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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야기 |
멀리에서도 보일 정도로 커다란 글씨로 붙어 있는 ‘부정공세려’라는 편액의 글씨는 가까이 갈수록 그 획 하나하나까지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부정공세려’의 바깥채는 축대 위에 올라서 있었고, 동향을 하고 있는 바깥 쪽 마루 끝에는 난간이 둘러쳐져 있다. 있었는데, 집 뒤쪽으로 경사면을 타고 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부정공세려’의 지붕이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 왔다. 덮어쓰고 있었다. 사당의 지붕들도 돌이끼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산이었지만 그곳에 오르자 늪실마을의 모든 것이 한 눈에 들어왔다.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그 한 끝은 마을 입구 역할을 하는 고갯마루 쪽으로 이어지고 있었고, 다른 한쪽은 동쪽 방향으로 뻗어나가 다른 산굽이 끝으로 잦아들고 있었다. 잘 가꾸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늪실마을에서는 아직 나무를 때는지 소나무들은 아래가지가 다 떼어져 마치 키 큰 여인네들이 다리를 훤히 드러내고 늘씬한 몸체를 자랑하는 듯하였다. |
건축 구성 |
口자 건물이다. 앞에는 사랑채가 나와 있고, 사랑채의 동편으로는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열려 있다. 중문의 동쪽에는 안채인 口자 건물의 동쪽을 막고 서 있는 건물의 끝에 붙은 1칸의 방이다. 안마당은 아주 좁다. 얼마 전에 수리를 하여 화강석으로 뜰을 단장하였다. 사당은 집 뒤쪽으로 올라서 있다. |
현판 |
부정공세려(副正公世廬) |
파조인 부정공의 종택임을 의미한다. |
승국간성영침처......(勝國干城永寢處......) |
종택 좌측 재사(訥谷齋)에 주련이 있다 |
부정공세려중수기(副正公世廬重修記) |
권오훈(權五焄)이 지었다. |
문중 이야기 |
- 부정공파(副正公派) 종가 |
“우리 ‘안동권씨’는 종가가 없어요.” (副正公派) 종가이지요. 부정공파는 파 종손이 있어요. 종손은 부산에 있어요. 종가는 와룡에 있고, 종손만 부산에 가 있지요.” 그 길을 따라가면 늪실. 지금은 길이 더 뻗어 와룡에서 정산 나가는 2차선 도로와 만나게 되어 있다. 하여 왔습니다. 그렇지만 아이구, 보잘것이 없습니다.” 그 다음이 우리 파지요.” 백부에게로 양자를 오셨고 …… 그 윗대에서도 한 번 양자를 하신 적이 있지만 …… 거의 적자로 이어 내려온 셈이지요. 현 종손은 부산에 가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현 종손은 1948년생이고, 이름은 기승이라고 하지요.” 가문이라고 하겠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족보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이 바로 이 가문에서 발행한 것이라는 점을 통해서 우리는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성화보(成化譜)』라고 불리어지는 이것은 우리 민족의 중요한 문화유산일 뿐만 아니라 권문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안동권씨 족보 성화보를 추밀공파 문충공 아들 권제와 그의 아들 권람께서 편찬 하시고 완성 하지 못한것을 내종 서거정이 더하여 보충하고 수정 보완하여 외손 경상감사 윤호께서 안동부에서 간행 할때 서거정(徐居正)公 께서 서문을 지었는데 『성화보(成化譜)』의 「서문」에서는 안동권씨의 초기 역사가 다음과 같이 말하여진다. 책이 스스로 구하여 본읍의 향리가 되었다. 권씨가 책이 향리로 된 후로부터 칠세를 미미부진 (微微不振)하다가 수평(守平:樞密公)에 이르러 부흥하고 자손이 미덕을 계승하여 문정공 (文正公:菊齋)에 이르러서 비로소 크게 현달하였으며, 수홍(守洪:僕射公)의 후손 문탄공 (文坦公:一齋)이 또다시 현달하여서 권씨가 드디어 2대족으로 나누어져 …….” 향리직을 세습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 『부정공파 세보』는 권책의 조항에서 다음과 같이 적어두고 있다. 당대(堂大)를 호장(戶長)이라고 칭하였고, 등대(等大)를 부호장(副戶長)이라고 칭하였고, 낭중(郎中)을 호장동정(戶長同正)이라고 칭하였고, 원외랑(院外郞)을 부정(副正)이라고 칭하였다. 공은 스스로 호장 되기를 바래서 풍속을 규찰하고 바로잡았으니, 이에 그것을 세습하게 되었다.” 중앙 관직에 진출하는 사람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안동권씨 15개 파는 복잡한 양상을 띠므로 명확하게 정리하여 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보감』에 보이는 「안동권씨 10세 15파 세계도」 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이르러 중윤공파(中允公派)를 형성한다. 군기감공파(軍器監公派)를 형성한다. 권추(權樞)가 호장공파(戶長公派)를 형성한다. 형성한다. (給事中公派)를 형성한다.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이 ‘추밀공파’의 파조는 ‘수평’이다. 그는 ‘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상장군’을 지낸 사람이다. 추밀공파에서는 추밀공의 3대 후에 권부(權溥)가 나서 이 가문을 단숨에 최고 명문으로 끌어올렸다. 권부는 몽암(夢庵) 단(㫜)의 아들로써, 호가 국재(菊齋)이니, 바로 서거정이 앞에 인용하였던 『성화보』의 서문에서 언급하였던 바가 있는 사람이다.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공민왕을 상주로 호종하며, 임인년(任寅年:1362년)에는 어가를 따라 청주에 이른다. 그 공으로 봉순대부(奉順大夫) 판삼사부사(判三司副使)가 되며, 홍무(洪武:명 태조의 연호) 임신년(壬申年:1392년)에 안동부 북쪽의 감마촌(甘麻村) 등지의 땅을 하사받았다. 그의 벼슬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른다. 현덕왕후(顯德王后)이다. 현덕왕후는 단종(端宗)의 생모이다. 권전의 아들 권자신(權自愼)은 예조판서를 역임하였고, 사육신과 같이 화를 입어서 삭탈관직 당하였다가, 숙종 때에 이르러서야 복직된다. 어쩌면 부정공파의 영화를 보장하여 줄 수도 있었을 왕비 배출은 오히려 그들의 불행으로 끝나 버리고 마는 것이다. 등암(藤岩)이며, 1426년(세종 8)에 태어났다. 그는 1450년(세종 32)에 문과에 급제하여 통례문(通禮門) 봉례랑(奉禮郞)을 역임하였다. 그의 이력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죽음과 관계된 기록이다. 역설적으로 그는 부정공파에 불행을 가져다 준 장본인이었던 세조를 위하여 죽는다. 1467년(세조 13)에 이시애(李施愛)는 함경도에서 난을 일으켰다. 권징은 병마평사(兵馬評事)로 이시애 난을 평정하러 갔다가 순절하고, 혈서 한 장만이 집으로 돌아왔다. 막곡에 있는데, 지금 안동전문대학 맞은편입니다.” 아마 그때는 영주 근방에 세거하였던 모양입니다. 여기 늪실의 입향조는 파조로부터 14대, 그러니까 시조로부터 24대 때의 일이지요.”라고 권오수는 말하였다. |
관련문집 | |
- 임장세고(林庄世稿) | |
이 책은 안동권씨 부정공파종택에 소장되었던 임장세고(林庄世稿)이다. 총 6권 2책으로 고종 연간에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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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금헌선생문집(樂琴軒先生文集) | |
이 책은 안동권씨 부정공파종택에 소장되어 있던 『낙금헌선생문집(樂琴軒先生文集)』이다. 이정백(李庭柏, 1553~1600)의 시문들을 총 1책으로 엮어 1855년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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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고유적(先考遺蹟) | |
이 책은 안동권씨 부정공파 종택에 소장되어 있던 『선고유적(先考遺蹟)』이다. |
관련문서 |
- 능동재사중건상량문(陵洞齋舍重建上樑文) |
이 문서는 안동권씨 부정공파종택에 소장되어 있던 능동재사중건상량문(陵洞齋舍重建上樑文)이다. |
관련유물 |
- 호양선생문집(湖陽先生文集) |
권익창(權益昌, 1562~1645)의 시문집으로 4권 2책의 목판본이다. |
관련인물 |
- 권익창(權益昌) |
부정공파의 가산을 늪실로 옮긴 사람은 권익창(權益昌)이다. 그의 선대 2대의 묘소가 남선에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직계 선대들은 안동 동쪽에 살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그의 부친 권선(權宣)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를 역임하였으며, 퇴계의 문인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권익창은 자가 무경(茂卿)이고, 호가 호양(湖陽)으로 1562년(명종 17)에 탄생하여 1645년 (인조 23)에 타계하니, 향년 84세였다. 그에게는 장락원(掌樂院) 정(正)의 벼슬이 주어졌고, 학암서원(鶴巖書院)에 배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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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는 늡실에서 태어나서 현재 서울에서 27년째 생활하고있습니다.
현재 늡실에는 아버님 어머님 두분이 사고계십니다.이런카페가 있다는것이 무척이나 반갑습니다.
저는 종택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살았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시조 할아버지 계신 서후는 가봤는데... 태어난 곳이 예안입니다.시골가는길에 한번 들러 봐야 할것 같습니다. 살고 있는곳은 안양에 살고 있구요. 자주 들러서 열심히 공부 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다녀 오시면 사진 찍어서 많이 올려주세요.
안녕하세요
복야공파 충정공계 34세 권영섭입니다.
문중이야기를 읽다가 성화보의 저자를 서거정으로 기록하셨기에 저의 의견을 몇자 적습니다.
성화보를 만드신 분은 추밀공파 16세 권근의 아들인 지제공 권제와 그분의 아들 권람입니다. 권제,권람 부자가 완성하여 간행치 못하고 돌아가시자 권란의 내종인 서거정이 보완하여 圖譜2권을 만들었고 이를 경상감사 윤호가 편찬하였습니다.
정확한 기록은
成宗(성종) 7年(1476)에 創刊(창간)하였으며 陽村 權近公(양촌 권근)의 子 止齊公 權踶(지제공 권제)가 家譜小牒(가보소첩)을 編修(편수)한데서 비롯하여 踶(제)의 아들 所閑堂 權擥公(소한당 권람 )이 先志(선지)를 받들어 널리 수소문하여 많은 資料(자료)를 蒐集(수집)하였으나 그 亦是(역시) 끝을 맺지 못하였던 것을 그의 內從 徐巨正(내종 서거정)이 補完(보완)하여 圖譜2卷(도보2권)을 만들었다. 이것을 더 보완하여 3秩(질)로 編纂(편찬)한 것을 外孫(외손) 慶尙監司 尹濠(경상감사 윤호)가 安東府(안동부)에서 刊行하였다.
안녕하세요 지적 고맙습니다. 위의 내용은 서거정이 안동권씨 족보를 편찬했다는 것이 아니라 편찬시 서거정公께서 성화보 서문에 안동권씨 시조 행 부터 낭중공 인행 3世 책 으로 이어져 이후 현달한 인사가 배출되어 가문이 번성했다는 것을 적고 있다는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글 내용에 오해가 있으셨다면 다시 수정토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