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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空)의 철학, 고난과 역경의 방어기제
-조관형의 수필 세계-
권대근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Ⅰ. 들어가며
헤겔은 미학을 통해 ‘예술미는 자연미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예술을 정신적인 소산으로 여겼으며, 예술의 목표가 단순히 자연을 모방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앞에서 느끼는 정서를 표현하는 데에 있다고 보았다. 또한 예술을 정신화의 과정으로 보고, 완전한 재현과 모방은 영혼과 생명력이 없는 것이라 치부하였다. 즉 예술을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세계에 근본적인 변형을 거쳐 진리를 감성적으로 실현시키는 것이라 여겼다. 예술의 힘은 바로 개인의 실제 얼굴 모습을 그대로 모방하기 보다는 그의 정신적 내면, 진실된 실재의 모습을 이상적으로 그리는 데 있는 것이다. 흔히 문학은 인간과 사회를 비춰주는 거울이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세계의 참모습을 비춰주는 동시에 사회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삶에 대한 교훈과 진리를 전달한다. 그것은 문학이 일상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작가의 안목에 따라 재구성됨을 물론이요, 독자들이 소망하는 삶의 형식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문학이 일상적인 생활 모습을 모방하거나 일방적인 교훈을 나열하는 식이라면 독자들에게 감흥과 깨달음을 제공할 수 없다. 따라서 예술은 형식과 내용미의 적절함 속에 개인의 목적과 사회의 목적이 조화를 이룰 때 완성된다. 필자는 앞서 논의한 헤겔의 미학 이론을 적절히 반영하고 있는 작가 한 명을 소개한다. 바로 수필가 조관형이다. 조관형은 종주한 백두대간의 산행기록 다수를 작품화하였고, 자연과 생명에 대한 탐구를 바탕으로 자연의 미적 가치를 이상화한 작가다. 또한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와 더불어 자연과 인간의 화합을 전제로 삶의 이치를 내포하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에 그의 작품 「어머님은 통화 중」, 「알았다 다 알았다아 (벌재-저수령(5.3km)」 , 「헛꽃(假花), 그 슬픈 꽃 이름」 을 중심으로 조관형의 작품 속에 내재된 철학적 가치를 심도 깊게 밝혀보려 한다.
Ⅱ. 펼치며
1. 「어머님은 통화 중」
우리네 속담에 ‘부모는 산에 묻고,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자식 잃은 부모의 슬픔과 고통은 평생 한으로 남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부모의 희망은 곧 자식으로부터 출발하며, 자식은 곧 부모의 삶 그 자체임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도 ㉠‘삶은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는 것’이라 했다. 어찌되었던 살아내야 한다. 그리고 삶은 이래저래 핑계 댈 것도 없이 무조건 견뎌내야 한다. <중략> 20년 전 막내아들을 잃은 충격이 청력 상실로 온 후로, 어머님에겐 말을 하는 것도, 듣는 것도 힘든 일이 되었다. 본래 듣지 못하면 말도 잃는다는데... ㉡다행히 마주보고 예길 하면 몸짓과 손짓이 언어가 되니 자주 찾아뵈라는 뜻인가.
어머니는 막내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후 그 충격과 노화로 인해 청력을 상실하였다. 그 뒤로 안부 전화를 건 아들을 친척 아저씨로 착각하시는가 하면, 전화 건 사람을 무색하리만치 당신의 얘기만 늘어놓다 끊으신다. 그러나 그것은 각박하고 고통스런 삶을 이겨내고 버텨내는 방법의 일환이며, 곧 외상에 대처하는 방어기제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과거의 충격으로 인해 더 이상 듣지도 소통하지도 못한다는 말인가. ㉠과 같은 성경 구절은 ‘삶은 곧 번뇌와 고통이다’는 불교적 세계관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인간은 곧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고통의 바다를 건너야 하고, 이를 지혜롭게 견뎌내는 것이 바로 인간에게 남겨진 과제인 것이다. 또한 인간은 강력한 자극으로 인해 마음에 치명적인 결함을 남기기 마련인데, 이는 과거의 외상이 현재의 삶에 지속적으로 관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작품 속에서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치명적인 외상을 겪은 후, 방어기제로써 타인과의 소통(청력)에 제약을 만든다. 그러나 ㉡과 같은 몸짓과 손짓, 즉 감정적 공감과 동화적 작용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소통과 공유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런 재미하나 제 때 드리지 못한 ㉢큰 아들에겐 좀처럼 가슴을 열려 하질 않으려는 듯 아직 굳게 닫혀있다. <중략> 전화는 저 혼자 알았다며, 먼 길을 혼자 돌아다니다가 뚜 뚜 뚜 끊기고 만다.
누구나 정신적 상처를 경험하고 나면,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렇게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삶을 장악하고 구속할 때, 삶을 지속하고 유지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바로 자신을 과거 속에 묶어두거나 현재의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어머니는 마음속 가득 지배하고 있는 아들의 죽음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해 채움이 아닌 비움을 선택한다. 타인의 이끌림을 거부하신 채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어 비워내고 싶은 것이다. 작가는 여전히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시는 어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인지 되묻고 있다. 이에 서로를 마주하고 전하는 감정적 교류, 몸짓, 손짓을 전제로 하는 소통에 그 해답을 찾는다. 작가는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머니가 안쓰러우면서도, 상처 입은 가슴을 어루만져줄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함에 부끄러워진다. 또 ㉢과 같은 어머니의 태도는 곧 채움이 아닌 비움을 통해 고통을 해결하려하는 그녀만의 방식임을 인정한다.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고통에 견고해지기 위해 자신을 털어내는 방법을 선택한 어머니. 결국 우리는 「어머님은 통화 중」을 통해 삶에 대처하는 어머니의 방식을 이해하려는 작가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2. 「알았다 다 알았다아 (벌재-저수령(5.3km)」
흔히 문학에서 자연은 ‘치유의 어머니’라 말한다. 자연이 삶의 안식처나 휴식처를 제공하고 상처받은 인간의 마음을 치유함을 이르는 말이다. 이는 결국 숭고의 아름다움을 선사하며, 기쁨과 치유를 제공하는 자연의 무한한 가치를 높여 부르는 데에 목적이 있다.
이렇게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소리를 본다’는 뜻을 조금 알 것도 같다. 산은 지금 그 소리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중이다. ㉣흔들리는 것으로 소리가 되는 나무는 바람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작가는 “사는 일이 왠지 허전하게 느껴질 때 홀로 길을 떠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말한다. 먼 길을 떠나는 것은 삶의 성찰과 회한이 되고, 자연을 통해 삶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산은 만물의 생성과 소통을 지켜볼 수 있는 곳으로, 메를로퐁티가 말한 “각각의 사물은 모든 다른 사물들의 거울”이라는 이치를 매개하는 장이라 볼 수 있다. 산은 바람을 통해 소리를 내며, 바람은 산을 통해 본질을 드러낸다. 이는 각각의 본모습을 드러내기보다는 서로에게 융합되는 형식으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개개의 사물은 모든 사물들의 거울이 됨으로써 하나로 이어지고, 자연이 주는 소리를 들은 인간(작가)은 곧 자연의 일부로 남는다. 그것은 곧 느끼는 자(작가) 속에 자연이 한 몸으로 결합되어 나타나고, 이는 작품 안에 스며들어 독자들을 일깨운다.
예로부터 구도자들은 깨달음을 얻는 방편으로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을 중요시했다. 그래서 일까, 이슬람 경전 코란(koran)에서도 귀를 일컬어 ‘영혼의 문’이라고 불렀다. <중략> ㉤‘산은 산, 물은 물이로다(山是山 水是水)’ 그 깨달음이라는 것이 어쩌면 우리 곁에 가까이에 있는 것임에도, 멀리서 찾고 있는 어리석음을 안타까워했던가. 그래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일 것이다.
㉤은 성철 스님의 마지막 유언으로, 산이라는 말에 구애받지 않고 물이라는 말에 집착하지 않는, 즉 사물의 본질을 깨우칠 수 있음을 알려주는 불교의 가르침 중 하나다. 이는 육신의 눈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사물을 대하라는 가르침과 동시에, 자연이 하나가 되는 물아일여(物我一如)의 경지를 위한 수행 과정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작가는 인간의 어리석은 잣대, 즉 편견을 넘어 사물 그 자체를 바라보라는 교훈을 제시하며, 삶의 이치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음을 강조한다.
㉥깨달음이란 본래 비어있는 곳에서 이뤄진다(唯道集虛)했던가. 무엇을 깨우쳤는지...살아가면서 훈장처럼 얻은 건망증으로 스스로를 비워버린 어머님과 겨울산은 얼마 쯤 닮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럴지도 모른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일컬어 공(空)이라 한다. 공(空)이란 ‘내실이 없다. 근거가 없다. 부질없다.’ 등의 뜻하지만, ‘텅빔’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텅빔’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무한하게 담을 수 있는 가능성과 시작을 뜻하며,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환경과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는 융통성과 관용을 의미한다. 그것은 ㉥의 시작과 변화를 필두로 무한의 가능성으로 나아가는 도전 정신으로 볼 수 있다. 작가는 스스로를 비워버린 어머니와 겨울 산을 적절히 매치하여 고난과 역경을 대하는 삶의 자세와 비움의 철학, 그 가능성에 대해서 깊이 있게 사색하려 한다. 그것은 자연 그대로의 재현이 아니라 자연을 매개로 절대적 정신을 이끌어내려는 그만의 인식과 철학임에 분명하다.
3. 「헛꽃(假花), 그 슬픈 꽃 이름」
모든 존재는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재능과 역량을 충분히 뽐낼 때 세계는 존재하고 인간의 삶은 유지된다. 아름다운 민들레를 꽃 피우기 위해 추하고 냄새나는 강아지똥을 필요로 하는데, 이는 곧 ‘희망은 낮은 곳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익숙한 깨우침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철쭉은 진달래와는 그 색깔부터가 다르다. 진달래는 꽃이 먼저 피고 잎을 피우지만(先花後葉) 철쭉은 꽃과 잎이 비슷하게 핀다. <중략> 진달래보다 늦었으므로 제 때 수정을 하기 위해선 색깔도, 향기도 더 짙어야 한다. ㉦철쭉 꽃잎 색깔과 향기는 화장기 진한 여자의 모습을 연상하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중략> 그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진짜 꽃 곁에 있는 ‘헛꽃’이라는 존재다. 헛꽃은 꽃이 아니고 잎이다. 꽃이 아니면서 꽃인 냥 약 보름동안에 자신의 몸을 진짜 꽃과 똑같은 색으로 변신하여 헛꽃(假花)를 피운다. 헛꽃을 피우며 유혹의 손을 내미는 괭이눈의 변신은 무죄이다.
작가는 ㉦와 같이 진달래와 철쭉을 대비하여 보여줌으로써 유혹하는 여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제시한다. 꽃과 잎이 비슷하게 피는 철쭉은 수정을 위해서 색깔도 향기도 더 짙은데, 그것은 생을 향해 달음질 하는 인간의 의지와 열정으로 해석된다. 게다가 그 꽃이 ‘헛꽃’이라는 놀라운 반전을 보여주는데, 꽃의 가면을 쓴 채 자신의 기표를 숨기는 헛꽃의 강열한 유혹이 매혹적이다. 그것은 ‘헛꽃’이 사치와 허영에 물든 타락된 실체가 아니라 치열한 생존 그 자체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꽃의 그림자임을 자처한 채 생존 법칙에 동화하며 살아가려는 움직임, 처절하고 눈물겨운 그들의 사랑이 아름답다.
백석에게 있어 자야는 그리고 버지니아에게 남편 레너드는 가화(헛꽃)와도 같은 존재들이다. 헛꽃은 종족보존이라는 마지막 본능적인 쾌락마저 포기해야 하는 꽃이다. 자신의 욕망마저 억제하고 30년간이나 버지니아를 지켜준 남편 레너드의 희생적인 삶은 헛꽃과 다름 아니었다. 태어난 생은 화려하지만 어찌 보면 그 자체가 고통이다. 헛꽃은 진짜 꽃의 생을 완성해준다. 없는 것 같으면서 있는 그림자와도 같은 존재이다.
백석을 사랑한 김영한과 버지니아를 지켜준 레너드는 ‘헛꽃’의 상징성인 희생적 사랑을 실천한 인물들이다. 김영한은 백석을 사랑하였지만 영원히 이별하고 말았고, 레너드는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버지니아 곁을 영원히 지켜주며 자신을 내던졌다. 자신의 쾌락마저 포기한 채 사랑하는 이의 곁을 지키고자 했던 그들의 희생적인 삶이 마치 ‘진짜 꽃’의 생을 완성해주는 ‘헛꽃’의 그림자와 닮았다. 이를 두고 작가는 ‘헛꽃은 살아온 흔적이 슬프도록 아름다운 사람의 뒷모습과 닮은 꽃이다’고 지칭하며, 자신을 비우고 사랑하는 이의 토양이 되어준 그들의 희생정신이 아름답고 고귀하다 말한다.
Ⅲ. 나가며
오늘날 예술은 내용과 형식의 완연한 일치가 아닌 감각적 소산을 중심으로 한다. 이성의 전복, 형식이나 장르를 파괴한 예술 작품들이 속출하면서, 주관적이고 감정이 예술의 주요한 맥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예술이 개인의 감정 배설이나 정화의 목적만이 아니라 사회의 목적이 조화되어야함을 감안할 때, 감각과 사유 사이의 매개로 완성되어야함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비록 예술이 감각적인 방식이나 표현을 전제로 한다고 하더라도 보편적인 진리를 전달하는 데에 목적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수필의 경우 일상적인 삶을 토대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전달하는 장르적 특성상, 감정만을 호소하는 우를 범하기에 매우 쉽다. 간혹 자신의 경험을 열거하거나 관념적인 생각만을 나열한 수필을 만나게 되면, 작가의 숨은 의도와 생각을 들춰보는 묘미가 없어 쉽게 책을 덮고 만다. 수필이 작가 자신의 경험을 매개로 쓴 것이긴 하나, 감정적인 소산물만으로는 독자들의 감동과 울림을 이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의 감각화된 정신을 바탕으로 미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작가의 인식과 철학의 정립이 중요하다.
앞선 논의를 바탕으로 조관형의 수필을 살펴보면, 일상적이고 감각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보편적 가치를 이끌어가려는 작가의 의도가 빛나는 작품이라 평가하고 싶다. 먼저 「어머님은 통화 중」 은 자신의 어머니를 통해 인간 내면의 상처와 이에 대처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며, 「알았다 다 알았다아 (벌재-저수령(5.3km)」 는 인간과 자연을 매개로 번뇌와 고통의 인간사를 돌이켜보는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삶의 인식과 태도를 깊이 있게 성찰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헛꽃(假花), 그 슬픈 꽃 이름」 은 진정한 사랑의 의미와 고귀하고 아름다운 희생정신을 ‘헛꽃’에 비유한 작품이다. 자신을 비우고, 타자의 배경으로 남아 생의 토양이 되고자 했던 그들의 희생과 사랑을 숭고하게 그려낸다.
이에 필자는 조관형의 수필을 조명하며, 자연과 인간의 조화, 대상과 대상의 융합, 형식과 내용의 적절한 배합이 삶과 예술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였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앞으로 조관형 씨가 감정적 절제와 이성적 현현이 적절히 배합된 작품들로 독자의 정신을 깨우고, 가슴을 울리게 되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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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구경꾼도 칭찬
받을수있다는것
멋진 구경꾼이되어야 겠습니다
삶의 멋도 소통, 문학도 작가와 독자의 소통이 중요하지요. 하하
잘 생각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