에 타협하지 않고 죽음의 길을 택한 정몽주. 정몽주는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충절의 대명사로 우리에게 자리하고 있는 인물이다. 일시적인 권력과 부귀영화 대신에 정도(正道)와 원칙을 택한 정몽주에 대한 기억은 선죽교의 피와 비석으로 구현되어 현재에도 살아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