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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머리 - 형제가 서로 권면하여 순교의 영광을 얻다 |
원머리 교우촌의 탄생
원머리라는 지명은 바닷가의 둑을 막는 머리 부분이라는 뜻을 지닌 언두리(堰頭里)가 언머리로 바뀌고 이것이 다시 원머리로 변형된 말이다.(언두리 〉언머리 〉원머리)
원머리 지역은 아산만의 물과 삽교천 하부의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며 당시 밀물이 들어오면 사방이 바닷물로 둘러싸여 자연적으로 섬의 모양을 띄게 되었다. 따라서 천혜의 요지인 이곳으로 박해를 피해온 많은 교우들은 주로 염판(불로 바닷물을 지펴서 증유하여 소금으로 만드는 작업)과 옹기그릇을 구우며 생계를 유지했다. 소금과 옹기 행상은 특성 상 언제 어디로든 떠날 수 있었기에 박해와 포졸들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고, 또 누구와도 만날 수 있기에 신앙을 알리고 전파하는데 적합한 전교 수단이 되기도 했다.
이곳에는 1785년 무렵 이존창 루도비코에 의해 주변 내포지역과 함께 신앙이 전해지고 1790년대에 이미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당시 충청도 관찰사인 박종악(朴宗岳)이 남긴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기록으로 볼 때 원머리 교우촌은 원머리 공소로 발전되어 이웃의 새터 공소와 함께 아주 열심하고 우수한 공소로 이름이 나 있었다. 이는 뒷날 퀴를리에(Curlier, 南一良, 1863~1935, 레오) 신부나, 그 뒤를 이은 홍병철(洪秉喆, 1874~1913, 루카) 신부(1905년 재임), 크렘프(Krempff, 慶元善, 1882~1946, 핸리) 신부(1913년 재임)의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당시 공소 신자들은 일찍부터 고아를 신자 집에서 기르는 성영회(聖嬰會) 사업에도 동참하였고, 공소전(公所錢)으로 교리 학교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이 교리 학교는 처음부터 학생 수가 많지는 않았으나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후까지 지속되면서 점차 활성화되었다. 그 후 수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배출하였다. 대전교구 박재만 신부를 비롯해 최효인, 최상순 신부 등 많은 신부들이 이곳 출신이다
박해시기의 순교자
1800년대 박해시기에는 많은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지방과 산간으로 숨어들어 가 살았는데 이로 인해 전국적으로 신앙이 퍼져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원머리 지역 또한 다른 교우촌과 같이 박해를 안전하게 피할 수 없게 되어 끝내 병인박해(1866) 이후 무진박해(1868)까지 약 20명의 치명자가 나왔다.
이들의 순교 형식을 보면 교수형이 10명으로 가장 많고 생매장이 6명이며, 순교 형태가 나타나지 않은 경우가 4명이다 순교 장소로는 홍주가 16명, 해미가 2명, 수원감영이 2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순교 연도별 치명자의 명단을 보면, 1866년에 6명(한 마티아, 양정수, 홍 베드로닐라, 양명삼, 최 아우구스티노, 홍 베드로), 1867년에 5명(김 마리아, 원씨, 양 도미니코, 김자선의 모친, 송춘일)이 순교하였다. 1868년 무진년에는 8명(박 요한, 문 마리아, 박 마르코, 박 미티아, 최 베드로, 김 루치아, 김 마리아, 원 아나스타시아)의 치명자와 연도 미상자 1명(양 아우구스티노)이 굳건한 용덕을 보이며 순교하였다.
순교자 묘 이장 과정
대부분 순교자의 묘는 박해시기 때부터 눈을 피해 깊은 산속 외딴 곳에 자리 잡을 수밖에 없어 분실되거나 방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원머리 성지에는 현재 수원 감영에 끌려가 순교한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 두 분의 치명자가 모셔져 있다. 특히 이들 순교자 묘는 조선시대 무덤의 형태를 그대로 지니고 있어 전통문화 유산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순교자 박선진 마르코의 아우 박 요셉은 훗날 형의 순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르코 형은 모친의 뜻에 따라 착실히 수계하면서 동네 교우들과 잘 지냈다. 신부님이 오시어 성사를 받으려 하면 부친이 금하는 고로 늘 마음속으로 꺼렸다. 무진년(1868년)에 수원 포교에게 체포되어 잡혀 갈 때 그는 부모님께 하직하며 위로하기를 ’거기 가서 죽으면 어찌 육정의 박절함이 없을까마는 주님의 명대로 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 영혼 구원에 편한 일이니 부디 염려 마시고 훗날을 조심하십시오.’라고 한 다음 그의 사촌 형 박태진 마티아와 함께 수원으로 붙잡혀 끌려갔다.
관가에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할 때 사촌형 박 마티아가 매를 못 이겨 배교했다. 이때 박 마르코는 천주를 배반하고 영벌을 어떻게 받으려 하느냐고 하자 이에 박 마티아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15일 후에 같이 순교했다. 이때 박 마르코의 나이는 33세였고 박 마티아의 나이는 52세였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의하면 외교인 서덕행이 모진 매를 맞아가며 시신을 찾아 이곳 원머리로 운구하여 가족에게 넘겼다. 이후 서덕행은 순교자 박 마르코의 매제가 되었고, 그가 죽은 후 그의 공을 기리고자 후손들이 두 분 순교자 묘 옆에 안장하였다.
1989년 4월 4일 순교자 묘는 모본당인 신평 성당 구내로 옮겨 모시며 현양비를 세웠다. 신평 성당은 2000년 새 성당을 건축하면서 두 순교자의 묘를 재정비하였고, 2009년 11월 3일 순교자 현양과 성지 개발을 위해 본래 두 순교자가 묻혔던 이곳 원머리 순교사적지 묘역으로 유해를 다시 이장했다. 그리고 현양비도 수정하여 다시 세우고 묘역 또한 재정비했다. 다행히 그 사이 원머리 묘역에는 순교자 유해가 없었음에도 빈 무덤을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형을 회복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2009년부터 한국교회에서 진행 중인 ‘하느님의 종 132위’의 시복 추진에 순교자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가 포함되고, 그리고 근 ‧ 현대 ‘하느님의 종 80위’에 6.25때 순교한 유영근(세례자요한) 신부와 박영옥(안드레아) 부회장이 선정되어 현재 시복 추진 중이다.
묘역 앞 넓은 터에 복원 건물이 한 동 있고 묘역에는 순교자 현양비와 특이한 펼쳐진 책 모양 안내판이 있다. 그리고 묘역 앞에는 성모상이 묘역을 지키듯 서 있고 둘레에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이것이 원머리 성지의 전부이다.
순교자 묘
묘역에는 지금 6기의 묘가 있는데 순교자 박선진, 박태진과 공로자 서덕행의 묘를 나란히 모시고 그 앞에 묘비를 세웠다. 나머지 3기의 묘는 누구의 묘인지 알 수가 없다.
순교자 현양비는 2000년 신평성당에서 묘를 모실 때에 당시 성당 내에 세운 것인데 2009년도 이곳으로 이장을 하면서 이곳에 옮긴 것이다. 비제(碑題)는 순교자 박선진(말구) 박 마지아 현양비이다. (말구는 마르코, 마지아는 마티아)
내포평야 지평선에 해가 떨어진다. 성지가 온통 붉은 색이다. 노을이 지면 땅거미가 내리고 이렇게 또 하루가 간다. 내가 밀레였다면 삼종 소리에 명작 ‘만종’을 남기겠지만 삼종기도 대신 노래 한 소절이 떠오른다.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
상념 끊기지 않는 번민의 시인이라도 좋겠소;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행의 방랑자처럼
하늘에 빗긴 노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 테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제 잠잘 곳을 찾아야 한다. 내일 코스인 솔뫼성지와 가까운 합덕읍으로 차를 몰았다.
다행히 조용한 모텔(가빈 모텔) 따뜻한 온돌방 하나를 구해 피로를 풀 수 있었다. 저녁 식사는 인근 바지락 국수집 ‘소담’(소담스럽다는 뜻으로 상호를 지었다고 함)에서 주인인 교우 자매님으로부터 젊은 날의 신앙 경험담을 들으며 막걸리 한 병을 비우기도 했다.
2024 .02. 18(금)
황무실 성지 - 박해시대 외국인 선교사의 사목 본거지 |
황무실은 당진시와 예산군의 경계에 위치한 얕은 구릉지대에 있는 유서 깊은 교우촌으로, 1791년 신해박해 이전부터 1868년 무진박해까지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던 곳이다. 달레의 교회사나 관변문서에는 소위 ‘덕산’ 또는 ‘홍주’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주소는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석우리 1013.
박해시대에 황무실은 홍주목 덕산현 관할지로 면천군과 범천면(솔뫼)과 인접해 있었다. 밀물 때 바닷물이 만수가 되어 삽교천 구만포까지 배가 올라올 수 있을 때는 홍주나 덕산 사람들은 배로 아산만과 서해를 거쳐 한강을 따라 서울 서강까지 왕래했다. 하지만 썰물 때 바닷물이 삽교천에 적게 들어오면 황무실을 거쳐 현재 삽교천 방조제에 인접한 남원포까지 걸어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서울을 오갔다. 그래서 황무실은 한양 소식을 전해 듣기 쉬운 길목이었다. 천주교 신앙도 이러한 지리적 위치에 따라 일찍이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100여명의 신자가 거주하였던 황무실 교우촌은 인근 신리 교우촌과 더불어 박해 중에 숨어서 활동하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거주하며 사목활동을 한 내포교회의 요처였다는 사실이 많은 기록으로도 고증되고 있다.
1852년 조선에 잠입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스승인 메스트르(Maistre, 1808-1857년) 신부는 1853년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Ferreol) 주교가 선종하고 새 교구장이 입국하기까지 조선교구의 교구장직을 대리하면서 배론 신학교를 설립 운영하는 등 조선의 천주교세 유지에 힘쓰다가 1856년 제4대 교구장 성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 주교가 들어오자 교구장의 지시를 받아 충청도 내포 황무실을 중심으로 사목하다가 안타깝게도 1857년 12월 20일 과로로 쓰러져 이곳 황무실에 묻혔다.
메스테르 신부의 선종 이후 이 지역을 맡은 이는 다블뤼 주교(Daveluy, 安敦伊, 1818-1866)였다. 당시 교구장 베르뇌 주교는 조선 교회를 8개 지역으로 구분하고 그 중 충청도 홍주 지방을 성모 성탄 공동체로 이름하고 당시 신부였던 다블뤼를 조선 교구 부주교로 임명 받게 하여 그를 홍주지역을 맡겼다. 당시 홍주(洪州) 지역 교회 공동체의 중심지는 황무실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곳 황무실과 이웃하는 신리성지에 머무르면서 지역공동체 육성에 전력하다가 1866년 베르뇌 주교가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짧게다마 5대 교구장을 맡아 조선교구룰 책임지다가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
1861년 조선 입국에 성공한 랑드르(Landre, 洪, 1828-1863년) 신부 또한 베르뇌 주교로부터 충청도 내포 지방으로 파견되어 한강 이남을 관할하던 다블뤼 주교의 명령에 따라 황무실에 근거지를 두고 전교 활동을 하던 중 1863년 봄 중병을 얻어 9월 16일 35세의 젊은 나이로 황무실에서 선종하여 이곳에 묻혔다.
프랑스 랑그르 교구 출신의 성 위앵(Huin, 閔, 1836-1866년) 신부는 1865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로 조선에 파견되었다. 그는 1865년 6월 18일 성체 성혈 대축일까지는 신리 성지에 머물며 다블뤼 주교에게 한국말을 배웠다. 그런 다음 주교가 계신 곳에서 십 리 떨어진 황무실 교우촌으로 왔다. 위앵 신부는 그때의 감동을 이렇게 적었다.
“이것이 제 성체거동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유럽에서 당신들의 그 화려한 예절에 참석한 것보다도 더 기뻤습니다.”
1866년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자 그도 자수하여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Aumaitre, 吳, 1837-1866년)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고, 갖은 고문을 겪은 뒤 3월 30일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음으로써 30세의 나이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주님의 품에 안겼다.
내포지역의 다른 교우촌과 마찬가지로 황무실 교우촌도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곳이다. 안타깝게도 몇 명 이외에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고 무명 순교자로서 내포 지방 산야에 잠들고 있다.
황무실 출신으로 순교한 분 대표적인 분은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를 자기 집에 모신 적이 있는 복자 이보현(李步玄, 1773~1800, 프란치스코)이 있다. 그는 황무실의 부유한 양인의 집에 태어나 고향 인근에 살던 황심(토마스)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황심은 훗날 북경을 왕래한 교회의 밀사로, 그의 아내는 바로 이보현의 누이였다. 1797년의 정사박해로 연산에서 체포되어 1800년 해미에서 순교했다.
그 외 황무실 인근 고을에서 살다가 1793년 1월 28일 홍주 옥에서 동사형(凍死刑)으로 순교한 복자 원시장 베드로(1732-1793), 1799년 청주에서 순교한 복자 원시보 야고보, 황무실 1799년에 홍주 형장에서 참수 순교한 방 프란치스코(?-1799)와 박취득 라우렌시오(1769?-1799) 등은 장렬한 순교를 통해 대전교구 초기 공동체에 영적 영감과 감화를 주었다.
이렇게 황무실 교우촌은 병인박해로 철저히 파괴되고, 이웃한 면천 출신과 합쳐 70여 명에 이르는 순교자가 탄생했지만, 서서히 역사 속에 묻혔다. 그러나 일부신자들은 꾸준히 외국인 사제 메스트르 신부와 랑드르 신부의 묘지를 보살펴 왔다. 그러던 중1970년 4월 30일 메스트르 신부와 랑드르 신부의 묘를 합덕 성당으로 이장하면서 황무실은 교우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돌보지 않는 순교사적지가 되었다.
합덕 성당으로 모셨던 두 선교사제의 묘는 2003년 4월 11일 대전가톨릭대학교 내의 성직자 묘지로 다시 이장되었다. 성직자의 묘지가 옮겨 간 후 이곳은 일반 교우나 외교인의 가족묘원으로 변신하여 비신자의 소유가 되었다.
황무실 순교사적지는 2008년 8월 15일 대전교구 청소년대회를 시작하며 실시한 도보 성지순례 출발지 중 하나로 선정되고, 2014년 8월 16일 이곳 출신 이보현 프란치스코(1773-1800년) 순교자의 시복을 계기로 성지로 조성되기 시작했다.
신합덕 본당은 해미에서 순교한 이보현 프란치스코가 살았던 옛 황무실 교우촌 부지를 매입해 4m 높이의 자연석으로 순교자 현양비를 세우고 성지 개발을 본격화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29일 충남 당진 합덕읍 석우리 1013. 이곳 현지에서 교구장 유흥식 주교 주례로 황무실 성지 및 순교자 현양비 축복 미사를 봉헌했다.
빡빡한 오늘 일정을 감안하여 아침식사로는 집에서 가져간 간식으로 때우고 08시 출발하여 황무실 성지에 도착하니 8시 20분이 안 되었다. 황무실 성지는 나지막한 언덕등성이에 위치하고 있다. 주차장에 내려서 잔디가 깔린 공원 같은 경내를 바라보니 한 눈에 다 들어온다.
구름은 어제 비를 내리게 하더니 오늘은 푸른 하늘을 못 보게 하려는 듯 매우 험악하게 심술을 부린다.
대형 순교자 현양비를 중심으로 야외 성당 같이 조성되었는데 현양비 앞에는 돌 제대가 있고 그 좌우에 예수성심상과 성모상이 있다.
순교자 현양비 뒷면에는 2014년 8월15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솔뫼, 합덕 방문과 124위 순교시복에 감사드린다는 천주교 대전교구 신합덕본당 신자들의 뜻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황무실 성지와 관련된 6분 순교자의 순교사적이 소개되어 있다.
▲성 위앵 민 루카 신부 (1866.3.30.갈매못)
▲사제 랑드르 (1863.9.15. 황무실)
▲복자 원시장 베드로 (1793.1.28. 홍주)
▲원시보 야고보 (1799.4.17. 청주)
▲복자 이보현 프린치스코 (1800.1.9. 해미)
▲사제 매스트르 (1857.12.20. 황무실)
성지 옆에도 묘역이 조성되어 있어 가 보았더니 사유지의 개인 묘지였다. 그러나 그 중에는 신자의 묘도 섞여 있다.
순례에 그렇게 시간이 요하지 않아 곧 다음 성지인 배나드리로 향했다.
배나드리 - 삽교천변의 박해시대 교우촌 |
배나드리는 예산군 삽교읍 동남쪽 삽교천 가에 위치한 섬처럼 새긴 마을로 도리(島里)라고도 부른다. 배나드리라는 마을 이름도 밀물 때 물이 차면 사면이 물바다가 되어 배를 타고 드나들었다는 데에서 연유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불편하고 외딴 곳일수록 비밀리에 신앙을 지키기에 적당한 마을이었으리라 아닐 수 없다.
주소는 충청남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 270-23
배나드리 출신의 첫 순교자는 복자 안언민 마르티노이다. 그는 이곳에서 태어나 전교 활동을 하다가 1797년 관아에 체포되어 해미로 이송되어 순교하였다.
그후 얼마동안 잠잠하던 박해는 1815년 경상도 일대(청송 노래산, 봉화 우련전, 영양 머루산 등)에서 일어난 을해 박해가 이곳에도 미쳤다. 이는 내포지방 출신의 신자들이 경상도 오지에 피신하여 살았기에 서로 소통이 되었다는 뜻이다.
1817년 10월 이곳에 밀고자의 소행으로 여겨지는 박해의 손길이 뻗쳐 해미의 포졸들이 나타나 20-30명 가량의 신자들을 모두 체포해 갔다. 관아에서 조사를 받는 동안 대부분의 신자는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여 배교하여 석방되었으나, 민 첨지 베드로와 그의 형수 안나, 송 첨지 요셉, 손연욱 요셉, 민숙간 등은 혹독한 형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다가 옥사로 순교하였다. 그리고 손연욱의 부친 손여심은 오랫동안 해미 옥에 갇혀 있다가 10년 뒤인 1827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민 첨지는 결성(結成) 출신으로 목천 소학골(지금의 천안시 북면 납안리)에서 살다가 배나드리로 이주하였고, 손연욱은 홍주 출신인 것으로 보아 배나드리는 박해를 피해 다니던 신자들이 모여 이룩한 교우촌으로 추정된다.
그 후 배나드리 교우촌은 없어졌다. 박해가 얼마나 혹독했나를 말해준다. 더욱이 배나드리의 박해가 공식적인 박해가 아니었으므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이곳 순교자들의 행적에 대하여도 분명하게 알려지고 있지 않다.
◆ 복자 인언민 마르티노 (1737∼1800년)
1737년 충청도 덕산 주래(현 충남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인언민(印彦敏) 마르티노는 온순하면서도 꿋꿋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상당한 학식도 쌓게 되었다. 황사영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교리를 배운 뒤 한양으로 올라가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장남 요셉을 신부 곁에 남겨두었으며,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위해 집과 재산을 버리고 공주로 이주하였다.
1795년에 시작된 정사박해 때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옥으로 끌려갔다. 청주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고 다시 그의 고향을 관할하던 해미 관장 앞으로 이송되었다. 해미 옥에서 그는 젊은 이보현(프란치스코)을 동료로 만나 언제나 서로를 권면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인언민도 이보현과 같이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형리들은 그를 옥에서 끌어내 매질을 가하다가 그들 중의 하나가 엄청나게 큰 돌을 들어 그의 가슴을 여러 번 내리쳤다. 이내 그의 턱이 떨어져 나가고 가슴뼈는 부서지고 말았다. 이러한 형벌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때가 1800년 1월 9일(음력 1799년 1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마지막으로 매질을 당하는 동안에도 그는 여러 차례 다음과 같이 되뇌었다고 한다.
“그렇고말고.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거야.”
◆ 손연욱 요셉 ( ? ∼1824)
손연욱은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자의 본분을 기리는 일에 지극히 엄격하였다. 1811년에 순교자 김종한(안드레아)의 딸인 김데레사(1839년 순교)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결혼 생활 7년 후인 1817년 10월(음) 덕산의 배나드리(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에서 마을 교우 30여명과 함께 체포되어 해미 진영으로 압송되었고 거기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였다.
무수한 고문을 오랫동안 당하고 옥중에 갇혀 영영 석방될 가망이 없어지니 그는 일생을 거기서 지내려는 것처럼 자리를 잡았다. 6∼7년이라는 세월이 이렇게 흘렀지만 그의 열심은 덜해지기는 고사하고 날로 더 단단해져갔다. 마침내 감옥 곁에 있는 어떤 집에서 동생과 같이 살 허락을 얻어 몇 주일 동안 거기서 머무르다가 죽었다.
현재 순교자 인언민 마르티노 사적지가 있는 이곳 용동 2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산 본당 관할의 주례 공소가 곳이었다. 그러나 1967년 예산 본당에서 삽교 본당이 분가되면서 공소가 폐지되고 강당이 헐리게 되자 인언민 마르티노 순교자를 기념하는 사적지로 조성하였다.
이때 이곳 신자들은 여러 차례 논의를 거쳐 이곳을 사적지로 만들기로 합의를 보았다. 공소 자체가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삽교지역 최초의 순교자 인언민(印彦敏,마르티노 1737~1800)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09시경 도착해 보니 터는 좁고 사방 민가와 사유지로 둘러싸여 환경은 좋지 못했다. 십자고상과 십자가를 든 순교자 안언민 상이 있을 뿐, 그 뒤의 십자가가 있는 지붕 건물은 개신교 교회었다.
순교자 상이 있는 아치문을 통과하여 관목 울타리 사잇길을 오르면 맨 뒤쪽에 십자가와 제대가 있다. 제대 앞에는 “그렇고말고.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거야.”라는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새겨져 있다.
곧 이어 다음 행선지인 여사울 성지로 향했다.
여사울 성지 - 이존창의 고향, 천주교 대전교구의 뿌리 |
내포(內浦)라 함은 아산(牙山)에서 태안(泰安)까지의 평야 지대, 삽교천(揷橋川)과 무한천(無限川)의 두 물줄기가 흐르는 충남 중서부 지역을 총칭한다. 김대건 신부의 출생지인 솔뫼와 인근의 합덕, 여사울, 해미, 덕산 등 유서 깊은 교우촌과 본당들이 다 이 지역에 있다.
여사울 성지의 주소는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신종여사울길 22 (신종리 122-4)
여시울 성지 유래
이곳 여사울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이곳 출신 이존창이 1784년 겨울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창설을 주도했던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암브로시오), 권일신(權日身, 1742~1792,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형제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고향으로 내려와 천주교 신앙을 전하면서부터였다. 이후 이곳의 복음은 내포 평야 지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여사울은 내포 교회, 넓게는 충청도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에 앞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익(李瀷, 호 星湖, 1681~1763)의 제자로 일찍이 서학을 받아들인 홍유한(洪儒漢, 호 隴隱, 1726~1785)도 경상도로 이주하는 1775년까지 이곳에서 거주하였으며, 1777년에는 이존창의 스승인 권철신과 이기양(李基讓, 호 茯庵, 1744~1802)이 여사울 이존창의 집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 마을은 예부터 부자들이 많이 살아 온통 집들이 기와집뿐이어서 마치 서울과 비슷하다 하여 ‘如서울’이라 불렸던 것이 여사울로 되었다고 한다.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의 여사울에서 농민의 집안에서 태어난 이존창은 한양에서 천주교를 받아들여 열렬한 신앙심과 학구심으로 초기 교회 가성직단(假聖職團)의(평신도가 성직자의 고유한 임무인 성사를 집행했던 조직) 일원이 되어 충청도 지역의 복음 전파 사명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해박한 지식과 훌륭한 덕행으로 자기 가족과 친척과 친구 등 많은 사람들(약 300명으로 추정)을 입교시켜 훗날 내포의 사도로 불리게 되었다. 내포 천주교회의 기초는 이렇게 다져져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의 토대가 되었다.
그는 가성직 제도가 교리에 어긋남을 깨닫고 신부 영입을 위해 복자 윤유일 바오로(尹有一, 1760-1795년)와 지황 사바(池璜, 1767-1795년) 등에게 여비를 주어 중국 북경 교구에 보내어 마침내 선교사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1752-1801년) 신부를 맞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 때 그는 다른 수많은 천주교인들과 함께 관헌에게 붙잡혔다. 혹독한 고문과 가혹한 매질은 그로 하여금 배교의 쓴맛을 보게 하였다. 그 뒤 양심의 가책으로 내포 지방을 떠나 홍산(鴻山, 지금의 부여)으로 이사하여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전보다 더욱 열심히 신앙을 지키며 전교에 힘썼다. 그 결과 내포 지방은 다른 어느 지방보다도 교세가 크게 성장했고, 이에 따라 박해 때마다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 집안도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했는데, 김대건 신부의 할머니는 그의 조카딸이 되며,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1821-1861년) 신부도 그의 생질(甥姪)의 손자이다. 이처럼 그가 전교 활동에 끼친 공헌은 지대하다.
1795년 말에 이르러 그는 다시금 지방 관리들에게 체포되어 고향인 천안으로 옮겨져 6년 동안 연금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1801년 다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그 해 4월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丁若鍾, 1760-1801년)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충청도의 감사가 있는 공주(公州)로 호송되어 황새바위에서 42세를 일기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이 때 그의 목은 여섯 번째 칼날을 맞고서야 떨어졌는데, 친척들이 그의 시체를 거둘 때는 도리어 머리가 목에 단단히 붙어 있었고, 단지 실낱같은 흉터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여사울과 인근 지역 출신 순교자는 이존창 이외에도 다수 발생했는데, 당고개에서 순교한 성 홍필주(베드로) 성 홍영주(바오로) 형제, 김광옥 김희성 부자, 강완숙 홍필주 모자 등 복자 9명, 그 외 순교자로 박의서 원서 익서 3형제 등 12명, 이들을 합하면 도합 23명이나 된다.
성지조성
1984년 가을에 신례원 본당에서는 구전을 토대로 하여 여사울의 이존창 생가 터를 찾게 되었다. 그런 다음 서울 정릉 본당의 협조를 얻어 생가 터를 발굴한 결과 중국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고상, 성모상, 성의패들이 나옴으로써 생가 터가 분명함을 입증할 수 있었다. 이때 발굴된 유물들은 현재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져 보관되어 오고 있다.
내포 지역과 여사울 순교사적지의 중요성을 인식한 대전교구는 교구의 뿌리인 여사울 성지를 개발하기 위해 2002년부터 신례원 성당을 중심으로 성지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주변 부지를 매입하고 진입도로를 넓히는 한편 십자가의 길과 강당을 추가로 조성하였다. 2008년 1월 성지본당으로 지정하고, 그 해 12월 22일 ‘예산 여사울 이존창 생가터’라는 명칭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77호로 지정되면서부터 성역화를 본격 추진하였다. 이존창의 생가 터 앞 강당 자리에 이존창 루도비코 순교자 기념성당을 신축하고, 기존의 공소 건물 뒤에는 사제관과 수녀원을 건립하였다. 스페인풍의 기와를 얹은 기념성당은 2010년 10월 16일 봉헌식을 가졌다.
이존창 순교자 기념성당
배나드리를 출발하여 10시쯤 여시울 성지에 도착. 이존창 순교자 기념성당이 도로변에 있다. 스페인 풍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성당 건물로는 낯설다.
성당 내부에 들어가니 벽면에 여사울 및 인근지역 순교자 23명의 명단과 순교지, 순교일자 등이 정리되어 게시되어 있고 그 밑으로 초기 교우촌에서 사용했던 전례서, 교리서들이 전시되어 있다.
성당 내부는 전면 대형 십자고상, 제대, 성모상이 있고 양쪽 벽면에는 스테인드 글라스 사이에 십자가의 길 14처가 배치되어 있는 등 평범하다.
야외 제대 및 생가터
기념 성당 길 건너편 널찍한 잔디 광장에 야외 성당이 조성되어 있다. 맨 앞쪽에 성지표지석과 이존창 유적비가 있다. 그리고 맨 안쪽에는 언덕받이에 대형 십자가가 서 있고 그 아래 돌제대가 있다. 돌제대 좌우에는 이존창 생가터 표지석과 성모상이 있다.
야외 제대 위의 언덕에도 성지 시설이 일부 보이기에 올랐더니 여기도 넓은 잔디밭 가운데 돌 제대가 있고 옆에 여사울 성지 기도문이 새겨진 석판이 있다.
이 자리에서 내포 구원을 시작하신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이 자리를 내포 복음화 샘으로 삼으신
예수님 그리스도님은 찬미 받으소서.
이 자리에서 내포 순교자 신앙을 키워내신
성령님은 찬미 받으소서.
주님, 어둠과 유혹이 끊이지 않는 세상에서.
저희도 목숨을 바쳐 복음을 증거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위하여 비나이다. 아멘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성 홍병주 베드로와 성 홍영주 바오로님
복자 김광득 안드레아와 김정득 베드로님
복자 홍낙민 루카와 홍재영 프로타시아님
복자 강완숙 골롬바와 홍필주 필립보님
복자 김사집 프란치스코와 김희성 프란치스코님
복자 심조이 바르바라와 순교자 이존창 루도비코님
여사울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내려오는 길에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갔다. 뒤편에도 잔디광장이 있었다.
10시 20분. 미사시간에 맞추기 위해 솔뫼 성지로 급히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