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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야 뭐라 하건 What Do You Care What Other People Think? [리처드 파인만 Richard Feynman] [Notable awards] Albert Einstein Award (1954) E. O. Lawrence Award (1962) Nobel Prize in Physics (1965) ForMemRS (1965)[2] Oersted Medal (1972) National Medal of Science (1979)
[Spouse] Arline Greenbaum (m. 1941–45) (deceased) Mary Louise Bell (m. 1952–56)[3] Gweneth Howarth (m. 1960–88) (his death) [Children] Carl Feynman Michelle Feynman Signature Richard Phillips Feynman (/ˈfaɪnmən/; May 11, 1918 – February 15, 1988) was an American theoretical physicist known for his work in the path integral formulation of quantum mechanics, the theory of quantum electrodynamics, and the physics of the superfluidity of supercooled liquid helium, as well as in particle physics for which he proposed the parton model. For his contributions to the development of quantum electrodynamics, Feynman, jointly with Julian Schwinger and Sin-Itiro Tomonaga, received the Nobel Prize in Physics in 1965. He developed a widely used pictorial representation scheme for the mathematical expressions governing the behavior of subatomic particles, which later became known as Feynman diagrams. During his lifetime, Feynman became one of the best-known scientists in the world. In a 1999 poll of 130 leading physicists worldwide by the British journal Physics World he was ranked as one of the ten greatest physicists of all time.[4] He assisted in the development of the atomic bomb during World War II and became known to a wide public in the 1980s as a member of the Rogers Commission, the panel that investigated the Space Shuttle Challenger disaster. In addition to his work in theoretical physics, Feynman has been credited with pioneering the field of quantum computing,[5][6] and introducing the concept of nanotechnology. He held the Richard C. Tolman professorship in theoretical physics at the 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 Feynman was a keen popularizer of physics through both books and lectures, including a 1959 talk on top-down nanotechnology called There's Plenty of Room at the Bottom, and the three-volume publication of his undergraduate lectures, The Feynman Lectures on Physics. Feynman also became known through his semi-autobiographical books Surely You're Joking, Mr. Feynman! and What Do You Care What Other People Think? and books written about him, such as Tuva or Bust! and Genius: The Life and Science of Richard Feynman by James Gleick. [Personal life] While pursuing his PhD at Princeton, Feynman married his high school sweetheart, Arline Greenbaum (often misspelled "Arlene"),[57] despite the knowledge that she was seriously ill with tuberculosis—an incurable disease at the time. She died in 1945. In 1946, Feynman wrote a letter to her, expressing his deep love and heartbreak, that he kept for the rest of his life. ("Please excuse my not mailing this," the letter concluded, "but I don't know your new address.")[58] This portion of Feynman's life was portrayed in the 1996 film Infinity, which featured Feynman's daughter, Michelle, in a cameo role. He married a second time in June 1952, to Mary Louise Bell of Neodesha, Kansas; this marriage was unsuccessful and they had a divorce which started in 1956 but was only finished in 1958: He begins working calculus problems in his head as soon as he awakens. He did calculus while driving in his car, while sitting in the living room, and while lying in bed at night. — Mary Louise Bell divorce complaint[3] In 1960 he married Gweneth Howarth (1934–1989),[59] who was from Ripponden, Yorkshire, and shared his enthusiasm for life and spirited adventure.[41] Besides their home in Altadena, California, they had a beach house in Baja California, purchased with the prize money from Feynman's Nobel Prize, his one third share of $55,000. They remained married until Feynman's death. They had a son, Carl, in 1962, and adopted a daughter, Michelle, in 1968.[41] 1918년 뉴욕에서 유대인 세일즈맨의 아들로 출생. MIT를 졸업하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음 1942년부터 원자폭탄 제조를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1942년부터 1951년까지 코넬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1951년부터 1988년 2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캘리포니아 공대 교수로 일하면서 수많은 과학적 업적과 일화를 남겼다. 양자전기역학 이론을 개발한 공로로 1965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저서로는 [파인만씨 농담도 잘 하시네],[남이야 뭐라하건],[파인만의 여섯까지 물리학 강의],[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발견하는 즐거움]등이 있다. 우주왕복선 챌린저호는 1986년 1월28일 화요일 폭발 사고 난 후 며칠 뒤에 조사위원으로 위촉 6개월 이 책의 서두는 1988년 3월 쓰여짐. 파인만씨는 조사위원회의 일을 마치고 나서 세 번째와 네 번째의 큰 수술을 받았고 거기에다 방사선치료, 초음파 열 치료 및 기타 치료를 받았기 때문에 이 책이 좀 더 일찍 출판되지 못했다. 파인만의 10년에 걸친 암과의 투장은 1988년 2월 15일로 끝이 났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떠나기 2주 전까지 캘리포니아 공과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나는 그의 연설문 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이고 우리에게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하는 연설인 [과학의 가치]를 에필로그로 포함시켰다. 이 책을 쓴 랠프 레이턴의 아버지 로버트 레이턴은 리차드 파인만이 교수로 있던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동료 교수로서 유면한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를 파인만과 함께 저술했다. 랠프 레이턴은 파인만의 취미중 하나였던 드럼을 함께 치면서 파인만의 일화를 모으게 되었다. 이 책과 [파인만씨 농담도 잘하시네]는 그렇게 모은 이야기를 책으로 정리한 것이다. ◇◇◇ 제 1부 호기심 많은 파인만 씨 [나는 모든 것을 아버지로부터 배웠다] 내게 예술가 친구가 한 사람 있는데 그는 가끔 내가 인정할 수 없는 말을 하곤 한다. 예를 들어 그는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며 “이 꽃 좀 보게나,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라고 말한다. 나도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그는 “예술가인 나는 이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알 수 있지만 과학자인 자네는 꽃을 분해하고 분석하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게 된다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럴 때에는 그가 좀 모자라 보인다. 우선 그가 보는 아름다움은 다른 사람들도(나를 포함하여)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심미안이 그만큼 세련되지 않았을지는 모르겠으나 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정도는 된다. 나는 평생토록 과학에만 관심을 기울여 왔으며 젊어서는 거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과학에만 쏟았다. 그 당시 나로서는 소위 인문 과학이란 것을 공부할 시간도 없었고 그럴만한 참을성도 없었다. 나의 관심과 시야를 조금이나마 넓히게 된 것은 나이가 들고 여유가 좀 생기고 나서의 일이다. 그래서 그림 공부도 좀 하게 되었고 책도 조금 읽게 되었다. 한번은 내가 MIT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이제 네가 과학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을 테니 내가 늘 궁금하게 여기면서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하나만 물어보자.’ 나는 무엇이냐고 여쭤 보았다. ‘원자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화할 때 광자라고 부르는 빛의 입자를 방출한다고 알고 있는데…….’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광자가 원래 원자 속에 들어 있다가 방출되는 것이냐? ‘아니요, 광자가 원래 있다가 방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광자는 어디에서 온 거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이냐? 나는 광자의 수는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전자의 운동에 의해 생성된다는 것을 아버지께 설명해 드리려고 애썼지만 잘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렸다. ‘그것은 제가 지금 내고 있는 소리와 비슷합니다. 소리가 제 몸 속에 원래 있던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것은 내 아들의 경우와는 좀 다른데, 내 아들이 아주 어렸을 때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낱말 주머니에서 어떤 낱말-그 낱말은 나중에 알고 보니 고양이였다-이 다 떨어져서 더 이상 그 낱말을 말할 수 없게 되었노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낱말주머니라는 것이 있어서 낱말을 다 쓰면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니듯이, 원자에도 광자주머니라는 것이 있어서 미리 광자가 원자 내에 있다가 방출되는 것이 아니다) ※양자전기역학이론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는 과학인으로서 광자에 대한 설명이 독특하여 발췌한 것임. [남이야 뭐라하건] 이해하기 힘든 기적들도 있었다. 잎사귀가 흔들린 기적은 T길에 어디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 살펴보니, 바람은 거의 불지 않았는데도 덤불의 잎사귀들이 약간씩 흔들리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것은 잎사귀들이 우연히 어떤 적당한 위치에 있게 되면 일종의 공명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 이것이 바로 엘리야 선지자가 보았던 흔들리는 덤불에 대한 좋은 설명이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참고:왕상19장] 결국 나는 그 여름 방학 동안 알린을 몇 번밖에 보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내가 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이때는 이미 그녀를 사귄지 6년이 지난 때였다. MIT를 졸업하고, 나는 대학원 과정을 밟기 위하여 프린스턴의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리고 방학이 되면 알린을 보러 집으로 가곤했다. 한번은 그녀를 보러 집에 갔는데 알린의 목 한쪽 옆에 작은 멍울이 생긴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매우 예뻤고 멍울이 눈에 거슬렸기 때문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아프지는 않아서 심각한 문제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얼마후 멍울에 변화가 생겼다. 더 커졌는지 더 작아졌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알린에게 열이 나기 시작했다. 열이 점점 심해지자 알린의 주지의가 큰 병원에 가야겠다고 했다. 장티푸스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물었다. 그렇다면 아내가 결핵에 걸렸다고 해서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겠습니까? 호텔을 경영하시는 이모만이 정 그렇다면 결혼을 해도 괜찮을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수줍은 신랑은 신부의 볼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주말마다 나는 프린스턴에서 병원으로 알린을 보라 갔다. 한번은 프린스턴에 있는 나에게 소포가 배달되었다. 소포 속에는 짙은 녹색의 연필이 여러 자루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 연필에 금색으로 ‘리처드 사랑해요! 푸치.’라고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알린이 보낸 것이었다. 그 다음날 아침 우편함에 편지가 왔다. 편지 첫머리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연필에 새겨진 이름을 왜 도려내는 거야? 내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이 자랑스럽지 않다는 거야? 남이야 뭐라하건 무슨 상관이야?‘ 나는 잠시 밖에 나가서 주위를 걸어 다녔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흔히 사람들이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내가 느끼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매우 놀랐다. 어쩌면 나는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는 즐겁지는 않았다. 하지만 엄청나게 슬프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도 오랫동안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신의 나의 심정을 말로 표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예를 들어 화성인이 있다고 치고, 그들은 사고로 죽지 않는한 절대 죽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자. 그 화성인이 지구에 와서 칠팔십년 정도 사는 인간을 만난다고 하자. 우리는 우리가 칠팔십년 후에는 누구나 죽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연적인 죽음이라는 것이 없는 화성인이 보기에는 잠시 동안 이 세상에서 살다 죽는 사람들은 엄청난 심리적인 문제를 안고 잇을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죽음을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웃기도하고 농담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74p 나와 알린의 결혼 생활이 다른 사람들의 결혼 생활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다른 사람들이 50년을 함께 살 때 우리는 5년을 함께 살았다는 것이다. [하나, 둘, 셋 ....을 세는 것처럼 쉽다.] 나는 나중에 대학에 가서 꿈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빛이 망막을 자극하고 있는 것처럼 사물이 사실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자 할 때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것으로 설명을 한다. 그런데 하나의 개념은 또 다른 개념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 개념은 저 개념을 통하여 이해되고 저 개념은 또 다른 개념을 통하여 이해된다. 그런데 이런 개념과 이해의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수의 개념이 아닌가? 그리고 이 기본적인 수를 세는 방법이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어떤 것을 똑같이 이;해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실은 그 이해가 얼마나 다를 수 있겠는가 하는 말이다. [출세하기] 우리는 많은 것을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택시 기사는 내게 말했다. 자‘ 교수님, 제가 하고 싶은 질문은 이겁니다. 보신 바와 같이 인도 사람들은 흑인들 만큼이나, 때로는 흑인들보다 더 가난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그래도 발전하고 있습니다. 아까 그 남자는 자기 아들을 대학교에 보냈고, 또 그 아주머니들은 재봉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흑인들은 전혀 발전이 없습니다. 도대체 왜 그렇습니까? [시티호텔] [허먼이 도대체 누구야?] [비열한 성 차별주의자 파인만] [방금 그 사람하고 내가 악수를 했다고 믿을 수 있겠어?] 1986년 여름에 교토에서 학회가 있을 예정이었고 교토 대학교는 또다시 나를 초청했다. 나는 일본을 좋아해서 굉장히 가고 싶었지만 발표할 논문이 없었기 때문에 난처해하고 있었다. 그러자 교토 대학교에서는 내가 학회 폐회 전에 학회에 대한 총평을 맡아 주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학회의 한 분과에서 의장직을 맡아준다면 그들로서는 영광이겠노라고 했다. 그것이 내가 할 일의 전부였다. 그래서 결국 그 초청에 응했다. 이번에는 운 좋게도 아프지 않았다. 궤네스(세 번째 부인으로 ,In 1960 he married Gweneth Howarth-1934–1989-)가 그 지도에서 이즈 반도의 중간쯤에 역이 잔뜩 있는 구불구불한 기찻길을 발견했다.~~~ ‘저기에 가 보고 싶은데요.’~~~ 그 여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관 주인은 매우 주저하는 했다. ‘우리 여관은 아주 작은 여관입니다. 종업원도 따로 없이 가족들이 운영하는 곳입니다.’ ‘이분들께서 원하시는 곳이 바로 그런 여관입니다.’라고 말하며 그가 여관 주인을 안심시켰다. ‘좋다고 합니까?’하고 내가 물었다. 좀 더 말을 주고받은 후에 그 여행 담당자가 말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그 여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난밤에 가족회의를 했는데 자기네 여관은 외국인을 받을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랍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여행 담당자는 여관으로 다시 전화를 해서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물어보았다. ‘화장실 때문에 그렇답니다. 그 여관에는 수세식 화장실이 없답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 아내와 내가 여행을 했을 때에는 작은 삽과 화장지를 가지고 다니며 땅에 구멍을 팠다고 말해 주시오. 그리고 우리가 삽을 가져가면 되겠는지 물어봐 주시오.’ 그는 여관 주인에게 내 말을 전화로 전했다. 결국, 좋습니다. 우리 여관에서 하룻밤 묵으실 수 있습니다. 삽은 안 가져오셔도 됩니다. ‘ 그 여관 주인은 이세오키쓰 역까지 마중 나와 우리를 여관으로 데려갔다. 우리 방 밖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다. 반짝이는 에메랄드빛의 초록색 개구리가 빨랫줄과 연결된 금속 난간을 기어 올라가고 있었고 우리 방의 엔가와(뒷마루) 앞에 있는 관목 속에는 작은 노란색 뱀이 보였다. 과연 이세오키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흥미로웠다. [편지, 사진, 그리고 그림] -사랑하는 궤네스에게. 우선, 당신을 사랑하오. 그리고 당신과 아기, 그리고 키위가 보고 싶구려. 지금 내가 집에 있다면 좋겠소. -사랑하는 궤네스와 미셀에게.(그리고 칼에게도?) 오늘은 아테네에서 보내는 세 번째 날이오. 리처드 파인만은 44세의 나이에 미술 지도를 받기 시작하여 그 후 남은 생애동안 그림을 그렸다. 파인만은 자신이 그린 그림에 서명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오페이ofey라는 이름으로 서명했다. 제 2부 파인만 씨, 워싱턴에 가다 고체 연료 로켓 부스터는 여러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각 부분은 두 가지 유형의 접합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영구적인 ‘공장 접합 방식’은 유타 주에 있는 모톤 티오콜 공장에서 접합되어 나오는 것이고 임시적인 ‘현장 접합 방식’은 플로리다 주에 있는 케네디 우주 센터에서, 즉 ‘현장’에서 비행하기 전에 실시되는 것이다. [자살 행위] 많은 독자들이 이미 아다 시피 우주 왕복선 챌린저 호는 1986년 1월 28일 화요일에 사고를 당했다. 나는 텔레비전에서 폭발 장면을 보았지만 일곱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비극적인 면을 제외하고는 그 사건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사고가 난 후 며칠 뒤에 나사의 책임자인 윌리엄 그레이엄이 내게 전화를 했다. 우주 왕복선에 어떤 문제점이 있었는지를 밝혀내는 조사 위원회의 위원으로 위촉한다는 것이었다. [냉엄한 사실들]
한편 신문과 뉴스에서는 소문에 의하면 나사가 조급하게 우주 왕복선을 쏘아 올리게 된 것은 정치적인 압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은밀한 조사] 6월 초순 어느 날 우리 모두는 워싱턴으로 다시 가서 백악관고서를 제출하는 행사를 가졌다. 그날은 목요일이었으며 보고서는 그 다음 주 월요일까지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게 되어 있었다. 그동안 대통령이 보고서를 검토할 시간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가 내일 발사를 할 것인지에 대해서 토의를 한 결과 티오콜 사의 깃루자들은 대부분 발사에 반대하고 있는 형편이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획대로 ㅂ라사를 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보고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밀러이 씨의 말은 모든 문제점들이 해결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문제점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문젤있을 것이 아닌가? [에필로그] “젊은 시절에 나는 과학이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좋은 것들을 만들어 준다고 생각했다. 당시에 과학은 분명히 쓸모 있고 좋은 것이었다. 그런데 제 2차 세계 대전 중에 나는 원자폭탄 제조에 참여했다. 원자폭탄은 누가 보아도 심각한 문젯거리였다. 살인 무기였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는 원자 폭탄에 대하여 많은 걱정을 했다. 당시 나로서는 인류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가늠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과연 인류가 오늘날까지 존속할 수 있을지조차 자신할 수 없었다. 따라서 내가 가졌던 질문은 과학에 어떤 악한 요소가 있는지 하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여, 내가 매우 사랑하고 내 인생을 바치기로 한 과학이 그토록 참혹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직접 보았을 때 과학의 가치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가 반드시 해답을 찾아야만 했던 질문이었다. 과학의 가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구하고자 노력하면서 얻은 생각들을 묶은, 일종의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1955년 미국 국립 과학 학술원의 가을 학회에서 리처드 파인만이 대중 강연의 원고를 정리한 것이다.- [과학의 가치 ‧ 전문] 어떤 사람들은 가끔 저에게 과학자들도 사회적인 문제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특히 과학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좀 더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말은 마치 과학자들이 비교적 덜 중요한 과학적인 문제에만 시간을 보내지 말고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사회적인 문제에 눈을 돌리고 해결책을 구하고자 노력한다면 모든 문제들이 잘 풀리지 않겠느냐는 말처럼 들립니다. 제가 보기에는 과학자들도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과학자들은 그러한 문제에 온 정력과 시간을 소모하지 않을 뿐입니다. 사회적인 문제들은 과학에서처럼 어떤 기발한 공식을 생각해내고 그 공식에 따라 쉽게 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과학적인 문제보다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생각해 본들 간단하고 명쾌한 결론을 얻기가 쉽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과학자들도 비과학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다른 평범한 사람들보다 전혀 나을 것이 없으며, 비과학적인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는 그 분야의 훈련을 받지 않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엉뚱하고 답답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의 가치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 역시 비과학적인 문제이므로 오늘 제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시면 가끔 제가 한 말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과학이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는 누구나 쉽게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과학 덕분에 우리는 수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수많은 것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좋은 것을 만들면 그것이 과학의 덕분만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좋은 것을 만들도록 한 도덕적인 선택의 덕이기도 합니다. 과학은 선한 일뿐 아니라 악한 일도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하지만 과학 자체에는 그 지식을 어떻게 사용하라는 지시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능력은 분명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그 능력으로 어떠한 일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능력 자체가 부인될 수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언젠가 호놀룰루에 여행을 갔다가 인간이 갖고 있는 이러한 공통적인 문제를 표현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곳의 한 절에서 관광객을 인솔하던 스님이 불교에 대하여 간단한 설명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설명 끝에 마지막으로 우리가 평생 잊지 못할 말을 한마디 하겠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천국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주어져 있다. 그러나 그 열쇠는 지옥의 문도 열 수 있다” 그렇다면 천국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는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느 문이 천국의 문이고 어느 문이 지옥의 문인지를 판단하게 해 주는 정확한 기준이 없다면 그 열쇠를 사용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이 열쇠가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만약 그 열쇠가 없다면 천국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문이 어디 있는지 한다 하더라도 열쇠가 없이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과학도 이 세계에 엄청난 공포를 가져다 줄 수 있는 반면에,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과학의 또 하나의 가치는 지적 쾌감이라고 부르는 재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적 쾌감을 독서나 배움을 통하여 또는 그것에 대하여 사고함으로써 얻게 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실제로 과학에 종사하면서 얻기도 합니다. 이 두 번째 가치는 중요하며 과학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과학자들이 생각할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점이기도 합니다. 이 두 번째 가치는 단지 개인이 즐거움을 느끼느냐 못 느끼느냐 하는 정도의 문제이므로 사회가 갖는 중요성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렇다면 사회의 목표란 과연 무엇인가? 에 대해서 생각해 볼 책임 또한 있는 것입니다. 사회는 그 구성원들이 인생을 즐길 수 있도록 조성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과학을 통하여 즐거움을 얻는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되어야 합니다. 물론 저는 과학적인 노력의 결과를 중요시하는, 즉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과학의 가치를 무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과학의 발전을 통하여 우리는 과거의 시인들이나 몽상가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멋진 것들을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자연의 상상력이 인간의 상상력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를 들어 우주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지구를 생각해 봅시다. 이 지구가 한없이 깊은 바다 속을 헤엄치는 거북의 등에 올라 탄 코끼리 등에 얹혀 있다고 상상하는 것과, 자그마치 수십억 년 동안 줄기차게 회전하고 있는 공 모양의 물체에 어떤 신비로운 힘에 의하여 우리 인간들이 북반구와 남반구에 서로 거꾸로 매달려 있다는 사실 중에 어떤 것이 더 멋진 것일까요? 제가 방금 말씀드린 이런 생각은 평소에 제가 자주 하던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서 저와 비슷한 생각들을 해 보신 분이 계시다면 제 이야기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겠지만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것만큼의 과학 지식이 없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런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홀로 바닷가에 서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수많은 분자들로 이루어진 산이다. 자신의 키보다 1조 배만큼이나 서로 멀리 떨어진 채 어리석게도 자기의 일만을 생각하는가 하면 한편 조화롭게 어울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이룬다.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 그 어느 누구의 눈도 아직 열리기 전부터 긴긴 시간동안 지금의 모습 그대로 천둥처럼 해변을 때려 왔다.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감상해 줄 생명도 없는 죽은 행성 위에서 태양이 엄청나게 뿜어대는 우주 공간으로 뱉어내는 에너지의 고문을 잠시도 쉬지 않고 받았다. 진드기 하나가 바다를 포효하게 한다. 바다 깊숙한 곳에서 모든 분자들은 서로의 모습을 반복한다. 그리하여 새롭고 복잡한 모습이 형성될 때까지 그들은 다른 분자들을 서로 자기들처럼 만들어 완전히 새로운 춤을 시작한다. 점점 더 커지고 점점 더 복잡해지는 살아 있는 것들 원자들의 덩어리 DNA, 단백질 점점 더 기묘한 형태의 춤을 추는 구나 요람에서 나와 마른 땅 위에 지금 여기에 서 있다. 의식이 있는 원자들. 호기심이 가득한 물질이구나. 바닷가에 서서. 신기한 것들을 신기해한다. 나는 원자로 이루어진 우주이며 우주 속의 한 원자인 것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 충분히 깊게 생각해 보면 위에서와 같은 가슴 벅찬 경이감과 신비감을 느끼게 됩니다. 지식을 더 많이 쌓게 되면 더 깊고 더 황홀한 신비감에 빠지게 되어 더욱더 깊이 파고들게 됩니다. 찾게 될 해답이 우리에게 절망을 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추호도 없습니다. 오직 즐거움과 확신을 가지고 새로운 돌을 뒤집을 때마다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이상한 것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러면서 좀 더 황홀한 신비의 세계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모험입니까! 과학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러한 일종의 종교적인 경험을 거의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시인들은 시를 쓰고 있지 않으며, 화가들도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에 대한 지식을 접할 때 감동을 받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말인가요? 과학의 가치를 노래하는 가수도 없습니다. 여러분도 과학의 경이로움에 대한 노래나 시를 들어 본 적이 없을 것이며 , 기껏해야 저녁 시간에 앉아 과학에 대한 강의를 듣는 정도가 아닙니까? 이래도 우리가 현재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사람들이 과학에 대한 노래를 부르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과학이라는 음악을 읽을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논문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고 합시다. “쥐의 대뇌에 있던 방사성 인의 양이 2주일 후에 반으로 줄었다.”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의 뜻은 쥐의, 또는 저나 여러분의 대뇌에 있는 인이라는 물질은 2주일 전의 인과 똑같지 않다는 말입니다. 뇌 속의 원자들은 계속 교체되고 따라서 전에 있던 물질은 사라진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생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 답은 바로 지난주에 우리가 먹었던 감자입니다! 감자들이 1년 전에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1년 전에 우리 생각을 만들던 원자들은 이미 오래전에 다른 물질로 대체된 것이지요. 우리가 개인 또는 개체라고 부르는 존재는 원자들의 움직임 또는 춤에 불과하든 것을 먼저 깨달아야 비로소, 앞의 논문 구절에 담긴 속뜻이 뇌를 이루는 원자들이 다른 원자들로 바뀌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가를 밝혀냈다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즉 원자들은 나의 뇌 속에 들어와서 춤을 추고 나서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원자들이 들어오지만 그 원자들은 어제 추었던 춤을 기억하면서 똑같은 춤을 춘다는 것이 위 논문이 밝혀낸 사실에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사실을 보고하는 논문이 신문에 실리는 경우 언제나 다음과 같이 씌어 있습니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이 새로운 발견은 암을 치료하는 데 매우 유용할 것이라고 한다.” 신문은 언제나 새로운 생각이 어디에 쓸모 있을까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그 생각 자체에는. 새로운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여기에도 예외가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그 중요성을 깨닫기도 합니다. 어떤 어린이가 보통 사람들이 하지 못한 새로운 생각을 하고 깨닫는 바가 있을 때 우리는 새로운 과학자의 탄생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대학생이 되면 너무 늦었다고 생각됩니다. 이제는 과학이 지니고 있는 세 번째 가치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세 번째 가치는 다소 비 간접적인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무지와 회의 그리고 불확실한 것에 대하여 경험이 많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매우 중요합니다. 한 과학자가 어떤 문제의 해답을 모를 때에 그는 무지한 것입니다. 문제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예상만을 할 수 있다면 그는 불확실한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 지 꽤 자신이 있더라도 그는 여전히 회의합니다. 과학의 발전과 진보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무지함을 깨닫고 확실시되는 것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회의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습니다. 과학적 지식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정도의 확실성을 갖는 명제들의 집합입니다.(그중 어떤 것은 매우 불확실하고 어떤 것은 거의 확실하지만,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과학자들은 이러한 생각에 매우 익숙하기 때문에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것도 사실은 매우 일관성 있는 태도라는 것과,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과학의 발달 초기에 인간은 권위와의 투쟁을 통하여 회의할 수 있는 자유를 쟁취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심오하고도 강력한 투쟁이었습니다. 확신 대신 물음을 던질 수 있는(회의할 수 있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얻은 것을 다시 잃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에 있었던 투쟁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사회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엄청난 가능성에 비해 무척이나 왜소해 보이는 인간의 성취를 생각하면 서글픈 생각마저 듭니다. 사람들은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좀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지만 똑같은 오류를 또다시 되풀이하고 맙니다. 과거 악몽 같던 암흑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도 미래에 대한 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미래인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그들이 가졌던 꿈 중 일부는 이루어졌으나 다른 많은 것들은 여전히 꿈으로 남아있습니다. 우리의 오랜 희망 중 많은 것들이 아직도 미래에 대한 우리의 희망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때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이 개발되지 않는 이유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누구나 볼테르같이 될 수 있을까요? 나쁜 것도 좋은 것만큼이나 효과적으로 전수되고 교육될 수 있습니다. 교육은 강력한 힘이지만 선을 위하여 이용될 수 있는 만큼 악을 위해서도 이용될 수 있습니다. 국가 간에 교류의 통신은 상호 이해를 증진시킬 것입니다. 이로써 또 하나의 꿈이 실현되겠지요. 하지만 통신 기계를 조작하면 진실이 아닌 거짓된 내용을 전달할 수도 있습니다. 통신은 강력한 힘입니다. 하지만 통신 또한 선을 위해서 이용될 수 있는 만큼 악을 위해서도 이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응용과학은 인간을 최소한 물질적인 문제로부터는 해방시킬 것입니다. 병을 치료하는 의학은 선을 위해서만 이용될 것 같지만 이 분야 종사자들 중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에 사용할 전염병과 독극물을 개발하기 위해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전쟁을 싫어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꿈은 평화입니다. 평화 시대에 인간은 자신이 가진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계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미래의 인간에게는 평화 역시 좋을 수 있는 만큼 나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평화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권태로움에 지쳐 술에 의지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인간의 가능성을 계발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술이 될지도 모릅니다. 분명코 평화는 위대한 힘입니다. 절제, 물질적 능력, 통신, 교육, 정직 그리고 많은 이상가들의 꿈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우리는 과거 인류에 비하여 힘과 능력을 더 많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과거 어느 시대와 비교해 봐도 더 많은 힘과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우리가 혼란 속에서 성취한 보잘것없는 것들에 비하면 우리의 잠재력과 우리가 할 수 있어야 하는 것들이 너무 거대해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어째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정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위대한 힘과 능력들 외에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하라는 분명한 지시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물리적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엄청나게 축적되면 될수록 이러한 움직임들은 일종의 무의미한 움직임일 뿐이라는 확신만을 주게 됩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인류는 인생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노력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행동의 방향이나 인생의 의미를 찾기만 하면 위대한 인류의 잠재력이 고삐라도 풀린 듯이 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수많은 대답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대답들은 모두 다릅니다. 어떤 한 가지 대답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다른 대답을 믿는 사람들을 두려움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서로 상반되는 관점을 갖고 있으므로 한쪽의 대답이 다른 쪽 사람들이 보기에는 인류의 위대한 가능성을 잘못된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류가 가진 능력이 무한하고 엄청나다는 것을 철학자들이 깨닫게 된 것은 거짓된 믿음으로 창조된 거대한 괴물들이 과거 우리 역사를 얼마나 유린 했는가를 보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꿈은 열린 길을 찾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모든 것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우리 조상들이 알고 있던 것뿐만 아니라 그들은 몰랐지만 현재 우리는 알고 있는 것들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솔직히 모른다고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른다고 대답할 때 오히려 우리는 열린 길을 찾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이성의 시대에서나 비로소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어 낸 사람들을 이끌었던 철학입니다. 한 나라를 이런 방식으로 이끌어야 하는지를 아무도 알 수 없다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있었기에, 새로운 생각이 개발될 수 있고 시도될 수 있고 필요하다면 또 다른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행착오적인 정치 체계를 도입하게 된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시도될 수 있었던 것은 18세기 말에 이미 과학이 성공적인 사업임이 증명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도 사회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기회이며, 회의와 토론이야말로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최상의 방법임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전에는 풀 수 없었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문을 열어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앞으로 인류가 누릴 긴 역사를 시작하는 시점에 있습니다. 따라서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허덕이며 싸우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앞에는 몇 만 년의 미래가 놓여 있고,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책임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고,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우는 것이고, 문제의 해답을 발전시키는 것이고, 그 해답을 후세에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후손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인류의 긴 역사에 있어서 현재는 마치 충동적인 젊은 시절과 비슷하므로 우리는 심각한 오류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오랫동안 인류의 성장이 방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아직 어리고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미 해답을 찾았다고 단정 짖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심각한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것이 바로 답이요, 친구들, 이제 우리는 구원을 받았소!’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모든 토론과 비판을 억압한다면,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제한된 상상력으로 권위의 쇠사슬에 인류를 얽매어 두는 것입니다. 이전에도 우리는 그런 경험을 수없이 했습니다. 과학자로서의 책임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무지의 철학으로부터 위대한 발전이 이루어짐을 깨닫고 위대한 발전은 자유로운 사고의 결실이라는 것을 인식하여 자유의 가치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회의는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환영해야 할 것이며 자유를 요구하는 것이 미래의 후손들에 대한 우리의 임무인 것입니다. 끝 [Review] 한 분야에 전문가가 되려면 다른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 특별한 전문가가 아닐지라도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있고 좀 덜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는 늘 서로가 서로를 동경하는 마음이 있게 마련이다.
이 책은 노벨 물리학상수상자인 리처드 파인만의 일상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형식의 글이지만 자서전격 내용을 담고 있다. 누구보다도 분명하고 이성적이어야 할 과학자이지만 그는 엉뚱하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이 책의 제목에서처럼 그는 ‘남이야 뭐라 하던’ 자기 길을 간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사귀게 된 ‘알린’은 예쁘고 상냥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파인만이 프린스턴 대학에 다닐 때 ‘알린’은 결핵성 임파선으로 시한 부 인생을 살게 되었다. 주위에서 모든 사람들이 결혼을 반대했지만 두 사람은 혼인신고를 하고 결혼 생활을 시작하였다. 알린은 병상에 누워 5년간의 투병생활을 마감하였다. 남이야 뭐라 하건 두 사람만의 사랑은 순결했고 아름다웠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그의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노벨 수상자라는 타이틀이 그에게는 자랑거리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인 듯, 자유로운 일상이 책속에 잘 드러나 있다. 그의 이러한 마음은 어쩌면 일반인들이 바라보는 과학자에 대한 편견에 반한 마음이었을까?
[내게 예술가 친구가 한 사람 있는데 그는 가끔 내가 인정할 수 없는 말을 하곤 한다. 예를 들어 그는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며 “이 꽃 좀 보게나,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라고 말한다. 나도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그는 “예술가인 나는 이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알 수 있지만 과학자인 자네는 꽃을 분해하고 분석하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게 된다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럴 때에는 그가 좀 모자라 보인다. 우선 그가 보는 아름다움은 다른 사람들도(나를 포함하여)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심미안이 그만큼 세련되지 않았을지는 모르겠으나 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정도는 된다. <본문>] 책의 전반부에는 유대인 가정에서 그가 겪은 유년시절의 이야기와 첫 번째 부인 ‘알린’과의 이름다운 사랑, 그리고 과학자의 길을 가게 된 대학 시절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후반부에는 1986년 전 세계인들을 놀라게 한 챌린저 유인 우주선의 폭발에 대한 조사위원으로서 그가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노력이 담겨있다. 결국 그는 치명적인 문제가 고체 연료 로켓 부스터의 현장 연결부에 들어가는 작은 부품 O링의 결함이라는 것을 밝혀냈지만 그의 보고서는 부록으로 실릴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의 끝에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보고서 전문을 담았다. 책의 후미에 담겨있는 일본 출장에서의 에피소드도 재미있다. 그는 1986년 챌린저 호 사고 조사활동을 마치고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온 병마에 시달렸다. 그해 여름 일본에서 학회 위원으로 초청 받아갔을 때의 일이다. 일본에서 마련해 준 좋은 호텔을 마다하고 그는 아내가 지도에서 찾아낸 시골마을의 이름 없는 여관에서 묵기로 했다. 갑작스런 귀빈을 맞이한다는 연락에 당황하는 여관주인을 설득하는 장면이다.
[‘무엇이 문제랍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여행 담당자는 여관으로 다시 전화를 해서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물어보았다. ‘화장실 때문에 그렇답니다. 그 여관에는 수세식 화장실이 없답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 아내와 내가 여행을 했을 때에는 작은 삽과 화장지를 가지고 다니며 땅에 구멍을 팠다고 말해 주시오. 그리고 우리가 삽을 가져가면 되겠는지 물어봐 주시오.’ 그는 여관 주인에게 내 말을 전화로 전했다. 결국, 좋습니다. 우리 여관에서 하룻밤 묵으실 수 있습니다. 삽은 안 가져오셔도 됩니다. ‘ 그 여관 주인은 이세오키쓰 역까지 마중 나와 우리를 여관으로 데려갔다. 우리 방 밖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었다. 반짝이는 에메랄드빛의 초록색 개구리가 빨랫줄과 연결된 금속 난간을 기어 올라가고 있었고 우리 방의 엔가와(뒷마루) 앞에 있는 관목 속에는 작은 노란색 뱀이 보였다. 과연 이세오키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흥미로웠다. <본문>] 이 책은 파인만의 글이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이 책의 출판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파인만의 생전에 취미 중 하나였던 드럼을 함께 치면서 지냈던 가까운 친구 ‘랠프 레이턴’이 정리해서 펴낸 것이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2주 전까지 캘리포니아 공과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생전에 그의 감동적인 연설문중의 하나인 [과학의 가치]가 에필로그로 실려 있다. 1918년 뉴욕에서 유대인 세일즈맨의 가정에서 출생하여 MIT를 졸업하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42년부터 원자폭탄 제조를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1942년부터 1951년까지 코넬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1951년부터 1988년 2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캘리포니아 공대 교수로 일하면서 수많은 과학적 업적과 일화를 남겼다. 양자전기역학 이론을 개발한 공로로 1965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저서로는 [파인만씨 농담도 잘 하시네],[남이야 뭐라 하건],[파인만의 여섯까지 물리학 강의],[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발견하는 즐거움]등이 있다. y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