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예수님
본당보좌생활을 하면서 신자들의 고통을 고해성사와 상담을 통해 많이 듣게 됩니다. “왜 저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냐?” 고 울부짖는 신자를 향해 “고통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거저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앞에 주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시켜 줄뿐입니다. 이처럼 감히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고통을 두고 다른 사람에게 위로한다는 것이 조심스러워집니다.
아마 인생에서 지금 겪는 고통은 힘들겠지만 훗날 삶을 돌아보면 자신을 성장시킨 시간이며 주님께서 함께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당신 없이 겪는 고통을 원치 않으십니다. 아픔만큼 성숙해지고 라는 말처럼 누구에게나 주님과 함께하는 고통의 시간은 사람을 순수하고 겸손 되게 만듭니다. 그러기에 고통을 많이 겪은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이해할 줄 압니다. 고통은 마치 원석이 깎이고 다듬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아름다운 보석이 되는 과정입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우리자신에게 필요한 “겸손함과 순수함”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겸손함과 순수함은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보석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와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어린이들은 단순합니다. 꾸밈없고 순수합니다. 좋고 나쁨을 분명히 밝히는 자기감정에 솔직합니다. 이런 어린이의 속성과 달리 어른들은 복잡합니다. 가식적이거나 자신을 속이기도 합니다. 좋고 나쁨의 자기감정에 충실하기보단 옳고 그름에 더 관심을 가집니다.
어른이 되면서 왜 어릴 때의 이런 모습이 차츰 사라져만 갈까요?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교만은 끝내 파멸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만은 지옥으로 가는 낭떠러지이며 겸손은 하느님께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겸손함이라는 단어가 성숙한 어른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면 순수함은 천진난만한 어린이의 모습을 말합니다.
오늘복음에서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 되어라”고 하신 말씀은 영어의 바로 childlike로서 어린이다운, 어린이 같은(좋은 뜻으로), 순수한, 천진한 이라는 의미로 사용됨을 알 수 있습니다. childish의 부정적의미의 어리광부리는, 응석받이어린이, 유아적인 의미를 표현은 아닙니다.
누구나 태어나면서 겸손함과 순수함을 간직하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은 변하지 말아야하는 이런 부분까지도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 욕망 등으로 차츰 변질되어갑니다.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어른의 겸손함과 어린이의 순수함을 지니는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교만과 “childish” 의 모습은 악마의 유혹이므로 경계해야합니다.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가장 큰사람 이냐 하는 문제로 서로 논쟁하는 것을 보시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잠시 묵상합시다.
첫댓글 겸손은 하느님께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부님 강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