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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때 지은 부산 동래구 온천동의 동래별장. 부산 근현대사의 사연을 간직한 곳이다. 홍영현 기자 hongyh@kookje.co.kr |
- 삼국유사에 최초 기록
- "병든 사람도 낫게 해"
- 조선의 학자 성현
- "몰려드는 왜인들로
- 관청이 괴로울 지경"
- 목욕탕에 지붕 덮고
- 남녀탕 나눈 건 1691년
- 영남 유림들 행차 땐
- 고을 사또들이 접대
필자가 근무하는 동아대 다우미디어센터 박성훈(27) 조교와 김지은(23·경영정보학과 4) 동아대학보 편집국장, 안혜진(24·영어영문학과 3) 동아대학보 기자와 동래 온천장을 찾은 날 공교롭게도 노천족탕은 휴일이었다.
"동래온천에 대한 최초 기록은 '삼국유사' 권3 신문왕 3년(683년) 영취산조로 '재상 충원공이 동래온천에서 목욕했다'고 적혀 있어요. 신라 성덕왕 11년(712년)에 '여름 4월에 왕은 온수에 행차했다'는 기록('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삼국사절요' 본기 임자년) 등도 있지요. 조선시대에 와서는 태종 이방원의 장남이자 세종대왕의 형인 양녕대군과 세종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의 부인, 세종과 소헌왕후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 임영대군의 누나인 연창위 공주 등 왕실 및 훈신들이 즐겨 찾았고, 이규보와 정포, 박효수, 권제, 김종직 등 문인들의 제영시도 많이 전해옵니다. 1530년(중종 25)에 이행 윤은보 등이 '동국여지승람'을 증수, 편찬한 책인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3 동래현 산천조와 '동래부지' 산천조에는 '온천은 동래부의 북쪽 5리에 있으며, 그 열이 달걀을 익힐 만하고 병든 사람이 이곳에서 목욕을 하면 금방 나아, 신라시대에는 왕이 여러 번 이곳에 행차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지요. 그런 걸로 보면 신라시대부터 동래온천에서 목욕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겁니다."
■삼국시대부터 이어진 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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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년대 초 동래온천 봉천관(왼쪽 사진)의 모습과 노천족탕 옆에 남아 있는 온정개건비. |
박 조교가 묻는다. "동래온천은 어느 정도 크기였나요? 그렇게 많은 사람이 찾은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을까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샘의 안팎에는 돌방이 있는데 하나에 5, 6명이 들어갈 수 있고, 샘물은 위쪽 여러 구멍에서 흘러나오는데 매우 뜨거워 갑자기 손발을 넣을 수가 없다'고 적혀 있지요. 또 '동래구지'(1995년)에는 1691년에 온천을 대폭 정비하여 목욕탕 건물을 세우고, 남탕과 여탕을 구분했다고 합니다. 돌로 탕 두 개를 만들고 아홉 칸의 목욕하는 집을 지었으며, 남탕과 여탕을 구분하고 지붕을 덮었다는 내용인데, 1691년 이전에는 지붕이 덮이지 않고 탕만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동래온천은 그 뒤 여러 번 고쳤으며, 개항 2년 뒤 1878년에는 일본인 전용 목욕탕이 생겼죠. 노천족탕 옆의 비석은 강필리 동래부사(재임 1764년 8월~1766년 11월)가 부사직을 마치기 직전 온천의 낡은 건물을 고쳐 지은 공적을 기리는 온정개건비이지요."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았을까. "세종과 연산군 때 학자인 성현(1439 ~ 1504년)이 '용재총화'에서 언급한 내용을 봅시다. '지금의 우리나라에는 6도마다 온정이 있는데, 경기·전라도만 없다.… 동래온천이 가장 좋으며, 마치 비단결 같은 샘물이 땅에서 솟아 나오는데, 물을 끌어올려 곡(斛·10말의 용량)에다 받아둔다.… 우리나라에 오는 왜인들은 반드시 여기서 목욕을 하고 가려 하므로 이들의 왕래가 빈번하여 관청에서는 그 괴로움이 많았다'고 합니다. 온천을 좋아하는 일본인의 기질 때문인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온천 일대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1598년에 명나라 장수 마귀와 조선의 김응서 등이 이 주변의 왜군을 격파하기도 했지요."
■대문호 이규보도 감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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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온천 거리에 조성된 노천족탕. |
김지은 편집국장은 "고려 때 이규보가 동래온천에 들러 목욕하고 시를 읊었다는데, 그 시를 소개할 수 있을까요?"라고 부탁한다.
"엄경흠 신라대 교수가 쓴 '한시와 함께 시간여행'(전망·1997)을 참조해 설명하지요. 이규보(1168~1241년)가 2수를 지었네요. '썰렁한 바람 소리에 처음에는 찬 샘 솟을까 했더니/어둑어둑해지자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것 같네/스님은 납일이라 무릎 꿇고 산중에서 제사 지내는데/나물 익히고 차 마시는 데 불로 끓이지 않네'. 이규보가 온천에 도착한 때는 12월로 아주 추울 때였지요. 그래서 찬물이 솟을 줄 알았는데, 저녁나절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물을 보고는 온천임을 알았답니다. 그는 시의 말미에서 '샘물 아래에 못이 있는데 반드시 여기서 목욕을 했다'라고 적었죠. 옛날에는 목욕탕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온천수가 솟는 샘 아래에 못을 파두고 그곳에서 목욕했던 것으로 짐작해요. 그리고 나물을 익히고, 차를 달이는 물도 끓이지 않고 사용했다고 하는군요."
다음은 두 번째 시. '아직까지 유황이 수원에 녹아 있다고 믿지 않았고/해 돋는 곳에서 아침에 목욕한다고 믿지 않았네/땅이 멀어 양귀비의 더럽힘 면할 수 있었으니/지나가며 잠시 따뜻함 시험하는데 뭘 거리끼리'라며 읊네요. 그는 물에 유황성분이 많다는 것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던 것 같고, 이 추운 계절 아침에 온천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며 감탄하고 있지요. 그리고 당나라 현종의 사랑을 받은 양귀비가 화청궁이라는 온천을 세우고 목욕하기를 즐겼는데, 이곳은 그곳과 멀어 더럽히지 않았으니 따뜻한 물에 몸을 한번 담그는 것을 꺼리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동래온천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는 없나요." 안혜진 학생기자의 질문이다.
"1617년 동래온천에 시끌벅적한 일이 있었죠.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가르침을 받은 유학자 한강 정구(1543 ~ 1620년) 선생이 수많은 제자를 데리고 국왕 행차와 유사할 정도의 규모로 이곳에 나들이한 사건(?)이지요. 75세 정구는 신병 치료차 경북 칠곡 지암에서 1617년 7월 20일 새벽에 배를 띄워 하빈~현풍~고령~창녕~함안~영산~밀양~김해~양산을 거쳐 7월 26일 정오에 동래온천에 도착합니다. 온천장에서 꼬박 30일을 묵으며 온욕과 휴식을 취한 그는 한 달 뒤인 8월 26일 동래를 떠나 양산~통도사~경주~영천~하양~경산을 거쳐 9월 4일 지금의 대구시 북구 사수동인 사수(泗水)로 돌아갑니다."
■고을 떠들썩했던 유림의 행차 기록
영남 유림이 회합한 일대 사건으로 불리는 이 온천행에 당시 경상감사 윤훤은 직권으로 여행에 따른 제반 편의를 제공하였고, 정구 일행이 경산의 소유정(小有亭)에 이르렀을 때는 몸소 영접하기도 했다. 대구부사, 신안현감, 초계군수, 창원·밀양·김해·동래부사, 경주부윤 등 연로의 지방관이나 도동·연경·신산·자천·서악·임고서원, 성주·밀양·동래향교 등에서도 정구의 문안과 영접에 각별한 정성을 보였다.
동래별장을 빠뜨릴 수 없다.
"1898년 조선과 일본의 동래온천 임차계약이 이뤄집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인은 온천장 일대에 일본인 전용 목욕탕 겸 여관인 야쓰시(八頭司)를 시작으로 봉래관(농심호텔 자리)이라는 대규모 여관을 열었지요. 1915년 11월 1일에는 부산진에서 동래온천장 입구까지 전차 운행이 시작됩니다. 지금의 동래별장(온천1동) 건물은 일제강점기 당시 부산 3대 거부라던 하자마 후사타로가 자기 별장으로 지어 하자마유겐(迫間湯源)이라 불렀지요. 이 건물은 해방 뒤 미군정청 집무실로, 한국전쟁 때 부통령의 관저로 쓰였어요. 1965년 고급요정으로 탈바꿈하면서 동래별장이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부산의 아픈 근현대사가 담겨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