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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는 고려·조선시대 유교교육을 위해 지방에 설립한 관학교육기관으로 '교궁' 또는 '재궁'이라고도 하였다. 수도를 제외한 각 지방에 관학이 설치된 것은 고려 이후로서 1127년(인종 5)에 인종이 여러 주에 학교를 세우도록 조서를 내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부터 향교가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향교에 적극적인 유학교육의 면모가 나타난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
유교 국가를 표방한 조선왕조는
교화정책 가운데 근본적인 방법으로 지방민을 교육, 교화할 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1392년(태조 1) 각 도의 안렴사에 명하여 향교가 만들어지고,
또 잘 운영되는 정도를 가지고 지방관 평가의 기준을 삼는 등
강력한 진흥정책에 힘입어 성종 때는 모든 군·현에 향교가 설치되었다.
향교에는 유생들이 학문을 배우는 공간으로서 강학장소인 명륜당이 맨 앞에 배치되고,
그 좌우로 지금 기숙사와 같이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동재와 서재가 마주하고 있다.
명륜당 뒤에는 공자와 선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례를 위한 대성전이 위치하고 대성전 좌우로 동무와 서무가 마주하고 있다.
명륜당, 동무, 서무 및 대성전 주위로 성현 제사와 유생 교육에 필요한 제반 업무를 처리하던 건물들이 위치하고 있다.
교생의 정원은 부·대도호부·목에 50명(90명), 도호부에 40명(70명), 군에 30명(50명), 현에 15명(30명)으로 배당되었으나, 조선시대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각각 90명·70명·50명·30명으로 증원되어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교수관으로는
교수(종6품)와 훈도(종9품)를 두어 교육을 맡아보게 하고 8도의 지방장관인 관찰사로 하여금 이를 감독하게 하였다.
그리고 교생이 독서하는 일과를 매월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관찰사는 각 향교를 돌아다니며 교생을 독려하였다.
향교의 재정은
조선 초부터 향교에 주어진 위토 전답에서 거두는 세 외에도
지방관이 나누어준 전곡 및 요역, 그리고 향교에 비축된 전곡의 이자로 충당되었다.
《대전속록》 학전조에는 성균관을 비롯한 주·부·군·현 등에 각각 400결·10결·7결·5결씩을 지급하여 이를 농민에게 소작하게하고 소작료를 받아 재정수요를 충당하도록 하였다.
중기 이후 향교는
점차 무력화되어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사림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사학인
서원이 거의 대치하게 되었고,
향교는 지방 양민들이 군역을 피역하는 장소로 전락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향교는 이름만 남게 되고
단지 문묘에 대한 제사만을 담당하게 되었다.
서원은
우리나라의 선현을 배향하고 유생들을 가르치던 조선의 대표적인 사학교육기관이다.
서원은 선현을 모시고 유생들을 교육시킨다는 점에서
성균관, 향교와 성격이 같다,
그러나 관학이 아닌 사학이라는 점과,
중국 선현은 배향하지 않고(숭인동의 동묘)(화양서원의 만동묘)
우리나라의 선현만을 배향했다는 점에서
성균관, 향교와 크게 다르다,
이후 서원의 설치는 전국에 미쳐 명종(1545-1567) 이전에 설립된 것이 29개,
선조 때는 124개에 이르렀고, 당쟁이 극심했던 숙종 때 설치한 것만 300여 개소에 이르러 1도에 80∼90개의 서원이 세워졌으며,
초기의 서원은
인재를 키우고 선현·향현을 제사지내며 유교적 향촌 질서를 유지,
시정(時政)을 비판하는 사림의 공론을 형성하는 구실을 하는 등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하였으나 증설되어감에 따라 혈연·지연관계나 학벌·사제·당파 관계 등과 연결되어
지방 양반층(사림)의 이익 집단화하는 경향을 띠게 되고
사액서원의 경우
부속된 토지는 면세되고, 노비는 면역되기 때문에
양민의 투탁(投託)을 유인하여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 때문에 서원은 양민이 원노(院奴)가 되어 군역을 기피하는 곳이 되어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군정의 부족을 초래하였고
불량유생의 협잡소굴이 되는가 하면 서원세력을 배경으로 수령을 좌우하는 등
작폐도 많았다.
또한 면세의 특권을 남용한 서원전의 증가로 국고 수입을 감퇴시켰으며,
유생은 관학인 향교를 외면,
서원에 들어가 붕당에 가담하여 당쟁에 빠져 향교의 쇠퇴를 가속시켰다.
서원의 폐단에 대한 논란은 인조 이후 꾸준히 있었으나
특권 계급의 복잡한 이해 관계 때문에 손을 대지 못하고
1657년(효종 8) 서필원은 서원의 폐단을 논하다가 파직되기도 하였다.
효종·숙종 때는 사액에 대한 통제를 가하고
누설자를 처벌하는 규정까지 두었으나 잦은 정권 교체로 오히려 증설되었다.
1738년(영조 14) 안동 김상헌의 원향(院享)을 철폐한 것을
시발로 대대적인 서원 정비에 들어가 200여 개소를 철폐하였으나
그래도 700여 개소나 남아 있었으며
이 중 송시열의 원향이 36개소나 되어 가장 많았고,
유명한 것으로는 도산서원·송악서원·화양서원·만동묘 등이 있었다.
1864년(고종 1)에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서원에 대한 일체의 특권을 철폐하여,
서원의 설치를 엄금하고
그 이듬해 5월에는 대표적인 서원인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폐쇄한 이후
적극적으로 서원의 정비를 단행하여, 사표(師表)가 될 만한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만동묘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에 세운 사당
화양서원: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의 우암 송시열(건립 권상하)을 모시는 서원.
철폐이유:
제수비용 마련을 목적으로 각 고을에 화양묵패를 보내고
이에 응하지 않는 수령은 탄핵여론을 조성 하였다.
또한
봄가을 향사때 유생들을 대접한다는 명분으로 양민들의 재산을 함부로 거둬들이며
이에 따르지 않으면 서원으로 잡아들여 사사로이 형벌을 가하였다.
화양묵패는
서원업무를 처리하기위해 검은도장을 찍은 공문서지만 백성들에게는
수탈의 대상이 된 것이다.
화양 서원의 관리 토지(서원전)는 충청,강원,경상에 걸쳐 상당한 토지가 있었다.
*** 서원전에 넣어놓고 개인적으로 탈세 목적인지도 모른다. ***
공주 충현서원은
1581년에 고청(孤靑) 서기(徐起)가 창건한 공암서원의 학맥과 전통을 이어오다가
1625년(인조 3)에 ‘충현’이라는 현판을 하사 받았습니다.
나라에서 현판을 내려 받은 서원을 ‘사액서원’이라고 하며
이와 같이 국왕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서원은 책 과 땅, 그리고 노비를 하사받았고,
국가에 대한 세금과 노동의 의무를 면제 받는 혜택이 있었습니다.
공주 충현서원은
충청남도에 있는 여러 서원 가운데 그 시기가 가장 빠른 유서 깊 은 서원입니다.
국가로부터 편액을 받기 이전인 1581년부터 ‘공암서원(孔巖書院)’ 이라는 이름으로 고청(孤靑) 서기(徐起)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설립, 운영되었 으며 이 시기를 전후하여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이 본격화되면서 공주의 대표적인 서원으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1592년에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10년에 복원되었으며, 1624년에는 국가로부터 ‘충현서원’으로 사액(賜額) 되었다.
명실공히 16세기 후반 지역의 대 표적인 강학장소로 자리매김하였고, 17세기에 이르러 조선후기 사림계(士林界) 를 주도할 저명한 교육기관으로 발전하였습니다.
1871년(고종 8)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도 지역 유림 들의 노력으로 중건되어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는 우리지역의 대표적인 유교문 화유산이며 충현서원 일원에는 사당을 중심으로 재실, 충현서원사적비, 충현 서원사실병우암송선생추향기 등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 충현서원은
유·무형의 문화 유산을 문화재청의 문화재활용사업과 연계하여 다채로운 체험프로그램과 인 성교육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공주 도산서원(道山 書院)은
옛날에 ‘숯뱅이’라고 불려지던 탄방동(炭坊洞) 도산(道山) 기슭에 세워진 서원이다.
숯뱅이는 안동권씨의 집성마을이다.
탄옹 권시(炭翁 權諰)는 선대의 땅을 상속받아 23세(1627)가 되던 때에
탄방동으로 옮겨와 살면서 이곳은 권씨의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권시가 공주(탄방동)(현 대전 서구 탄방동)으로 옮겨 살면서 공주를 가향으로 하고,
대전지방의 명현인 송준길(宋浚吉), 송시열(宋時烈), 유계(兪棨),이유태(李惟泰) 등
호서의 사림과 교유하여 호서지방에 이름이 났다.
그러나 그는 예송문제로 서인과 대립하여 결국 벼슬에서 물러나고,
공주의 옛집으로 돌아와 많은 후학들을 길러냈다.
권시가 작고한 후 사림과 문인들이 그를 서원에 배향하고자 하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유성 지방의 자제들이 가장 많이 드나들던 충현서원에 추배하고자
2번에 걸쳐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사림들은 그가 살면서 후학에게 강학하던 향리에 서원을 세우기 위한 운동이
일어났다.
1690년 충청도 도내의 선비들이 서원설립에 대한 상소를 올렸으나,
해당관청으로부터 아무런 답을 얻어내지 못하였다.
이에 다음해인1691년(숙종 17) 10월 27일 서당계(書堂契)에서
서원의 건립에 관한 ‘통문(通文)’을 작성하여 서울과 지방의 선비들에게 돌렸다.
권시가 작고한 후 이곳의 사림들은 그를 서원에 향사하고자 20여 년간의 노력 끝에
결국 그가 향리에서 강학하던 서당자리에 1693년(숙종19)에 서원을 창건하고
서원의 명칭을 ‘도산서원(道山書院)’이라 하고
권시와 그의 아버지 권득기(權得己)를 배향하였다.
1711년(숙종37) 사액(賜額)을 받았다.
도산서원은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서원이 훼철된 후 당시 충청도관찰사가 보낸 편지에서
도산서원은 훼철대상에서 빠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1921년 장판소(埋版所)에 설단하고 춘추향례(春秋享禮)를 봉행(奉行)하다가
1968년에 사당인 함덕사(涵德祠)를 세웠고,
1974년에는 옛 서원이 있던 동쪽 언덕에 문공부 협조를 얻어
안동권씨 가문에서 자력으로 도산서원을 복원하였다.
매년 음력 3월과 9월의 두 번째 정일(丁日)에 유림들이 제향을 올리고 있다.
=배향 인물 =
1)권득기(權得己, 1570∼162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지(重之), 호는 만회(晩悔). 박(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종묘서령 덕유(德裕)이고,아버지는 예조판서 극례(克禮)이며, 어머니는 윤천석(尹天錫)의 딸이다. 큰아버지인 선공감역 극관(克寬)에게 입양되었다.
1589년(선조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 광해군이 모후를 서궁에 유폐하고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등, 정치가 혼란하여지자 관직을 버리고 야인생활을 하였다. 1618년에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이 되었다. 죽은 뒤 공조참판이 추증되고, 대전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만회집≫·≪연송잡기 然松雜記≫ 등이 있다.
2)권시(權諰, 1604∼1672)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성(思誠), 호는 탄옹(炭翁). 아버지는 좌랑 득기(得己)이고, 어머니는 전주 이씨로 도정(都正) 첨(瞻)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행(志行)이 절이(絶異)하여 사람들이 안자(顔子)에 비유하였다. 9세 때 이미 훌륭한 시를 지었으며, 15세에 이기지설과 사칠지변(四七之辨)에 정통하였다.
1636년(인조 14) 대군사부(大君師傅)에 임명된 것을 비롯하여,
선릉참봉(宣陵參奉)·세자시강원자의 등 여러 차례 벼슬이 주어졌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49년 효종 즉위 뒤 공조좌랑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갔으며,
경상도사 등을 역임하고, 그 뒤 집의·진선(進善) 등을 거쳐
1658년(효종 9) 승지에 임명되었으며, 이어서 찬선(贊善)에 오르고,
1659년 현종이 즉위한 뒤에 한성부우윤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예송문제가 있을 때,
송시열과 송준길에 대립하여 윤선도를 지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같은 서인의 규탄으로 파직되어 낙향하던 중 광주(廣州)(현: 성남시 분당구 금곡동 쇳골마을)의 선영에 머물러 살았다.
1668년 송준길이 임금에게
“시(탄옹공)는 애군우국(愛君憂國)하는 것이 늙을수록 더욱 돈독하니 버릴 수 없다.”고
주청하여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이듬해 공주(公主 : 현재 大田)의 옛 집으로 돌아갔다.
송시열과 같은 기호학파로서 예론에 밝았다. 그가 죽자 좌참찬에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였다. 대전의 도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탄옹집≫ 7책이 있다.
=건축물=
1)함덕사(涵德祠)
함덕사(涵德祠)는
도산서원의 사당으로 권득기와 권시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엄숙한 공간이다.
도산서원의 윗 구역에 ‘유정문(由正門)’ 현판을 건 묘문(廟文)과 ‘함덕사’ 현판을 단
묘우(廟宇)에 세웠다. 평지일 경우에는 강당 앞에 사당을 배치하지만,
산이나 언덕을 낀 지역은 평지의 강당보다 한층 높은 산 쪽의 뒤편에 사당을 배치하였다.
이러한 이유는 선현(先賢)에 대한 봉사(奉祀)를 높이는 의도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함덕사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전면 1칸 열은 퇴칸으로 하고, 뒷면 2칸 열은 통칸으로 하여 내부에 우물마루를 깔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위패는 왼쪽이 권득기, 오른쪽이 권시를 봉안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함덕사에서는 반대로 왼쪽으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나온다. 상량문에는 함덕사가 1968년에 지어졌음을 알리고 있다.
2)명교당(明敎堂)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가운데 3칸에는 우물마루를 깔은 넓은 대청을
들이고 좌우의 측면에 각각 1칸의 온돌방을 들였다.
강당에는 ‘도산서원(道山書院)’ 편액(扁額)을 걸었고,
대청인 강당 내부에는 정면에 ‘명교당(明敎堂)’ 현판, 좌우 측면에 각각 방을 가리키는
‘구인재(求仁齋)’와 ‘귀본재(貴本齋)’란 현판을 걸어 놓았다. 1974년에 지어졌다.
강당의 좌우 측벽에는 미수 허목(眉叟 許穆)의 전서체(篆書體) 글씨를 나무판에 새긴 십자훈(十字訓)이 걸려있다.
‘每事必求是 毋落第二義(모든 일은 반드시 옳은 것을 구하고, 의롭지 않은 일에 빠지지 말라)’는 내용으로 권득기가 후손들에게 학문의 과업에 두지 말 것을 당부하며 남긴 유훈이다.
3)동·서재(시습재, 지선재)
명교당(明敎堂) 앞에는 잔디마당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시습재(時習齋)와 지선재(止善齋)라는 동서양재를 두었다. 대칭으로 배치된 양재는 구조도 동일하여 전면3칸, 측면2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전면 1칸은 열은 퇴칸으로 마루를 깔았고, 뒷면2칸 열은 온돌방이다. 시습재와 명교당 사이의 계단을 오르면 함덕사가 있는 담장 가까이에 정면2칸, 측면1칸 규모의 제기고(祭器庫)가 있다.
중요 물건
1)도산서원사적비(道山書院事蹟碑)
건 립 : 1804년(순조4년)
찬 자 : 통훈대부 행 사헌부 지평 정종로 찬
서 자 : 통훈대부 행 홍문과 교리 지제교겸 경연시독관 춘추관 기주관
동학교수 실록기주관강준흠 서
2)원규(院規) 및 ≪독서잠의 讀書潛疑≫ 10권과 문집 10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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