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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의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했습니다. 10가지 재앙을 목격하고 홍해의 기적을 체험한 이들은 꿈에 그리던 땅을 향해 나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열하루 길이면 갈 수 있는 쉬운 길로 이끌지 않았습니다.
무려 40년을 광야에서 지내게 합니다. 성경은 이를 민수기 14장에 나온 ‘40일간의 가나안 정탐’에 대한 부정적 반응 때문으로 설명합니다만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광야를 번역하면 ‘미드바르’입니다. 이는 ‘∼로부터’ ‘∼와 함께’란 의미의 전치사 ‘민’과 ‘말씀’ ‘사건’이란 의미의 ‘다바르’란 명사의 합성어입니다. 곧 광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역사(사건)를 체험하는 시간이자 장소’를 뜻하는 것입니다.
육안으로 볼 때 광야는 나무나 풀 등 생명이 자라기 힘든 역경의 장소로 보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볼 때 광야는 가나안 입성 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성장케 하는 곳입니다.
인생에 있어 누구나 한 번쯤 광야에서 보내는 시간이 있습니다. 지루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지겠지만 결코 무의미한 시간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광야 중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깊이 체험할 수 있는 귀한 시간으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신민규 나사렛대 총장 (상암동교회 목사) - 출처 : 국민일보
▣ 광야의 영성
광야는 고독한 곳이다. 광야는 조용한 곳이다. 광야는 세속의 방해가 가장 적은 곳이다. 그래서 광야는 하나님을 부르고 찾기에 적합한 곳이다. 그러나 광야는 부족함이 많고 불편한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광야는 하나님을 의존함을 배우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광야를 찾았고 거기서 하나님을 홀로 대면했으며 그들을 통해 광야의 영성이 태어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기에 앞서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셨다. 이 광야의 여정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도를 배우게 되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존귀함을 배우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직한 모습을 직면하면서 죄와 탐욕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것을 학습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땅의 백성’이면서 ‘광야의 백성’이었다.
광야는 안전하지 못한 곳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끊임없이 주거를 옮겨 다녀야 했다. 그들은 광야의 경험을 통해서 진정한 안전은 오직 하나님 안에만 있는 것을 배워야 했다. 오늘을 사는 성도들은 다른가? 우리는 오늘도 삶의 자리를 끊임없이 옮기며 유목민의 삶을 흉내 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는 불행하게도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함의 레슨을 너무나 늦게 배운다. 광야의 영성이 고갈된 까닭이다.
그래서 옛날 우리의 선배들도 이 광야의 경험을 제대로 학습하고 전수하기 위한 공동체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시작된 운동이 수도원 운동이었다. 나는 오늘을 사는 성도들이 광야의 영성을 회복하기 위해 수도원으로 가자는 말을 하고자 하지 않는다. 난 단지 오늘의 교회 내에 수도원의 영성이 담겨져 있을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이 광야를 순례하는 백성들을 위한 영적 지도의 책임을 위해서 말이다.
수도원에도 타락과 부패는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수도원은 산위에 높이 세운 산성이요 등대였다. 오늘의 교회에게 세상이 거는 기대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세상과 다른 모습의 거룩함과 아름다움을 보고 싶어 하는 갈망은 얼마나 큰가. 그리고 그것을 보지 못한 좌절과 실망이 소위 안티 기독교, 안티 교회 운동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더욱 광야의 영성이 그립다.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 광야의 길에서 예배하라
몇 년 전에 우리 교회에 암으로 죽어 가던 여성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자신이 걸을 수 있는 한 교회에 나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말을 지켰습니다. 나는 그녀의 삶이 거의 다해 가던 어느 날에 그녀가 여위고 허약해진 몸으로 천천히 예배당 안으로 걸어 들어오던 모습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머리카락이 거의 다 빠진 상태였고 얼굴빛은 매우 창백해 보였습니다. 남편이 산소 마스크를 들고 그녀 옆에서 함께 걷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맨 뒷자리에 조심스럽게 앉혔고, 그녀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손을 들라는 가사의 찬양을 부르는 동안 그녀는 야윈 양손을 위로 들어 올렸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녀는 힘없이 떨리는 손이었지만 계속해 들고 있었고, 눈을 감고 약간의 미소를 띤 채 나지막하게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날 예배에는 두 개의 설교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내가 단상에서 전한 설교였고, 다른 하나는 맨 뒷자리에 앉았던 그녀가 한 마디 말도 없이 행한 설교였습니다. 그리고 두 설교 중에 그녀의 것이 훨씬 더 강력했습니다.
「광야를 정복한 영적 거인」/ 마크 애터베리
* 기도: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음으로 광야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 광야의 지혜
"광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미드바르’입니다. 이 단어는 ‘말하다’라는 뜻인 ‘다바르’에서 나왔습니다. 이러한 어근에 비춰볼 때, 광야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곳, 하나님이 가장 중요한 그분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주시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광야 경험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눈에 보이는 희망도 없이, 병든 가족을 돌보는 것이나 오랫동안 노부모를 모시는 것을 포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메마른 땅에 머무는 것에는 당신을 제한하는 심한 신체적 장애가 포함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실하지 못한 배우자나 반항하는 자녀들로 인한 깊은 영적 아픔이 포함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가?’, ‘그분은 이에 대해 이해하고 계시는가?’를 궁금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매우 잘 알고 계십니다. 바로 그분이 당신을 그곳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교육은 광야의 시간도 포함합니다. 광야에서 그분은 우리의 주목을 받으십니다.
- 「지혜」/ 찰스 스윈돌
▣ 광야
요즘처럼 폭염이 계속되는 날 광야에 나가 서 있는 것은 무척이나 끔찍한 경험이다. 메마른 땅, 강력한 태양 그리고 살인적인 더위는 그곳에 선 모두를 금방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하다. 그렇게 무서운 곳이 광야여서 예레미야는 광야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라고 했다.
그런데 자주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시는 종들을 이 광야로 내모셨다. 모세가 그러하고 엘리야가 그러했고 세례요한도 광야의 사람이었다. 또한 우리 주님께서도 광야의 40일을 보내셨다. 왜 이 살인적 환경이 기다리는 곳으로 당신의 사랑하는 자들을 보내시는가?
모세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는 지금까지 많은 생존과 자기 발전의 수단을 가졌었다. 그러나 광야에 나온 후 그에게는 이 모든 수단들이 무용지물이었다. 왕족의 신분증도 통하지 않았고 그 많았던 동료들의 도움도 그곳에는 없었다. 지금까지의 경험도 유익하지 않았고 이집트의 찬란한 문명도 여기엔 없었다. 빈손이었고 주변은 광야였을 뿐이다. 이것이 그의 실존이었고 현실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그는 하나님 앞에 선 외로운 개체였다. 소위 신 앞의 단독자일 뿐이었다. 중간에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끼어들지 않고 하나님과 직면하여 마주하고 자기를 맡기는 순간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임재가 그에게 온전히 임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공주였던 양어머니의 품을 떠나 광야에 홀로 서서 하나님의 품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 그는 새 피조물이었다. 이 거룩함의 광야 경험이 우리를 새롭게 한다.
/손달익 목사 <서울 서문교회>
▣ 독신(솔로)에서 탈출- 연혼 결혼정보회사 (連婚 結婚情報會社)
* 결혼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결혼합니다. 홀로 살지 말고 짝을 찾으세요. 음행(동성애, 근친상간, 매춘, 간음 등)은 무서운 범죄입니다. 음행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결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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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잠18:22)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잠19:14)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2:18)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9- 12)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치 아니하느니라』(잠31:10-12)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마19:5)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2:10)
▣ 광야의 외침을 듣자
욕심도 없이 한 벌 옷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기 인생이 세 문장으로 표현된 한 사람이 있어 소개합니다.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엔 가죽띠를 메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산 사람’,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의 고독과 침묵 속에서 외로움보다는 오히려 훈훈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때로 고독과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침묵의 은총’이란 글을 보면 ‘침묵은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말을 찾아내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30년 세월의 침묵은 말하지 않기 위한 침묵이 아니라 말하기 위한 침묵이었습니다. 꼭 해야 할 한마디, 즉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한마디를 외치기 위한 침묵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례 요한은 아무런 욕심이 없었습니다. 욕심을 버리면 세상이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욕심을 버리면 그렇게 편할 수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두려움이 없는 사람입니다. 당대에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앞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습니다. 타락한 세상을 향해 진리를 외면하고 정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저들에게 참 의가 무엇인지를 말하고, 성공만을 위해서 달려가는 저들에게 진리를 보여줄 수 있으며,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을 높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만 보이게 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비참한 인생을 마친 것 같지만 그는 사명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저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 이스라엘 자손을 주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며, 또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서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품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이 귀한 사명을 감당했기 때문에 그는 죽어도 여한이 없었습니다. 사명에 충실합시다. 우리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뭇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거스르는 자, 거역한 자들이 주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며 영광 가운데 살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능력과 엘리야의 심령을 가지고 산 것처럼 우리도 세례 요한의 심령과 세례 요한의 능력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갑시다. 이 마지막 세대의 우리는 저 세상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진실하고자 하는 마음들을 일깨워 하나님께로 이끌어와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을 향해 희망을 찾아주는 교회,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나눠주는 교회가 됩시다.
/정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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