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별은 공동체를 지키는 지혜입니다.
성경본문 : 느헤미야 13: 1-3
1. 그 날에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그 책에 기록하기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영히 하나님의 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2. 이는 저희가 양식과 물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
3.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서 몰수히 분리케 하였느니라
=====================================================================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 가운데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구소련의 수상이었던 어떤 분의 딸이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결국 소련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미국 생활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수많은 선택을 하며 사는 게 가장 어려웠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삶은 매 순간의 작은 선택을 통해서 이어져 갑니다.
오늘 여러분의 모습은 과거의 선택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고, 또 여러분의 선택을 통해서 여러분의 미래가 열릴 것입니다. 그런데 선택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 속에 어떻게 하면 바른 선택을 할 것인가, 어떻게 유익한 선택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를 동시에 충족할 수 있는 선택을 바라는 욕구 때문에 늘 어려운 것입니다.
선택이 이렇게 쉽지 않기 때문에 선택에 관한 한 누구에게나 상처도 있고 추억도 있습니다. ‘아, 그때 내가 바른 선택을 했기 때문에 오늘 내 삶이 아름답게 되었구나.’하는 부분도 있지만, 어떤 경우는 ‘그때 내가 잘못 선택해서 내 삶이 어려움을 겪고 있구나.’하는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많은 사람들은 서슴지 않고 비전과 분별력을 꼽습니다. 올바른 선택을 뒷받침해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분별력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분별할 줄 아는 능력이 지도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자기 개인의 삶이나 환경을 어떻게 분별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선택하기 때문에 바른 분별을 하는 사람은 결국 바르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개인을 위한 분별도 힘든데, 공동체를 위해 분별한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입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지도자를 선택했는가, 지도자를 선택할 때 제대로 분별했는가, 또 뽑힌 지도자들이 현실을 바르게 분별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어릴 때만 해도 스위스는 시계 강국이었습니다. 스위스 시계가 가장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스위스 시계가 가장 좋지는 않습니다. 그냥 좋은 시계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났던 스위스의 시계산업을 망하게 한 사람은 바로 스위스 사람이라고 합니다. 스위스의 어떤 사람이 새로운 시계를 발명해서 시계 업계에 얘기했는데, 시계 업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태엽으로 감는 시계가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부를 거둬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좋은 시계는 나올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바로 디지털 시계였습니다. 이 새로운 디지털시계를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시계를 발명한 사람은 기술을 다른 나라에 넘겼습니다. 스위스 시계업자들은 태엽 시계에 대한 믿음과 지금까지의 경험 때문에 사람들이 점점 실용적이고 간편한 것을 좇아가는 시대 흐름과 디지털이 생활 패턴에 미칠 영향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뒤쳐져 버리는 쓰라린 결과를 안게 되었습니다.
분별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시대와 개인의 상황을 분별하고 선택하는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앞두고 있습니까? 여러분 가운데에는 평생 살아갈 형제와 자매를 선택하고 직업을 선택해야 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또 삶의 철학과 삶의 방향을 선택하는 시점에 서있다면 무엇보다 지혜로운 분별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특별히 여러분이 앞으로 지도자가 될 계획이 있다면 분별력에 대한 훈련과 연습은 필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오늘 우리는 느헤미야의 마지막 장에 이르렀습니다.
느헤미야 12장을 보면, 이스라엘 공동체가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1백60연간이나 황폐했던 이스라엘 성에 성벽이 세워지고, 새로운 가치관이 자리 잡으면서 희망에 찬 노래가 울려 퍼지고 많은 사람들이 소망 공동체로 거듭나는 놀라운 변화들이 12장에 계속해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12년간 무겁고 힘든 사명을 감당했던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에게로 돌아갑니다. 이 공동체가 이제는 달라지고 새로워질 거라는 기쁜 마음과 희망을 안고 돌아가지만, 13장에 와서는 새로워지기 보다는 변질돼 있음을 알게 됩니다. 어느새 행복을 위한 가치관과 원리는 상실하고, 옛날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패망과 분열, 다툼의 조짐이 뿌리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는 창립한 지 46년이 되었습니다. 아마 주변의 함께 시작한 교회보다 더 많이 성장했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하면 앞으로도 크게 성장할 것이라는 사고방식이 다수입니다. 그러나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읽지 못한다면 이제껏 이룬 성장이 오히려 우리를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 교회와 개인의 삶 속에서 이 시대를 어떻게 분별하고 또 무엇을 선택해야 합니까? 특별히 청년으로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이 공동체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이어갈 수 있는 비결, 받은 축복을 축복으로 간직할 수 있는 삶의 원리, 새롭게 회복할 것들은 무엇이 있는지를 느헤미야를 통해 발견하기 바랍니다.
느헤미야에게서 볼 수 있는 리더로서의 중요한 특징은 분석력입니다. 찰스 스윈돌 목사님은 리더로서 느헤미야의 탁월성에 대해 분석력이 뛰어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정직하게 현실을 파악하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분석하는 뛰어난 분석력이 있었습니다. 그건 자신이 경건하고 용기 있게 살기를 원하는 결단에서 나온 것입니다. 일단 분석이 되면 느헤미야는 헌신적이고 열정적으로 일을 추진했습니다.
오늘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에게로 돌아갔다가 얼마의 기간이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다시 돌아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분석했습니다. 백성들의 문제와 문제의 원인을 느헤미야가 어떻게 분석하고 분별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서 오늘 우리 삶을 되돌아보기를 바랍니다.
느헤미야는
첫째, 하나님 말씀을 들려줌으로써 백성들이 공동체의 행복을 지키는 지혜를 스스로 깨닫게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권위를 가지고 백성들에게 나가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을 가지고 나가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지금까지 이끌어 성을 다시 쌓을 정도로 힘이 있었습니다. 본래 총독이니까 지위로 얻는 권위가 있었지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 “그 날에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특별한 철학 없이 마음대로 사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 저나 여러분들 모두는 나름대로 삶의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공동체가 되기 위한 기준을 느헤미야를 통해서 다시 회복했습니다. 우리가 선택한 삶의 기준은 생활에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바뀌게 되어있습니다. 흔들리고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새 신자 한 분을 만났는데, 연세가 많은 할머니십니다. 할머니께서 “옛날에 전 교회 잘 나왔어요. 그런데 그동안 방학했지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왜 교회 안 나오셨어요?” 그랬더니 먹고살기가 바빠서 못 나왔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참 멋쟁이 이십니다. 나름대로 멋있게 살려고 노력한 할머니인데 얼굴에는 삶의 피곤이 있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살았고, 자신이 목적한 것도 이루었지만 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쓸쓸함과 외로움, 회복할 수 없는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제각각 목표가 있을 겁니다. 지금이야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살다보면 어느새 정말 중요한 것을 놓쳐 버릴 수 있습니다. 정작 해야 될 일을 하지 못하고 사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이렇게 살려고 한 게 아닌데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헛살았네요.” 라고 말하는 어른들이 참 많습니다. “돈이 되는 일이면 저는 뭐든지 다 했습니다.” 라는 말 속에 비굴하고 의미 없게 살았던 인생에 대한 아픔과 허무함이 들어 있습니다. “그때는 이것이 옳았어요. 양파 껍질 벗기듯이 옳다고 생각해서 좇아가서 껍질을 벗기니까 아니에요. 또 벗기니까 아니에요.”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너무 많은 기운과 정력, 시간과 물질을 써 버린 후입니다. 더 무엇을 시작할 힘조차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어떻게 해볼 힘도 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여러 어려움과 문제 때문에 그동안 세워두었던 믿음이 다 왜곡되는 모습을 보고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3절 말씀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들었다는 말은 귀가 아닌 가슴으로 듣고 영혼으로 깨달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 내 인생에 아무 원칙 없이 너무 내 마음대로 살아왔구나.’하고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캐논’, 즉 ‘자’라는 의미가 있는데, 잣대를 통해 볼 때 ‘내가 너무 엉뚱한 데로 와 있구나. 내 기준이 말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구나. 이제는 내 삶을 고쳐야지.’하는 깨달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러자 진정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하나님 말씀이 들어가면 반드시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 어거스틴이 회심한 이야기를 잘 아실 겁니다. 어릴 때 예수님을 믿었지만 젊을 때 이방 종교에 빠져서 사생아도 낳았습니다. 철학을 공부하다 큰 고통 속에 있는데, 하루는 밖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중에 “펴서 읽어 봐.”라는 말이 들렸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 성경을 펴서 읽었습니다.
로마서 13장에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어거스틴이 말씀을 읽을 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인생의 기준이 되면서, 회개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설 수 있게 된 것은 말씀의 기준이 분명하게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시편 1편에서 정말 행복한 사람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젊을 때는 젊을 때의 열매를, 중년에는 중년의 열매를 그리고 부요할 때는 부요의 열매를, 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식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가난할 때는 가난할 때 맺어야 할 열매를 맺고, 병들었을 때는 병든 사람이 맺어야 될 열매, 여자면 여자로서 맺어야 될 열매를 맺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인생에 여러 굴곡이 있지만 복 있는 사람은 환경에 따라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들도 축복하고 하나님도 인정하시는 영향력 있는 인생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야로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의 기준을 가지고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인생을 복되게 사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섬기던 모세가 죽은 뒤에 후계자가 된 여호수아의 마음은 정말 참담했습니다. 아무리 봐도 자기는 후계자 자격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능력 있는 모세가 인도할 때도 불평하고 원망하며, 조금의 틈만 있으면 반역하고 지도자를 때려죽이려고도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백성들을 이끌었다가는 하루도 못 가서 맞아죽을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자기가 해야 될 일을 보니까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당장 요단강을 건너야 하고, 건너자마자 여리고성을 정복해야 합니다.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자기 능력으로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비서 역할만 했지 지도자로서 수업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워서 우울증에 빠져 버렸습니다.
여호수아 1장에 하나님께서 위기를 극복할 지혜를 알려주셨습니다.
‘여호수아야, 두려워 말라. 내가 내 종 모세에게 주었던 하나님 말씀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지켜 행하면 네 삶이 형통하고 어디를 가든지 승리하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을 보지 않았습니다. 환경도 보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지 보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만 의지했습니다. 그럴 때 어떤 어려움 중에서도 자기 사명을 다했던 여호수아를 보게 됩니다.
최근의 책 중에 여호수아의 리더십을 ‘사자의 리더십’이라고 명명한 책이 나왔습니다. 가장 나약했던 사람이 그토록 고되고 힘든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말씀을 따라 인생의 원칙을 세우고 말씀에 자신의 삶을 복종시켰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행복을 원하십니까?
아름다운 자매와 형제를 찾아다니십니까?
물질과 명예를 구하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구하기 전에 말씀을 먼저 찾으십시오.
말씀을 읽고, 말씀을 붙드십시오. 그러면 말씀이 여러분을 붙드시고 인도하실 겁니다. 발의 빛이 되어 한 발 한 발 내딛는 걸음이 실족치 않도록 비춰 줄 것입니다.
달라스 신학교에는 유명한 하워드 핸드릭슨이라는 교수가 있습니다. 교수님이 쓰신 책이 번역되어 있는데, 그에 따르면 말씀을 대하는 신자들은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먼저 피마자 기름형의 사람들입니다.
피마자 기름은 맛이 쓴 모양입니다. 말씀을 굉장히 쓴 약으로 생각합니다만, 버리지는 않는답니다. 왜냐하면 진짜 약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성경을 들춰보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버리지도 않고, 늘 끼고는 다닌답니다. 다만 위기와 어려움이 올 때 약으로만 쓰는 것입니다. 그때 성경을 들춰보고는 위기가 지나가면 다시 덮어둡니다. 가끔 약으로만 쓰는 유형, 피마자기름 형입니다.
그 다음은 현미밥 형입니다.
말씀이 좋다는 것은 아는데 밥맛을 모릅니다. 현미밥은 입에 들어가면 까칠까칠해서 단 맛이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냥 건강에 좋다니까 무조건 먹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다 읽어야 된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읽는데, 왜 읽는지, 무엇 때문에 읽는지, 성경 읽는 맛이 뭔지도 모르고 무조건 읽습니다. 이런 유형을 현미밥 형이라고 합니다.
마지막 유형은 딸기 아이스크림 형입니다.
맛을 경험했기 때문에 조금씩 맛보면서 계속 먹습니다. 말씀의 맛을 압니다. 그래서 자랑하듯 맛을 느껴가며 먹는 스타일의 사람이 딸기 아이스크림 형입니다.
예레미야는 역사적으로 가장 어두웠던 시대에 말씀으로 인해서 기쁨과 위로를 얻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행복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인생의 기준으로 삼고 말씀을 좇아 지키는 인생에게는 하나님께서 행복을 지킬 수 있는 원리를 주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공동체의 행복을 지키는 사람으로 세우십니다. 말씀, 바로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깨닫게 한 분별의 방법이고 분별의 지혜였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정말 행복하기를 원하고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 민족이 다시금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한다면 말씀을 회복하고 말씀의 기준을 다시 세우는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 때 여러분의 인생, 우리 교회와 민족이 회복되어 새 역사를 시작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느헤미야를 통해 알게 됩니다.
둘째 느헤미야는 영적인 교훈에서 분별의 지혜를 얻었습니다.
13장 2절 말씀 “이는 저희가 양식과 물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건 영적인 교훈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여기 모압과 암몬 자손들이 나오는데,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광야 생활할 때에 발락이라는 왕이 발람이라는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도록 만든 족속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저주하지 못하게 하니까 머리를 써서 모압과 암몬의 예쁜 여자들을 이용해 광야에 정착하고 있는 이스라엘 남자들을 간음하게 하고 혼음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모압과 암몬 족속은 이스라엘 백성 속에 있는 죄성을 타고 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죄를 짓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죄악된 요소를 가지고 있는 족속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과 암몬 족속의 악함을 역사 속에서 이미 경험한바 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와서 보니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이미 모압과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이들을 통해 태어난 아이들은 이스라엘의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말을 못하니까 성경을 배울 수 없었고 말씀의 영향력을 받을 수 없으니까 이방으로부터 영향을 받게 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로 세워질 수 없다는 걸 느헤미야가 발견합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적 교훈을 통해 정말 하나님 안에 있는지, 아니면 세상 안에 있는지를 분별하라고 지시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환경적인 동물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구의 말을 듣느냐에 따라 사물을 보는 각도와 이해하는 감정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내가 세속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의 영향을 받는 자리에 있고, 그런 사람과 사귀고 있다면 거기서 나를 분리해 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의 사람, 하나님 앞에 구별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축복을 가져오는 사람으로 세움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아셔야 됩니다. 매일 성적이고 폭력적인 영화를 보는데 어떻게 자매와 형제를 순수하게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뒤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쉽지 않습니다. 굉장한 아픔입니다. 그렇지만 일단 분리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부터의 분리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분리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제자들과 나누며 시간을 보내는 한편 혼자만의 시간을 절대적으로 비워서 하나님과 교제했습니다. 동시에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전도하고 섬겨야 될 세리와 창기들, 그리고 병자들과 시간을 가지며 전도하고, 가르치고 치료의 역사를 베풉니다. 그리고 다시 제자 공동체 속에서 제자들과 교제하며 탈진된 자신의 삶을 추슬렀습니다.
영성 운동을 하는 미국 공동체 중에 아주 최첨단에서 사회 운동을 하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이들은 일정한 시간을 떼어 사회봉사에 참여하던 그 사람들을 다시 공동체 속에 집어넣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우리가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 세리와 창기와 함께 거하면 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 동화되게 돼 있습니다. 그게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공동체 속에서 재충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변화시킨 뒤에 다시 사회 봉사하도록 합니다. 사회 운동을 하는 사람일수록 영성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 생활을 철저히 하지 않으면 넘어지게 돼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 생활을 위해서 여러분의 삶을 점검해 보십시오.
복음의 능력을 약화시키며 내가 영향을 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잠시 떨어지십시오. 영적으로 새롭게 된 다음 그들을 찾아가 복음의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진지하게 여러분의 삶이 어디에 와 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복음 안에서 복음의 영향을 받고 있는지 아니면 세상의 병든 가치관과 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는지 분별하십시오. 그럴 때 공동체를 아름답게 가꿀 사명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지혜를 간직하게 됩니다. 그러한 결단과 선택이 이 시간에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남아 있는 미래만큼이나 우리 민족과 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을 귀하다고 하는 이유는 여러분 자체가 귀해서라기보다 여러분에게 있는 젊음이 그만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젊음을 어떻게 사용할까 하는 결단이 없다면 지금 여러분이 가장 비난하는 기성세대로 조만간 접어들게 될 것입니다. 지금 분리의 결단과 돌아섬이 없다면 그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렇게 왔다가 저렇게 가는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셋째, 느헤미야는 우선순위를 세워 분별의 지혜를 얻었습니다.
본문 4절 이후에 보면 느헤미야가 성전 안에서 하나님께 올려드릴 거제와 소제물을 쌓아두는 창고에 도비야의 방과 물건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도비야는 하나님의 공동체가 되는 것을 끊임없이 방해했던 존재입니다. 바로 이 도비야가 엘리 아살이라고 하는 제사장과 친척 관계를 맺으면서 성전 안에 자기 방을 만들고 거기에 짐을 갖다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용할 물건들로 채워야 될 그 방이 인간을 위한 물건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여러분, 당시 사건이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은 아닌지 진지하게 돌아봐야 됩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교회 속에 하나님께 드려져야 될 것이 우리 자신을 위해 채워져 있다면 큰 문제입니다. 느헤미야는 타협하지 않고 다 없앤 후에, 백성들에게 삶의 우선순위를 가르칩니다. 바로 십일조와 안식일에 대한 우선순위였습니다. 십일조와 안식일만큼 신앙의 전반적인 부분을 진단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는 물질을 포함한 자신의 전부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인 행위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머지 십의 구조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나머지 십의 구조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다 보니 죄를 위해서 쓸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물질로 살아갑니다. 물질을 쓸 때마다 주님 뜻을 생각하면 신앙의 길에서 멀어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일조의 원래 정신입니다. 십일조 외에 나머지는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를 드리면 돈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물질을 온전히 구별하여 드릴 때 물질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물질을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물질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데 사용하도록 지금부터 연습해야 합니다.
다음은 시간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일주일 가운데 하루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드리지 못하는 사람이 시간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을 아까워하는 사람이 내 생명이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예배드리는 시간마저 아까워서 주일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엉뚱한 데 쓰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어떻게 내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드리기를 원한다면 주님께 온전히 예배를 드리십시오. 예배를 드리고 난 다음에 소외된 친구를 찾아가십시오. 어려운 이웃을 찾아가 섬기십시오. 장애인들을 위해서, 교사로, 성가대로,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여러분의 삶을 드리십시오. 그리고 형제자매끼리 피차 신앙으로 격려하며 이 날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날로 드리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허락하신 다른 시간도 헛되이 버리지 않게 됩니다. 시간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릴 수 없는 사람이 시간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느헤미야는 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오늘 13장 14절을 보면 “내 하나님이여 이 일을 인하여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나의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 또 22절 하반절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옵시고 주의 큰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왜 기도하면서 이 일을 했을까요?
교회 밖에서 ‘동안교회’의 이미지는 개혁입니다. 해외에 나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송치헌 목사님께서 교회 기초를 잘 닦으시고, 김동호 목사님이 오셔서 10년 동안 해놓은 일이 바로 교회의 개혁입니다. 개혁 이미지 때문에 교회가 이만큼 부흥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김동호 목사님이 10년 동안 하신 개혁의 흔적이 지금 어디 남아 있습니까? 제도 속에 남아 있습니까? 저는 담임목사로서 제도 속에서 개혁의 흔적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개혁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전통 교회와 똑같습니다. 오히려 앞서 가는 교회보다 제도적으로 훨씬 못합니다. 개혁이 성도들의 삶 속에, 신앙 속에 남아 있습니까? 문제가 터지면 진정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를 기도합니까? 자신을 죽이고 말씀에 순종하며 새롭게 결단하는 역사가 우리 신앙과 인격 속에 나타납니까? 개혁의 주체가 같기 때문에 개혁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10년 동안 해온 일들은 무엇입니까. 어찌 보면 허무합니다.
여기에 느헤미야의 고민이 있습니다. “하나님, 인간이 하는 일은 허무한 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이를 기억하시고 분별의 지혜를 간직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무리하는 느헤미야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절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개혁의 흔적이 어디 남아 있느냐 반문했지만 사실 교회 곳곳에 개혁의 모습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남아 있는 모습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한국 교회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기 위해 우리는 기도하기를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새로워지고 민족이 새로워지는 일에 앞장서야 될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서가는 목사님들이 외친 변화를 위한, 새로운 분별의 유산들을 이어 받아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 일의 주인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상패를 주고 떡을 해먹는 것이 교회 창립 46주년의 본질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46주년 기념주일은 뭘까요? 하나님이 주신 공동체의 유산과 지혜를 회복해야하지 않을까요? 창립 46주년을 앞두고 잃어버린 기도의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청년들이 다시금 신앙과 열정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말씀의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민족을 향한 사랑과 열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네덜란드 령 뉴기니에 선교사 부부가 7년 동안 머무르면서 겪은 실화입니다. 의사 선교사 부부가 선교활동을 위해서 그곳에 갔습니다. 선교사 부부는 파인애플이 먹고 싶어서 파인애플 나무를 백 주 정도 사다가 원주민들에게 삯을 주고 심게 했습니다. 3년쯤 지나 이 나무에 열매가 열렸습니다. 날마다 익기를 기다려서 따먹으려고 보니까 열매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원주민들이 다 따간 것입니다. 원주민들에게 왜 따갔는지 물으니 자기들이 심었기 때문에 파인애플은 자기 것이라고 우겼습니다.
선교사는 너무나 화가 나서 병원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그러자 아픈 원주민들이 몰려와서 살려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결국 나무를 심은 사람들이 파인애플을 가져간 범인임이 드러났습니다. 선교사는 화가 났지만 병원 문을 열고 다시 계약을 맺고 삯을 준 뒤 나무를 심었습니다. 3년 뒤, 원주민들은 역시 또 다 따갔고, 주장도 동일했습니다.
몹시 낙심한 중에 있는데 마침 안식년이 되어 모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선교사가 우연히 한 집회에 참석했다가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지 못하고 헌신하지 못한 모습을 발견하고는 크게 회개하고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지로 돌아간 선교사는 파인애플 나무를 심고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기로 결단했습니다. 나무가 자라서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제는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 갖고 가십시오.’ 온전히 봉사했습니다. 원주민들은 이번에도 역시 따갔습니다. 그런데 선교사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화를 안 내는 것입니다. 어리둥절한 원주민들이 찾아와서 화를 왜 안 내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교사는 이제 파인애플은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원주민이 하나님은 파인애플 밭이 없냐고 묻자 선교사는 하나님이 파인애플 밭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하나님께 바쳤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원주민들이 굉장히 고민하면서 돌아갔습니다.
원주민들은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우리가 훔친 것은 선교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것이다. 우리가 사냥 가도 동물이 안 잡히고 아이들도 아프고 일이 잘 안 풀리는 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그렇다. 이제는 절대 파인애플을 따먹지 말자. 그건 하나님의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그 다음부터는 파인애플을 따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떼로 몰려와서 하나님께 바친 파인애플 밭을 다시 돌려받으라고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선교사가 파인애플을 따서 원주민들에게 다 주었습니다. 선교사는 그동안 말로만 하던 성경의 가르침을 몸소 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원주민들은 선교사가 하는 말을 듣고 믿기 시작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선교사가 어느 날 성경을 보다가 우연히 한 말씀을 발견했는데, 레위기 19장 23절에서 25절 말씀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 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제 사년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제 오년에는 그 열매를 먹을찌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제야 선교사는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첫 해에 익은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고, 그 모습을 원주민들이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하셨다는 것을 그제야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더라면 원주민들이 5년째 되던 해부터는 선교사 자신에게 파인애플을 따먹으라고 얘기했을 텐데, 말씀에 순종치 않아서 그동안 수많은 돈과 시간을 허비하고 괴로움을 겪은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던 모습을 반성하면서 말씀이 정말 옳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선교사는 말씀을 진실로 믿고 말씀대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생명의 역사는 일어나 원주민들에게도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삶의 원리는 바로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시고, 붙드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주장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말씀이 여러분을 붙들고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말씀을 여러분 삶 속에서 확인하고 회복하십시오.
그것이 공동체가 사는 길이며,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분별의 지혜를 되찾는 길입니다.
우리 인생과 가정과 교회와 민족을 다시 살리는 놀라운 지혜와 보석이 바로 말씀 속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생애와 가정과 공동체가 헛되게 부서지는 공동체가 아니라 아름답고 새롭게 가꾸어지는 복된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앞에 존귀하게 쓰임 받는 여러분들로 인해서 교회와 민족의 역사가 변하고 열방을 향한 선교의 역사가 더 크게 이뤄지기를 간절히 축복하며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