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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16일 (금) - 코타키나발루로!
오전 2시. 어제 밤, 에어컨을 끄고 오너 선실에서 잠들었다. 끈적한 땀에 깨어 냉수를 마신다. 쉽게 잠이 돌아 올 것 같지 않다. 다시 에어컨을 켠다. 잠들기 위해 동영상도 보고 이런저런 잡생각에 빠진다.
오전 3시. 갑자기 추워진다. 다시 에어컨을 끄고 오너 선실로 돌아간다. 잠들 수 있을까? 항해 전날이면 늘 이렇다. 오늘 항해는 겨우 187해리, 35시간짜리 항해. 그래도 모든 항해 과정은 똑같다. 1.5미터 이상이면, 어차피 모든 바다는 안전하지 않다. 그러다 까무룩 기절하듯 잠에 굴러 떨어졌다.
오전 5시 30분. 알람에 깨었다. 시리얼에 찬 우유를 부어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한다. 에어컨을 분리하고 어디다 고정해야 풍랑 때 굴러다니지 않을까? 하늘은 잔뜩 찌푸리고 있다.
오전 6시 10분. 고민하던 차에 깡깡 개 짖는 소리가 나면서, 개주인 Karis 호의 Colin Mclean 호주 선장이 왔다. 어제 오전 7시 약속했는데 벌써 왔다. 실은 조용히 나가려고 했다. 바람 없는 오늘 같은 날은 단독 출항이 더 편하다. 58년 개띠인 Colin Mclean 선장도 아침잠이 없나보다. 아쉽게도 정 들기도 전에 이별이다.
오전 6시 30분. 마리나 관리인 ‘핀’이 보내준 조석표에 따르면, 오전 8~9시 사이가 가장 안전하지만 지금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Colin Mclean 선장과 그의 필리핀 크루가 계류줄을 풀어준다. 인사를 하고 출항한다. 필리핀 크루가 배가 폰툰에 닿지 않도록 바우를 힘들여 민다. 나는 바우트러스트로 좌현으로 방향 전환한다. 바우트러스트는 좁은 계류장에서는 아주 도움이 된다. Colin Mclean 선장과 그의 필리핀 크루, 강아지 두 마리에게 손을 흔들며, 나는 Miri 마리나를 출항한다.
마리나 입구 왼쪽에 정박된 큰 보트에 바짝 붙어간다. 2.4, 2.3... 미터까지 낮아지던 바다가 입구를 벗어나자, 2.5미터로 다시 깊어진다. Miri 마리나는 정말로 가족적이고 조용한 마리나다. 깊이 정 들면 떠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Miri 마리나로 올 사람은 먼저 마리나 매니저 ‘핀’ 에게 연락해서 조석표(Tide table)를 받고 입출항 하는 것을 권장한다. 안 그러면 좌초한다. 아참 디젤이나 제리 캔을 사기전에 일단 주변 선장들에게 여러 번 물어 봐라. 안 그럼 바가지 쓴다.
Miri 마리나 매니저 Fin 전화 : +60 14-273 0186
오전 7시. 항구 밖은 앵커링 중인 중형 카고들과 여기저기 석유 시추 시설들이 많다. 아침 일찍 그물을 치는 작은 어선도 있다.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이러 저리 뛰어다니며 계류줄을 정리하고, 팬더를 올리고, 제리캔 고박을 확인한다. 제대로 침로를 잡아 놓고 커피를 한 잔 끓인다.
오전 7시 30분. 바람은 2.3노트, 엔진 Rpm 1,450. 선속 5.8노트. 인젝터 크리너가 별 무소용인지, 엔진 부조 현상이 그대로다. 코타키나발루엔 좋은 엔지니어가 있을까? 부조를 수리하고 가나? 이대로 그냥 한국까지 가나? 생각이 많다. 에이 냉수나 한 잔 마시자.
오전 8시. 단독 항해라고 별 다를 건 없다. 레이더를 켜고, 빨래를 해서 넌다. 아침에 먹은 그릇도 설거지 한다. 아직은 선속이 잘 나오니 내일 일몰 전에 들어 갈 거다. 어제 오후에 디젤 대금 2,100링깃를 ATM에서 찾은 뒤로, VISA 카드가 잘 안 된다. 코타키나발루 가서 계좌 인출이 잘 될까? 하루도 걱정 없는 날이 없다. 코타키나발루에서 인터넷 되면, 카드 관련 검색부터 해봐야겠다.
출항 하다보니 세일 요트 한 대가 Miri로 접근중이다. 어제 Colin Mclean 선장이 말하던 친구인가 보다. 그들은 오늘 저녁에 모여 즐거운 파티를 할 예정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오늘 아침 출항이다. 좋은 친구들을 더 많이 만들 기회를 놓쳤지만, 그들의 파티가 행복한 추억으로 남기를 기도한다. 항구에 남겨두고 온 벗들에게 문자로 간단히 출항 인사한다. 모두들 “have a safe trip! Fair winds!” 라고 답을 준다. 이렇게 세계는 하나다. 전쟁 따위는 일부 제 정신 아닌 지도자들의 머릿속에나 있는 거다. 국민들에게 불행을 주는 지도자들이 사라지면 전쟁도 없겠지.
에어컨 양쪽에 비스로 천 조각을 고정한다. 그런 후 노끈으로 세면대 손잡이에 단단히 고정한다. 이 정도라면 어느 정도 풍랑에도 끄떡없을 거다. 어차피 바다에서는 오래가는 물건이 없으니, 한 5년 쓰면 진짜 오래 사용하는 것이 될 거다. 에어컨아, 여름을 부탁해!
오전 9시 45분. 먼 바다 쪽으로 비구름이 레이더에 잡힌다. 조금 일찍 스타보드 쪽으로 침로를 변경한다. 풍속 브로드 리치 8노트, 엔진 Rpm 1,250. 집세일 100%, 메인세일 100%, 선속 5.7~6.1 노트. 170 해리 남았다. 해무 속에 희미하게 나타난 좌현의 석유 시추 시설에서는, 화염이 하늘로 치솟고 있다.
우리 딸 김리나의 아침 유아원 등원 사진을 보고 있다. 이번 주 월요일(6월 12일)부터 등원이니 일주일이 채 안 되었다. 내가 Miri마리나 입항하던 날이다. 꼬맹이는 엄마의 바짓단을 잡고 안가겠다, 보챈다. 너무 귀엽고 너무 가엾다. 가면 어차피 친구들과 잘 놀 텐데 그래도 당장 우는 모습은 가엾다. 너무 너무 늦게 딸을 낳는 것은 정말 권장치 못할 일이다. 지나치게 귀여운 딸의 모습은 심장에 좋지 않다. 사방이 유전 시추선이고, 오가는 배들도 많은데, 불성실한 김선장은 딸 사진을 보며 훌쩍이고 있다. 아아, 그립고 그리운 일상이다. 과연 나는 나이 들어 적당한 배를 가지고 동남아시아를 오가며 노년을 보낼 수 있을까?
오전 10시. 7시 방향에 엄청나게 큰 먹구름이다. 그쪽에서 계속 천둥소리가 들려온다. 아마 폭우가 쏟아지고 있을 텐데, 제네시스가 이런 비구름을 잘 피해 가기를 기도한다. 필리핀 마닐라로 오늘 아침 9시에 출항한다는 Yulya M.juliana & Valdum Russia 커플은 잘 출항했을까? 마닐라에 며칟날 도착하는지 왜 묻지 않았을까? 코타키나발루에 도착하면 곧장 안부를 물어봐야겠다.
오전 10시 15분. 공지영의 소설에 손을 대었는데, 갑자기 포트쪽 브로드 리치에서 20노트 강풍이다. 선속이 8.5노트다. 즉시 메인세일 붐 시트를 풀어 조금 열어 준다. 힐긋 마스트와 붐을 연결하는 스텐 볼트를 보니 잘 고정되어 있다. 스리랑카 출항 직후 붐 고정 볼트가 빠져 깜짝 놀랐던 기억이라니. 지금도 오싹한다. 풍속 Run 13~14노트, 선속 7.0 노트. 166마일 남았다. 21해리 왔다. 비구름이 제네시스를 추격중이다. 벗은 등짝에 빗방울이 느껴진다. 제네시스야, 도망 가잣!
오전 11시. 이른 점심을 준비한다. 쌀밥에 오이+두반장, 햄계란 부침, 김과 김치, 고추장 볶음이다. 생각 보다 만찬이다.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에서는 계란을 조심해야 한다. 어차피 마트에서 사는 거고 깨보지 않으면 모르지만, 동그란 노른자가 탱글한 것은 60%다. 계란을 깨자마자 노른자가 확 풀리는 것은 30%. 나머지 10% 중, 어떤 것은 계란 노른자가 시커멓게 썩어 있거나 내란 내부가 허연 콧물 같이 변한 것도 많다. 아프리카에서부터 지금까지 계란은 별도의 그릇에 깬 다음, 내용물을 확인하고 사용한다. 전에 프라이팬에 햄을 다 담고 나서 계란을 올렸다가, 그대로 바다에 버린 적이 있다. 한국에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실패다. 아주 오래전 신선한 계란 고르는 법 같은 것이 생활의 지혜 같은 Tip으로 본 적이 있는데, 아마 지금 한국에서 ‘신선한 계란 고르는 법’ 같은 것을 기억하는 남자가 있을까?
오전 11시 40분. 바람이 계속 바뀐다. 대기가 불안정한 탓이다. 강풍과 무풍이 반복되고 있다. 유전 지대에서 느껴지는 매연의 내음. 유정에서 태우는 가스와 기름 때문일 거다. 깔끔해야 될 남중국해에서 도심에서나 있을 법한 매연 냄새를 맡으며 항해중이다.
빨래를 바라보니 한국서 가져온 속옷과 반바지들 중에 이미 다 헤어져 버린 것들이 눈에 띤다. 5개월 반이라는 시간은 그 질량이 가볍지 않나보다. 반년 아닌가? 아무도 보지 않으니 당분간 그대로 입을까? 코나키나발루에서 두어벌 살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뒤돌아보니 육지는 이미 멀어져 보이지 않다. 이제 코타키나발루에 도착하면 타이완 가오슝과 대한민국. 두 구간이 남았다. 7월 초에 반드시 도착하고 싶다. 부디 태풍이 없기만을 소망한다. 엇! 하는 사이에 잠에 굴러 떨어졌다.
오후 1시 20분. 삑삑거리는 가드 존 알람소리에 눈을 떴다. 2시 방면 3마일 지점에, 건설 중인 석유 시추 시설이 보인다. 갑판이 평평한 배 두 척이 석유 시설 양쪽서 작업 중이다. 나비오닉스 상에는 근방에 Wreck 도 있다. 상당히 복잡한 바다다. 바람은 전혀 없다. 선속은 6.0 노트. 145 해리 남았다. 42 해리 왔다.
더위가 점점 심해진다. 자고난 담요가 흠뻑 젖었다. 그늘 진 곳에 앉아 있어도 2미터 밖의 헐에 반사된 햇살에서, 한증막 열기가 느껴진다. 축축한 담요에 다시 누울 생각 따윈 없다. 하지만 열기를 참는 것 외엔 달리할 일도 없다.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주변 유정에서 솟아나는 화염이 열기를 더하는 것 같다. 바람은 윈디와의 약속을 어기고 사라졌다. 노름꾼, 술꾼 같은 남중국해의 바람이다. 에라 샤워나 한번하자. 그저 몸에 물 칠하고 닦아낼 뿐인 샤워지만, 땀이라도 닦아내자.
오후 3시 30분. 싱글핸드, 혼자서 하는 항해는 이제 내 삶의 일부가 되어 버린 느낌이다. 평화롭고 편안하다. 나는 독일 선장 마르코나, 덴마크 선장 톨스, 호주 선장 데이빗이 되기는 글러 먹은 것 같다. 나는 잘해야 미국 선장 윌리엄이나, 아주 잘되면 한국의 김석중 선장님이 될 예정이다. 문득 동남아시아를 세일링 하는 나를 그려 본다. 의외로 잘 어울린다. 나는 결국 고독해야만 하는 팔자려나. 대낮에 우울해 진다. 수생 식물들과 원목 덩이가 떠다닌다. 만만치 않다.
오후 3시 50분. 바람이 분다. 벗은 등에 느껴진다. 집 세일을 120%로 더 편다. 풍속 포트 크로스 홀드 7노트. 선속 6.3 노트. 집나간 바람이 이제 윈디에게 돌아 온 것인가? 이렇게만 계속 불어 줘도, ETA는 내일 오후 1시다.
오후 4시 30분. 바람이 노고존에 들어선다. 집세일 펄럭거려 감는다. 이 역시 윈디에는 없는 일이다. 바람은 여전히 철없다. 바람처럼 살고 싶다는 말은 정말로 쉽지 않은 소망이다. 메인세일 100% 만으로 선속 5.9 노트. 그래도 나는 바람처럼 살고 싶다. 햇살이 우현 8시 방향으로 내려앉는다. 차양을 친다. 김기자님이 스리랑카로 전달해 주신 차양은 아주 효과가 좋다. 장거리 항해의 필수 아이템이 될 것 같다.
코타키나발루에 도착하면 문선장님께, 가오슝 마리나가 야간에도 입항 가능할 정도로 조명이 밝은 곳인지 확인해봐야겠다. 잊지 말자.
오후 5시 10분. 현재 반다르스리브가완 앞 바다를 통과중이다. 노고존 9.9 노트다. 윈디에는 전혀 표시되지 않았다. 지금은 뒷바람을 신나게 받기로 예보가 되었었다. 이런 게 항해다. 바다 한가운데 속사정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판단되는 게 아니다. 선속이 5.1 노트까지 떨어진다. 바다는 여전히 디지털의 정확성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이래서 선장의 역량이 항해를 좌지우지하는 거다. ETA가 오후 4시 27분으로 늦추어 진다. 야간에 입항하는 일만 없으면 좋겠는데... 우현 1시 방향에 카고선이다. 충돌각은 아닌지 확인중이다. 일단 스타보드 20으로 침로 변경한다. 30분 후 카고선이 제네시스 앞을 지난다. 항해법이 뒤바뀌는 순간이다. 대형 상선이 범선을 피해야 하는데, 무식한 상선 선장은 그럴 생각이 없다. 내가 피해 가는 수밖에.
오후 6시. 나물밥과 감자볶음, 볶음김치, 오이와 두반장, 계란 프라이로 저녁식사를 한다. 해가 일찍 질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조금 서둘렀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 한잔을 마신다. 이렇게 하루가 지났다. 한국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바쁘다. 코타키나발루 가면 입국, 항해준비, 출국 이렇게 3일이 지날 거다. 그 정도면 충분할거다. 물론 풍랑이 있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그 이상 머물 계획은 없다.
어제 아침, Karis호 Colin Mclean 호주 선장과 함께 하버마스터에 가서 입출국 등록을 할 때 30분 정도 걸려서 투덜댔더니, 그래도 말레이시아는 양호하단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입출국이 하루 종일 걸린다고 한다. Whole day! 라며, Whole에 강세를 둔다. 인도네시아는 AIS 무전기 뿐 아니라 몇 가지 점에서 세일러를 귀찮게 하나 보다. 선장들 사이에서 악평이 높다. 수에즈 통과 라인의 악명 높은 마리나들은, 이집트 (포트사이드, 이스마일리아), 오만 Hawana 마리나, 인도,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이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쿠칭 마리나가 상당히 위험하니 가지 말라.
풍속 5.2 노고존 45도, 메인세일 100%, 집세일 80%, 선속 5.3노트다. 114해리 남았다. 73해리 왔다. 파도가 높아진다. 무슨 일이지?
[언젠가 나이 많은 한 신부님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며
저는 무심히 말하였습니다
"빛나는 시절이 있었군요."
그러자 그 신부님의 대답은 간단하였습니다.
"금방이야." - 정채봉, 열 살적의 낙서 中(중)]
낮이 시나브로 사위어가는 초저녁, 정채봉의 ‘좋은 예감’을 읽으며 자꾸 울컥한다. 이사람 참 잔인하다. 울컥거리는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풀어 놓는다. ‘금방이야.’ 정말 그렇다. 살아보니 금방이더라. 더 늦기 전에 장거리 항해를 실행한 것은 정말 잘한 선택이다. 오늘 저녁은 집 생각, 어머님 생각, 딸 아이 생각에 꽤 심란할 것 같다.
오후 7시 45분. 후방에서 자꾸 번갯불이 보인다. 천둥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주 먼데서 벼락이 치고 있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 먼데 유정들이 불을 밝히고 있다. 남십자성이 보이지 않는다. 남십자성이 보이던 자리에 전갈 한 마리가 팔을 벌리고 있다. 찾아보니 남십자성은 이제 뒤로 한참 돌아가 있다. 남십자성이 뒤에 보이는 만큼, 나는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 남중국해의 북쪽, 내 나라와 내 집이 있는 방향이다. 뜬금없이 6.5노트 역풍이 불고 있다.
오후 9시 55분. 풍속 크로스홀드 8.1노트. 선속 6.1 노트. 우측 유전 지대의 불빛이 환하다. Begawan 지역 앞 바다를 통과중이다. 97.1 해리 남았다. 89.9해리 왔다.
오후 11시 48분. 가드존 알람이 울린다. 좌측에 같은 방향 선박, 우측에 유정이다. 선속 6.3노트. 86해리 남았다. 101해리 왔다. 낮엔 미친 듯이 덥지만, 밤엔 바람이 쌀쌀하다. 담요가 필요하다. 바람은 예보와 전혀 맞지 않고, 시추시설, 유정들이 온통 널려있다. 예상 밖의 항해고, 주의가 필요한 항로다. 나비오닉스를 2마일로 표시되도록 확대해서 자세히 보며 진행 중이다. 주변이 온통 ‘Gas and Oil’ 이다.
6월 17일 (토) 오전 2시 10분. 전방 3마일에서 가드 존 알람이 울린다. 정확히 침로 한가운데다. 10분간 지켜봐도 변화가 없다. 선박인지, 시설물인지 확인불가. 스타보드 10으로 침로를 변경해 본다. 장애물은 11시 방향에 고정되어 있다. 장애물까지 1.5마일. 1마일까지 접근해 보니 나비오닉스에 아직 표기 되지 않은 시추 시설이다. 이런 것들이 몇 개나 있다. 항상 레이더에 가드존 알람을 설정하고, 견시해야 한다. 선속 5.9노트. 남은 거리 70.9 해리.
오전 4시 45분. 또 가드 존 알람이다. 5마일 전방에 2개의 움직이지 않는 장애물이다. 알람을 끄고 커피 한잔을 끓인다. 바람은 완전 노고 존 5노트다. 이번 항해에서는 윈디가 전혀 맞지 않는다. 장거리 항해 때 이러면, 일정에 차질이 많다. Miri에서 코타키나발루까지 짧은 항해지만 윈디의 적중률은 30% 밖에 안됐다. 어둠 속에 두 개의 불빛이 보인다. 제네시스는 그 사이로 통과해야 한다. 집중해서 견시한다. 남은 거리 56해리, 10시간 남았다.
오전 5시 20분. 좌측 장애물은 어선이었다. 그물을 끌고 있는 듯, 힘겨운 엔진소리를 내며 우현 400미터 거리로 스쳐 지나갔다. 남은 거리 53 해리다. 전방에는 어떤 불빛도 보이지 않고, 사방에 여명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커피 잔이 어느새 바닥을 보인다.
오전 5시 40분. 또 알람이다. 레이더에 먹구름이 표시 된다. 비가 쏟아지지 않기를 바란다. 비가 내리면 번거로운 일이 많아진다. 다행이 먹구름은 우측으로 비켜간다. 정면에서 일출이 준비되는 모양인데, 짙은 구름 속에서 암암리에 이루어지는 일출이다. 내용을 알 수 없다.
어제 밤, Yulya M.juliana & Valdum Russia 커플과 저녁 식사할 때, 그들은 일본 운전면허를 다시 따야만 했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내게 토로했다. 한국 면허를 국제면허로 바꾸던가, 아예 한국면허증으로 자주 렌트를 해본 나는, 그들에게 왜 면허를 다시 따야했는지 물었다. 러시아 면허로는 그런 게 안 된다는 거다. 응? 러시아가? 세계최강국중 하나인 러시아 운전면허가 일본서 안 된다?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나는 Yulya M.juliana & Valdum Russia 커플에게 한국에 오면 반드시 강릉에 와라. 내가 멋진 한국 전통 식사를 대접해 주마. 약속했다. 그 과정에서 강릉에 러시아 사람, 우즈베키스탄 사람, 몽골 사람들이 많이 와서 일한다고 했다. Valdum이 물었다. ‘왜 러시아 사람들이 한국에서 일하지요?’, ‘돈 때문이지. 한국의 최저임금은 한 달 1,500달러 정도다.’ 라고 말하자. ‘아하, 러시아는 평균 월급이 500달러 정도니 3배로군요.’라고 한다. 그러면서,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러시아에 많이 와서 일하는데, 더 똑똑한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한국으로 가네요.’ 라며 자조적인 표정이다.
이번 러시아가 전쟁을 일으켰을 때, 많은 러시아 세일러들이 한국으로 탈출했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다. 얼마 전 러시아 세일요트가 속초에서 그물에 걸렸을 때, 한국 해군이 출동해 그물도 제거해주고, 직접 항구로 예인하여 물과 음식도 제공했다는 미친(?) 뉴스도 알려주었다. 세계에서 제일 친절한 한국 해군이다. 다른 나라 세일러들이 듣기엔 또라이! 들이지만.
자국의 미치광이 지도자가, 젊은이들의 생목숨을 말 그대로 ‘믹서기의 과일’처럼 갈아 버리고 있는 상황. 그런 조국을 세일 보트 한척으로 떠난 방랑자. 얼마나 막막하고 두려운 상황일 것인가? 나는 이들의 미래가 밝아지기를 기도한다. 군대 다녀오지 않은 것들이 권력을 잡고, ‘선제공격’ 운운하는 반쯤 미친 지도자를 뽑은 어떤 나라도, 미래가 불투명하기는 마찬가지. 인간의 미래와 평화는 오직 하느님의 소관이다. Yulya M.juliana & Valdum은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오전 6시 7분. 바람이 거세진다. 크로스 홀드 10노트. 약간의 빗방울도 함께다. 선속이 7노트를 넘어간다. 돌풍이다. 풍속 13노트, 선속 7.5 노트. 제네시스는 먹구름을 묘하게 피하며 신나게 달리고 있다. 태양은 두꺼운 구름을 뚫고, 수평선 한 참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풍속 크로스홀드 9노트, 선속 6.3노트다. 46해리 남았다.
오전 7시. 쌀밥, 배추김치 + 두반장, 감자볶음, 돼지고기 고추장볶음. 아침식사를 맛나게 하고, 세탁을 해 넌다. 아침 일과가 끝났다. 냉수를 마시며 먼 바다를 본다. 바람은 9.9 노트, 선속은 5.8 노트다. 바람 방향이 노고존 30~40도, 집세일은 접었다. 코타키나발루까지 41.5 해리, 7시간 30분 남았다.
오전 8시 30분. 잠시 류종호의 소설 ‘안개 속으로 걸어가다.’에 눈을 판 사이 바람이 120도 바뀌었다. 스타보드 클로스 홀드에서, 포트 빔리치 6.2노트로 대반전 된 거다. 집세일을 펼까 망설인다. 아직 안정되지 않은 바람에 집세일을 펴면, 잠시 후 바람이 바뀌거나 노고존이 되는 경우가 많다. 5시 방향에서 엄청난 천둥소리가 들린다. 계속 먹구름과 경쟁하며 달려가는 상황. 34.8 해리 남았다. 바람은 또 잠깐 사이 브로드리치 12노트다.
정면에 멀리 코나키나발루의 산마루가 보인다. 5시간 30분 남았다. 먹구름 끼고 바람이 부니 슬그머니 춥다. 셔츠를 입는다. 인터넷 데이터는 불통이다.
풍속 15노트, 메인 세일 하나로도 6.0노트 이상 나온다. 돌풍이 더 거세지기 전에 메인을 축범하고 집세일을 같이 펼칠까? 고민하는 사이, 집세일을 펼치기엔 바람이 너무 뒤로 가버렸다. 메인세일을 좀 더 열어준다. 6.2 노트로 충분하다. 실은 장거리 세일링엔 5.0~5.5노트만으로도 충분하다. 6.0노트 이상은 그리 반갑지 않다. 6,0노트 이상의 빠른 속도는 결국 문제꺼리 또는 문제의 소지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평속 5.5~6.0노트 정도면 아주 감사한 세일링이다. 바람이 가라앉으면서 선속은 5.5노트. 바바리아 50은 속도는 빠르면서 파도와 돌풍에 묵직하다. 제네시스는 믿음직한 배다.
오전 9시 40분. 콕핏에 누워 오페라를 들으며, 소설의 끝을 읽고 있었다. 갑자기 사람 목소리가 난다. 뭣? 콕핏에서 일어나보니, 하얀 부이들이 떠있고 어선 한척과 잠수부가 있다. 다행이 30~40 미터 간격으로 지나가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힘차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들도 손을 흔들어 준다. 하지만 큰일 날 뻔한 거다. 아마 소규모 양식장인 모양이다. 그들도 놀랐을 거다. 배 한척이 곧장 그들을 향해 달려오니. 소형 어선이 레이더에 나타나지 않았다. 연안에서는 절대로 레이더만 믿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 정면에도 어선 한척이 있다. 바람이 사라지자 선속이 느려져 여전히 28해리 남았다. 멀리 보이는 코타키나발루를 향해 천천히 다가간다.
정오. 라면에 식은 밥. 오이와 두반장. 세일러의 정석대로 점심을 먹었다. 17.5 해리 남았다. 빤히 보이는 코타키나발루가 3시간이나 남았다. 핸드폰 데이터는 여전히 먹통이다. 10해리나 돼야 터지려나? 일단 도착하면 제네시스에 육상전기를 연결하고, 이미그레이션, 하버마스터, 세관을 차례로 들러야 한다. 오늘 중 시간이 되겠지? 내일은 한국마켓에 들러보고, 인젝터 청소비용과 일정을 확인해 보자. 안되면 한국서 하면 되지 뭐. 아 타이완은 어떨까? 잠깐 배에서 육전 커넥터를 수리하고, 조정래의 태백산맥 1부를 열었다. 타이완까지 항해 중 야금야금 읽어야겠다.
오후 1시 10분. 9.9 해리 남았다. 그래도 인터넷은 안 터진다. 멀리 임대균 선장이 알려준 빨간 지붕이 보인다. 저기가 코타키나발루 Sutera Harbour Marina 다. 1시간 50분 남았다. 전방에 어선 두어 척이 있다. 잘 지켜보자. 코타키나발루는 회색 구름으로 덮여있다. 혹시 몰라, 전화기를 껐다 켜본다.
오후 2시 5분. 이제 55분 남았다. 코타키나발루는 천둥소리가 나고 있다. 폭우가 오려나? 미리 단속을 하고 들어가야겠다. 이제 인터넷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