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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구원 얻는 믿음의 수학공식>의 줄거리:
구원 얻는 믿음의 수학공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인격에서 수학공식이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빼기 하나님은 제로', 즉 '예수 - 하나님 = 0' 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지정의의 속성은 그 껍데기 안을 하나님의 지정의로 채우고 있었습니다. 이 공식에서 '예수'의 자리에 '나'를 대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그러므로 '나 빼기 하나님은 제로'라는 공식이 성립하고 유지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구원 얻는 믿음의 수학공식
(요한복음 14:8~14)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구원 얻는 믿음의 수학공식>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구원 얻는 믿음의 수학공식’
구원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이 공식은 믿음의 주이시고 구원의 주이신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성립합니다. 즉 예수님의 인격을 믿고 그 인격성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것을 간단한 수학공식으로 표현해보면 “예수님 - 하나님 = 0”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단들의 특징은 교주 자신이 하나님임을 자청합니다. 반면 정통 진리를 전하는 자들의 특징은 내게서 일어나는 일들이 나를 만나는 사람들에게서도 동일하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도 본문 12절에서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빌립에게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빌립이 예수님과 똑같은 상태가 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 하나님 = 0”이라는 공식은 나에게도 적용 되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공식을 삶에 적용하여 예수님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나에게서도 일어나는 것이야 말로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단의 특징은 교주 자신이 홀로 하나님이고 성령이라고 주장합니다. 교주를 순종해야 하는 대상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나만 하나님의 아들이고 너희는 하나님의 아들인 나의 말을 들으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와 반대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처럼 너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비단 이단뿐만이 아니라 대형교회를 보면 담임 목사님이 권력을 가지고 교인들과 구분되어 군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듣고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당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이 고스란히 다 이루어지기를 허락하셨습니다. 다만 메시아로써의 직분을 가지고 계셨을 뿐이지, 하나님의 아들로써 가지고 계신 모든 은총과 특권을 우리가 똑같이 누리기를 바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일어나야만 합니다.
얼마 전에 연세가 많으신 한 권사님께서 저희 집으로 전화를 하셨습니다. 당시에 제가 외출중이어서 집에 있던 아들이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묘하게 내용이 구체적입니다. 보통은 나중에 연락을 달라는 내용만 전해주면 될 텐데, 권사님이 이야기하시고자 했던 모든 내용을 아들이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권사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권사님께서 오히려 깜짝 놀라시며 아까 통화하지 않았냐고 되물으십니다. 권사님께서는 전화를 받은 사람이 저인 줄 아시고 아들에게 모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말씀하신 권사님도 그렇고 그걸 듣고만 있었던 제 아들도 그렇고 참 재미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걸어가고 있으면 뒤에서 아내와 어머니가 웃습니다. 걸음걸이가 똑같기 때문입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아내가 집안에서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면 돌아가신 장인어른의 걸음걸이가 떠오를 때가 있고 어떨 때에는 아내의 얼굴에서 장모님의 표정이 비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하신 것은 이렇게 닮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신 예수님을 통해 영이신 하나님을 연상할 수 있는 형상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가족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유사성 같은 것을 말씀하시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과 빌립이 마주하고 있는 현장에는 인격적으로 하나님이 실재하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인격성을 통해서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빌립을 마주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진실을 몰랐던 빌립은 8절에서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라고 눈으로 하나님 뵙기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마음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늘 부르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실제로 보여주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마치 구약의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강림하실 때에 구름과 불과 연기가 일어나고 산이 진동하고 우레가 울렸던 것을 연상하는 것과 같습니다. 빌립을 비롯한 제자들은 이렇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현상으로써 하나님이 나타나시길 기대했던 것입니다. 일상과는 현격하게 구분되고 차별화 된 하나님의 현현하심을 느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기대와는 다른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사건과 같은 특별한 사건을 통해서만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격을 통해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시내산에서의 자연현상을 통해서 나타나실 때는 선민과 하나님과의 인격적 연합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인격을 통해 하나님께서 현현하실 때에는 완전한 일체를 이루셨습니다.
인격이란 지정의(知情意)의 속성을 의미합니다. 생각하고 감정으로 느끼고 의지를 가지고 계획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지신 지정의의 속성은 껍데기와도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인격의 내부는 아버지 하나님의 생각과 느낌과 의지로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마마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에게 허락을 구하는 남성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남자와 결혼한 여자들의 정신적 고통이 심하다고 합니다. 남편은 껍데기와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분명 남편을 마주하고 있는데 그 내면의 생각과 판단과 계획이 모두 시어머니에게서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와의 관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집에 전화를 해서 엄마의 의견을 듣고 따라갑니다.
현실에서 이런 삶은 문제가 많지만 다만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파파보이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통해서 인격을 채우시고 표현하시며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화를 내시고 채찍을 들어 성전을 정화하실 때를 생각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스스로도 판단하시고 행동하실 수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인격을 비우시고 하나님의 인격에 의해서만 행동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가지는 것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독자적 판단에 의해 행동하셨다면 결과적으로는 똑같은 일을 하셨을지라도 하나님과의 연합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을 단편적으로 잘라서 순서대로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상태를 보십니다. 잘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분노를 느끼십니다. 그러나 그 분노를 표현하시지 않고 제거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십니다. 그러자 성전 상태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예수님에게 전달되어서 채찍을 들어 치심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정화뿐만 아니라 모든 사건과 상황에 대해 이렇게 행동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충분히 생각하시고 느끼시고 판단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인격을 제거하시고 하나님의 인격을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당면한 사건에 대한 대처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써 아버지와 똑같은 생각과 느낌과 판단을 가지고 계셨던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점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개별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어디까지나 아버지 닮은 아들이지 아버지와 하나인 아들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치 껍데기와 같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인격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인격이 가득 채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도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마보이를 남편으로 둔 아내는 남편을 대하면서도 시어머니를 마주하듯이, 파파보이인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대하면서 하나님을 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에는 예수님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표현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서두에서 말씀드렸던 “예수님 - 하나님 = 0”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인격이 하나님으로 채워졌으니 하나님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모습이 되어야만 합니다.
세상에는 머리가 좋은 사람도 있고 상대적으로 덜 좋은 사람도 있습니다. IQ가 90인 사람의 생각과 IQ가 180인 사람의 생각은 차이가 벌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공식대로라면 우리의 IQ가 몇인지는 상관이 없습니다. 내 것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IQ가 아무리 낮더라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인격을 받아들여서 살아간다면 가장 지혜로운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바로 이러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우리에게서도 똑같이 일어나기를 바라셨습니다. 이것을 이루셨기에 믿음의 주가 되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의 생애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나타내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 - 하나님 = 0”으로 살아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에서 하나님을 빼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지정의는 오직 하나님의 인격을 담는 껍데기로써만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공식의 예수님의 자리에는 내가 대입되어야만 합니다. “나 - 하나님 = 0”의 삶도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구원받은 상태입니다.
이 믿음은 인격적으로 내 마음을 예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자리에 나를 대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생각과 감정과 의지라는 지정의 속성을 스스로 포기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을 다시 살펴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을 가진 자라면 이 말씀에서 예수가 나로 바뀌어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내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나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인 나도 그와 같이 행하고자 합니다. 이게 우리 모두의 믿음의 고백이 되어야만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같은 장 30절에서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또한 나에게 적용해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께 듣는 대로만 심판합니다.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려 하기에 내가 하는 심판은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으로 채워져야만 하는 우리에게 배우자나 자녀처럼 사랑할 대상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말 그대로 서로 사랑하며 채우라고 주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서 하나님을 보이신 것과 같습니다. 배우자 앞에서 자녀 앞에서 하나님을 드러내 보이라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인격적 속성은 껍데기만 남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 채워져서 배우자와 자녀가 나를 통해 하나님을 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배우자나 자녀는 결코 자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나를 통해 하나님을 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설령 우리가 서로를 대할 때에 하나님을 대한다고 여길 수는 없을지라도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인격에서 비롯되는 표현을 통해 서로를 대면할 수는 있습니다. 자녀의 문제를 걱정할 때가 아니라 내가 문제라는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직장을 주신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대한민국에 태어나시게 하셨고 사람에 따라서 다른 나라로 이주하게 하신 이유도 같습니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의 공식에 나를 대입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곧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나 혼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예수님을 붙잡는 것이고 곧 예수님의 인격에 나를 대입하여 “나 - 하나님 = 0”의 공식을 이루는 것입니다. 나를 만나는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를 대면하는 상황이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쉽게 관찰됩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에 비행스케줄이 어긋나서 공항에서 2시간 정도를 기다린 적이 있었습니다. 창밖을 구경하고 있는데 직원들이 휴식을 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무슨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춤을 춥니다. 그러니까 이윽고 다 따라 웃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던 즐거운 감정이 다른 사람들에게로 옮겨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인격이 채워지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의지뿐만 아니라 감정까지도 우리의 인격에 채워지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추종하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감정과 동일하지 않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이 기뻐하실 때에 울고 있었고, 예수님이 슬퍼하실 때에 무관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23장 28절에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신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제자들은 또한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왜 우시는지를 몰랐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우신 것도 제자들은 이유를 몰랐습니다. 자기들 식으로 이해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11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정의를 하나님 아버지의 지정의로 채우시고 공생애를 사셨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었습니다.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 기적에서 하나님을 뺀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임하시는 껍데기이셨습니다.
산상수훈의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생각이 표현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뺀다면 예수님은 빈껍데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스스로의 인격을 포기하신 것은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를 비우신 결과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2장 6~8절에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
나사로의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사로가 죽어서 굴에 넣어져서 썩은 냄새까지 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현장에서도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시면서 스스로의 인격을 비우시고 빈껍데기가 되셔서 하나님의 인격을 담으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들어오시면서 나사로가 살아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과 일으키신 모든 사건에서 하나님을 빼고 나면 인격적으로 제로 상태이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스스로 행하신 것이 아무것도 없는 모습이야 말로 바로 타락 전 아담의 모습으로써 인간의 본래 모습이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스스로 판단하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판단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선악과는 판단을 상징합니다. 타락하기 전의 아담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음을 버리고 하나님과 연합하기를 선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하나님과 동일한 판단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인격을 비우시고 하나님의 인격을 받아들이심으로써 하나님 아버지 갖기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연합하여 일체가 되셨던 것입니다.
타락이란 곧 아담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인격이 빠져나간 상태입니다. 본래대로라면 인격적 제로의 상태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빠져나간 자리를 스스로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로 채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빠져나간 마음은 사실상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마치 좀비처럼 이 죽음의 상태에서 움직이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사람을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이며 살도록 지으셨습니다. 판단이란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기초입니다. 판단은 가치 기준입니다. 똑같은 인생이라도 어떤 사람은 길고 얇게 사는 것을 추구하고 또 어떤 사람은 짧고 굵게 사는 것을 추구합니다. 판단이 기초가 되어서 생각이 움직이고 감정이 활성화되고 의지가 작용합니다. 이에 따라 슬픔과 기쁨의 이유도 달라집니다.
말씀드렸듯이 본래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인격을 담아 하나님과 연합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빠져나간 마음은 껍데기가 되는 편이 나았습니다. 마마보이가 스스로 결단하지 못한 채 어머니와 연락이 닿기만을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이 빠져나간 자리를 스스로의 인격으로 채우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고 감정을 추구하고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많은 문학작품들이 거의 무신론적입니다. 추구하는 아름다움과 감동 또한 결국은 하나님을 대체하기 위한 좀비들의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 44절을 보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빠진 상태에서 인간은 차라리 껍데기 상태로 있었다면 에덴의 회복도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귀는 인간에게 세상을 기준으로 삼도록 유혹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대상이 돈입니다. 돈이 있으면 기쁘고 돈이 없으면 슬픕니다. 돈을 벌게 하는 일이면 좋은 일이고, 돈을 잃게 하는 일이면 나쁜 일입니다. 돈이라는 가치관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움직입니다. 또 이렇게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의지가 작동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결혼이 판단의 대상입니다. 좋은 배우자를 골라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판단을 가지고 행동하고 움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좀비와 같은 움직임으로는 결코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참된 기쁨과 만족이 주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기쁨을 의미하는 에덴에서 쫓겨난 것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 없이 이룬 일들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한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을 한 번 생각해봅니다. “예수님 - 하나님 = 0”이라지만 칭기즈칸은 하나님의 지정의가 없이도 몽골제국을 이루었습니다. 몽골제국을 세울 수 있었던 칭기즈칸의 인격적 능력이 돋보이게 됩니다. 스티브 잡스도 하나님의 지정의 없이도 세계 최대 기업인 애플사를 이루었습니다. 중국의 마윈도 하나님의 지정의 없이 알리바바라는 거대 기업을 만들었습니다. 세종대왕도 하나님의 지정의 없이 한글을 창제할 수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도 하나님의 지정의 없이 나라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관 아래에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물론이고 티끌 하나의 존재까지도 하나님의 주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못 본 사이에 벌어지는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칭기즈칸이든 스티브 잡스든 그들의 지정의에서 그러한 일들이 이루어지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선민에게 던지시는 화두이기도 합니다.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이룬 것처럼 보이는 모든 일들이 실제로 가치 있는 일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을 받아들여서 행한 일이 아니라면 그 일은 아무리 거창해보일지라도 실은 가치 제로로 느껴져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에서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면 어떤 것도 가치 없는 일로 여겨져야만 합니다. 이것이 선민이 가져야 할 믿음의 마음가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모시는 자들을 통해서만 세상을 움직이시지는 않습니다. 전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을 통해서도 섭리하시며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을 부러워하며 내게도 그런 일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는 것은 결코 올바른 선민의 태도가 아닙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시대의 교회 안에서도 쉽게 발견됩니다. 나의 지정의로 가득 찬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만을 부르고 있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선민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엄밀히 말해 선민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예수님 - 하나님 = 0”의 상태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적 속성은 껍데기였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모두 하나님이 채우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격이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격으로 채워지기를 자처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본래 인간의 모습이고 선민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난 큰 업적들의 가치를 분명히 파악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 일어난 일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무가치할 뿐입니다. 마윈의 알리바바라는 기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마윈의 지정의를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일이 가능하도록 허락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을 먹고 살게 살려하시는 방편으로써 마윈을 활용하셨을 뿐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볼 때에 마윈 자신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활용되었지만 정작 하나님을 갖지는 못했고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선민은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고 하나님과 연합할 수 없다면 차라리 거지 나사로와 같이 사는 것을 택할 것입니다. 이 가치의 중요성을 아는 것이 선민다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들이 이것을 깨닫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여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그 덕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이순신 장군이 왜적으로부터 나라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면 이들의 지정의가 구현된 것 또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입니다. 이들의 인격 바깥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한 결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지정의가 아닌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내게는 세종대왕과 같은 지혜가 없고, 이순신 장군 같은 용기도 없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집에서 설거지하고 밥하는 것에 불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가 하나님과 연합한다면 이 일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됩니다. 이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트럭에 가득 실린 흙보다 한줌 사금이 더 가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선민다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선민다움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지정의가 빠진 상태에서의 일도 일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연합하지 않은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무가치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 하나님 = 0”입니다. 이 공식은 나에게도 적용되어 “나 - 하나님 = 0”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그러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이단의 교주들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말입니다. 교주보다 더 큰 일을 행하는 자가 있다면 이단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이 말씀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행할 수 있다니 그럴 수는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 - 하나님 = 0”이라는 공식이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만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빼면 똑같이 0입니다. 예수님에게 나타난 일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일이고, 나에게서 나타나는 일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인격이 죽었음을 인정하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심지어 숟가락 들고 밥 먹는 일조차도 나의 뜻대로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순신 장군이 나라를 구하도록 섭리하시는 힘과 나에게 밥을 먹이시는 일을 하실 때에 들어가는 힘에는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풍랑을 잠잠케 하실 때나 바닷가에서 산책할 때에도 하나님의 힘은 똑같이 역사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에서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일들을 꿈꿀 필요가 없습니다. 밥을 먹는 작은 일에서부터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와 함께 밥을 먹는 가족들이 나를 통해 하나님을 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신앙인의 과제입니다. 나를 남북통일을 이끄는 주역으로 사용하시지 않는 이유는 내게 임하는 하나님의 힘이 적기 때문이 아니라 나를 통해 하실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애의 존재 이유는 이처럼 세상에서 큰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2절 하반부에서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신 것과 내가 더 큰 일도 하게 되는 것에 어떤 관련이 있다는 것일까요? 믿음은 예수님께 인격의 중심인 마음을 드리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 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따라 하나님께로 가게 되면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되고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이 기쁨과 만족을 누릴 때에 우리는 세상에 대해 원하는 것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예수님처럼 인격을 껍데기로 삼아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면 나의 껍데기 인격을 하나님의 인격이 채우게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 아버지로 채워졌을 때에 이루어지는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 느끼는 감정은 하나님의 감정입니다. 이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결단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한 것이 됩니다. 이것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로 채워지게 되면 이 땅에서는 더는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의 지정의는 껍데기가 되고 하나님의 지정의로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땅에서는 사람들이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면하게 하는 삶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구원 받은 자의 삶입니다. “예수님 - 하나님 = 0”의 공식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찬가지로 “나 - 하나님 = 0”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나를 채우실 때에 사람들이 나를 통해 하나님을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 믿음의 수학공식 안에서 나의 인격이 머물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를 위해 이 세상에 대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게 해주셔서 예수님을 따라 내 마음도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오니 하나님으로 채워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므로 세상을 향한 나의 지정의가 껍데기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지정의 내용이 채워져서 아버지와 연합하여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면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