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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6장 1-7절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죽음을 앞두고 계신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말씀과 함께 성령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특히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모든 계명의 핵심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십니다. 율법을 요약하자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지만, 이웃 사랑만을 말씀하실 때는 하나님 사랑이 전제가 되고 있기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께서 먼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즉 서로 사랑하라고 하실 때는 하나님께서 먼저 자기 백성을 사랑하셨다는 전제가 있는 것이고, 그 사랑을 받았다면 너희도 나를 사랑함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증거가 어떻게 나타나야 되는가?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맺어야 할 열매인데, 정작 세상은 어떤 곳이냐?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합니다. 왜 세상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미워하는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은 악하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본래는 세상에 속한 자였습니다. 그런 그들을 택하여 구별된 자로 세우셨습니다. 본래는 악을 향해서만 달려가던 자들이었지만, 더 이상 그곳으로만 달려가지 않는 자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자에서 이제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미워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속한 제자들도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은 사도의 직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 이후 세상에 나가 복음을 증거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가 세상을 악하다고 하신 것처럼 동일하게 증거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악에서 구원 받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말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씀만 전한다면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그러나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세상은 싫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스스로가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단지 미워하는 정도로만 있지 않고 박해까지 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고 박해를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믿는 자들이 있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때, 그러나 성령 하나님은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기 때문에 너희를 통해 증거 하는 그 복음의 역사 속에서 믿는 자들이 있게 될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요한복음 16장 이런 박해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시는데, 먼저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요한복음 15장 18절부터는 그 성격이 약간 달라집니다. 비교해서 보자면 요한복음 15장 1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열매를 맺는 것, 그것은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고,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때 이 모든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기뻐하는 것이 너희 안에 있기를 원한다는 것이고, 그것이 너희 기쁨이 되어 더욱 충만하게 되기를 원한다. 즉 서로 사랑함으로 계명에 순종하고 열매를 맺는 것이 너희의 기쁨이 되도록 하기 위해 이런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주부터 보게 되는 내용에서는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한다, 박해한다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고 계속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 속에서는 그것이 너희의 기쁨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라면, 세상의 미움과 박해에 대한 말씀에서는 그것이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고, 또 박해하는 일까지 있게 될 때 실족하게 될 수 있지만, 내가 미리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그런 일이 갑작스레 일어나더라도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의 기능 한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으로 무장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가? 간혹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표현할 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주의해야 할 표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은 오늘만 필요해서 주시는 게 아닙니다.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할 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딤후3:16). 오늘도 유익할 뿐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 우리의 전 인생에 있어 유익함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66권으로 된 성경만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라고 고백합니다.
물론 우리는 66권의 모든 말씀을 매일 전체 다 읽을 수는 없습니다. 적은 분량이지만 읽어 나간다고 할 때 읽은 말씀이 실제 우리 삶에 있어 어떤 유익으로 다가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이 오늘 나에게 적용되지 못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떤 말씀도 불필요하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이 내일을 위한 것일 수도 있고, 모레를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우리의 전 인생 속에 그 말씀이 필요하기 때문에 기록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무장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지금 당장 박해를 받고 있지 않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십니까? 물론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유대 지도자들로부터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고, 그런 만큼 제자들도 그런 어려움 가운데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장차 올 어려움에 비하면 그렇게 큰 어려움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어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더 큰 어려움이 온다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하는가? 그런 어려움이 있을 때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비무장이 아니라 무장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기능이 이러하다면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매일 그 말씀을 읽어야 하고, 그 말씀이 우리 마음 가운데 새겨지도록 해야 합니다. 지상의 교회를 전투하는 교회라고 할 때,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세상이 주께 속한 자들을 미워한다고 할 때 아무런 무장 없이 나가서 싸운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이길 수 있겠습니까? 비무장 상태로 나가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만이 아니라 내일을 위해서, 모레를 위해서, 우리의 전 인생을 위해서 늘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의 말씀처럼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서의 삶은 늘 우리를 실족하여 넘어지게 만드는 일로 가득합니다. 말씀 없이는 백이면 백 넘어질 수밖에 없는 수준이 우리의 수준입니다. 때문에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우리의 생각을, 우리의 마음을, 나아가 우리의 모든 행동에 이르기까지 무장해야 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오시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신다고 할 때, 오늘 본문 2절에서는 박해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까지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출교(黜敎)는 어떤 가르침에서 내쳐지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 사회로 보자면 회당에 출석하는 것을 금한다는 것이요, 유대인이지만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자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보는 것이 유대인들입니다. 출교라는 것은 이런 하나님을 믿는 무리로부터 쫓겨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 무리에서 쫓겨나는 것,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정통교회가 이단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유대인 입장에서 출교를 당하는 사람은 이단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한다고 할 때 죄악 된 모든 세상이 그러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있는 유대 사회는 다른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말하는 그들도 세상과 다를 바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는 주의 제자들, 사도들을 미워하면서 박해를 하게 되는데, 그런 박해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는 출교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요한복음 9장에서 이러한 내용을 언급한 바 있는데,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의 눈을 고쳐 주신 사건에서 이미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들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출교하기로 결의한 상태였습니다(요9:22 참조). 그로 인해 맹인의 부모는 맹인이 눈 뜨게 된 일에 대하여 질문하는 유대인들에게 사실 그대로를 말하기보다 회피하듯 말하게 되는데, 유대 사회 안에서는 이 출교가 매우 두려워할 만한 일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두려워할 만한 일이 있을지라도 두려워하지 말라, 실족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일이 있다 할지라도 참된 진리를 알고 있다면 진리 위에 서 있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 사회에서 출교를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도들이 공회로부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했을 때 그들 앞에서 말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19)입니다. 너희가 하나님 편을 들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에 대해서는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행4:20)
오늘 본문에서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악한 판단으로 기가 꺾일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욕을 담대하게 견디어 내면서 인간들의 부당하고 악하게 정죄 받고 있는 우리의 명분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있다는 이 한 가지 사실로 만족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 종교개혁의 역사가 이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위 구교와 신교로 나눠지게 될 때 많은 사람들은 가톨릭에서 개신교가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가톨릭 입장에서는 개신교가 분리주의자인 셈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박해가 있었습니까? 심지어 순교의 역사까지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탈한 것은 가톨릭입니다. 이탈한 가톨릭에서 개신교가 나왔다는 것은 참된 교회로부터 분리한 것이 아니라 참된 교회로 회귀한 것입니다. 이것을 두려워했다면 종교개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황의 파문을 두려워했다면 어떻게 종교개혁이 일어났겠습니까?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힘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힘이라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의 권위로만 당시 철옹성과 같은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지도자들이나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은 그들에게 쥐어져 있던 권력으로 하나님 편을 든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권력이었지만 그 권력을 올바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남용함으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대적했던 것입니다. 본래는 교회를 정결케 하는 데 사용해야 할 것을, 참된 경건을 뿌리 뽑는 데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출교로 위협한다고 해서 정작 하나님께로부터 내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진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진리와 함께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출교와 함께 오늘 본문은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있다고도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소위 순교하는 일까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미워하는가? 복음이 싫어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보내신 하나님이 싫어서 하나님께 속한 자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를 죽이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일을 유대인들도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할 때 유대인들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유일하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5장 21절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 23절에서는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고도 말씀합니다. 그런데 저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어떻게 말씀합니까?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를 박해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사도 바울의 회심 이전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3장 6절에서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는 자로 있었다고 자신을 밝히기도 했던 겁니다. 누구를 위한 열심인가? 하나님을 위한 열심입니다. 문제는 그런 열심이 어떤 열심인가? 로마서 10장 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한마디로 유대인의 열심은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며,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닌 만큼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가?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아니라, 그 반대 방향을 향해 열심을 다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그들은 열심이라는 이름으로만 가지고 하나님을 위하여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지식 없는 열심은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성도로 하여금 열심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열심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 성경이 말하고 있지도 않는 공로주의를 가지고 들어옵니다. 열심에 따른 상급도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미 방향부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방향이 아니란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분명 열심이 좋은 것이긴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열심 이전에 하나님 지식이 가르쳐져야 합니다. 하나님 지식도 참되게 가르쳐져야 합니다. 그 지식에 합당한 열심을 가지도록 권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결코 공로주의가 들어올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상급을 말할지라도 내 공로에 따른 상급은 말할 수 없습니다. 은혜의 상급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만이 모든 것을 아우를 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진정한 겸손이 자리하게 됩니다. 당연히 거기에는 하나님의 영광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식 없는 열심을 주의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 열심이라고 할 때 그것은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구약 시대 때는 이스라엘의 재판법 안에 사형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 사형 제도가 유지 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식법과 함께 재판법까지 폐지가 되었는데, 이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부터 알리셨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음행 중에 잡혀 온 여자를 용서하신 사건이 그것 아닙니까! 때문에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하는 열심이란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기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3절로 오시면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계속해서 말씀드리는 것처럼 무지한 열심일 뿐입니다. 물론 저들은 하나님은 안다고 말할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지 않는 이상 무지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한다고 할 때 요한복음에서 누누이 강조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이고, 아들의 말을 듣지 않는 이상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왜 저들로 하여금 아버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가? 아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으로 아버지의 아들이요, 아버지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즉 아들에 대한 참된 고백 없이는 아버지에 대한 참된 고백도 나올 수 없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말한다 할지라도, 그것도 구약 성경을 따라 말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지식은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 성경을 따라 하나님을 말할 때 하나님의 속성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성, 하나님의 영원성, 하나님의 불변성 등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없는 구원의 지식은 결코 주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헛되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4절을 보시면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절에서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는데, 마찬가지입니다. 목적은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인데,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 이후 복음을 전하면서 너희가 박해를 받고 심지어 죽게 되는 일이 있을 때 내가 지금 너희에게 한 이 말이 기억나도록 하기 위해 이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너희로 하여금 실족하지 않게 하기 때문에 너희로 하여금 무장하도록 하기 위해 말씀한다는 것이고, 지금은 듣고도 잊어버린 자처럼 있을 수 있으나 때가 되면 기억나게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거 너희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란 것인데, 스승과 제자가 있다고 할 때 모든 비난은 스승을 향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비난 속에서 이 모든 말씀을 미리 하지 않은 것은 제자들 역시 그만큼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저들을 떠나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고, 그래서 무장해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런 박해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았지만 때가 되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고, 이 말씀으로 저들을 무장시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물론 성령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가 그들에게 있기까지는 여전히 연약함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다 도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도망하게 된다고 해서 이 말씀이 헛되냐?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이 말씀은 결코 헛되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5절과 6절에서는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는 말씀도 하시는데, 이미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4장 28절에서는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그러나 이런 말씀에도 불구하고 너희 중 누구도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의 경우 요한복음 13장에서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는 질문을 하기도 했습니다(요13:36).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신 뜻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자 하여 묻는 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 승천과 관련해서 묻는 자가 없더란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금 이 말을 하니까 너희 마음에 근심으로 가득하였다는 것입니다. 나를 미워하기 때문에 너희를 미워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박해하게 되는데, 출교를 당하게 되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다고 하니까 마음에 근심이 가득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로와 격려를 더하시는데, 7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시는 것도 유익이었습니다. 그러나 떠나는 것이 더욱 유익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주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택하신 자기 백성의 죄악을 속량하시고, 그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길을 여시는 사역을 끝마치실 때까지는 오순절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매튜 풀 주석 참조).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지금 제자들에게 성령이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령 없이 어떻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 그 고백이 참된 고백이라면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그들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내가 떠나가야 한다, 그리고 보혜사인 성령이 오셔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입니까? 이미 요한복음 14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우선 12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이미 말씀드린 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큰 일을 한다는 것은 어떤 능력적인 차원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의 확장성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그들 스스로가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래서 16절 이하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6-18) 참된 신앙고백을 한 자라면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계시지만, 내가 하는 일뿐만 아니라 그보다도 더 큰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 특별히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있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함께 하시는 것은 승천 이후 재림 때까지는 있지 않을 것이지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실 때(마28:20)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것은 아니나 여전히 전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요, 나아가 성령 하나님을 통해 너희와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박해가 있고 순교하게 되는 그런 일이 있어서 당황스러울 수 있고 두려워할 수 있지만, 성령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 이후 내용을 보면 더욱 담대히 세상 앞에 복음을 전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할 때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시는 것 또한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의 사역은 요한복음 14장에서 말한 것처럼 진리의 영이시요(요14:17), 진리의 영으로서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되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요14:26). 정확하게 다음 주에 보게 될 내용 안에 이 부분이 다시금 언급됩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 14장 18절에서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는다고까지 말씀하시는 겁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 단회적이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모든 구원의 내용을 적용하시는 분도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 말은 예수님께서 지상의 사역을 다 이루시고 하늘로 올라가지 않는다면 성령 하나님의 사역도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지상의 사역을 다 이루시기 전에도 구원은 있었습니다. 구약 백성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전이기 때문에 구원 받지 못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7장 하나님의 사람과의 언약, 5항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처럼 율법 아래에서 이 언약은 유대인들에게 전해진 약속들, 예언들, 제사들, 할례, 유월절 양, 다른 모형들과 규례들에 의해 모두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며 실행이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오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오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의 죄를 위하여 죽으실 것을 내다본 것이고, 오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를 위하여 다시금 살아나실 것을 내다본 것입니다. 그것들은 택자들을 약속된 메시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지도하고 세우기에 그때를 위해 충분하고 유효적이었는데, 이런 유효성을 누구로 말미암는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습니다.
결국 성령의 모든 역사는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의 완성에 근거합니다. 비록 그가 죽어 잠시 우리를 떠나게 되실 것이지만, 부활이 있을 것이고, 승천이 있을 것이고, 그의 모든 사역이 결코 헛되지 않고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열매를 맺되 더욱 풍성히 맺히게 되는 모든 일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실족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자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주님께서는 말씀만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까지 약속하고 계시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셔야 합니다. 실족할 수 있는 일이 모든 신자에게 늘 있습니다. 그러나 실족에 앞서 말씀을 주십니다. 말씀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성령 하나님까지 약속해 주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잘 심겨 자라나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 없이 산다는 것은 앞서도 말했지만 전투하러 나가면서 무장하지 않고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무장했다고 해서 늘 이기는가? 부패함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늘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이기게 하기 위하여 성령 하나님을 약속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말씀과 함께 역사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도록 우리는 늘 깨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주의 말씀이 헛되이 뿌리 내리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이기게 해 주옵소서. 비록 실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만, 그 가운데 말씀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고 또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 하나님게서 역사 하여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길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이렇게 우리는 늘 기도하면서 주 앞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