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이시오 신부가 서울의 소년의 집 안에 세운 초 중 고등학교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운영되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일반 사립학교보다 월급을 더 주고 우수한 교사들을 채용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고아들에게 무슨 교육이냐고 비아냥거렸지만 알로이시오 신부는 자신이 돌보는 아이들이 넘칠 만큼 많은 고통과 상처를 받은 만큼 다시는 그런 고통과 상처를 입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가정과 사회에서 버림받은 아이들인 만큼 훨씬 더 좋은 환경에서 더 좋은 보살핌을 받고 자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교육을 시키는 흉내를 낸 것이 아니라 실력 있는 교사들을 채용해 아이들에게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교육을 하게 했다.
알로이시오 신부의 생각은 잘 맞아 떨어졌다. 교사들은 열심히 가르쳤고 아이들은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다 보니 학력평가 시험을 치면 주변의 공립학교나 사립학교보다 늘 성적이 우수했다.
공부도 잘했지만 스포츠 분야에서도 특별히 두각을 나타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운동은 소년의 집 전체 교육과정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다. 운동이야말로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었다. 그래서 소년의 집 학생들은 공부 못지않게 운동도 열심히 했는데, 소년의 집 축구팀과 농구팀은 전국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늘 상위권을 차지했다. 심지어 부산 소년의 집중학교 축구팀은 전국 우승을 두 번이나 했다. 부산의 수많은 중학교 가운데 그런 영예를 누린 학교는 소년의 집 중학교가 유일했다.
지금은 고교축구가 별로 인기가 없지만 1970년대와 80년대는 고교 축구가 꽤나 인기 있는 스포츠였다. 그때 소년의 집 고등학교 축구부는 전국에서 유명했는데, 창단 이래 전국대회에서 세 번의 우승과 다섯 번의 준우승을 차지했다. 국가대표 골키퍼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김병지 선수도 소년의 집 고등학교 축구부 출신이다.
알로이시오 신부님은 소년의 집 학생들의 축구시합이나 육상경기가 있을 때면 일부러 시간을 내어 운동장에 가서 응원을 했다. “뛰라, 뛰라!”외치면서 하도 열심히 응원을 하다 보니 부산과 서울의 축구계와 육상계 사람치고 신부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승리에 대한 집착도 대단해 심판이 편파적인 판정이라도 하면 심판을 향해 큰 소리로 항의하기도 했다.
-「여전히 살아계신 우리 신부님」중에서
초등학교 축구부도 유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울 소년의 집 초등학교가 개교한지 고작 두 달이 지났을 무렵, 전국 소년체전이 대구에서 열렸다. 그때 서울의 초등학교 대표 팀이 바로 소년의 집 축구팀이었다. 소년의 집 축구팀이 서울의 다른 초등학교들을 다 물리치고 서울 대표가 됐던 것이다.
이때 전국체전 초등부 첫 축구시합이 서울과 부산의 시합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부산의 초등학교 대표 팀은 부산 소년의 집 축구팀 이었다. 한마디로 전국체전에서 행복한 집안싸움이 벌어진 셈이었다.
경기결과, 서울 소년의 집이 1대0으로 이겼는데 이 경기에 일로이시오 신부를 비롯해 많은 수녀님들이 참석해 응원을 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경기가 끝나고 알로이시오 신부와 수녀들에게 달려가 어느 팀을 응원했는지 질문을 쏟아 붓기도 했다.
당시 전국체전에서 부산 소년의 집 농구팀은 결승까지 올라갔는데, 결승전에서 서울 대표 팀인 금성 초등학교와 붙어 44대43으로 아깝게 패1배해 준우승을 했다. 그렇지만 전국체전 후 소년의 집은 일약 스포츠 명문 학교로 떠오르기도 했다. 소년의 집 아이들은 축구뿐만 아니라 농구도 잘했다. 부산 소년의 집 초등학교 농구팀은 부산에서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렇게 양질의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대부분 취업을 하면서 소년의 집을 떠났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그 학생들에게 수입의 10%를 소년의 집에 기부할 것을 당부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자란 소년의 집과의 관계를 이어나가고, 또 날로 불어나는 소년의 집 운영경비의 일부를 부담하도록 했던 것이다.
알로이시오 신부의 이런 당부를 많은 졸업생들이 받아들였고, 소년의 집을 떠난 후에도 설과 추석이 되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소년의 집을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