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0일 수요일
성동구청 기독신우회 예배 메시지
성경 본문: 이사야 42장
설교 제목: 예언자는 무엇을 보았는가?
이사야 42장을 읽으면서 예언자가 본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들었다. 그것은 일종의 비전이며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사야 42장은 인간 창조의 확장판이며 설명서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바로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다. 예수께서도 예언자처럼 그렇게 늘 좋은 상태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현재의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회개란 메타노이아이다. 마음을 바꾼다는 의미다. 마음을 바꾼다는 말은 바라보고 해석하는 새로운 눈이 열려서 ‘좋지 않은 상태’에서 ‘좋은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서 나타나는 ‘생명현상’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생명활동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며 그것을 ‘새로운 창조’ 또는 ‘재 창조’라고 부를 수 있다. 나는 전에 회개를 ‘하나님과 더불어 춤추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 의미는 새로운 스텝을 배운다는 뜻이었다. 회개는 생명활동을 위해서 죽음의 스텝을 버리고 생명의 스텝을 배우는 과정이다.
다시 이사야 42장으로 돌아와서 예언자가 본 것을 정리하면, 그는 하나님의 창조활동을 보았다. 그리고 그 위대한 임무에 동참하라고 위임받은 인간의 본래적 영광을 보았다. 그리고 그 앞에서 펼쳐질 미래와 전망을 보았다. 그것은 모든 피조물이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그야말로 ‘충만’ 그 자체다. 하나님이 창세기에서 충만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이사야 42:10~13이 그 모습이다.
예언자는 ‘좋은 상태’를 본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동시에 ‘좋지 않은 상태’를 보았다. 그것은 현실이다. 좋은 상태와 좋지 않은 상태라는 말을 키워드로 정치학 입문서를 쓴 사람은 성균관대교수 김병욱 박사다. 그의 책 ‘지탱’이 그것이다. 정치도 인간의 생명활동에 대한 이야기라면 결국 좋지 않은 상태를 좋은 상태로 변화시켜 가는 과정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예언자란 좋은 상태가 무엇인지를 본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는 좋지 않은 상태인 현실을 보고 안타까워하고 그에 대하여 변화와 회개를 촉구한다. 그것이 이사야 42장의 후반부다.
예언자는 무엇이 문제라고 진단하는가? 이사야 40장 이후로부터 마지막까지 본문을 보면, 반복되는 일종의 패턴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실 것에 대한 약속과 격려, 우상숭배에 빠지지 말라는 경고,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 즉 바른 교훈에 귀를 기울이라는 권면이다. 이 내용이 마치 시편처럼 계속 반복되며 심화된다. 그래서 이사야 40장 이후를 나는 ‘예언자의 시편’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사야 42장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주제는 (1)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와 약속, 그리고 그 일이 이루어지는 세상에 대한 전망이며, (2)현실에서 그 기대가 무산되어 답답한 심정과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기 백성을 일깨우려는 회개 촉구가 그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문제의 원인이 바로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한 것에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 그 주요한 내용이다. 그런데 역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야기가 좋은 상태에 대한 언급과 회개를 촉구하는 것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언자는 어쩌면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단지 규칙이나 규정을 주기만 하면 해내는 존재라기보다는 그가 마음으로 바라보고 그려야 할 실체에 대한 그림이 먼저 강력하게 그의 마음에 새겨져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진정한 회개는 마음에 깨우침과 각성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런 점에서 예언자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그 사역을 시작하는 설교를 하실 때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셨다. 그것이 이사야 61장이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사명을 깨달았을 때 그의 마음에 울려 퍼진 구절이 바로 이사야 42장 6절과 7절이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이렇게 보면 신앙생활이란 늘 ‘좋은 상태’를 바라보고 기대하면서 현실의 문제, 즉 ‘좋지 않은 상태’를 개선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일을 할 수 있는 동력은 가장 좋은 상태를 만드시고 완성하실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경배하고 바라볼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 아닐까?
하지만 우상숭배는 하나님 앞에서 이 두가지를 바라보면서 내적인 혁명을 이루지 못하게 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바라는 바를 자기 자신의 노력과 방법으로 끊임없이 반복하여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자기폐쇄적 행동이다. 김병욱 박사는 근대 서구 정치학과 인문사회학의 근저에는 ‘자기폐쇄회로’가 깔려 있다고 지적했다(지탱, 18쪽). 그런 점에서 우상숭배는 자기 고집에 사로잡힌 인간의 자기 파괴적인 행동이며 그 일에 관여하면 그는 하나님의 본래적 소임을 결코 이룰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언자는 끊임없이 우상숭배의 허무함과 어리석음을 지적한다. 그 지적은 때로는 조롱의 형태를 띤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예언자가 본 것과 들은 것을 마음에 새기면서 우리도 그것을 볼 수 있도록 함께 꿈을 꾸어야 한다. 시편에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했다. 그 의미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과 생명의 호흡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시는 것처럼 우리가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의 약속과 기대인 ‘좋은 상태’ 또는 본래적 소임을 마음에 그리고 그것을 입으로 고백하고 찬양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마침내 그 예언이 성취된 ‘좋은 상태’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것을 우리 주 예수께서는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 아닐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