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광우 바이오그라피 15)
[에피소드42]
나의 화기소대 포반장은 성격이 너무 고지식하고 통솔력이 부족했다. 어느 날 그는 소대원 중 한명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대검으로 위협하다가 허벅지를 그만 찌르고 말았다. 찔린 소대원은 의무실로 가서 치료를 받고 있었고, 나는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나는 전체적으로 소대의 분위기가 정신적으로 해이해 졌다고 판단되어 정신교육차 기합을 주기로 했다. 그 때 당시는 겨울이라 영하 20~30도가 넘는 강추위였다. 나는 포반장을 내무반에 남겨 놓고, 전 소대원의 웃통을 벗게 하고 구보로 20분 정도 떨어진 전술훈련장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찬바람이 생생 부는 벌판에서 30분 동안 부동자세로 서 있게 했다. 아마 이것은 군 생활 동안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하들에게 가한 가혹한 기합이었다.
기합이 끝나고 내무반에 돌아와서는 소대원들을 마른 수건으로 몸을 비비게 하여 동상을 방지하게 하였다. 나중에 제대하는 병사가 나에게 이 때 일을 거론하며 “굉장히 힘들었다.”고 하였고, “당시 기합을 받는 이유가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나도 그 때 좀 지나친 것 같아, 그 후 많이 반성했다. 그러나 그 일로 말미암아, 포반장도 대오각성하게 되었고, 소대의 흐트러졌던 질서도 바로 잡혔다.
[에피소드43]
그 해 말 한해를 마무리 짓는 겨울 혹한기 훈련 때 일이다. 소대원들은 추운 벌판에 야영을 하면서 혹독한 추위를 견디어 내야 했다. 나와 병사들은 야전용 텐트위에 바람을 막기 위해 짚을 두르고 그 안에 작은 페치카를 만들어 군불을 떼고 잠을 잤다. 훈련이 끝나던 날 특전 단에 근무하다가 사고로 우리부대로 전입해온 한 하사관이 있었다. 그 하사는 여름 사단 전투력 측정 때 나와 같이 완전군장 구보를 같이 한바 있었다. 그는 제대일이 되어 소대원들과 이별을 하면서 고통스러웠던 군생활의 벅찬 감회를 이기지 못해 골짜기가 떠나가도록 갑자기 “야! 이 xxx들아”하며 벼락같은 소리를 질렀다. 마치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 같았다. 감성 풍부한 꿈같은 청춘시절에 겪은 혹독한 군대생활이 얼마나 가슴에 사무쳤으면, 제대하는 기쁜 날에까지 저렇게 회한이 맺혔을까? 하는 비감(悲感)한 생각이 들었다. 역시 우리 부대는 “인제가면 언제 오나 인제, 원통해서 못 살겠다 원통” 부대였던 것이다.
[에피소드44]
우리 연대 전방지역에는 각종 진귀한 수목들이 있었는데, 그 중 고급 바둑판을 만드는데 사용하는 피나무들이 많이 서식했다. 내 1년 후배 중 11P에 있던 모 소대장은 겨울에 소대원들을 동원하여 대규모로 피나무를 벌채하여 민간 시장에 내다 팔았다. 약 200개가량의 바둑판을 만들 수 있는 많은 분량이었다. 사건이 문제가 되었으면 군법회의 감이었다. 그러나 그는 용의주도하게 감시하는 헌병대와 보안부대에도 적당히 손을 써서 탄로 나지 않게 했다. 피나무를 판돈으로 부하들에게도 술을 실컷 사주었기 때문에 소대원들의 불만도 없었다고 한다. 어쨌든 그 후배는 군대생활을 피나무 덕분에 물질적으로 풍부한 생활을 하였다. 사람이 있는 조직체에는 어디나 이와 같이 기상천외한 인간이 있기 마련이다.
어떤 소대에서는 눈 쌓인 겨울에 피나무 벌채를 하다가 넘어지는 나무에 깔려 사병 한명이 사망한 사건도 생겼다. 그러나 그 후배는 운이 좋아 한 건의 사고도 없이 무사히 넘어갔다. 77년 봄 부대 교체로 제대를 몇 개월 앞두고 나는 마지막 방책선 근무를 하기 위하여 전방으로 올라갔다. 그 때는 나는 부중대장이 되어 3-13 중대본부에 중대장과 같이 생활했다.
그 후배를 내가 은행에서 퇴직하고 난 후 여의도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는 내가 사는 여의도 모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그의 처형이 영등포에서 제지 영업을 크게 하고 있었는데, 그 건물에서 따로 사무실을 차려 영업을 했다. 그는 전역한 후 전주제지에 다녔는데, 그 때 제지 영업을 하던 처형을 많이 밀어 주었다고 했다. 나는 그 후 후배와 자주 만나 맥주를 먹었다. 맥주를 마시면 그는 꼭 2차로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불렀다. 그는 노래방에 가서도 맥주를 시키고 노래방 도우미를 불렀다. 그리고 그는 은행에서 퇴직한 나의 어려운 형편을 감안하여 절대 나에게 돈을 내지 못하게 했다. 그 후배 덕분에 맥주는 원 없이 마시고 노래방에도 수없이 갔다. 후배는 그가 군에서 특별히 좋은 피나무로 만들었던, 용 모양을 조각한 용 바둑판을 나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에피소드45]
대대장이 새로 바뀌었는데 육사출신이었지만 성격이 약간 변태적이었다. 그는 나와 동문인 연세대 의대를 나온 대대 군의관을 이상하게 미워하고 못살게 굴었다. 한번은 의무대 내무반에서 사병들이 보는 앞에서 군의관에게 옷을 벗고 알몸으로 서 있게 하였다. 심한 수치심이 들게 하는 일종의 인격살인이었다. 그러나 군의관은 부당한 명령이었는데도 기가 약해서 항거를 못하고 수모를 겪었다. 그는 제대를 앞둔 나에게도 아이오아(불규칙 지뢰지대)지뢰를 매설하는 준비를 하라고 했다. 나중에 보니 그가 나에게 농담조로 하는 말이었지만, 인격이 있는 사람이 결코 하는 행동과 말은 아니었다.
[에피소드46]
어느 날 대대 본부에 잠깐 볼일이 있어서 들렀다. 통신참모와 군의관 등과 어울려 술을 먹다가 한참 흥이 고조될 때에 술이 떨어졌다. 전방이라 근처에 술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군의관이 제안했다. 에틸알코올과 환타 주스를 섞으면 술이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희한한 즉석 제조 술을 만들어 먹었다. 맛은 예상대로 찝찔하고 이상했다. 군대가 아니면 시도할 수 없는 해프닝이었다.
[에피소드47]
이름이 X면수라는 중대장이 있었다. 그런데 군대 음식 중에 자주 먹는 “이면수”라는 생선이 있다. 하루는 중대 보급계 행정병이 전화로 대대 보급계와 통화를 하면서 이면수가 어쩌고저쩌고 했다. 그는 분명 이면수 생선을 얘기했는데, 옆에서 듣는 중대장은 자기를 욕하는 줄 착각하고 불같이 화를 내면서 그를 두들겨 팼다. 어처구니없는 오해와 착각에서 빚어진 불상사였다.
[에피소드48]
방책선 부대는 술 반입(搬入)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실탄이 지급되기 때문에 총기사고 우려 등 정신적인 긴장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술이 귀했다. 술을 구경할 수 있다면, 결혼한 선임하사들이 마을로 외출, 외박 후 귀대할 때 술 몇 병을 숨겨 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제대를 앞둔 고참 병사들은 제대 회식이나 그 밖의 극히 중요한 행사시 마실 술을 보관하기 위해 술을 땅에 비밀리에 묻어놓았다. 만약 벙커에 보관하다가는 금세 도둑맞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만큼 술이 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특별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땅에 묻어놓을 때도 혹시 누가 훔쳐 갈까 두려워 찾기 아주 어려운 장소에 묻어 놓기 때문에 술 지도를 따로 만들어 놓아야 할 정도였다. 그래서 전방에서는 “피 같은 술”이라고 하면서 술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야단이 났다.
[에피소드49]
방책선 근무자와 근무자간의 입을 통해 인접 연대에서 들려온 놀라운 소문이 있었다. 군대에서의 소문은 입과 입을 통해서 금세 퍼지며 대체적으로 사실인 경우가 많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았다. 비육사 사관학교 출신 소대장 한명이 우리 연대와 인접된 52연대 방책선 경계근무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그런데 그 소대장은 평소에 소대원들을 너무나 비인격적이고 가혹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소대원들의 원한이 뼈에 사무쳤다. 그러다가 불행히도 더 이상 견디다 못한 소대의 고참병들은 어느 날 그를 제거할 무서운 음모를 꾸미기에 이르렀다.
방책선 부대는 야간의 경계 근무 시 적과 아군의 식별을 하기 위해 암구호를 사용했다. 가령 상대방을 향해서 사전에 약정된 암구호로 “xxx”하고 부르면 상대방은 아군이면 “xxx”이라는 대답을 해주는 방법이었다. 암구호는 매일 해지기 전에 사단 정보참모실로부터 만들어져 각 예하부대에 유선으로 전달되었다. 육군의 규정은 초병이 야간 경계 근무 시 암구호에 상대편이 불응하거나 엉터리 암구호로 대답할 때에는 사살해도 책임이 없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통상 소대장이 순찰 시 자기의 목소리를 병사들이 잘 알기 때문에 병사들이 검문하려고 하면, “나야 나” “소대장이다” 하며 대답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소대의 고참병들은 음모를 꾸밀 때 이점을 착안하여 합법적으로 소대장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치밀하게 준비한 그들은 마침내 밤이 되기를 기다려 작전을 실행에 옮겼다. 경계병이 소대장에게 암구호를 불렀을 때 소대장은 통상 하는 행동대로 “나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준비된 수류탄과 개인화기는 소대장을 향하여 불을 뿜었다. 그는 제대로 비명한번 지르지 못한 채 부하들에 의해 완전 폭사 당했다. 사건이 일어난 후 사단 보안대와 헌병대에서 현장에 출동하여 철저히 조사했으나, 소대장을 죽인 병사들을 처벌할 법적 근거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사건은 경계규칙에 의한 완전 합법적인 범죄였기 때문이다.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는 경우였다.
그러나 죽은 자의 피가 얘기 하는 법, 이 소문은 전 사단 지역에 조금 씩 조금 씩 퍼졌다. 나는 이 소문의 사건을 통해서 인간의 죄성(罪性)의 끔찍한 모습에 섬뜩함을 느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월남전에서도 전투 중 아군에 의해서 죽는 장교가 간혹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자무적(仁者無敵)이란 옛 성현의 말이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강광우 자서전 다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