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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9: 1-2
야곱이
모세는 야곱이 자기 아들들의 장래에 대하여 예언하기 위해 모이라고 한 사실을 기록합니다 이렇게 야곱이 그의 아들들에게 후일에 당할 일들을 미리 말한 것은 사실상 단순히 유언적인 성격보다는 예언 그 자체입니다. 본 장에 기록된 말씀을 보아서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되어질 일들입니다. 특별히 22-26절을 참조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1. 본문 1절은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 입니다.
1) 앞장에서 에브라임과 므낫세에 대한 축복이 열거된 것은 야곱이 자기 다음에 이어질 민족 전체 상태를 다루기 전에 이 두 손자들이 자기 자식들과 한 가지로 들어가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마치 지상에서 구름을 뚫고 하늘 위로 올리워진 사람처럼 말하기 시작합니다.
보통 일반 사람 신분으로서가 아니라 마치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말하듯이 선포합니다. 장차 오랫동안에 걸쳐서 이루어질 그들 모두 상태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먼저 지적할 점은 이미 그에게는 열세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자녀들의 숫자에 따라서 동일한 숫자의 민족, 내지는 동일한 부족을 눈앞에 설정(設定)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와 같은 행동을 통해서 야곱에게 주신 신앙의 황홀한 광채가 더욱 돋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로부터 그의 후손이 수많은 민족으로 불어날 것이라는 이야기를 수차에 걸쳐 들어왔었습니다. 그랬던 만큼 이 말씀은 야곱에게 있어서 마치 인간 의식으로는 깊이 감취어 있어서 안 보이는 것들까지도 꿰뚫어 보는 귀중한 거울과 같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야곱이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약속하신 일반적인 것에 대한 소망을 증거 하는 단순한 신앙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 수준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깊으신 뜻에 대한 해설가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내신 사신으로서 장차 이루어질 교회 상태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2)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성령께서 스스로 취하신 의도를 주목해야겠습니다.
(1) 첫째로, 야곱의 아들들에게 그들의 장차 운명이 제시되고 있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온 세상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렇지만 야곱의 예언이 집중하는 것은 그의 후손들이 다른 민족에 비해서 하나님의 권속의 지체로 선택받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 깨닫게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이 점에 대한 인식이 예나 지금이나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특별히 야곱의 예언에서 아름다운 술을 풍성하게 내는 포도밭 지역과 우유를 공급하는 훌륭한 초장이 유다 족에게 주실 것으로 약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이 얼핏 보기에 하찮은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이것을 통해서 자기 선택의 내용을 훌륭히 입증하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는 한 가정의 가장처럼 음식을 공급하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또 세목(細目)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들과의 성스러운 언약에 일치한 행동을 취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부성애와 그분이 자기 언약하신 백성에게 신실하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이보다 더 깊은 신비도 다시 찾아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2) 둘째로, 주께로부터 약속된 기업에 대한 소망이 다시 그들에게 새롭게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마치 그들에게 직접 자기 손으로 그 땅을 쥐어주는 것과 같이 그들 각자에게 속할 땅의 성질을 실제 그들 눈앞에 있는 것 마냥 자상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심각한 문제에 대한 확증이 건전하고 분별력 있는 신자들에게 하찮은 것으로 보일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이란 하나님의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인 만큼 그들에게는 특별한 은혜를 입은 자들이요, 하나님께서 이미 구별 되이 모으시는 자들이요, 이들이 받은 은혜만큼이나 분별력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에서는 성도요, 나그네로 사는 자들입니다.
주께서 주시는 부가적인 은사를 따라 주의 뜻을 전하는 자로, 혹 권하는 자로, 혹 봉사하는 자로 사는 자들입니다.
3) 하지만 야곱의 예언에서 주된 의도는 그들 중 누구에게서 그들에게 지극히 큰복(至福)을 가져올 왕이 나타날 것인가 하는 점을 꼬집어 지적하는데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그는 복 받은 후손에 대해서 희미하게 약속되었던 점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너무도 심오한 것이라서 재능 있는 자들이 이것을 간단히 살펴보기만 해도 경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결코 흔하지 않은 이 점을 여기서 꼬집어서 말한다면 그것은 제멋대로 모세의 신뢰성을 훼손하는 속되고 더러운 사람들의 말문이 막히게 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더 이상 야곱이 하늘의 감동을 받아 말하지 않았다는 소리를 감히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설령 모세가 여기서 야곱이 전에 예언한 일이 없는 내용을 다만 야곱의 입에 넣어 이야기하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모세는 실제로 수 백년 후에야 일어났던 일을 어떻게 내다 볼 수 있었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말하자면 다윗 왕국에 관한 예언 같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8절-12절과 22절-26절까지가 그렇습니다. 유다와 요셉을 이스라엘을 이끌 쌍두마차와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땅을 제비뽑아 분배하도록 명령하신 것은 여호수아가 그것을 계약과 자기 스승 모세의 지시에 따라서 지파들 간에 그것을 분배했다는 의구심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땅을 차지하고 그 땅을 분할 받은 것은 사람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해변 근처 지역이 스불론 지파에게 돌아가고 풍요한 평야가 아셀 지파에게 돌아가며 나머지 지파에게도 모두 여기에 기록된 대로 돌아간 것은 여호와께서 자기 말씀을 그 결과에 비추어서 인준하려고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오래 전에 일어날 것으로 말씀하지 않으신 것은 그 어느 것도 우연히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공공연하게 보여 주시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4) 다시 야곱이 아직 요원한 장래 사건에 대해서 성령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는 내용에 대한 모세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십시다. 그러나 혹자는 개같이 미친 나머지 모세는 이름 없는 오두막집에서 200년 전에 있었던 대화를 어떻게 알 수 있었단 말인가 하고 캐묻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마치 훌륭한 측량기사처럼 각 부족에게 할당하는 가나안 땅에 대한 지식은 어디서 얻었겠는가 하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늘로부터 나온 지식이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못된 이들은 항상 야곱이 예언했던 내용이 모세에게 신령하게 계시되었다는 점을 부정하려드는 것입니다. 더욱이 거룩한 조상들이 전통을 통해서 내려 준다는 많은 내용들 가운데 이것은 당시 일반적으로 다들 알고 있는 내용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심히 압제를 받을 때 백성들이 그들의 구원자인 하나님에게 도움을 간청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전에 주어진 약속에 대한 얘기만 듣고도 그들의 마음이 좋은 소망을 지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양자 삼으심에 대한 기억이 당시에 아직 제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당시 백성들이 여호와의 언약을 일반적으로 알고 있었다면 하나님의 신령한 종들이 약속된 기업에 대한 사실을 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는 명확한 사실입니다. 이런 점을 부정하는 것은 참으로 뻔뻔스러운 일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마치 허공에 숨을 내쉬는 식으로 야곱이 죽은 뒤에 갑자기 없어질 말씀을 그의 입을 통해서 발설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많은 세기에 공통적인 교훈을 전해 주신 것은 그의 후손이 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이 땅의 세습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하시려는 뜻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구속의 원천이 무엇이며 누구이신 가를 알도록 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모세가 그의 백성을 구원하라는 소명을 받았을 때 수줍어하며 마지못해 임무를 맡은 것은 자기가 상대해야 할 쪽이 고집불통이요 사악한 민족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자기 소명을 입증하는 신임장을 받아 가지고 나타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아무도 자기가 제멋대로 이 임무를 맡은 것으로 상상치 못하도록 하는 뜻에서 마치 하나님의 거룩한 하늘 등기소에 있는 공문서와 같은 이 예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2. 본문 2절은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비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입니다
1) 야곱은 먼저 그들의 관심을 불러모으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관심에 대한 대변입니다. 그가 이 문제를 신중하게 시작하며 스스로 선지자의 임무를 주장하는 것은 자기가 결코 사사로운 자기 집안 사정을 두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되면 제 때에 사건화 되기까지 자기에게 보관되고 있는 이 언약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을 자식들에게 가르쳐 주려는 뜻에서입니다.
야곱은 그들에게 단순히 자기 소원을 경청해 달라는 당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엄숙한 의식을 통해서 집회를 여는 가운데 그들이 그들에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어날 것을 듣게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경험했던 애굽의 유랑(流浪)에 반대되는 미래시계를 여기서 사용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초조한 가운데 저 약속된 상태를 바라보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앞에 이야기한 점으로부터 살펴 볼찌라도 이 예언에는 애굽 출발로부터 그리스도의 통치까지의 전 기간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우리는 쉽게 추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이 모든 사건을 나열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가 간략하게 다루고 있는 사건의 요약 속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 전까지의 확정된 순서가 정리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2) 이렇게 야곱이 자기 후손을 향한 예언 속에 하나님의 모든 뜻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그 예언 속에는 하나님의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 있습니다.
야곱의 예언에는 약속된 기업에 대한 소망이 나타나 있습니다.
거기에는 피조계 전체보다 크신 분으로서 그리스도가 선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주이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창조의 전체 소식과 구속의 전 과정을 듣는 일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모으시는 것과 그분이 뜻하신 바를 듣는 것이 복인 것으로 말씀되고 있습니다. 또 계시록에 계시된 말씀처럼 듣는 것을 믿고 그 믿는 바를 전하며 지켜 행하는 일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요 복인 것입니다.
창 49: 3-6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모세는 야곱이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에 대하여 예언한 사실을 기록합니다.
1. 본문 3절은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입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에 있어서 본래 장자의 의미, 혹은 장자의 역할 등이 먼저 제시되고 있습니다. 야곱이 장자로 시작하는 것은 그의 명예를 생각하고 서열을 확정지으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철저한 수치를 드러내어 공정한 비난을 통해서 그를 낮추려는 뜻입니다.
여기서 르우벤이 자기 장자권을 빼앗기는 것은 그가 서모의 근친상간을 통해서 부친의 침상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한 그 말 뜻은 '너는 사실 장자요, 나의 힘이요, 나의 남자다움의 시작인 만큼 모든 면에서 뛰어나야 옳았지만 물과 같이 흘러 내어 버리고 말았으니 이제 아무것도 네 것이라고 자랑할 만한 것이 없게 되었구나. 네가 강건한 날부터 네가 네 어미로부터 출생할 때 받은 위엄이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하는 식입니다.
(온-)이라는 명사를 '씨앗'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슬픔'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장자에게 속하는 위엄을 계속해서 나열하고 있는 만큼 여기서는 자기 남성다움(manhood) 의 시작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어느 면에서 남자들은 자식을 통해서 다시 사는 셈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장자를 가리켜 '기력의 시작' 으로 부르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르우벤이 자기 잘못으로 그의 위엄과 힘을 빼앗기기 전에는 그것이 탁월했다는 이야기도 같은 의미입니다.
야곱이 르우벤에게 그의 이전 영광을 제시하는 것은 그가 무엇 때문에 뒤쳐지고 있는가 하는 점을 철저히 깨닫는 것이 그에게 유익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이 스스로를 더럽힌 죄악을 제시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수치를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고전6:5).
사실 우리는 자신들의 죄악에 대해서는 이러쿵 저러쿵 스스로에게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타락한 뒤에 자기 사악성을 깨닫지 않을 경우 건전한 마음으로 되돌아 오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들과 우리가 우리 잘못으로 스스로에게 가져오는 형벌들을 대조하는 것만큼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아담이 모든 혜택을 박탈당하고 나자 하나님께서는 '보라 이 사람이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라는 말씀으로서 그를 신랄하게 꾸짖습니다.
거기에는 일종의 조소하는 내용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아담 자신이 본래 하나님이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며 수많은 탁월한 은사를 부여받고 있던 최근 모습과 얼마나 거리가 먼가 하는 점을 반성하고 머리를 숙여 엎드리는 가운데 자기 현재 상태를 탄식하도록 하려는 뜻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의 진노하심을 통해서 제 정신을 차리게 되는데, 이렇게 정신을 차리는데 있어서 징계가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는 점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계에는 반드시 효과가 있습니다.
흔히 있는 일이지만 우리가 형벌을 당할 경우에 먼저 그 원인인 죄악을 불쾌하게 여깁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 속에 거하는 하나님의 은사들이 우리 경솔 때문에 없어지지 않도록 더욱 더 경계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위광이 초등함' 과 '권능이 탁월함' 이란 말씀은 르우벤이 자기 본래 지위를 고수했더라면 모든 탁월성이 그에게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2. 본문 4절은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입니다.
1) 여기서는 그의 정욕이 조절되고 억제되지 못한 범죄에 오름에 비견하여 그의 위엄과 직위에서 끌어내려진 사실이 예언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어떠한 영예에 그것을 지킬만한 선한 양심이 따르지 않을 경우 그것은 확고하지 못하고 물거품과 같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야곱은 르우벤으로부터 장자 신분을 빼앗고 있습니다.
야곱이 그 원인을 여기서 밝혀 주는 것은 르우벤이 무고한 자기를 처벌한다는 식으로 불평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그의 처벌이 무익하게 되지 않도록 하려면 자기 잘못을 확신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2) 우리가 여기서 보는 대로 야곱은 육적인 애정을 제쳐놓고 용감하고 자신만만하게 선지자 임무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 심판은 아버지가 자식에게 사적(私的)으로 앙갚음을 하는 그러한 분노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성령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받아서 그대로 증거하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야곱이 자신에게 부과된 짐을 충분히 마음에 새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 맨 마지막에 나오는 (알락흐) 라는 단어에는 하늘로 올라가 없어지는 연기처럼 떠나다, 또는 분산되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르우벤의 탁월성은 부친 침상을 더럽힌 시간부터 사라지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3. 본문 5-6절은
"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 하는 기계로다
⑥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입니다.
1) 야곱께서는 시므온과 레위가 저지른 세겜 성 학살 사건을 저주하면서 그처럼 무시무시한 범죄에 대한 처벌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인간의 피가 하나님 앞에 그처럼 귀중하다는 것을 보아 잔인성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 두 인간들이 이미 처벌을 피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자기 법정으로 이 두 사람을 소환해서 그들에게 재앙을 요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오래 전에 그들에게 사죄가 허용되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미 용서하셨다면, 왜 그들에게 다시 처벌을 하시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이미 용서를 받았다 하더라도 이 학살사건이 처벌을 받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은 꼭 필요했습니다.
① 그것은 그들 자신에게 있어서 개인적으로 유익했습니다.
② 그것 뿐 만이 아니라 하나의 귀감으로서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앞에서 그들이 부친에게서 권고를 받을 때 보았듯이, 그들은 참 회개의 시작이 되는 슬픔과는 얼마나 거리가 멀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후로 그들은 더욱 더 야수적인 무감각에 취한 나머지 그들의 사악한 행위를 계속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그들의 죄악에 대해서 비통하게 슬퍼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두려운 것은 후손들이 그 행동에 대해서 신령한 방법으로 혼이 나지 않을 경우에 동일한 야만적인 행위에 길이 들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① 그들을 겸손하게 만들고 ② 그들을 만대(萬代)의 귀감으로 삼는 뜻에서 그들에게 영원히 수치스러운 처벌을 부과하셨습니다.
참으로 그분께서는 장래를 위해 적합한 교정책을 시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와 맞먹는 처벌을 꼭 받아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마음으로부터 위선을 제거하십니다. 그리고 선택받은 자들로 하여금 세상 유혹을 점차 벗어버리게 하십니다. 그러는 가운데 회개에 이르게 하십니다.
또 그들에게 경성 하는 가운데서 간구 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경외심이라는 재갈을 통해서 그들을 억제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익을 위하여 그러한 처벌을 받아 내고자 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받아 마땅한 처벌이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바 속죄행위를 통해서 속량 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망측한 것도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 양식에 따라 빚이 자신에게 갚아지기를 원하신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처벌에 대한 무상의 사면(赦免)과 이미 저질러진 악을 그대로 계속 따르기보다는 장차 악을 예방하는 회초리의 징계 사이에는 더없이 적절한 조화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2) 다시 시므온과 레위 이야기로 돌아가십시다.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뒤로 미루셨던 처벌을 부과하시면서 그들을 마치 도망병처럼 심판대 앞에 끌어내시는 것은 처벌하지 않고 지나치는 것이 본인들에게 해로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심판관의 자세보다는 '고치려' 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일차적으로는 매를 '아끼지 않는' 부친의 자세를 가지십니다.
그리고 또 한편 자기 처방과 전 열정으로 치료하시는 선하신 의사의 자세를 취하십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은 병들어 있는 두 환자를 고칠 뿐 아니라, 또 한편은 해독제를 써서 다른 사람들에게 병이 옮아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함으로써 예방책을 쓰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타인들이 잔인성을 경계하도록 하는 의사(醫師)의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3) 여기서 또 자기 백성의 수치를 광고하는 모세의 행동은 하나님 사자의 자세입니다.
모세는 온 인류에게 공통적인 수치를 여기서 크게 외치고 있을 뿐 아니라 자기 부족(部族)을 수치로 낙인찍고 있습니다.
여기서 명백한 점은 모세가 자기 혈육에 특별한 배려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무슨 총애나 증오심에 이끌려 역사적 신뢰성에 어긋나는 일을 하거나 무엇 하나에 거짓 색채를 가하기보다는 여호와의 선택받은 사역자와 증인답게 하나님의 진리를 진지하고 자신 있게 선포하는 자기 소명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야곱의 아들들에 대한 개인적인 비교 뿐 아니라 거기서 파생된 부족(部族)들에 대한 비교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 기회야말로 모세로서는 자기 부족(部族)의 고귀성을 변호할 절호의 계기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들에게 찬사를 늘어놓기는커녕 솔직하게 자기 전체 가문에게 반복해서 들려질 영원한 수치로 자기 부족장을 낙인찍고 있습니다.
모세의 가르침을 물고늘어지며 우짖는 개 같은 루시안 주의자들은 모세가 자기 스스로 조야(粗野)한 평민에 대한 지휘권을 획득하려 했던 허영된 사람이었다는 식으로 떠들어댑니다.
이것이 모세의 계획이었다면 모세는 자기 가문에 대해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는가? 입니다. 야망 있는 사람이라면 최 상좌에 놓았을 이 아들들을 모세는 제사장직 영예에서 제쳐놓고 그들에게 천한 임무를 부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몰지각한 중상모략이 인간의 현명한 처사가 아니라 신령한 경륜에 의해서 미연에 방지되고 있으며 이 위대하고 탁월한 사람의 후손들이 영예를 박탈당하는 것은 그에게 아무런 음험한 의심이 달라 붙지 못하게 하려는 뜻에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후손들 이야기는 제쳐 두더라도 우리는 레위라는 인물을 통해서 자기 온 족속(族屬)들을 견만하는 그의 행동은 단순히 인간으로서의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에 따라서 아무런 사심이 없이 말하는 사자(使者 : angel)로서의 행동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죄악이라는 횡포의 활이 그들의 장막에 있다는 것이요, 따라서 모세는 자기 혀와 마음으로 자기가 그들의 흉계를 가증스러운 것으로 여긴다는 점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복수심에 불탄 나머지 한 도시와 그곳 주민들을 없애 버렸기 때문입니다.
4) 이제 말씀을 종합하여 적용하고 마치겠습니다.
(1) 르우벤에게 있었던 장자의 위엄은 그의 범죄로 인하여 그 탁월성이 유지되지 못하고 소멸되었던 것으로 예언되었습니다.
이것은 일개인에 대한 인간 개인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신 평가입니다.
여기서는 일반적인 음란이나 근친상간이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힌 정도라기 보다는 선지자를 모독하고 하나님 자신을 모독하는 죄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면 야곱의 자손, 곧 교회에서 끊쳐질 범죄라는 사실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2) 시므온과 레위 형제의 잔혹성도 정죄되고 처벌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하나님 자신의 심판대 앞으로 끌어 내시면서도 매질하시는 부성애와 치료하시는 의사로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야곱의 자손들, 곧 당시 교회원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라"는 것이요, 또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입니다.
그들의 분노와 그들의 혈기에 그들의 잔인성에 동참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3)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같이 말씀 하시는 것은, 야곱의 후손들에게 지금 가야 할 교회 갱신의 길임과 동시에 미래에 계속 되어질 "교회 갱신의 길" 을 보이신 것입니다.
교회는 언제, 어느 때든지 주의 성령께서 하신 평가, 곧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은 우리로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긍휼히 여기시길 원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교회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부성애를 나타내실 것입니다.
치료하시는 의사로 계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해 계시고 역사 하실 때 건실하고 아름다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창 49: 7-9
그 노염이 혹독하니
모세는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 대하여, 유다에 대하여 예언한 내용중 한 부분을 기록합니다
1. 본문 7절 상반은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입니다.
여기서는 앞에서 지적한 점, 곧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모든 악한 흉계를 멀리하라는 권고를 받고 있습니다. 이어서 야곱은 그들의 격정에 대해서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 역시 스스로 자제하는 법을 배워 그런 포악에 대해 경계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든 죄악과 접촉을 멀리하지 않는 한 우리 손만 깨끗하게 보관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우리가 부당한 횡포를 항상 자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것을 은폐하는 것은 동의와 가깝기 때문에 죄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건전한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것은 혈연지간이든 그 무엇이든 마음에서 제해 버려야겠습니다.
우리가 보는 대로 이 거룩한 조상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친자식에게 마저 무자비하게 날벼락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가 시므온과 레위의 분노가 더욱 더 가증스러운 것으로 선언하는 것은 그것이 시초부터 포악했을 뿐 아니라 끝에 가서도 달랠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 절의 간단한 문맥 속에 그 내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노염이 처음부터 맹열하였는데 그 분기가 계속 맹렬하여 사그러질 줄 몰랐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중적 저주가 내려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악한 흉계를 의논하여 모으고 부풀린 데서 시작됐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초부터 경계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 분노를 달래고 조절하며 삭혀야 하고, 하나님께만 있고 그 분만이 주시는 다른 선한 것으로 바꾸어서 채워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한가지 분명한 것은 선한 것이 우리에게서 자생될 수 없음으로 늘상 주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2. 본문 7절 하반은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입니다.
1) 야곱이 자기 자식들을 교회의 족장들로 지명하고 그들을 신령한 언약 상속자들로 부르는 마당에 그들에게 복이 아니라 저주를 선언하는 것이 이상한 절차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본체인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는 말씀은 확실히 저주이고 심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저주하시고 심판하시는 중에도 선하신 뜻을 두시고 그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로서는 먼저 징계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제시하는 길을 준비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것은 본 장 마지막 부분에서 엿볼 수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교회에 영광스러운 이름을 허용하시며 그들의 권리를 손상치 않고 그대로 남겨두심으로써 이 처벌을 완화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2) 레위의 처벌에 해당하는 것이 바뀌어 제사장직이라는 보상으로 나타나는 거기서 하나님의 신비한 선하심이 뜻하지 않게 불쑥 제시된 셈입니다.
레위 지파의 분산은 그들의 조상의 죄악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사악하고 불법적인 복수심을 두고 자만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태초에 흑암에서 빛을 이끌어 내신 하나님께서는 레위인들이 온 민족 사이에 분산되어야 할 또 다른 이유를 그것도 전혀 수치와 무관할 뿐 아니라 아주 고귀한 이유를 발견하셨는데 그것은 그 땅의 어느 구석이든 유능한 교사가 부족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기 이름으로 온 땅의 방방곡곡의 주관자와 지도자로 삼고 있는데 이것은 그분께서 영원한 구원의 씨앗을 방방곡곡에 뿌리거나 자기 은혜의 일군들을 내보내시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레위가 당장 자기 죄에 대한 처벌을 받지 않고 지나침으로써 결국 멸망하도록 내버림을 받기보다는 그때 처벌을 받는 것이 얼마나 그에게 유익한 것이었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땅을 분배하고 서로 떨어져 있는 레위인들에게 성읍이 주어질 때 이 이유는 제지되고 전혀 다른 이유 곧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라는 점이 제시되었다 해서 우리는 이것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흑암에서 빛을 끌어내시는 것은 기적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 타버린 잿더미 속에서 보석들이 발견된 경우와 같습니다.
물론 레위가 먼 곳으로 망명하도록 저주를 받았다면 그는 그 처벌을 달게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레위가 부친의 기업 속에서 유랑 생활을 하도록 정하심으로써 처벌을 완화하신 것입니다.
후에 수치의 표적이 제거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후손을 탁월한 사신 자격으로 각각 다른 곳으로 파송하고 있습니다.
3) 시므온에게는 비록 희미하나마 어느 정도 저주의 흔적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은 제비(lot)를 통해서 그의 자식들에게 분명히 다른 영토가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유다의 부족과 함께 섞여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호수아서 19장 1절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입니다.
후에 그들은 세일 산에 올라가 아말렉 족속을 추방하고 그들의 땅을 차지했는데, 이것은 역대기상 4장 40-43절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입니다.
4) 여기서 우리는 야곱이 비록 낮고 천한 모습으로 자신의 침상에 다 늙어 빠진 늙은이와 망명객으로 앉아 있지만 마치 위대한 임금의 높은 보좌에서 호령하는 자처럼, 자식들에게 영토을 할당하는 이 거룩한 야곱의 용맹성과 기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이 자기에게 위탁되었으며 그것에 따라서 그 땅 상속자와 주인으로 부름 받았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권리에 따라서 이 일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선지자로서의 권위를 스스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 말씀이 우리 귀에 울려 퍼질때 선포된 내용을 신앙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곧 하나님의 일군들이 그것을 선포하도록 명령을 받고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에게도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렘1:10).
그리고 일반적으로 선지자들은 모두 그들이 위협하는 민족들에 대해 마치 그들에게 공격을 개시할 큰 군대가 제공되어 있는 것처럼 그 민족들에게 대항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3. 본문 8절 초두의 말씀은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입니다.
'찬송'이라는 단어에는 유다의 이름에 대한 암시가 들어 있습니다.
모친이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은 그의 출생으로 하나님께 찬송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부친은 그의 이름이 형제들 가운데서 어찌나 뛰어나고 칭송을 받던지 그가 장자와 마찬가지로 그들 모두로부터 영광을 받을 것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새 어원을 덧붙입니다.
야곱이 바로 앞에서 요셉에게 할당했던 '두 몫'은 사실 장자권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왕국'이 유다 지파에게 양도되었던 만큼 야곱이 그의 이름이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요셉의 영광은 잠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취급되고 있는 것은 안정되고 지속적인 왕국으로서 이것은 유다의 자식들의 권위 아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 사회에서 완전한 정부 형태를 세우시고자 하실 때 택한 것이 군주제도였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시대에 왕을 임명하는 일은 인간의 의지와 신령한 경륜이 반반씩 작용해서 된 일이었지만 이 신인(神人) 합동이 불길한 군주정치 시작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백성들이 제때가 오기도 전에 법석을 부리며 왕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 왕국이 즉각 유다 지파 안에서 세워지지 않고 돌연변이 자손처럼 사울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나타난 것은 그들의 당찮은 성급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올바른 순서에 따라서 유다 지파의 탁월성이 다윗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마침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4. 본문 8절 후반은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입니다.
이것은 유다에게 원수가 없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괴롭히고 그에게서 권리를 박탈하려 하겠지만 그가 승리할 것이라는 점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다윗 자손들이 항상 원수들을 상대로 우세할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의 배은망덕 때문에 하나님 은혜의 한결같고 동일한 진노가 방해를 받은 적도 있습니다 유다 지파에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그의 말씀에 기초한 왕좌가 서 있었다는 점에서 최소한 유다가 우월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북쪽 이스라엘 왕국이 재물과 거민에 있어서 더욱 더 흥황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애호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원래부터 엉터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설령 거기에 금박이가 휘황찬란하게 달라 붙어 있다 해도 유다 지파에게 새겨진 하나님의 선택의 영광을 흐리게 하는 것도 옳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다윗 시대에 이르러서 이 예언의 의미와 효과가 실제로 명백하게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솔로몬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솔로몬 후에 그 왕국이 동강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경이적으로 존속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손길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삽시간에도 수 백 번 무너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유다 자손들은 그들 멍에를 그들의 원수들에게 부과시키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자식들에게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열 지파가 갈라져 나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적법한 정부가 소란을 받고 무법한 혼란이 들어오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유다 지파에게 다스리는 권리를 부여하는 하나님의 경륜을 파괴할 수는 없었습니다.
5. 본문 9절은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는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입니다.
1) 이 비유는 유다가 자기 원수들에게 상당한 부담이 될것이라는 앞문장에 대한 확증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백성들 대다수가 여로보암에게 반기를 들 때 일어났던 감퇴현상을 두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때부터 유다의 왕은 잠자는 사자와 같이 곧 더 이상 그의 머리털을 흔들어 원근각처를 멀게 하지 않고 그냥 자기 굴속에 갇혀 있는 사자와 같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무감각 상태 밑에는 하나님의 은밀한 능력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제 마무리 강렬하게 그의 파멸을 바라고 제 아무리 그에게 해를 끼칠 능력이 있는 자라도 감히 그를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최상의 권리를 모든 형제를 제쳐놓고 유다에게만 양도한 다음에 여기서 교정 형식으로 비록 그의 능력이 감퇴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는 계속 마치 잠자는 굴 속의 사자처럼 그의 원수들에게 공포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2) 이제 말씀을 요약하고 적용함으로 마치겠습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을 등져버린 의논과 흉계에서 나온 엄혹성과 자기 분노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저주와 심판을 받는가? 를 봅니다.
시므온과 레위의 일에서 이런 죄가 시초부터 경계되고 있다는 사실을 봅니다.
그런 죄가 부풀리고 다져지면서 계속되는 것이 얼마나 지독한 범죄인가? 를 봅니다.
그런 것이 시작되었을지라도 깨닫고 멈추어야 한다는 것이요, 회개하고 바른 길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2) 그러나 레위의 경우에 그 징벌과 저주 중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인하여 그들 중에 제사장과 교사를 두셔서 쓰심으로 흑암에서 빛을 끌어내시고 잿더미 속에서 보석이 빛나게 하시는 경우를 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심이요, 악을 선으로 나타나게 하시는 경우입니다.
(3) 유다의 경우는 스스로의 힘이나 무장으로 나서는 일이 없을지라도 그를 이스라엘 중에 높이시고 그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왕좌가 설 것으로 예언되고 있습니다.
그 자파의 왕권에 하나님의 은밀하신 권능이 함께 하신 때문입니다.
그 지파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메시야가 기대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