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출애굽기 37:17-29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성막을 건설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먼저 지은 것은 지성소에 모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증거궤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성도가 믿음의 집을 지을 때 그 마음의 중심인 그 주인의 자리에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그 마음의 중심과 주인의 자리에 자신이 주인으로 있는 자들입니다.
믿음은 그 주인의 자리에 있던 내가 종의 자리로 내려가고 진짜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기초를 반석 위에 놓는 것입니다. 아무리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인 열심과 행위인 예배나 헌금이나 기도나 봉사가 대단해도 자신을 십자가에 부인하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그 반석 위에 지은 믿음의 집이 아니라 자신이 여전히 주인으로 있는 그 모래 위에 믿음의 집을 지은 것이라면 목사 장로 권사 집사여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주인으로 있는 사람들의 종교적인 열심과 행위는 전부 다 자신의 의를 위하 자아숭배와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인으로 있는 그 인본주의 위에 가짜 믿음의 집을 짓는 가짜 그리스도인들은 뭘 못하겠습니까? 십자가에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가짜인지 진짜인지는 십자가에서 드러납니다. 평상시에는 믿음이 있는 것 같아도 십자가를 만나면 믿음의 실력과 진위가 드러나는 겁니다.
가짜는 이렇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기쁨과 만족과 이익과 뜻과 감정과 의를 위해서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얼마든지 하는 겁니다. 사실은 자기 마음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기쁨과 만족과 영광을 위해서 자신을 부인하고 희생하고 낮추고 버리고 고난을 받아야 하는 그 십자가의 길과 순종은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무얼 기뻐하실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이런 것은 아예 없는 겁니다. 이 시대의 교회에는 예배와 예물을 드리며 주여 주여 하는 성도들은 많고 말하는 것을 보면 다 믿음이 있어 보이지만 시험과 고난을 만나고 어떤 일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뜻을 찾고 기쁨을 구하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두드리며 십자가와 순종의 길을 가는 성도들은 소수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은 무얼 말하겠습니까? 십자가를 만나 회개하고 거듭나 하나님을 그 마음과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한 성도들이 실제로는 적다는 것입니다. 이게 문제인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냉철하게 돌아보고 확인해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나는 내 마음의 지성소에 주인으로 모시었는가? 그것을 어떻게 확인을 하겠습니까? 내 삶에서 나를 십자가에 부인하며 내가 원치 않아도 말씀에 순종하는 십자가의 믿음으로 사는 것으로 확증하는 겁니다.
본문은 성소에 둘 등잔대와 분향단에 관한 말씀입니다. 등잔대는 떡을 진설하는 떡상의 반대편인 성소의 남쪽에 두고 분향단은 지성소와 성도를 가로막고 있는 그 휘장의 가운데 앞에 두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의 모든 기구를 하나님이 말씀하신 방법대로 만들어야 합니다. 등잔대는 밑판과 줄기와 잔과 꽃받침과 꽃을 연결해 한 덩이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분향단은 조각목으로 만들고 뿔을 순금으로 싸고 금테를 두르고 금테 아래 양쪽에 금고리를 만들어 채를 꿰어 이동할 수 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관유와 정결한 향도 만들어야 합니다.
등잔대와 분향단과 관유와 향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십자가에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가야 하는 성도들의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나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원치 않아도 하나님이 기뻐하고 만족하는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내 만족이 아니라 아버지의 기쁨과 뜻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것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 안에 거하고 너희가 내 안에 거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그 하나 됨은 오직 내가 죽고 내 안에 주님이 사시는 십자가의 은혜와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믿음의 길을 가셨듯이 내 죄를 대속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는 것도 예수님처럼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십자가의 좁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등잔대는 진리와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한 덩이로 만들라는 것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주님과 한 몸으로 연합하여 예수님처럼 진리와 생명의 빛을 비추이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분향단도 자신을 십자가의 제단에서 희생 제물로 분향하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동시에 주님의 그 십자가를 믿는 성도도 주님과 동일하게 십자가의 제단에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로 분향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등잔대와 분향단은 성도가 십자가에 자신을 부인하였을 때 나오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받드는 순종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여러 가지로 표현을 하셨습니다. 빛과 소금, 착한 행실, 혼인 예복, 흰 옷, 기름과 등불, 달란트로 장사하는 것, 반석 위에 집은 짓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것, 그리스도의 향기와 편지라고 하였고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는 죽은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이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의 기구들은 내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인 동시에 그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이 세상에서 십자가에 자신을 부인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성도들의 십자가의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하신 말씀으로 증언한다면 성도는 구원을 받았으면 구원을 받은 자답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받았다고 의심하지 않으면서 구원을 받은 자의 삶에 나오지 않으면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밖에는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쉽게 되는 게 아닙니다. 지식으로 다 알고 있어도 잘 안 되는 겁니다. 그 마음과 영에서는 자신을 주인으로 숭배하는 교만하고 이기적인 육신의 자아가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많은 성도들이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자신을 부인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들은 적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청함을 받은 자들은 많아도 택함을 입은 자들은 적다고 하셨고 십자가의 좁은 길을 가는 이들은 적다고 하신 겁니다.
정말 나를 십자가에 못을 박는다는 것은 힘든 알입니다. 그만큼 내 안에서 주인노릇 하는 타락한 육적 자아는 대단하고 강한 것입니다. 그리고 교활하고 악한 마귀가 생각과 감정에 붙어 사람의 마음을 조정하고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하게 순종하지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감정을 자극하고 자존심을 부추기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단단하게 굳어지고 교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과 만족과 영광을 버리고 자신의 감정과 뜻과 만족을 선택하는 겁니다. 영적인 삶을 버리고 육신의 길을 가는 겁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마귀에게 끌려 멸망의 길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마귀를 멸하러 오신 겁니다. 마귀에게 붙잡혀 한 평생 육체와 죄에 종노릇하며 지옥으로 가는 자들을 그 십자가의 대속과 은혜로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십자가에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으면 십자가에 대한 그 은혜와 지식이 아무리 있어도 아무 소용도 없는 것입니다.
올림픽에서 우승을 해서 시상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국기게양식까지 마쳐도 나중에 경기 규칙에 어긋나는 불법이 드러나면 박탈을 당합니다. 누구도 그 사람을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논문을 쓸 때에도 정직하게 쓰지 않으면 그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아도 나중에는 그 학위가 취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성막을 건설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는 믿음의 집을 지어야 합니다. 내 죄를 대속해주신 주님의 그 십자가에 나를 날마다 부인하고 주님이 주인으로 사시는 그 십자가의 길만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믿음과 그 길 외에는 하나님을 모신 집으로 지어져가며 구원을 이루어가는 다른 믿음은 없습니다. 십자가에 나를 부인할 때 우리는 내 의지와 감정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말씀에도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고 멸시하는 사람을 용서하고 나를 낮추어 다른 사람을 높이고 섬기고 끊을 수 없었던 죄를 끊어내고 죄와 싸워가며 하나님이 기뻐하는 순종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십자가에 대하여 말씀을 들어도 끝내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십자가가 없는 가짜 믿음을 가지고 넓은 길을 가는 성도들이 훨씬 더 많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믿음 같아 보였어도 심판대 앞에 가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주여 한다고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나를 십자가에 부인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등잔대의 빛과 분향단의 향기가 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등잔대의 그 불과 분향단의 그 향연은 다 기름과 향을 태우고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을 다 태워 없애 빛과 향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그런 것입니다. 내가 죽어 없어져야 주님이 내 안에 사시고 말씀에 순종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어둠의 세상에서 예수님의 생명의 빛과 향기를 나태내고 천국의 빛과 향기를 발산하는 것입니다.
말은 쉬어도 십자가를 삶으로 살아내는 것은 죽을 때까지 어렵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 길만을 가야 합니다. 잘 안되어도 넘어지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십자가의 길만을 가야 합니다. 이 십자가의 길은 아주 고상하고 우아하게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험한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험한 길을 고상하고 우아하게 갈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싸우며 가는 겁니다. 자신과 싸우며 죄와 싸우며 세상과 마귀와 싸우며 가는 겁니다. 죽을 때까지 말입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마시고 십자가를 단단히 붙잡고 그 십자가에 날마다 나를 부인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 십자가의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로 나타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