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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번째 출입구: 이웃 사랑
2. 두 번째 출입구: 너 자신을 사랑하라.
3. 세 번째 출입구: "너는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4. 한 달 동안 할 수 있는 질문들과 공부들
- 첫째 날: 당신의 선물 발견하기
- 둘째 날: 당신의 선물들을 향상시키고 만끽하고 나누기
- 셋째 날: 당신의 선물을 가지치기 하기
- 넷째 날: 삶을 음미하기
- 다섯째 날: 수줍어하는 수사슴을 보기
- 여섯째 날: 당신 안에서 나오기
- 일곱째 날: 세 겹의 부르심
- 여덟째 날: 경탄함과 경외함
- 아홉째 날: 당신의 삶에 자리잡기, 이정표들을 보기 위해
- 열흘째 날: 반응적인(reacting) 삶이 아닌, 하느님께 응답하는(responding) 삶
- 열 한째 날: 깊은 감사
- 열 둘째 날: 움켜잡은 것을 내려놓기
- 열 세째 날: 슬픔이 영적지혜가 되도록 돕기
- 열 넷째 날: 과거 슬픔에 담긴 보석들
- 열 다섯째 날: 다른 이에 대한 진정한 관심
- 열 여섯 날: 의식들을(rituals) 실행하기
- 열 일곱째 날: (감정들에) 기대어
- 열 여덞째 날: 유머를 지니며
- 열 아홉째 날: 하나의 '작은 규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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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1. 첫번째 출입구: 이웃 사랑
http://www.ofmkorea.org/ofmkfb/542724
김상욱요셉 2024.01.06 08:27
2부 1. 첫번째 출입구: 이웃 사랑
로버트 제이 윅스는 2부에서 예수님의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우리 개인의 영적 양성의 핵심적 출입구로 이웃 사랑, 자기 사랑, 하느님 사랑을 읽어내고 그 길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첫 번째 출입구: 이웃 사랑
오래 전에 나는 한 때 ‘샴’ 만(the Gulf of Siam: 걸프 만)으로 알려진 곳에서 일주일 동안 긴 피정을 이끈 적이 있다. 참석자들은 네팔, 베트남, 태국, 방글라데시에서 온 성직자들, 수녀들, 평신도 선교사들이었다. 착한 사마리아인 비유에 근거하여 자비에 대한 세션들 중 하나를 끝내고 나는 질문이 있는지 물었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선교를 하는 한 온화하고 경험이 많은 성직자가 손을 들었다. 그는 “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기 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몸을 그냥 넘어 지나갈 수 있을까요? 이 그룹에 정적이 흘렀고, 나는 즉각적으로 응답을 하기보다 그가 부연 설명을 할 수 있도록 기다렸다. 그는 말을 이었는데, “당신이 아시듯이, 수많은 필요들이 있고, 나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고 내가 이 절박하게 가난한 나라에서 사목하며 만나게 되는 그 많은 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우리들은 이와 같은 극적인 가난이나 병고나 죽음을 일상에서 직면하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질문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다. “어떻게 우리는 이 과정에서 소진되지 않고 다른 이를 향해 감정적인 불꽃을 확장시킬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떤 십자가를 지도록 불리움 받았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은가?”
이 질문들은 이 장에서 이야기할 만하지만, 만약 우리가 이 질문들의 답만을 구한다면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이 질문들에 응답해야 하지만, 또한 생각해야 할 다른 질문들도 있다.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어떻게 하느님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방식에 충실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의 손 뻗침이 은총 순환의 일부가 되어, 우리를 더 깊은 자비와 내적 성취로 초대받게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이 질문들을 어떻게 꺼내느냐에 따라 ‘우리가 삶을 충만하게 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중요한 작용을 한다.
첨언)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회개 시작점으로 나환자와의 만남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프란치스코에게 나환자인 이웃 사랑과 하느님 사랑이 절묘하게 하나로 엮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사랑해서 이웃을 사랑한 것도 아니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유언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을 나환자에게 이끄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나환자에게 자선을 베푼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이끄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자기 안에 이미 자리한 역겨움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 하느님의 이끄심에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느님께서 그에게 작용하여 자신의 역겨움을 감미로움으로 바꾸어주심을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이 회개 여정은 프란치스코가 용을 써서 이웃을 사랑한 것도 하느님을 사랑한 것도 아닙니다. 먼저 계신 하느님, 하느님의 이끄심에 의지하여 그 길을 따랐을 따름입니다. 그러하기에 이 이웃 사랑 안에서 프란치스코는 자기가 고갈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을 향하는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안의 계신 하느님, 나환자 안에 계신 하느님, 자신의 응답으로 더 분명해지는 하느님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이 여정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알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프란치스코는 이 여정에서 자기 개인의 고유성을 발견하기보다는 자기 안의 계신 하느님과 하느님 안에 있는 자기를 만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보다 더 정확하게 하느님과 하나됨이 만들어내는 진미(珍味)를 맛보았고, 하느님 안에서 자기와 이웃이 살아남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여정이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자기 사랑이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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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2. 두 번째 출입구: 너 자신을 사랑하라.
http://www.ofmkorea.org/ofmkfb/543031
김상욱요셉 2024.01.12 09:57
두 번째 출입구: 너 자신을 사랑하라.
만약 우리가 정말로 잘 싸우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른 시점부터 다른 이에게 자비롭다는 것이 자기를 무시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사실 진정한 우정의 긴 여정은 자신과의 좋은 관계를 맺는 것에 달려 있다. 교황 요한 23세가 말했는데, “충만한 사랑의 마음을 가진 이들은 항상 나눌 무언가가 있다.” 이 지혜는 다른 문화들에서도 알려져 있다. 나이지리아 이브 부족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주는 것이 마음이고… 손가락은 움켜잡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가게 하는 것이다.”
당신이 주위의 다른 이를 사랑하지 않으며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류인 것처럼, 너 자신을 무시하거나 돌보지 않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더구나 당신이 받은 선물과 그 선물을 만끽하는 것은, 당신이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선물 가운데 하나이다. 이 책의 서두에서 소개한 성탄 선물을 받은 작은 소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감사함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은 어떤 모습이겠는가? 그 소녀의 경우, 그 선물에 기뻐하고 그것을 기꺼이 다른 이와 나누는 모습일 것이다. 우리 삶도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직업적인 조력자와 치료자가 자신의 사도직을 계속 수행하도록 자기 자신을 알고 사랑하고 돌보도록 같은 정보를 공유할 때, 두 번째 출입구는 어렵고 진이 빠지는 상황에서도 어떻게 생동감과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단순하고 효과적인 길잡이를 제공할 것이다. 다음을 기억하라. 관건이 되는 것은 세상이나 우리 일이나 우리 가족이나 심지어 내 자신 안에 있는 어둠의 총계가 아니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우리가 이 어둠 안에서 어떻게 서 있느냐?’이다.
이것과 어떻게 생동감과 생명력을 유지하는지 아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가서 그렇게 하라’라는 부르심을 크게 다른 방식으로 보도록 할 것이다. 우리 자신을 성공과 실패, 죄책감과 의무에 매이지 않게 하며, 우리가 다른 이를 돕도록 할 뿐만 아니라 이 과정에서 자기를 더 낫게 변화시키는 개인적 충실성 안에서 나아가도록 한다.
첨언) 프란치스코는 중세의 사람이기에 중세 문화의 영향으로 자신을 부정적으로 대함으로 성덕으로 나아가려 하는 움직임을 하였습니다. 그런 문화의 영향으로 프란치스코는 극기와 단식을 종종 하였고 자기 육신의 욕구를 잘 들어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욕구를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욕구에 기초하여 이웃과 형제들, 특히 약한 이들을 섬기곤 하였습니다.
하루는 한 형제가 단식을 너무 해서 잠을 자다가 나뒹굴기 시작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가 배가 고파 아픈 것을 알아차리고, 그에게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다른 모든 형제를 깨워 함께 먹도록 하였습니다. 그 형제가 혼자 먹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길 수 있었고, 또한 다른 형제들이 혼자 단식을 그만두는 그를 비웃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자기의 약함과 그 가운데에 자기가 바라는 것을 바탕삼아 다른 이의 필요에 깨어있었고 그 필요를 채우면서 하느님의 사랑이 육화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자주 움직이는 형제들이 여행을 하다가 아픈 형제가 생기면 그 형제를 우선적으로 돌보도록 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수도규칙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제들 가운데 누가 병이 나면 다른 형제들은 남이 자기 자신을 돌보아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에게 봉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권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웃 안에 있는 연약함을 보고, 비슷한 경우에 처해 있을 때 그 이웃으로부터 부축받기를 원하는 것처럼 그 이웃을 부축해 주는 사람은 복됩니다.” 이어 “온갖 좋은 것을 주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종은 복됩니다.” 프란치스코에게 ‘돌려드림’은 하느님께로 향하는 중요한 단어이었습니다. 그는 주로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모든 것을 통해 하느님께 모든 것을 돌려드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 연장선 속에서 생각해본다면, 이웃의 연약함 속에서 이웃을 경멸하지 않고, 자기가 그 상황에 있을 때 돌봄을 받기를 원하는 식으로 그에게 해주는 것, 이것이 하느님께 모든 것을 돌려드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마 이 가운데에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자기 사랑이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서 하나로 엮어지며 하느님이 일어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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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출입구: "너는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http://www.ofmkorea.org/ofmkfb/543541
김상욱요셉 2024.01.20. 10:44
세 번째 출입구: “너는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저명한 영성 작가 헨리 나우엔은 트라피스트 수도승이고 원장이고 심리 치료사인 존 에우데스 뱀베르거(John Eudes Bamberger)로부터 영적 지도를 받는 행운을 가졌다. 헨리는 이 수도원에 9개월간 머무르며(이 경험이 제네시의 일기 출판을 가능하게 함) 영적 지도를 받았는데, 이 세션 중 하나에서 헨리는 자신이 느끼기에 너무나 기본적이고 소박한 다음 질문을 나누었다. “내가 기도할 때, 나는 누구에게 기도하는가?” “내가 주님을 부를 때, 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헨리는 존 에우데스가 예상했던 것과는 매우 다르게 응답을 했을 때 놀랐다. 존 에우데스가 말했는데, “이것은 실제적인 질문이다. 이 질문은 당신이 물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적어도 이것은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을 일으키게 하는 질문이다.… 당신은 이 질문이 당신의 모든 부분들과 연결된 것임을 발견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기도하는 주님이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은 ‘주님께 기도하기를 원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직접적으로 이끈다. 그리고 당신은 곧 ‘왜 정의의 주님이 또한 자비의 주님일 수 있는가?’라는 의문에 잠길 것이다. 이것이 당신을 묵상의 중심으로 이끌 것이다.”
그러고 나서 존 에우데스는 ‘당신이 누구에게 기도하는가?’에 대한 원래 질문을 대면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데 “이 질문을 묵상의 중심으로 만드는 어떤 결정을 요구한다. 만약 당신이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긴 여정을, 아주 긴 여정을 출발하는 것임을 알 것이다.”
이 여정을 걷고자 한다면, 우리 각자는 자기 기도 규칙을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이에게 손 뻗침과 관련된 ‘가서 그렇게 하여라’는 부르심은 세상살이에서 우리에게 버겁게 다가오는 모든 것에 더해 불가능한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응답이 건강한 자기 사랑과 깊이 있는 하느님 사랑에 기반할 때, 이것은 세 개의 출입구를 통과하게 하는 부르심이고, 세 출입구는 우리가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하게 하는 곳으로 이끈다. 이것이 이 책이 추구하는 바이다.
첨언) “하느님 당신은 누구이시고, 벌레만도 못한 저는 누구입니까?” 이 질문은 프란치스코가 종종 던지곤 했던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놓고, 현대인들은 프란치스코가 ‘자기와 사람들을 너무 천하게 보지 않는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을 되돌아보면 이 질문은 자기와 사람을 부정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허상에 매이지 않고 진실로 자기와 하느님을 바라보려는 움직임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집안에서 많은 기대를 받았고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는 집안의 가업인 옷감 장수를 이어받던지, 아니면 이보다 높은 지위인 기사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프란치스코는 이 모든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기사가 되고자 전쟁에 참여하고 실패하면서 프란치스코는 세상과 자기가 추구하는 삶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보다 더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 질문이 “하느님 당신은 누구이시고, 벌레만도 못한 저는 누구입니까?”
이 질문을 하면서 프란치스코는 더 깊이있게 자비의 하느님을 맛보게 되고, 하느님의 자비심을 육화시키며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삶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이후 프란치스코가 살아있는 성인으로 사람들이 칭송을 할 때에도, 그는 이 질문을 자기에게 던지곤 하였습니다. 이 질문을 던지며, 그는 자기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에 더 깊이 젖어들었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돌려드리며 더 깊이있게 하느님께 나아갈 수 이었습니다.
그는 권고에서 말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천하고 무식하며 멸시받을 자로 취급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칭찬과 높임을 받을 때도 자기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종은 복됩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자기 의지로 높은 자리에 있지 않고, 다른 이들의 발 아래 있기를 늘 열망하는 그런 종은 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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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동안 할 수 있는 질문들과 공부들
http://www.ofmkorea.org/ofmkfb/543734
김상욱요셉 2024.01.23 15:10
한 달 동안 할 수 있는 질문들과 공부들
이제 당신의 차례이다. 여유를 가지고 제공된 가르침들을 다시 생각하며 그것들이 당신의 고유한 상황에서 자기 방식으로 실행하도록 하라. 이어지는 공부들과 질문들은 관습적으로 하던 생각 방식, 인지 방식, 이해 방식들에 도전을 제공한다.
우리가 자기와 타인들과 세상과 하느님에 대해 지금 생각하는 방식의 깊이를 가름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영적이고 온전하게 된다. 아래 연습들과 질문들과 함께하는 공부는 삶의 가능성을 더 온전하게 현실화하는 (삶을 하느님의 선물로 더 온전하게 경험하는) 하나의 헌신이다. 겉보기에 중요하지 않은 순간들에도 삶은 열릴 수 있다. 우리가 아침이나 저녁 산책 동안, 우리 자신의 관심거리에 몰두해 있지 않고 잎들의 가벼운 바삭거림을 듣기 시작할 때,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바로 여기 함께하는 하느님의 속삭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필 쿠지노(Phil Cousineau)는 자신의 책 The Art of Pilgrimage(우리가 거룩함을 대면하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할 때 삶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설명한 책) 에서 상호관계에 관해 설명한다. 그의 경우 그가 그렇게 하도록 독려했던 것은 그의 새 친구이었다. 그가 변화시키는 여정에 대해 말할 때, (내가 생각하기에) 그의 말은 우리가 매일 삶을 어떻게 살 수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아흐메트(Ahmet)의 정중한 목소리 톤은 하나의 축복으로 들렸다. 그는 나의 여정을 하나의 순례로 명명함으로 그것에(여행) 하나의 품위를 부여하였고 이것은 그 이후 내가 여행하는 방식을 바꾸게 하였다. … 그 여정 이후 20년 이상 동안, 나는 세상 여기저기를 여행했는데, 수많은 경이로움에 경탄하였고 또한 동시에 같은 곳에서 내가 본 동료 여행객의 좌절에 놀랐다. 동료 여행객의 얼굴은 토우치 가수(the torch singer)처럼 “여기 있는 것이 전부인가요?”라고 외치고 있었다. … 만약 우리가 감동적인 여행의 비밀을 알고자 한다면, 우리는 매일 실제 여행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어떤 거룩함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 이것은 항상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워지는 여정이다. 도전이 없는 여정은 아무 의미가 없다. 결의가 없는 여정 또한 어떤 목적도 없다.
그러하기에 다음 몇 달 동안 하루에 몇 분 시간을 내어 제안된 질문과 연습을 읽고 묵상하고 당신의 응답을 적어보라. 그러고 나서 당신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하루나 나머지 삶을 더 크고 깊은 자기 이해와 자기 표현을 향하는, 타인에 대한 자비심을 향하는, 그리고 하느님을 향하는 진정한 순례로 변화시키는 어떤 식의 시도를 해보아라. 만약 이것이 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삶의 철학은 당신이 있는 곳에서 그냥 시작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라.
첨언)
우리 삶의 가능태를 현실태로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요? 대부분의 우리는 나의 영역을 넓힘으로 이것을 이루려 합니다. 세상에 살고 있는 이들은 나의 능력이나 자질을 개발하여 내가 더 실력있는 이가 되거나 내가 재산을 더 소유하여 그러한 사람이 되려 합니다. 종교에 몸 담고 있는 이들은 나의 성덕이나 덕행이 더 높아지는 지는 것을 그러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프란치스코 또한 덕을 소중하게 여기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에게 덕은 내가 노력해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역이고 하느님의 영역에 내가 하나가 됨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무엇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에서 하느님과 덕을 거의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혜이시나이다.
당신은 겸손이시나이다.
당신은 인내이시나이다.
내가 나의 노력으로 덕을 추구할 때, 나의 자아가 강화될 수 있고 아니면 융이 말하는 집단 무의식의 작용에 따라 나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온 세상 사람 그 누구도 정녕 먼저 자신이 죽지 않으면 여러분 (덕) 가운데 어느 하나도 가질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나의 죽음의 여정을 통하지 않는 덕 추구에서, 하나의 덕은 다른 덕을 거슬러 일어나기에 조화가 깨트려지게 합니다. 가난을 산다고 하면서 사랑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이 있지만 이것이 진정한 나와 너를 살리는 사랑이라기보다는 나와 너를 옭아매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가 무시되지 않고 또한 도드라지지 않는 자연스런 흐름 속에 진정한 덕들이 싹트고 자랄 수 있습니다.
집단의 무의식에 의한 덕 추구는 그 자체는 하느님께로 향하는 길을 제시합니다. 인간이 원형적으로 가지고 있는 덕의 이미지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심어주신 것일 수 있고 아니면 인간이 역사를 통해 인간이 닦아놓은 길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길을 걸으며, 내가 나와 하느님의 만남,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나와 진정한 나의 만남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 길을 걷던 나는 어느 순간 지쳐버리거나 그 길이 아닌 다른 길에서 생명을 찾으려 할 것입니다.
집단 무의식에 의한 덕 추구에서 하느님과 이웃과 진정한 나의 만남을 이루어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 그것은 옳음의 추구와 행복의 추구가 하나로 통합되는 여정일 것입니다. 객관적인 옳음 추구와 주관적인 행복 추구가 하나로 엮여지는 것. 그 안에서는 옳음이라는 틀은 나만의 행복에 머물지 않고 너의 행복과 하느님 행복으로 나아가고, 행복이라는 에너지는 틀이 새로워질 수 있는 길을 열어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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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날: 당신의 선물 발견하기
http://www.ofmkorea.org/ofmkfb/544309
김상욱요셉 2024.01.31. 20:04
첫째 날: 당신의 선물 발견하기
하느님께서 당신을 이 세상에 있게 함으로 이 세상에 주고 있는 모든 선물과 달란트에 대해 나열하시오. 만약 당신이 이것을 나열하기가 어렵다면, 당신을 아는 이들에게 그들이 당신에 대해 느끼는 인상들을 말하도록 요청하라. 이 나열은 될 수 있으면 광범위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당신에게 어떤 선물과 카리스마가 주어졌고 이를 다른 이와 나눌 수 있기 위해서이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 주위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통해 그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혜택을 놓쳐버릴 수 있다.
첨언) 프란치스코 당시 글을 아는 것은 지식을 가지는 것이고 자기를 좀 더 높게 만드는 것이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이 소박하게 하느님을 섬기기를 바랐기에, 글 모르는 형제들은 성무일도를 하기 위해 구지 글을 배울 필요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글 모르는 형제들은 단순하게 주님의 기도를 바침으로 오히려 하느님께로 더 깊이 나아가도록 초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안토니오가 사람들에게 알려진 후, 성경과 신학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 프란치스코에게 물었을 때,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신학연구로 거룩한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으면, 그대가 형제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일은 나의 마음에 듭니다.”
프란치스코는 지식을 아는 것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데에 방해라고 여기기도 했지만, 또한 안토니오를 통해 지식이 하느님과 하나를 이루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드러날 수 있음을 인정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각자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인정하며 그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보여짐을 확신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의 영향을 받은 둔스 스코투스는 개체성을 강조합니다. 단순히 각 개인의 달란트가 피어남으로 하느님이 영광을 받는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하느님의 구체성은 개인이나 개체가 그 고유성을 피어날 때, 온전히 드러난다고 말했습니다.
각 개인의 달란트와 고유성이 하느님성을 품고 있음을 한번 묵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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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당신의 선물들을 향상시키고 만끽하고 나누기
http://www.ofmkorea.org/ofmkfb/544549
김상욱요셉 2024.02.03. 14:22
둘째 날: 당신의 선물들을 향상시키고 만끽하고 나누기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선물들과 달란트들을 어떤 식으로 돌보고 기르고 있는가? 당신이 다른 타입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다양한 환경에서 이 선물들을 어떻게 나누고 있는지 예시를 들어보라.
첨언) 프란치스코가 형제들과 함께 살고 있을 때 일입니다.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은 보다 깊이 있게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단식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잠을 자는데, 한 형제가 배가 아파 신음 소리를 내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이 소리에 깨어, 그에게 물었습니다. “형제 배가 아픈 가보네요? 무엇 때문에 배가 아픈가요?” 그 형제는 “배가 고파 배가 아픕니다.”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 형제는 자기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단식을 하였던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잠을 자는 모든 형제를 깨워 식탁을 차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형제들과 함께 앉아 차려진 음식을 먹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 형제 혼자 무언가를 먹을 경우, 스스로 자기를 부끄럽게 여길 수 있었고, 또한 다른 형제들이 그를 판단하고 비난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모두 함께 음식을 먹으며 형제애로 나아가도록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은 무엇일까요? 이 선물을 특별한 것으로 생각할 경우, 찾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형제들 자체가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형제가 잘하는 무엇가를 보고 선물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 형제 자체가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생각 때문에, 형제들이 죄를 짓거나 아플 때에도, 그 형제의 선물성은 약해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고 프란치스코는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바로 그 순간에 그 형제와 나의 선물성이 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픈 형제를 돌보고, 죄지은 형제에 대해 비난하지 않고 도움을 줌으로, 그가 회복의 여정을 걷도록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나 또한 나의 선물성이 진정 살아남을 만나게 됩니다. 프란치스코는 나만이 가진 특별한 무언가가 아닌, 사람이라면 가지고 있는 가지고 있는 보편적 가능성에서 선물성을 보았고, 이 가능성이 현실에서 피어날 때에 선물성이 온전히 드러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나의 선물은 친구를 바라보며 미소짓는 눈일 수 있고, 고통받는 이의 말에 눈가에 맺히는 눈물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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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 당신의 선물을 가지치기 하기
http://www.ofmkorea.org/ofmkfb/545401
김상욱요셉 2024.02.12 07:53
셋째 날: 당신의 선물을 가지치기(pruning) 하기
어떤 환경 하에서 당신의 선물들이 부담이 되어버렸는가요? 다른 사람들의 반대들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불안감이나 당신 자신의 에고를 확장하려는 욕심이나 다른 방어 작용으로 인해…
첨언) 우리가 관계에서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많은 경우 우리는 다른 이의 결점과 약함을 보고 그의 결점을 가지치기에 많은 에너지를 쏟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는 내가 원하는 대로 변화되지 않고, 관계는 더 어렵게 됩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런 경우 너를 향하는 움직임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바라보며 그에게 다가가도록 초대를 합니다, 그의 변화 이전에 내 마음에 담겨져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바라보도록 그리고 그가 변화되지 않더라도 내가 하느님의 사랑의 길로 나아가도록 초대합니다.
우선 프란치스코는 권고에서 누군가의 죄를 보고 흥분하거나 격노하면, 그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고 말합니다. 그가 보고 있는 다른 이의 악이, 그 안에서 더 교묘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악은 자기를 바라보지 못하게 막고, 또한 하느님의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자기 기대 대로 살지 않는 이들 앞에서 그들이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라기보다는 자기 마음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초대합니다. 자기 바람을 조금 내려놓고, 십자가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자기 마음을 채우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에게 여유의 공간을 만들고 그를 사랑으로 나아가도록 초대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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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날: 삶을 음미하기
http://www.ofmkorea.org/ofmkfb/545463
김상욱요셉 2024.02.16 09:02
넷째 날: 삶을 음미하기
당신이 삶의 일상적 선물들을 음미하는 작은 방법들로 어떤 것이 있는가? 당신이 이 질문을 숙고할 때, 가족, 친구, 동료들 그리고 삶의 목적들과 기회들과 함께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을 포함시켜라.
첨언) 프란치스코는 자기 삶을 음미하면서 거기에서 선하신 하느님을 만나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가 나환자를 만나면서부터 그는 삶을 자기 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으로 음미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식으로 삶을 음미할 때는, 나환자를 보는 것이 두려움이었고 쓴맛이 쓴맛으로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마음으로 나환자를 대하면서 하느님에 의해 자기에게 쓴맛이 단맛으로 바뀌는 것을 감지하고 그 맛을 음미하며 그 맛이 이끄는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프란치스코의 회개는 하느님을 앞에 놓고 그 홀로 단식하고 절제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의 현장에 함께하는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며 하느님 맛을 느끼고 그 하느님 맛이 자기를 채우고 자기를 통해 드러나도록 한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여정을 걸었기에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에서, 그 안에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애정과 사랑, 지혜, 겸손, 인내, 아름다움, 안전함, 고요, 즐거움과 기쁨, 희망 등을 직접적으로 하느님을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삶의 순간에 허락하는 이 세계를 그는 그냥 흘러버리지 않고 바로 그 안에 충분히 머무르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당신은 애정이시며 사랑이시나이다.
당신은 지혜이시나이다.
당신은 겸손이시나이다.
당신은 인내이시나이다.
당신은 안전함이시나이다.
당신은 고요이시나이다.
당신은 즐거움시며 기쁨이시나이다.
당신은 우리의 희망시나이다.
...
위대하시고 감탄하올 주님,
전능하신 하느님, 자비로운 구원자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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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날: 수줍어하는 수사슴을 보기
http://www.ofmkorea.org/ofmkfb/546933
김상욱요셉 2024.03.05 10:29
다섯째 날: 수줍어하는 수사슴을 보기
겸손은 영성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한 마리의 수줍어하는 수사슴과 같다. 당신이 자신의 선물들을 과대 혹은 과소평가하거나 어떤 식으로 다른 이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자아를 강화시킬 때, 이런 자신을 알아차리도록 하는 방법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다음을 기억하라.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다. 겸손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도록 돕는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내세우거나 우리의 선물들의 혜택을 어떤 이도 받지 못하도록 숨기도록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게 한다.)
첨언) 우리가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지만 자기가 이를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죄책감에 빠져 있거나 자기를 ‘못난 이’라고 여기는 순간들이 자기를 과소평가하는 순간들입니다.
이것과 대조적으로 자신을 과대평가할 때, 자신은 이를 쉽게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특히 옳다고 여겨지는 것과 공동체를 위한다는 것에 매여 있을 때에 그러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옳음에 빠져 있을 때, 나는 통합적으로 나를 보지 못하고 나의 부분을 봅니다. 그리고 다른 이의 부분만을 보고 판단하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참되고 완전한 기쁨에서 수도회에 유능하고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들어온다고 그것이 자기에게 참 기쁨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그리고 자기가 속한 무리를 과대평가하는 이라면, 이것을 대단한 영광으로 여길 것입니다. 오히려 프란치스코는 자기가 당하는 무시와 외면 가운데에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평화로 넘어갈 때, 자기에게 진정 기쁨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전환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응답을 할 때 가능하고 이 가운데 하느님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 순간은 자기를 있는 그대로, 그리고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일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또 다른 순간은, 우리가 표면적으로 무언가에 집중하고 매여 있을 때입니다. 형제들과 사람들이 성인으로 여기는 한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밤낮으로 기도에 열중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 형제였습니다. 그 형제는 침묵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가끔 고해성사를 할 때에도 말로 하지 않고 몸짓으로 할 정도로 침묵을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프란치스코 이 형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의 이런 열심을 이렇게 읽어내었습니다. “이는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기 위한 마귀의 유혹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장상에게 그 형제에게 고해성사를 말로 보게 하라고 조언을 했었습니다. 그 형제는 이 장상의 말을 따르지 않았고, 수도회를 떠나갔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천하고 무식하며 멸시받을 자로 취급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칭찬과 높임을 받을 때에도 자기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종은 복됩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권고 19. 하느님의 겸손한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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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날: 당신 안에서 나오기
http://www.ofmkorea.org/ofmkfb/553260
김상욱요셉 2024.04.18 09:56
여섯째 날: 당신 안에서 나오기
소설가 헨리 제임스(Henry James)는 다음과 같은 권고를 하였다. “너 안에서 나와, 너 밖에 머물러라.” 당신은 자기와 자기의 문제들에 과도하게 매여 있는 때를 어떻게 알아차리는가?
그리고 당신이 자신의 감정들과 상처들과 그것들이 당신에 끼친 영향들을 충분히 더듬어 보았고, 이제 다른 이의 감정과 필요를 향해 움직여야 함을 알게 하는 당신의 신호들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과도하게 나에게 매여 있는 때는 언제입니까? 우리는 종종 나에 매여 있지만, 이를 알아차리가 쉽지 않은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를 한번 생각해봅니다.
첫째, 내가 나름 옳은 일을 할 때, 하지만 남이 내가 하는 바를 인정하지 않거나 막아설 때, 우리는 나에게 더 매이곤 합니다. 예로, 내가 사랑을 실천하는데 그가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거나 무시할 때, 내가 가난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누군가는 마음대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때, 우리는 어떠한가? 이러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이 모든 것이, 나의 욕심이기에, 이를 내려놓고 아무 것도 하려 하지 않습니까? 프란치스코는 좀 더 조화로운 길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기쁨과 더불어 가난이 있는 곳에, 탐욕도 인색도 없습니다.” 가난만을 쫓는 삶이 아니라, 이 추구 안에서 기쁨을 만나도록 프란치스코는 초대합니다.
둘째, 내가 상처를 받았을 때, 그리고 그 상처가 좀 아물도록 내가 내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나에게 매이곤 합니다. 분명 상처를 받으면, 나에게 여유와 회복의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간은 단순히 인내하는 시간도 아니고 나의 연민에만 빠져 있는 시간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나에 대한 생각에서 너에 대한 생각으로, 그리고 너에 대한 이해와 받아줌에서 다시 나에 대한 이해와 받아줌으로 전환들이 일어나야 하고, 환경 탓으로 하던 마음에서 섭리에 의탁하는 마음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이러한 건너감을 위해, 프란치스코는 이런 말씀을 합니다. “인내와 겸손이 있는 곳에 분노도 동요도 없습니다.” 겸손한 인내, 인내 가운데 겸손한 마음은, 안과 밖 사이에 조화의 길로 우리를 이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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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 날: 세 겹의 부르심
http://www.ofmkorea.org/ofmkfb/555395
김상욱요셉 2024.05.22 10:26
일곱째 날: 세 겹의 부르심
당신이 세 겹의 부르심을 들을 때, 무엇이 당신 마음에 떠오르는가?
하느님을 깊이 사랑하라. 다른 이를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여라. 그리고 당신 자신을 잘 돌보아라.
첨언) 프란치스코에 대해 이야기 할 때, 프란치스코는 자기 자신을 벌레로 천하게 여기고 하느님과 다른 이들 그리고 피조물을 사랑한 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프란치스코가 하느님께 기도하기 위해 찾았던 은둔소들은 참 아름다운 곳들입니다. 그가 그곳에서 아름다운 피조물을 바라보았고 그 피조물을 통해 하느님께로 더 깊이 나아갈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사랑으로 프란치스코는 쓴맛이 자기에게 단맛으로 바뀌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러하기에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이 이끄시는 진정한 세 겹의 사랑의(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자기 사랑)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종말론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알려주었습니다. 종말은 세상의 끝 날과 그에 따른 구원받는 자들의 날이 아니라, 창조와 구원이 하나가 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우리의 사건이 되는 날이라고 합니다. 프란치스코가 ‘피조물 형제의 찬가’에서 태양과 달과 바람과 물과 어머니 땅을 노래하는 것은, 바로 창조와 구원이 하나되는 찰라에 그가 참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세계를 우리 또한 맛보고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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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째 날: 경탄함과 경외함
http://www.ofmkorea.org/ofmkfb/556663
김상욱요셉 2024.06.12 11:55
여덟째 날: 경탄함과 경외함
당신의 삶에서 경탄함의 문으로 들어갈 때, 당신이 일상사의 빛을 경험하게 하는 단순한 방식들은 무엇인가?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의 숨을 멎게 하거나 당신을 변화시키는 하느님의 현현일 수 있는 그런 큰 사건이 아닌, 당신에게 삶의 맛을 즐기게 하는 하느님과의 경이로운(소소한) 만남은 무엇인가?
첨언) 우리의 삶에는 하느님께서 일으키는 삶의 경이로움은 일어납니다. 관건은 이 경이로움에 대해 ‘우리가 얼마만큼 열려있고 이 경이로움에 젖어드는가?’일 것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에서 아름다운 자연이 함께하고 있고 소중한 만남들은 있습니다. 이 배경에서 어떤 이는 보다 많이 그리고 보다 깊이 삶의 경이로움에 젖어들고 어떤 이는 그렇지 못합니다.
최근 누군가가 성령의 역할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옳고 그런 것을 식별하도록 한다.” 그의 말은, 저에게 ‘예수님의 성령은 과연 어떤 작용을 하였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님의 성령이, 옳고 그런 것을 식별하는 영에만 집중하게 했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를 대했을까? 아마 잘못한 것을 다시 말하는 정도의 접근밖에 할 수 없지 않았을까? 예수님의 성령은, 옳고 그른 것을 식별하게도 하지만,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행동하도록 이끄셨습니다.
성령의 작용을 옳고 그름의 식별로 여길 때, 우리의 삶의 길은 두 갈래 밖에 없어 보입니다. ‘옳은 것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그리고 그 결과는 ‘성령을 따르느냐? 따르지 않았느냐?’ 이런 해석은 삶을 정돈되게 하고 삶을 단순하게 살아가도록 이끕니다. 하지만 삶의 모호성과 사람들의 다름은, 그 판단에 의문을 던지게 합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성령에 의해 시작되었어도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그는 자신이 삶아온 환경이나 배운 것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판단이 도전을 받을 때, 우리는 마치 자기의 판단이 하느님의 것인 양 옳음을 더 강하게 주장하고 이 주장에 매이기도 합니다. 그러할 경우, 삶에는 여유가 없어지고, 일어나는 하느님의 경이로움을 내가 막거나 내가 만나지 못하는 길을 갑니다.
성령의 작용은 하느님의 생명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생명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선택의 폭은 다양하게 펼쳐집니다. 율법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는데, 이 거룩함을 누군가 낫게 함으로써 더 깊이 살아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간음한 여인에게 무엇이 죄인지 구지 말을 하지 않고, 그의 처지에 함께 마음 아파하며 하느님의 생명에서 멀어진 이가 다시 그 길로 돌아서도록 이끌게 합니다. 우리는 이 여정에 참여함으로, 주도권은 계속 하느님께 내어드리며, 우리 가운데에 일어나는 것을 관조하며 젖어 들어갑니다.
옳고 그름을 식별하는 영은, 어릴 때에(우리의 생존의 시기) 외부에서 들려왔던 목소리와 연관이 있어보입니다. 그 길을 따르면 사랑받을 수 있고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컸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나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도록 이끄는 데에는 부족합니다.
삶의 모호성은 우리가 어른이(얼의 사람) 되도록 이끕니다. 삶의 모호함 가운데에 이 영은 과연 나와 너에게 생명을 일으키는 것이 무엇인지 욕심없이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이 영은 삶의 모호함 가운데 일어나는 삶의 경이로움에 불안함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신뢰로 되돌아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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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째 날: 당신의 삶에 자리잡기, 이정표들을 보기 위해
http://www.ofmkorea.org/ofmkfb/557287
김상욱요셉 2024.06.21 14:58
아홉째 날: 당신의 삶에 자리잡기, 이정표들을 보기 위해
하느님께서 당신 삶에 내려놓는 이정표들을 알아차리기 위해 당신 삶의 속도를 늦추는 방법들에 대해 생각해보라. 과거와 현재의 이 이정표들은 어떤 것이었는가? 이 이정표들을 알아차리는 다른 방법들은 무엇인가? 예를 들어, 하나의 지장을 은총으로 보는 것이 가능한가? 혹은 복도에서 기대하지 않은 누군가와의 만남을 하나의 공감의 기회로 보는 것이 가능한가?
첨언) 현대인이 삶의 속도, 삶의 템포를 낮추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삶의 템포를 낮추면, 무한 경쟁에서 뒤처질 것 같아, 최소한 남들의 속도에 맞추며 살아가려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요? 뒤처질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남과의 속도를 맞추거나 속도를 더 냄으로, 우리는 안정을 얻는 것이 아니라 지치고 삶의 방향감까지 잃어가고 있습니다.
삶의 템포를 낮춘다는 것은, 삶의 중심을 내 중심으로 보는 시각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보는 것이고, 원래 내 자리인 경계선에서(천사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열린 마음으로 삶을 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중심적인 삶에서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너가 보이고, 있는 그대로의 피조물이 보이고, 있는 그대로의 내가 보입니다.
우리는 나의 정체성을 찾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나의 정체성은 무엇일까요? 나를 주위 관계에서 떼어놓고 이 정체성을 찾고 만날 수 있을까요? 나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영향 속에 있고, 그 관계 속에서 나의 의미를 만날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의 정체성은 내가 생각하고 기대하던 하느님상이 깨트려질 때와 나의 이미지들이 깨어질 때, 아이러니 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내가 나의 틀을 내려놓고 다름이신 하느님께로 나를 던질 때에, 이 만남은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는 두려움이 함께 합니다. 우리가 이 두려움 가운데에 이 움직임을 한다면, 이 움직임 가운데 내가 생각하는 두려움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만날 것이고, 우리는 이 움직임을 계속 할 원동력을 얻습니다. 그렇지 않고, 그 반대의 움직임을 한다면, 우리는 거짓 안정감에 사로잡혀 ‘나’ 혹은 ‘내 식’의 쳇바퀴만 돌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권고 14에서 가난한 영을 가진 이는, 기도를 많이 하는 이도 아니고 하느님의 일에 열심한 이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나의 템포로 이러한 기도와 이러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이는 “자기 육신에 해가 될 것 같은 말 한마디에, 혹은 자기가 빼앗길 것 같은 그 무엇에 걸려 넘어져 내내 흥분합니다.” 가난한 영을 가진 이는, 자기가 기대하는 대로 행하지 않는 이나 환경들을 만날 때, 사랑의 마음으로 나아갑니다. 사랑 가운데에서 그는 나에 집착하는 마음에 여유를 불어넣으며, 너이신 하느님과 너이신 이웃에게로 나아갑니다. 그 가운데에 융합되어가는 하나됨이 아니라, 고유함이 살아나는 하나됨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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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째 날: 반응적인(reacting) 삶이 아닌, 하느님께 응답하는(responding) 삶
http://www.ofmkorea.org/ofmkfb/557938
김상욱요셉 2024.07.01. 16:39
열흘째 날: 반응적인(reacting) 삶이 아닌, 하느님께 응답하는(responding) 삶
당신이 하루를 되돌아보며 당신 삶을 깊게 하고 혹은 변화로 이끄는 공부 방법은 무엇인가? 다른 말로 해서, 하느님께 응답하는 삶을 살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첨언) 반응적인 삶은 누군가나 무엇의 자극에 사색이나 숙고없이 즉각적으로 임하는 삶을 말합니다. 주체인 나는 전체를 볼 여유가 없고, 나의 부분에 매여 있고,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너를 무시하며 거리두기를 하거나 비난과 화를 내곤 합니다. 이 반응적인 삶에는 표면적인 관계만 있지, 관계를 통해 내가 너를 진정으로 알고 받아들이는 움직임이나 내가 진솔하게 나를 드러내어 너가 나를 만나도록 하는 움직임은 없습니다. 어쩌면 이 관계 안에 하느님은 일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가 기사가 되려고 했을 때, 그는 당시 사회나 아버지가 인정하는 것에 반응하는 움직임을 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가 회개 하기 전에, 나병환자를 보기를 두려워했고, 그들을 보면 피해 도망갔던 것도, 반응하는 삶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우리가 상처를 덜 받고 나의 취약성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 바깥의 누구나 환경을 비난하고 화를 내는 것도 반응적인 삶일 것입니다.
이에 반해 응답하는 삶은 관계가 있고 관계 속에서 만남이 있고, 이 만남 속에 나도 살아나고 너도 살아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나환자를 포옹했을 때, 그는 나환자를 진정으로 만났습니다. 그 자신 안에 있는 두려움을 넘어 자리하고 있는 사랑이 나병환자와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았고 그 일어남이 자신을 통해 표현되도록 하였습니다. 그가 두려움에 반응하는 접근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응답하는 접근을 해왔을 때, 나환자는 그동안 잃어버렸던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프란치스코의 사랑의 포옹 시도에 그 또한 방어적인 반응이 아닌 자기를 열어젖히며 두 팔을 벌리고 프란치스코에게 다가갔습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에서 두 사람은 살아났습니다. 또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살아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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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째 날: 깊은 감사
http://www.ofmkorea.org/ofmkfb/558715
김상욱요셉 2024.07.12 21:15
열한째 날: 깊은 감사
어떻게 하면 당신은 삶에서 더 감사할 수 있는가? 만약 당신이 누구나 무엇을 잃는다면, 누구 혹은 무엇을 가장 그리워할 것인가? 당신은 누구나 무엇이 없는 삶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가? 그것을 고려하며, 그 사람들과 그 상황들과 그 무엇들에 대해 그 사람이나 하느님께 어떤 식으로 감사를 표현하는가?
첨언) 깊은 감사는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깊은 감사는 내가 기대했던 것이나 나의 생각의 테두리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것, 그리고 나의 생각이 깨트려질 때, 깊은 감사함이 솟아납니다. 그러하기에 나의 영역 너머에서 깊은 감사의 원천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깊은 감사를 통해 나는 나를 초월하여 더 깊은 세계로 들어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깊은 감사와 연결된 깊은 세계가 있을까요? 프란치스코는 참되고 완전한 기쁨에서, 참된 기쁨과 평화는 자기와 형제들이 기대하는 훌륭한 형제가 수도원에 들어오는 것이나 형제회가 위대해지는 곳에서 생겨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자신이 추운 겨울날 먼 곳에서 수도원을 찾아왔는데 형제들이 자기를 필요로 하지 않고 내칠 때, 그 순간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곳에 참된 기쁨과 평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아마 프란치스코는 비슷한 경우를 형제회에서 경험했고, 그때 그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세계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여정을 걸으며 그 세계를 맛보았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최근 바닥 체험을 한 누군가를 만났습니다. 그는 어릴 때 충분한 인정을 받지 못했는지 인정받는 것에 민감한 이였습니다. 그런데 스마트폰에 빠져 맡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해, 큰 위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인정’이 바닥에 떨어지는 상황에 내몰렸습니다.
중독을 연구한 이들 중 누군가,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바닥 체험’은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닥 체험’ =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합니다. 바닥 체험을 한 이들 가운데 10%만이 자기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되고 그곳에서 다시 일어난다고 합니다.
바닥 체험에서 자기의 진정한 모습을 보고 다시 일어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닥 체험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은, 약하고 힘없는 자기만을 바라보는 것에서 그냥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약한 자기만을 바라보는 움직임은 자기 안에서만 맴도는 움직임의 연장일 수 있습니다. 그는 어릴 때 자기가 감당하기 어려운 불안한 환경에 있었고, 그는 불안함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기 위해 인정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노력했지만 충분한 인정과 충분한 사랑이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고, 그는 다른 위안거리로 대체 인정과 대체 사랑을 받으려 했습니다. 이런 순환의 움직임에서, 바닥 체험은 자기 안의 순환 움직임이 더 이상 작동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그가 눈을 들어 주위를 볼 수만 있다면, 그는 달라진 환경과 달라진 나를 보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불안할 것이고 생각한 주위가 그에게 큰 요동을 주지 않을 수 있고 오히려 누군가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약한 나이지만 자기 안에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도 깨트려지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는 ‘보석’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순간이 생각으로는 큰 불안인데, 실재로는 그렇지 않는 세계와(오히려 참된 평화) 연결된 가능성으로 그에게 다가옵니다. 그가 그 가능성에 자신을 열어젖힐 때 그 가능태는 현실태가 되어 그는 그 세계에 젖어들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바닥 상태의 그리스도에게 하느님이 일어남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일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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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둘째날: 움켜잡은 것을 내려놓기
http://www.ofmkorea.org/ofmkfb/560073
김상욱요셉 2024.08.01 10:52
열 둘째 날: 움켜잡은 것을 내려놓기
당신의 삶에서 움켜잡은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그래서 당신에게 다가온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에서 (소유당하지 않고) 참 기쁨을 만났던 사례들 몇 가지를 제시해 보시오.
첨언) 유한성을 지닌 인간은 무언가를 갈망합니다. 인간은 무언가로 채울 수밖에 없는 마음을 지녔기에 중독의 잠재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허한 마음을 물질이나 행위나 관계로 채우면서 우리는 마음의 허함에서 벗어나려 하는데, 오히려 마음은 그 사람이나 그 물질이나 그 행위에 매어, 더 깊은 허함에 빠져듭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의 허함을 하느님이 활동하시는 공간이 되게 할 때, 우리는 중독에서 발생하는 것과는 반대의 자유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공간과 여백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하느님의 이미지나 내 생각의 하느님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마음을 무미건조함에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느님적이지 않는 무엇에 우리 마음을 우선적으로 내어줄 때, 우리 마음 공간에 하느님의 여백은 그만큼 축소되기에, 그 무엇은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 마음에서 하느님께 우선성을 내어드릴 때, 우리의 갈망들도 하느님을 향하는 갈망으로 질서지어지고 우리는 그 가운데에 자유를 만나게 됩니다.
클라라는 가난은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임을 프란치스코를 통해 프란치스코와 함께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프란치스코가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시고 또한 형제회가 가난하고 소박한 삶이 아니라 사목에 에너지를 쏟고 있을 때, 클라라는 이 가난을 수호하려 하였습니다.
당시 교황이었던 그레고리오는 클라라의 자매들이나 다른 가난한 자매회들이 안정된 생활틀에서 하느님께 몰두해서 기도하는 환경을 만들어주려 하였습니다. 클라라는 교황의 생각은 알고 감사하는 마음을 지녔지만, 그 생각을 자기와 다미아노의 자매들에게 허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할 경우, 클라라와 자매들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길을 잃어버리기 때문이었습니다. 클라라는 교황의 생각에 반해서 ‘가난 특전’이라는 땅을 소유하지 않을 수 있는 이상한 특전을 교황으로부터 받아내었습니다. 그리고 클라라는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수도규칙을 작성하여 인준을 받으려 하였습니다. 당시에는 교회에서 입증된 수도규칙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법이 제정된 이후였습니다.
클라라는 고집스럽게 자기의 주장을 내려놓지 않고 추구하였습니다. 아마 외부에서 이런 클라라를 보면서, “클라라는 가난 중독에 빠져, 교황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수 있습니다.
클라라는 가난 중독에 빠졌을까요? 중독에서 빠졌는지를 알아차리는 요소들로는 내성, 금단현상, 사고의 왜곡이 있습니다. 그리고 중독에서 빠졌는지를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클라라에게 그런 현상이 일어났는가? 클라라는 오히려 교황의 생각이나 사람들의 말에도 좌우됨 없었고 또한 이 가난 가운데 자매들을 자발적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며 자유롭게 그리스도를 따랐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를 품었던 성모님을 보면서 우리 또한 그러한 삶을 살 수 있고, 그러한 삶 가운데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실 수 있음을 알고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만들고 바치곤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집이시여, 인사드리나이다. … 하느님의 어머니시여, 인사드리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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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세째 날: 슬픔이 영적지혜가 되도록 돕기
http://www.ofmkorea.org/ofmkfb/561218
김상욱요셉 2024.08.25 13:55
열 세째 날: 슬픔이 영적지혜가 되도록 돕기
하루 중에 무언가가 일어나서 당신이 슬프거나 부정적이 되거나 낙담하게 될 때, 당신이 슬픔에 들어가서 무언가를 탐색할 수 있는 방법들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해서 당신의 겪은 것에서 배울 수 있고 어디에서 당신이 취약했는지 발견할 수 있고 또한 당신이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방법들은 무엇입니까?
첨언) 누군가는 사진을 찍을 때, 자기가 찍고 싶은 대로 찍는 것이 아니라, 찍히는 대상이 자기를 이길 때에, 사진을 찍는다고 합니다. 이긴다고 해서 경쟁하여 이긴다는 의미는 아니고, 그 대상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을 수 있을 때를 담는다는 것입니다. 분명 여기에는 찍는 이의 마음과 프레임이 있지만 그 마음과 프레임이 찍히는 이를 가두거나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감하고 일치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어떠한가요? 하느님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도록 하는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느님이 작용해주시기만을 요구하고 있는가? 우리는 하느님을 이야기하지만 하느님이 내가 생각하는 식으로 세상과 관계를 움직여 주기를 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불안만이 있을 것이라 착각합니다. 이런 착각을 깨트릴 수 있는 순간이, 바로 우리의 슬픔과 역경의 순간입니다. 이 순간은 세상과 관계가 내가 원하는 식으로 되지 않는 순간이고 세상과 관계가 있는 그대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또한 내가 집착하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이고 그 집착의 허무함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또한 내가 집착하는 것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너인 이웃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수하 형제들이 순종하지 않아 힘들어서 봉사자직을 내려놓기를 원하는 봉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대가 주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에 방해되는 것이든, 또 형제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대를 때리면서까지 방해하든, 이 모든 것을 은총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대는 이런 것들을 원하고, 다른 것은 원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것이 그대가 따라야 할 주 하느님의 참된 순종이요. 나의 참된 순종이 됩니다.”
하느님의 순종? 하느님도 무엇에 순종하시는 분이신가? 어떻게? 프란치스코에게 하느님은 우리에게 순종하시는 분으로 다가온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순종을 따르는 우리는, 이웃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나’(1인칭)를 강요하지 않고 그(3인칭)를 만나며 그가 너가(2인칭) 되도록 하며, 순종하시는 하느님과 하나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사라센인들과 비신자들에게 가운데로 가는 형제들에게도 비슷한 길로 안내하며 그들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거처가 되도록 한다. “한 가지 방법은 말다툼이나 논쟁을 하지 않고 하느님 때문에 모든 인간 피조물에게 아랫사람이 되고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말다툼을 하기 보다는 하느님 마음으로 이방인들을 만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런 자세는 지금 기후 위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적용될 것입니다. 피조물이 인간의 이용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형제 자매로 있는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연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 길에서 우리는 지금 현재 우리 가운데에 자연스럽게 일어나시는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마음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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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넷째 날: 과거 슬픔에 담긴 보석들
http://www.ofmkorea.org/ofmkfb/563181
김상욱요셉 2024.11.05 13:26
열 넷째 날: 과거 슬픔에 담긴 보석들
과거에 잠시 지나가듯 예상하지 않았던 슬픈 체험들이 당신 자신을 그리고 당신 삶을 보다 깊이 이해하도록 도왔던 일화들이 있는가? 그 일화들은 무엇이었는가? 이 이해가 지금 당신을 어떻게 돕고 있는가?
첨언) 프란치스코 회개 여정에서 슬픔은 큰 역할을 하였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갔던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면서 자기 삶의 슬픔에 젖어들었습니다. 이 슬픔이 그에게 삶을 전환시키는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슬픔에 잠기곤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이 그에게 슬픔으로 다가왔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삶에 담긴 사랑이 그에게 슬픔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이 슬픔이 그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한걸음 한걸음 따르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형제들이 서약을 하는 순간들은 참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서약을 했지만 일상을 살아가면서 서약의 삶을 살지 못하는 저와 형제들을 만납니다. 이런 순간 서약을 현재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누군가에게 사랑을 실천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사랑을 실천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사랑을 보여주기 힘들어하고 언제까지 사랑해야 하는지 어느 수준까지 사랑해야하는지 의문을 가지며 어둠에 젖어듭니다.
이것이 인생이 아닌가 싶네요. 일상의 인생 속에서 우리는 정(양)과 반(음) 사이의 긴장이라는 사선을 살아갑니다.
우리 삶의 여정에서 정(양) 반(음) 합의 사선이 이상이나 밝음으로 좀 더 기울 수 있고, 그렇지 않고 어둠이나 절망으로 좀 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선에 하느님의 손길이 있지 않나 싶네요. 이상과 밝음으로 이끄는 힘에만 하느님의 손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긴장 속에서 사선이 유지되도록, 우리가 살아가도록 하는 손길이 있습니다. 이 손길에 우리 마음을 좀 연다면, 절망 가운데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지 않나 싶네요. 이미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이 계시기에...
어머니의 역할과 어머니 됨의 차이가 있지 않나 싶네요. 같은 일을 하면서도 나 또한 이 어머니성에 포함되시킨다면... 진정한 모성과 부성의 하느님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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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다섯째날: 다른 이에 대한 진정한 관심
http://www.ofmkorea.org/ofmkfb/563774
김상욱요셉 2024.11.24 13:26
열 다섯째 날: 다른 이에 대한 진정한 관심
나에게 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당신이 자기 의견에 동의하지 않거나 그가 불친절할 때 자기를 보도록 말하면 분노로 치닫곤 하였다. 그는 종종 자기중심적이기도 했고 심지어 다른 왕따를 시키곤 하였다. 그런데 그는 많은 나를 포함하여 많은 친구를 가졌다.
나는 ‘이것이 왜 그럴까?’를 생각하면서, 나는 그가 사람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놀라운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가 너에게 어떻게 지내는지 물을 때, 그는 정말로 너에게 관심을 가졌고 심지어 네가 그에게 말한 것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묻기 위해 다시 연락하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복도에서 누군가를 멈추게 하여 “어떻게 지내니?” 라고 물을 때, 우리가 진실로 그것을 의미하는가? 당신이 다른 이에게 더 마음을 기울여 그들이 다른 이로부터 자기에 대한 진정한 관심을 경험하게 할 수 있게 하는 방법들은 있는가?
첨언)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반응적인(reactive) 삶과 수용적인(receptive)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회개 이전에는 반응적인 삶을 주로 살았다면, 회개 이후 그의 삶은 수용적으로 되어갔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누군가 자기에게 해가 될 듯한 말을 들었을 때, 발끈하는 것은 진정 가난한 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진정 가난한 이는 보다 깊고 보다 넓게 자기와 타인을 바라보기에 반응적인 삶이 아닌 수용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관계에서 반응적인 것은, 누군가의 말이나 표정에서, 표면적에만 매여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공격하는 듯한 말을 하면, 나는 되받아치거나 도망치거나 얼어버리거나 혼미해지곤 합니다. 내 안의 나와 너를 받아들일 여유 공간은 없고, 누군가의 어떤 말이 나에 대한 무시로만 다가오고, 나는 그것에 대해 되받아치거나 그를 무시합니다. 그러면 그는 이를 자기에 대한 무시나 공격으로 알아차리고 또 여유 없는 반응을 합니다. 이 관계성 안에서 상처는 깊어지고, 관계는 멀어져만 갑니다.
이에 반해 수용적인 관계는, 비슷한 상황에서도, 내 안에 있는 조금의 여유로 그것을 바라봅니다. 그가 보이는 감정들 아래에 있는 무언가를 읽어내고, 그가 일으킨 나의 감정들과 그 아래에 있는 무언가를 바라봅니다. 이 작은 움직임이 나에게 여유를 조금 더 키우고, 그의 감정에 대해 즉각적으로 부정적으로만 대응하지 않게 합니다. 즉 나에게 그리고 너에게 시간을 주기도 하고, 반응식이 아닌 응답식의 표현을 하게 합니다. 이 안에는 너만을 받아들이는 움직임만이 아니라 나 또한 받아들이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응답은, 너에게도 작용하여, 최소한 너가 즉각적인 반응적인 움직임을 그만두며 너 자신을 바라보도록 합니다.
이러한 모드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작용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느님께 무언가를 청하기만 하고, (그것이 이루어지던, 이루어지지 않던) 그것에만 맴돈다면,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반응적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단계에만 머물지 않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도록 침묵 가운데 머무르는 시간을 가진다면, 우리는 수용적이 됩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의 마음을 읽어내고 주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도록 합니다. 나의 열어젖힘 속에서 주님께서 나를 통해 어떻게 작용하시는 바라보는 수용적인 기도를 합니다. 이러한 기도와 응답을 통해 우리는 기도와 삶이 하나로 통합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나가 하나로 엮어져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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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여섯 날: 의식들을(rituals) 실행하기
http://www.ofmkorea.org/ofmkfb/564869
김상욱요셉 2024.12.30 20:39
열 여섯 날: 의식들을(rituals) 실행하기
당신은 하루나 일주 동안 당신의 삶과 당신 안의 하느님의 현존을 더 명확하게 감지하고 음미하기 위해 어떤 의식들을 행하고 있는가? 어떤 것은 아침기도와 같은 분명한 것일 수 있다. 또 다른 것은 종교적이지 않지만 기도적일 수 있다. 즉 오후에 창문을 내다보며 마시는 한잔의 차와 같은 것도 의식일 수 있다. 당신이 지금 즐길 수 있는 의식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 질문에 대해 창조적이고 사색적이 되도록 하라. 그리고 당신의 레포토리에 새로운 의식들을 첨가하여라.
첨언) 프란치스코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알려진 의식은(ritual) 성탄의 재현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당시 성탄 구유없이 성탄 전례가 거행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가 그렉치오 은둔소에 머물 때, 프란치스코는 베들레헴의 아기를 재현하며 성탄 전례를 거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특별한 의식이 아니었지만, 일상사를 살아가면서 프란치스코는 무언가를 만나면 자기 나름의 은둔소로 들어가곤 하였습니다. 즉 조용한 곳을 찾아 잠시 머물거나 이것조차 허락되지 않으면 후드를 쓰고 그 시간에 머물곤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음미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가 음미했던 순간들은 어떤 순간들이었을까요? 프란치스코가 자연에서 하느님적인 무언가를 느꼈을 때, 프란치스코는 그렇게 그 순간에 머물곤 하였을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프란치스코는 자기 영혼의 누추함과, 이곳을 마다하지 않고 오시는 주님을 만나는 순간들에도 프란치스코는 그렇게 머물곤 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가 클라라 자매들을 방문했을 때, 자매들은 프란치스코에게 설교를 부탁했습니다. 이때 프란치스코는 자매들이 자기를 높게 보고 있지만 사실 자기의 누추함을 보았고, 그래서 그는 재를 가지고 와서 자기 머리에 스스로 뿌리는 의식 이외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그 순간에 머물며 그러한 비천한 자기에게 다가오시는 주님께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말로 표현되는 다른 어떤 훌륭한 설교보다 깊게 자매들의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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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일곱째 날: (감정들에) 기대어
http://www.ofmkorea.org/ofmkfb/565335
김상욱요셉 2025.01.15 09:27
열 일곱째 날: (감정들에) 기대어
당신의 감정들을 통해 하느님께서 가르치는 바를 발견하는 것은 자기-탐색과 자기-이해 위한 탁월한 방법들 중 하나이다. 이 점을 마음에 간직하고, 당신이 앞으로 화, 성가심, 좌절을 경험할 때, 감정들에 기대어 자기에 대해 공부할 바가 무엇인지 바라보는 숙고를 하라! 다른 이들에게 반응하는 식이 아닌, 이런 식으로 하면, 당신은 감정들로부터 약간의 거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당신의 응답은 더 유용할 것이고 이 감정이 당신에게 접촉시키는 이유에 대해 더 분명한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첨언) 자기 감정을 통한 공부는 무엇일까요? 프란치스코는 나환자를 만날 때, 처음에 두려운 감정을 만났고 이 두려움을 마주하지 않고 피해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회개의 결정적인 순간, 프란치스코는 두려움에 머물 수 있었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음성과 또 다른 모호한 감정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감정에 자기를 열며 그는 나환자에게 다가갔고 그를 포옹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 모호한 감정이 ‘단맛’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에 열린 삶으로 나아갔습니다.
저는 어떠한가? 지금 겪고 있는 일 앞에서, 무엇이 최선이고 무엇이 틀리지 않은 것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럼에 따라 형제는 보이지 않고, 나의 생각이 나의 전부가 되어버립니다. 계속 저의 생각의 정당성과, 너의 생각의 잘못과 비현실적인 면을 찾기에 바쁩니다.
어느 순간, 이 흐름에 조금의 여유가 생겨납니다. 이제, 생각에 매인 나와 생각에 매여 있는 너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너의 주장 안에서, 너는 ‘너를 좀 보아달라!’는 요청을 나에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 주장의 ‘옳고 그름’도 중요한데, 그것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보여지기 시작한 너에 대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보여지기 시작한 너를 받아주는 것, 이것도 나의 힘으로는 안되는 것 같습니다. 나의 힘은, 너의 정당성 주장에 꿰찔림을 더 이상 받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 위험에 노출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이 앞에서 저는 하느님을 바라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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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여덟째 날: 유머를 지니며
http://www.ofmkorea.org/ofmkfb/566357
김상욱요셉 2025.02.19 14:28
열 여덟째 날: 유머를 지니며
당신의 약점에 대해 긴장을 풀 수 있었고 이를 가볍게 여길 수 있었던 때들을 나열해보시오. 이 사건들에서 당신은 어떻게 자신을 가볍게 하여 자신과 당시 상황에 대해 더 잘 이해하도록 하였는가? 당신이 너무 민감해져서 유머와 평정심으로 반응할 수 없는 영역들을 찾아 말해보시오. 이런 현실에 대한 이해가 당신 자신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는가?
첨언) 프란치스코에게 약한 부분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버지 베르나르디노에게 뜨거운 피를 이어받았기에, 프란치스코가 아버지와의 갈등 상황에서 격하게 표현한 것이 어쩌면 그의 약한 부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정에 대해서도 프란치스코는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어느 겨울날 프란치스코가 욕정을 이기기 위해 눈밭을 알몸으로 뒹굴었다는 일화와 눈사람 가족을 만든 일화는 욕정의 인간 프란치스코에 대해 말해줍니다.
프란치스코에게 이런 약한 부분이 있다는 사실보다는, 이런 약한 부분이 하느님 안에서 어떻게 소화하고 체화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연약함을 거부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바로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기에, 자기와 타인의 연약함은 하느님 사랑이 담겨질 수 있는 거처로 보았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글에서 육체적으로 약한 형제들을 돌보고 지탱해주며 만날 수 있는 하느님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또한 죄지은 형제들에 대해 의사로서 다가가신 주님을 바라보며 그 마음을 배우도록 안내합니다, 프란치스코는 복음의 시각 속에서 우리에게 “부당하게 번민과 괴로움, 부끄러움 모욕, 고통과 학대, 순교와 죽음을 당하게 하는 모든 이들이 바로 우리의 벗”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복음의 마음 안에서, 형제들은 죄지은 형제들에 대해 충고와 교정할 수 있지만, ‘어떤 권한이나 지배권도 가져서는 안됩니다.’고 말합니다.
누군가 우리를 부당하게 오해하거나 무시할 때, 그를 벗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또한 누군가의 잘못 앞에서 그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에도 겸손하게 그를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인간적인 힘으로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십자가 길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었던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그 신뢰에 응답하신 하느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작은 모험을 감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작은 모험 안에서, 주님께 대한 신뢰가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계속 이 여정을 걸을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힘에 의존하면서는 만날 수 없는 깊은 평화를 만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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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아홉째 날: 하나의 '작은 규칙'
http://www.ofmkorea.org/ofmkfb/566589
김상욱요셉 2025.02.28 11:04
열 아홉째 날: 하나의 '작은 규칙'
이 시점에, 당신은 자신의 작은 기도 규칙에 무엇을 포함시켰는가? 이 규칙 안에서, 무엇이 당신을 가장 영적으로 들어가도록(참여하도록) 하는가? 당신의 삷에서 하느님에 대한 감을 향상시킬 수 있는(그리고 당신의 ‘작은 규칙에 첨가할) 다른 어떤 것들이 있는가?
첨언) 마르틴 부버는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 관계성 안에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 관계 맺음이 ‘나와 너’, ‘나와 그것’에 따라 우리의 삶의 자세와 세계관과 하느님관이 달라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와 너’ 관계 맺음의 양식과 ‘나와 그것’의 관계 맺음의 양상은 현실에서 따로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라 합니다. 우리 삶이 ‘나와 그것’의 관계 양상에서 ‘나와 너’의 관계 양상으로 넘어가고, 이 둘 사이의 소통과 조화가 이루어질 때, 우리의 삶은 다채로워지고 깊어질 있습니다.
‘나와 그것’의 삶의 양상에서, 그것은 나의 그것으로(소유격적인 의미)를 지니며, 나와 그것은 분리된 상태에 있습니다. 그것에는 물건도 포함되고 고차원적인 사상이나 신학, 종교까지 포함됩니다. 우리의 신앙적 자세에서 ‘나의 하느님’이라고 말할 때, 하느님은 나의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이거나 나의 기대를 채워주시는 분이 됩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과 나는 분리된 상태에 있습니다. 그분이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내가 친밀감을 느낀다고 하여도 말입니다. 이 ‘나와 그것’의 양상에서, 우리는 그것과 보다 직접적인 만남과 유대가 일어나기가 힘듭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나를 위한 움직임, 나를 살리려는 움직임을 하지만 종국적으로 나와 그것은 살아나지 못합니다.
‘나와 너’의 삶의 양상은 (먼저) 나와 마주 선 너에게로 내가 녹아들어 가는 과정이고 또한 너와의 관계에서 내가 살아나고 너가 살아납니다. 우리들은 관계적일 수밖에는 없고 나의 본연의 모습은 너를 통해서 만나집니다. 특히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신 당신은 보여지는 나와의 관계성 속에서 보여지고 들려지고 만져집니다. 이 ‘나와 너’의 관계성 속에서 언뜻보기에는 너에게로 향하는 나의 녹아듦은 죽음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 안에서 하느님은 살아나고 생명이신 하느님 안에서 나 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프란치스코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이신 너와의 관계 맺음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관계 양상을 내비치는 글들을 남겼습니다. 그 가운데에 프란치스코가 라베르나에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만난 후 남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프란치스코가 더 병약해지면 썼던 ‘피조물 형제의 노래’가 저에게 강하게 다가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에서,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당신(Tu)’로 칭합니다. “당신은 애정이시며 사랑이시나이다. 당신은 지혜이시나이다. 당신은 겸손이시나이다. …” 이 당시 프란치스코에게 하느님은 사랑, 지혜, 겸손과 따로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너인 사랑과 너인 지혜와 너인 겸손과 따로 있지 않고 그 속에 잠겨있습니다. 이 속에서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만나고, 드러난 하느님과의 만남이 우리를 초대하고 이끌고 있습니다.
‘피조물의 노래’에서 프란치스코는 ‘당신’이라는 칭호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자신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들이 마주 선 하느님을 만나고 있고, 프란치스코는 이 ‘나와 너’의 관계 세계에 이끌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내 주님, 당신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찬미받으시옵고, 그 가운데 각별히 주인이신 해님 형제와 더불어 찬미받으소서. 해님은 낮이옵고, 그로써 당신께서 저희를 비추시나이다. 아름답고 장엄한 광채로 빛나는 해님은, 지극히 높으신 당신의 모습을 지니나이다.…”
우리의 신앙 여정이 하느님과의 ‘나와 너’의 관계 양상에 의해 우리들이 살아나는 여정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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