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현대 서양 사회에서 사랑의 붕괴
사랑이 성숙하고 생산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의 능력이라면, 어떤 특정한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랑의 능력은 이 문화가 평범한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 달려 있다. 서양 현대 문화에서의 사랑에 대해 말한다면, 우리는 서양 문화의 사회 구조와 이러한 사회 구조로부터 발생한 정신이 사랑의 발달에 효과적인가 하는 문제를 묻는 셈이다.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부정적으로 이 문제에 대답하는 것이다. 서양 생활에 대한 객관적 관찰자들은 누구든지 사랑 - 형제애, 모성애, 성애(性愛)이 비교적 희귀한 현상이며 여러 가지 형태의 사이비 사랑-이것은 사랑의 붕괴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형태다-이 사랑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는 한편으로는 정치적 자유의 원리, 또 한편으로는 모든 경제적·사회적 관계의 규제자로서 시장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상품시장은 상품이 교환되는 조건을 결정하고 노동시장은 노동력의 획득과 판매를 규제한다. 유용한 사물과 유용한 인력 및 기술은 상품으로 변해 폭력 행사 없이 시장의 조건에 따라교환된다.
구두는 아무리 유용하고 필요하더라도, 시장에서 구두의 수요가 없으면 경제적 가치 (교환 가치)를 갖지 못한다. 인격과 기술은현재의 시장 조건에서 수요가 없으면 교환 가치를 갖지 못한다.자본가는 노동력을 사서 그의 자본이 가장 유익한 투자가 되게끔일하도록 명령할 수 있다. 노동자는 굶어죽지 않으려면 현재의 시장 조건에 따라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팔아야 한다. 이러한 경제구조는 가치의 계층을 반영하고 있다. 자본은 노동력을 지배한다.축적된 물품, 다시 말하면 사장(死)된 물품이 노동력이나 인간의 힘이나 살아 있는 것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갖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시작된 이래로 자본주의의 기본 구조다.
근대 자본주의는 원활하게 집단적으로 협력하는 사람들, 더욱많이 소비하는 사람들, 그 취미가 표준화되고 쉽게 영향받고 예측할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근대 자본주의는 권위나 원리,또는 양심에 종속되지 않고 자유롭고 독립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즐거이 명령에 따르고 그들에게 기대되는 일을하고 마찰 없이 사회 기구에 순응하는 사람들, 폭력 없이 관리되고 지도자 없이 인도 되고 목적 없이 —좋은 것을 만들어내고 계속움직이고 기능을 다하고 곧바로 나간다는 목적 이외에는—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현대인은 자기 자신, 동료,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소외된다.” 그는 상품으로 변하고, 현재의 시장 조건 아래서 최대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투자로써 자신의 생명력을 경험한다. 인간 관계는 근본적으로 소외된 자동 기계 같은 관계가 되고, 각자는 군중과 함께 있음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고, 따라서 사상이나 감동이나 행동에서 각자의 차이가 없다.
모든 사람이 되도록이면 타인들과 함께 있으려고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아주 고독하며, 분리 상태가 극복되지 못했을 때 필연적 결과로 생기는 깊은 확실성과 불안, 죄책감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 문화는 사람들이 이러한 고독을 의식하고 깨닫지 않게끔 도와주는 여러 가지 완화제를 제공한다. 우선 제도화된 기계적 작업의 엄밀한 규격화,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 곧 초월과 합일에 대한 갈망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노동의 규격화만으로는 이러한 일에 성공하지 못하므로, 인간은 오락의 규격화에 의해, 곧 오락산업에 의해 제공되는 음향이나 구경거리를 수동적으로 소비함으로써, 더 나아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사고 이것을 곧 다른 것과 교환하는 데 만족함으로써 자신의 의식되지 않는 절망을 극복한다. 현대인은 사실상 헉슬리(Huxley)가 멋진 신세계>에서 그려놓은 상(像)에 가깝다. 곧 잘먹고 잘 입고 성적으로도 만족하지만 자아가 없고 가상 피상적인 접촉을 제외하고는 동료들과 어떠한 접촉도 없는, 헉슬리가 다음 과 같은 말로 간결하게 표현한 슬로건에 의해 지도되고 있다. "개인이 감정을 가질 때, 공동체는 비틀거린다." 또는 "오늘 즐길 수 있는 일을 내일로 연기하지 말라." 또는 절정에 달한 선언이지만 "오늘날은 모든 사람이 행복하다."
오늘날 인간의 행복은 '즐기는 데 있다. 즐긴다는 것은 '만족스러운 소비'를 말하고 상품, 구경거리, 음식, 술, 담배, 사람들, 강의, 책, 영화 등을 입수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것이 소비되고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것이다. 세계는 우리의 식욕에 대한 하나의 커다란 대상으로서 커다란 사과, 커다란 병, 커다란 유방이 된다. 우리는 젖을 빠는 자이고, 영원히 기대하는 자이고, 희망에 가득찬 자이다-그리고 영원히 실망하는 자이다. 우리의 성격은 교환하고 받아들이고 싸게 팔아버리고 소비하는 데 적합하다. 모든 것은, 물질적 대상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대상도 교환과 소비의 대상이 된다.
사랑에 관한 한 상황은 당연한 일이지만, 현대인의 이러한 사회적 성격과 대응된다. 자동 기계는 사랑할 수 없다. 자동 기계는 '퍼스낼리티라는 상품'을 교환할 수 있고 공정한 거래를 희망할 수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소외된 구조를 가진 사랑, 특히 결혼의 가장 중요한 표현의 하나는 '팀'이라는 개념이다.
행복한 결혼에 대해 쓴 무수한 논문은 원활한 기능을 가진 팀이 이상적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은 원활하게 일하는 고용인이라는 관념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이러한 고용인은 '합리적으로 독립적이고 협동적이고 관대하고 야심적이면서 동시에 "공격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남편은 아내를 이해하고 도와주어야 한다고 결혼 상담자는 말한다. 남편은 아내의 새 옷이나 맛있는 요리를 칭찬해야 한다. 아내는 남편이 지쳐서 시무룩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해해줘야 하고, 남편이 사업상의 난점에 대해 말할 때 주의 깊게 귀 기울여야 하고, 남편이 아내의 생일을 잊었을 때도 화내지 말고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모든 관계에 공통되는 것은 평생 동안 남남으로 남아 있고, 결코 '핵심적 관계'에 도달하지 못하고 서로 예의 바르게 대우하고 서로 더욱 호의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두 사람의 원활한 관계다.
사랑과 결혼에 대한 이러한 개념에서 중요한 강조점은 참아낼수 없는 고독감으로부터 피난처를 찾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에서 마침내 고독으로부터 벗어날 안식처를 찾아낸다. 사람들은 세계에 대항하는 두 사람 사이의 동맹을 형성하고, '두 사람만의 이기주의는 사랑과 친밀감으로 오해된다.
138
두 사람이 서로 그들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사귈 때, 그러므로 그들이 각기 자신의 실존의 핵심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경험할 때 비로소 사랑은 가능하다. 오직 이러한 '핵심적 경험'에만 인간의 현실이 있고 오직 여기에만 생기가 있고 오직 여기에만 사랑의 기반이 있다. 사랑은 이와 같이 경험될 때에만 끊임없는 도전이다. 사랑은 휴식처가 아니라 함께 움직이고 성장하고 일하는 것이다.
조화가 있든, 갈등이 있든, 기쁨이 있든, 슬픔이 있든 이것은 두사람이 그들의 실존의 본질로부터 그들 자신을 경험하고 그들 자신으로부터 도피하기보다는 그들 자신과 하나가 됨으로써 서로 일체가 된다는 기본적 사실에 대해서는 이차적인 것이다. 사랑의 현존에 대해서는 오직 하나의 증거가 있을 뿐이다. 곧 관계의 깊이 관련된 각자의 생기와 힘이 그것이다. 이것은 사랑을 인식하게 하는 열매이다.
자동 인형은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처럼 신을 사랑하지도 못한다. '신에 대한 사랑의 붕괴'는 인간에 대한 사랑의 붕괴와 같은 정도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실은 이 시대에 있어서 우리가 종교부흥을 목격하고 있다는 사상과 명백하게 모순되고 있다. 이 사상보다 진실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없으리라.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비록 예외는 있더라도) 신에 대한 우상 숭배적 개념으로의 퇴행이며 신에 대한 사랑을 소외된 성격구조에 적합한 관계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신에 대한 우상 숭배적 개념으로의 퇴행은 쉽게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불안하고 원칙이나 신념이 없으며, 그들에겐 전진한다는 목표 말고는 아무런 목표도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계속해서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 남아 있으면서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도우러 오기를 희망한다.
140
현대인은 자기 자신을 상품으로 만들었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의 생명력을 퍼스낼리티 시장에서 자신의 위치와 상태를 고려하여 최고의 이익을 올려야 할 투자로서 경험하고 있다. 현대인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동료로부터,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현대인의 주요 목표는 그의 기술, 지식, 자기 자신, 그리고 퍼스낼리티라는 상품'을 다른 사람과 유익하게 교환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역시 공정하고 유익한 교환을 바란다. 생활에는 움직인다는 목표 말고는 아무런 원칙도 없고, 소비한다는 만족 말고는아무런 만족도 없다.
이러한 상황 밑에서 신의 개념은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 신의 개념은 본래의 종교적 의미에서 성공을 중심으로 하는 소외된 문화에만 적합한 의미로 바뀌었다. 최근의 종교의 소생에서는 신에 대한 신앙은 인간을 경쟁적 투쟁에 더 적합하게 만드는 심리적 책략으로 바뀌었다.
종교는 인간의 사업상의 활동에서는 인간을 돕기 위해 자기 암시 및 심리 요법과 제휴한다. 1920년대에 우리는 우리의 퍼스낼리티를 개선하기 위해 신을 갈구하지는 않았다. 1930년대의 베스트셀러인 데일 카네기 (Dale Carnegie)의 《어떻게 친구를 얻고 또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가》는 엄밀하게 세속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에 카네기의 책이 수행한 역할은 오늘날의 최대의 베스트셀러인 N. V.피일(Peal) 목사의 <적극적 사고력>의 기능과 같다. 이 종교적 책에서는 성공에 대한 우리의 지배적 관심이 일신론적 종교의 정신과 일치하는가 하는 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
반대로 이 최고의 목표를 결코 의심하지 않으면서 신에 대한 신앙과 기도를 성공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증진시키는 수단으로 권고하고 있다.
정신과 의사가 고객에게 좀 더 어필하기 위해서는 고용인들이 행복해야 한다고 권고하는 것처럼, '신을 당신의 반려로 삼으라는 말은 사랑과 정의와 진리에 있어서 신과 일체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사업에 있어서 신을 동업자로 만들라는 의미이다.
형제애가 비개인적 공정성에 의해 대체된 것처럼, 신은 멀리 떨어져 있는 '우주'라는 주식회사의 사장으로 변했다. 당신은 신이저기에 있고 신이 쇼를 연출하고 있다는(신이 없어도 아마 쇼는연출되겠지만) 것을 알고 있고, 당신은 신을 결코 보지 못하지만 당신이 '당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동안에는 신의 리더십을 인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