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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이야기 스크랩 봉암서원 이야기
아라 추천 0 조회 32 14.09.07 16: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봉암서원(鳳巖書院)
소 재 지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매곡1리 559번지
건 축 주 :  안동 인근 사림
건축시기 :  1802년(순조 2)
중건시기 :  1928년, 1962년
훼철시기 :  1868년(고종 5)

건축 이야기
이 서원은 1800년(정조 24) 김굉, 남범구 등이 발의하여 1802년(순조 2) 10월에 풍산현 신안(현재 안동시 풍산읍 매곡리)에 봉암사(鳳巖祠)로 창건하고, 네 분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 뒤 1868년(고종 5) 대원군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1928년에 남인수의 주선으로 신안·안곡 양문의 협조를 얻어 강당과 주사 등 일부를 짓고 세덕사(世德祠)로 복설하여 당장 및 유사를 선임해 왔다. 1962년에 유림의 공의로 묘우와 전사청 등의 건물을 완성하였고, 1964년에 도내 유림 800여 명이 도회를 열어 봉암서원으로 승격하였다.

건축 구성
묘우인 상현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내부에는 전면 중앙에 주향인 허영정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좌측에 유유헌 선생, 우측에 난재, 고암 선생의 위패가 배향되어 있다. 강당인 람휘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원 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동재인 숭덕재와 서재인 광업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으며 유생들의 숙소로 사용하고 있다. 전사청은 정면 2칸, 측면 1칸이며, 주소는 口자형 와가로 이루어져 있다.
상현사, 람휘당, 숭덕재, 광업재, 전사청, 고직사

현판
상현사(尙賢祠)
남휘당(覽輝堂)
광업재(廣業齋)
숭덕재(崇德齋)

 

주향자
- 남응원(南應元, 1539~1611)
자는 인중(仁仲), 호는 허영정(許穎亭), 본관은 영양이다. 허영정은 자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모상을 당하여 6년 동안 무덤 곁에 여막을 얽어 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런 뒤에도 어버이 묘소가 바라보이는 자리에 정사를 지어 거처하면서 종신토록 추모의 정성을 한결같이 하였다. 평소에 항상 가묘를 깨끗이 쓸고 아침 저녁으로 참배했고,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상식을 폐한 적이 없었다. 제사에는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정성과 공경을 다하여 몸소 받들었다. 임진왜란에 왜적이 침입해 오자 온 마을이 크게 놀라 경황이 없는 중에도 조용히 사당과 묘소를 살폈다고 한다.

선조 때 지방의 사림들이 그의 효성과 행실을 조정에 알려, 임금이 관직과 포상을 내렸으나 실행이 소문에 미치지 못한다 하여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 뒤 학봉 김성일이 또 그의 효행을 조정에 올렸다. 1675년(숙종 1)에 정려가 내려지고, 통훈대부 사복시정에 증직되었다.

옛 선비들은 당호나 정자에 자신의 정신 세계를 담아 이름을 붙였다. 그런 의미에서 ‘허영정’이란 정자의 편액은 자기 자신에 대한 다짐이요. 그 후손들에게 내리는 경계의 의미이다. ‘허영’은 요임금이 그 신하인 허유(許由)에게 천하를 내주려 하자 허유는 거절하고, 자신의 귀가 더러워졌다고 하여 영수(潁水)에서 귀를 씻었다는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허영정의 지극한 효성과 그 정신 세계는 이후 후손들에게 가학의 전통으로 전해지고 있다.

- 남융달(南隆達, 1565~1652)
자가 현언(顯彦), 호는 난재(懶齋)로 허영정의 둘째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모습이 범상치 않아 여느 아이들과 달랐으며, 성장해서는 스스로 알아서 책을 읽고 글을 지었다. 여러 차례 향시에 합격했으나 과거에 실패하여 한창 나이에 과거 공부를 버리고 자질(子姪)을 가르치는데 전심하였다.

손수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모두 베껴 그들에게 주었고, 자제들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소학』을 우선으로 했으며, 『중용』에 “남이 한 번 읽으면 나는 백 번을 읽고, 남이 열 번 읽으면 나는 천 번을 읽는다.”는 자세로 공부에 임할 것을 강조하였다.

뒤에 훌륭한 자제들이 배출된 것은 그의 이 같은 열성적인 훈도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영양남씨 족보를 편찬하면서 관련되는 곳을 일일이 탐방, 자료를 상고하여 상하 8백 년 간 가문의 내력을 밝히기도 하였다.

한편 어버이 섬기는 정성에 이르러서는 일반 사람들이 미칠 수 없는 바가 있었다. 13세 때에 이미 선조들이 효행으로 포상 받은 문서를 모두 취하여 소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임진왜란에 공사 문적들이 모두 사라지는 판국에도 온전히 보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피난길에 처자식은 돌보지 못한 채, 위협을 무릅쓰고 부모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시니,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 그 소문을 듣고서 찬탄해 마지않았다.
맏형이 죽자 부모의 상에 여묘살이를 하며, 3년 동안 아예 출입을 하지 않았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났을 때, 난재는 용궁(龍宮)에 우거하고 있었다. 그 변란 소식을 듣자 분격하여 의병을 일으켜 그들의 마음을 격려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그 어려움을 범할 계획을 세웠는데, 강화했다는 소식을 듣고 파하였다. 그때 「의청약속(義廳約束)」(9개 조항)을 지었다. 이 한 두 가지의 일에서 난재의 충효의 마음가짐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만년에 풍산 북쪽 광야 가운데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여 신안의 터전을 연 시조가 되었다. 그 후 자손들이 연이어 명성을 이루었다. 특별히 통정대부 절충장군(折衷將軍) 행용양위부호군(行龍?衛副護軍)에 제수되었다. 유고는 시집과 부록으로 단권인데, 만시와 자제들에게 보낸 편지글이 대부분이다.『신안세고(新安世稿)』에 들어 있으며, 계당 류주목은 그 서문에서 난재의 순실한 행동이 크게 가문을 진작시켰다고 평가하였다.

- 남급(南?, 1592~1671)
자는 탁부(卓夫), 호는 유유헌(由由軒)으로 남융달의 둘째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여섯 살 때 또래들과 놀다가 한 아이가 웅덩이에 빠지자, 다른 아이들은 모두 놀라 달아났으나 남급은 재빨리 긴 장대를 가지고 와서 웅덩이 속에 던져 빠진 아이가 타고 올라올 수 있도록 해 준 일이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사마공의 ‘아이가 항아리에 빠지자 항아리를 깨트려 구한 일화’에 견주었다.

임진왜란을 겪은 뒤라 서책이 거의 없어, 늦도록 취학을 못하다가 다른 아이가 배우는 곁에서 어깨너머로 듣고 먼저 깨치곤 함에 그 조부 허영정은 기뻐하여 책을 마련해 가르쳤다. 학업에 분발하여 19세에 경시에 합격했으나 광해 무렵 어지러운 세상에 나설 뜻이 없어, 10여 년을 학문에 잠심하다가 인조반정 후 비로소 과거를 보았다.

우복 정경세가 그의 문장을 보고 감탄하기를 “이 사람은 문장에 능할 뿐만 아니라 성리학 공부도 적지 않다.”고 하며 그 아들과 함께 공부하도록 하니, 이로부터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1624년(인조 2) 사마시에 합격한 후, 경기전참봉 등을 거쳐 사옹원봉사로 있을 때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났다. 청나라의 갑작스런 침략으로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갈 때 유유헌은 일개 사옹원봉사의 신분으로 임금을 호종하였다. 이때 어렵게 종이를 구해 그날그날 조정의 형편과 난리의 상황을 소상히 기록으로 남겼는데, 바로 『병정일기(丙丁日記)』이다.

『병정일기』는 1636년(인조 14) 12월 12일 청나라의 침공에서부터 이듬해 4월 4일 강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왕을 호종하면서 일어난 모든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일기의 마지막 부분에 대의를 위해 순국한 인물과 신하된 도리를 저버린 간교하고 비겁한 무리들의 추악상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의분과 탄식을 자아내게 한다.
그 후 궁궐로 돌아와 종묘직장에 제수되어 묘우를 수리하고 신주를 봉안한 뒤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조정에서 호종한 사람을 위하여 특별히 과거를 열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로부터 벼슬길에 뜻을 끊고 「농잠요어(農蠶要語)」를 지어 자신의 뜻을 나타냈다.

1649년(인조 27) 사림에서 학봉 선생의 문집을 간행할 때 교정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1652년(효종 3) 벼슬에 뜻이 없었지만 90세 고령인 아버지의 봉양을 위해 의흥현감에 나아갔다. 그러나 몇 달 만에 부친상을 당하여 돌아왔다.

만년에 경전에 잠심하여 침식을 잊을 정도였고, 후생들이 배움을 청하면 명료하게 깨우쳐 주었다. 집 앞에 반달 모양의 연못을 파고, 그 가운데 집을 한 칸 얽어 유유헌이라 이름하고, 세속을 벗어난 초연한 삶을 누렸다. 1691년(숙종 17) 남한산성에 호종한 공으로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유고는 3권으로 『신안세고(新安世稿)』에 실려 있다.

- 남천한(南天漢, 1607~1686)
자는 장우(章宇), 호는 고암(孤巖) 으로 남융달의 손자요, 남급의 아들이다. 1607년(선조 40) 풍산에서 태어나 1686년(숙종 12)에 작고하니 향년 80세였다.

청수한 의표에 가정의 가르침을 받아 일찍 학업을 이루어, 1630년(광해 8) 사마시에 합격, 1645년(인조 23)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지평·장령 등을 거쳐 1675년(숙종 1) 집의·대사간에 승진하고, 이듬해부터 여러 차례 승지를 역임한 뒤, 1680년에 호조참의가 되었다. 그 사이에 그의 깨끗하고 곧은 성품 때문에 권세 있는 이들의 꺼림을 받아 외직으로 내려가기도 했고, 벼슬을 버리고 10년 동안 향리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고암은 예론에 밝았는데, 당시에 민신이 병든 아버지를 대신하여 복을 입으려는 ‘대부복상(代父服喪)’에 대해 그 같은 행위는 임금과 어버이를 업신여기는 패륜이니 바로잡아 인륜을 밝혀야 한다고 상소하였다.

결국 숙종에게 받아들여져 대부복상을 주장했던 이들이 귀양가게 되는 등 당쟁이 심화되어 갔다. 특히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고암은 장령으로 복제 문제로서 조야를 술렁거리게 했다. 기해예송에 의해 이번에는 인선왕후의 상사에 조대비의 복제 문제가 화두였다. 서인의 대공설에 남인들은 기년설을 주장하여 양쪽이 팽팽히 맞서 있었다.

결국 경상도 유생 도신징의 상소와 서인들이 적용한 예의 일관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어 숙종은 남인의 기년설을 받아 들였다. 이것이 갑인예송이다. 그의 예에 관한 글들은 모두 자신은 물론 당시 영남 남인의 예송에 관한 입장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그 뒤 고암은 숙종의 깊은 신임을 받았으나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호조참의로 재직 중 벼슬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유고는 단권으로 『신안세고(新安世稿)』에 실려 있다.

안동 > 풍산권 > 매곡리
-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있는 마을
매곡리는 풍산현에 속했으나 1895년 안동군 풍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매남리, 우안동, 번곡을 합하였다. 매남리와 번곡의 이름을 따 매곡(梅谷)이라 하였다. 1934년 풍산면에 편입되었고, 1995년 안동시 풍산읍 매곡리로 되었다.

매곡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고, 매곡 1리는 새터[新基], 밤실[栗里], 어란, 나바우 등 4개 마을이고, 매곡 2리는 매날·매산(梅山), 번곡·번거곡촌(蕃居谷村), 새절골[新寺谷·新寺洞], 미질, 막골마을이 있다.

새터는 매곡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조선 효종(孝宗) 때 남씨(南氏)들이 살면서 신안동(新安東)이라 하였다. 마을 앞에는 봉황산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이 산에 응고개가 있었으나 홍수 때 유실되어 도로가 되었다.
응고개는 새터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의 고개였으며 원님 행차가 드나들었다 하여 원고개라고도 한다. 고개 안쪽이 늪지대여서 폭우가 쏟아지면 지곡댁(枝谷宅)이 자기 밭으로 물이 넘치는 것을 막기 위해 응고개를 호미로 팠더니 차차 파여서 고개가 없어지고 평평한 도로가 되었다고 한다.

매곡천변에 있는 마을이 강변마이다. 강당들이라는 곳은 새터 앞에 있는 들이다. 그곳에 봉암서원이 있었는데 봉암서원 강당의 앞에 있는 들이라는 뜻이라 한다.
밤실은 새터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며 아랫밤실과 윗밤실로 나뉜다.

매날은 새터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매곡에 속했다.
금동들은 강당과 매날 사이에 있는 들이며, 번곡은 매날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이 마을에 명천(明泉)이란 샘이 깊어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새절골은 밤실 북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17세기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옛날 이 마을의 북서쪽 산 밑에 조그마한 절이 있었다 하며, 진성이씨(眞城李氏) 집성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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