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⑬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⑭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⑮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그 아버지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⑯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
성경에는 많은 위대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성경의 주인공이 아니다. 성경의 주인공은 항상 하나님이었다. 시골 노인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신 하나님께서 주인공이시다. 부모가 버릴 수밖에 없었던,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모세가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덕분이었다. 목동에 불과했지만,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 역시 하나님 덕분이었다. 그러므로 성경의 주인공은 하나님께서 될 수밖에 없다.
자기 아내를 지킬 힘이 없어서, 아내를 누이동생이라 불렀던 이삭은 주인공이 아니다. 자기 아내를 지킬 힘이 없는 이삭을 지키시고, 복 주시는 하나님께서 주인공이시다.
유목민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역시 땅이다. 내 이름의 땅이 있다면 더 이상 돌아다니지 않아도 될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삭은 땅을 빌렸다. 처음 농사를 짓는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자그마치 100배의 결실을 거둔 것이다. 농사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이삭이었는데 말이다. 게다가 기근으로 인해 온 천지가 흉년이 든 마당에…….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1~33) 실수한다고 자식이 아닐 수 없다. 믿음이 부족하다고 해서 자식이 아닐 수 없다. 백배로 축복하고 싶은 마음, 아버지의 마음이다.
때로는 아버지가 매를 들 수도 있다. 야단을 칠 수도 있다. 분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버지의 본 마음은 아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항상 동일하다. 인자하심이다. 긍휼하심이다.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13절) 이삭의 모습을 세 단어로 표현한다. “창대” “왕성” “거부”
“창대”는 “자라다, 커지다, 중요해지다, 증진시키다, 강하게 만들다, 높이다, 과장하다, 큰 것을 만들다”라는 뜻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서 물려받은 큰 유산이 있다. 그런데 지금, 더 큰 부자가 되어 가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모습이다.
“왕성”은 “빨리”라는 의미가 있다. 얼마나 빨리 거부가 되었든지, 블레셋 사람들이 질투할 정도였다. 남이 어려울 때 같이 어려웠으면 상관없다. 혼자만 아주 빠르게 부자가 되어 간다.
“거부”는 “창대”라는 단어의 반복이다.
표준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한다. “그는 부자가 되었다. 재산이 점점 늘어서, 아주 부유하게 되었다.”
12절을 다시 보자.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물론 이삭이 성실했을 것이다. 밤낮으로 애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백배의 축복을 얻게 되지는 않았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 그래서 백배의 복을 받았다.
이삭이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는 구절과 다르지 않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창대”의 복을 주셨다. 지금도 좋지만, 내일은 더 좋다. 그 다음 날은 더 좋다. 하나님께서는 창대케 하시는 복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창대의 복을 받았는데, 이삭도 창대의 복을 받았다. 하나님의 축복이 단지 말에서 끝나지 않고, 현실로 이삭의 삶에서 이루어졌다. 아버지보다 더 잘되는 아들, 아들의 아들은 더 잘되는 축복! 이것이 참된 축복이다.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14절)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10년, 20년 걸려서 장만할 것을, 이삭은 바로 그 해에 이루었다. 백배의 결실이라니? 이게 말이 되는가? 이삭은 유목민에 불과하다. 이주민에 불과하다. 잠깐 왔다가, 언젠가는 금세 떠날 사람이다. 저런 사람이 복을 받는다고? 어? 이렇게 말하는 중에 더 큰 부자가 되었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을 얻었다. 그 아브라함이 두려워 주변국에서는 쳐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 아브라함이 우물을 차지했다. 우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우물을 소유함은 곧 힘을 소유한 것이다. 능력자가 된 것이다. 그랄에서 아브라함의 이름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그래서 아비멜렉이 찾아와서 아브라함과 평화 협정을 맺은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죽었다. 이번에는 그의 아들이 큰 부와 힘을 가졌다. 그런 이삭에게 얼마나 화가 났던지, 블레셋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메꿔버렸다. 이건 선전포고이다. 너무 밉다는 것이다. 곧 전쟁이 일어날 듯한 분위기가 된 것이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고 판단한 것이다. 유약해 보이는 이삭? 싸워볼 만한 상대이다. 싸워서라도, 죽여서라도, 이삭의 재산을 차지할 수 있다면 좋겠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급기야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와서 통보한다.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16절) 떠나라는 것이다. 나보다 더 강해지는 것이, 부자가 되는 것이 싫다는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을 핑계 삼는 한이 있어도, 이삭을 쫓아내고 싶다.
지금 세대를 “결정장애 세대”라 부른다. 자기 결정이 부족하고, 어정쩡한 특징을 가진 젊은 세대를 일컫는 말이다. 왜 결정장애일까? 완벽하게 해낼 수 없다는 불편한 마음에 당장 시작해야 할 일, 끝마쳐야 할 일을 되도록 미루는 것이다. 게으름과 다르다. 두 가지의 공통점은 있다. 시작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 게으름은 나태하기 때문에 시작하지 못한다. 결정장애는 완벽주의라, 누군가의 시선을 인식하기 때문에, 시작하지 못한다.
결정장애일 수밖에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 선택 사항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①~④ 중에서 선택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세상은 ⑩이 넘는다. ⑳이 될 수도 있다. 그 많은 것 중에서 도대체 뭘, 어떻게 선택하란 말인가?
다니엘은 하나님께 뜻을 정했다. 어린 나이지만, 뜻을 정하고는 흔들림이 없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단 1:8) 나라가 망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각자가 알아서 살아야만 한다. 개처럼 살 수 있다. 정승처럼 살 수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지금 세대는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의사가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커피가 몸에 해롭다고 이야기한다. 그 다음 날에는 커피가 몸에 좋다고 이야기한다.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시점에서, 그룹 회장이 이혼할 것 같다는 이야기가 더 관심 사항이 되는 시대이다. 그 사람이 이혼하건 안 하건, 그게 무에 그리 중요한가? 한 시대의 아픔을 짊어진 분들, 영혼까지 난도질당한 분들의 이야기가 더 중요하지 않은 세상이다.
왜? 깊이 생각하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육신에까지 불편을 가져온다면 더더욱 싫다. 편한 게 좋다. 아무 생각 없는 것이 좋다. 결정하지 않는다. 결정하면 그만큼 책임을 져야 하니까 말이다.
다니엘의 생각은 다르다. 이런 시대이기 때문에 결정해야 한다. 선택해야 한다.혹 내가 내린 결정으로 인해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래서 다니엘은 음식의 차별을 당했고, 삶의 차별을 당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 뜻을 정했기 때문이다.
이삭이 하나님을 선택한 순간,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 동시에 블레셋의 시기를 당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는 이야기만 계속 되면 좋았으리라. 그런데 어떤 인생이든 좋은 이야기로만 끝나지는 않는다. 아픈 이야기, 눈물의 이야기가 함께 있다. 이삭처럼 말이다.
인생은 비빔밥이다.웃다가 운다. 좋다가 싫다. 힘들다가 기쁘다. 살다가 죽는다. 죽다가 살아난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다가 어느 순간 마귀의 자녀가 되기도 한다. 에스더를 포함한 유대인들은 하만의 미움을 받아 다 죽는 줄 알았다. 하루아침에 전세가 역전되었다. 오히려 하만과 그를 따르던 무리들이 모두 죽음을 당했다.
이삭이 아내를 누이동생이라 불렀던,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일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 일이 지나자마자 이번에는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한다. 이번에도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이렇게 앞으로 몇 번이나 더 겪을는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하나님의 첫 번째 작품인 아담과 하와가 그렇게 쉽게 무너질 줄 몰랐다. 그의 가정이 가인의 살인으로 인해 그토록 쉽게 무너질 줄 몰랐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두려움 앞에서 그렇게 쉽게 무너지고, 발람 선지자가 돈과 권력 앞에서 그렇게 쉽게 무너질 줄 몰랐다.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는 말이 맞다.
우리는 지금 전혀 앞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과거에는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지만, 지금은 분초단위로 세상이 바뀌어가고 있다. 경영학의 세계적인 정신적인 스승인 ‘게리 하멜’은 오늘날의 변화를 이렇게 표현했다. “변화 자체가 변했다. 이제 변화는 더 이상 점진적이지 않다. 더 이상 직선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21세기의 변화는 불연속적이고, 돌발적이며, 선동적이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엄청난 변화의 시대에 있다. 변화의 속도는 가공할 정도로 빠르다. 예측할 수 없으며, 멈추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 느끼지 못하는 부분에서 변화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변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복을 받을 수 없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밝힌 ‘적자생존’의 이론은 매우 일리가 있다. ‘환경 적응력이 높을수록 오래 살아남는다.’는 의미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결국 살아남는 종은, 강인한 종도, 지적 능력이 뛰어난 종도 아니라, 변화에 가장 잘 대응하는 종이다.”
사람은 누구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에게 익숙해진 생각과 행동방식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안주지대(Comport Zone)’라고 부른다. 그러나 안주지대에 들어가면, 변화에 적극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치명적인 해를 입게 된다. “지금까지 이렇게 해왔다.”면서, 평소에 하던 방식대로 타성에 젖으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어, 결국에는 망하는 원인이 된다.
세상을 살면서 어려운 일을 만나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런 인생은 없다. 그리고 그런 인생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금자리를 흔드신다. 도저히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없도록. 흔들림이 있었기 때문에, 백배의 축복도 있을 수 있다.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시 48:14) 아버지가 자식에게 매를 들 때, 죽이는 것을 목적하지 않는다. 살리기 위함이다. 나의 보금자리가 흔들리지만, 흔드시는 하나님의 손으로 인해, 내 영혼은 순수해진다. 성결해진다. 하나님과 언제나 함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