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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안에서 만난 넘쳐흐르는 사랑
-성 베네딕토와 토마스 머튼을 통해 배우는 마음이 넓어지는 길- 박재찬 안셀모 신부 글
들어가는 말
우리는 가끔씩 여러 이유로 미워하거나, 짜증을 내기도 하고, 토라져 마음의 문을 닫기도 한다.
때로는 자신의 실수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거나, 심하게 자신을 자책하며 자존감을 잃어 버리기도 한다. 우리의 마음이 왜 이렇게 쪼그라드는 것일까? 지나고 나면 별 일도 아닌데 왜 이리도 속이 좁아지는 것일까? 결국 "나"라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일까?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 고 싶고, 존중받고 싶고, 성공해 더 많이 누리고 싶어하는 그 마음에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나"라는 것은 결국 사라지고 없어질 것이기에 “내가 없다”는 무아(無我)의 의식으로 들어가면 욕심낼 것도, 힘든 것도 없어 자유로워진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나는 있다. 고통 가 운데 있기도 하고, 평온함 가운데에도 역시 있다. 물론 죽으면 다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리 스도교적 의미에서 나의 영혼은 여전히 있다. "있음과 없음” 그 사이에서 우리는 어느 것도 명료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지금 나의 육신이 존재하지만, 때로는 정신 나갈 때도 있다. 마음은 그것을 원하지만 행동은 다르게 할 때도 있다. 때때로 나도 모르는 행동과 말을 하는 나는 누구란 말인가? 물론 그것도 나 자신이다. 어떤 이는 과거의 나에 묶여 있기도 하고, 지난 날의 상처 때문에 오늘을 살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지금 여기에 있지만 과거를 살거나, 미래에 대 한 걱정 때문에 오늘을 불안 속에 사는 이들도 있다. 그것 역시 지금 나 자신이다. 지금 여기 에서 오늘을 살고 싶은데,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복잡하게 얽힌 관계들 속에서 마음 편할 날이 없다. 우리의 마음이 힘든 이유 중에 하나는 나에 대한 집착과 더불어, 결국 거짓 자아를 내려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거짓 자아를 내려 놓고 그리스도의 그 마음으로 평화와 자유 안에서 살 수 있 을까? 어떻게 하면 좁은 나의 마음이 예수의 그 마음과 하나되어 넓어질 수 있을까? 외부의 자극에 흔들리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모든 이를 포용할 수 있을까?
베네딕토 성인은 수행 생활과 신앙생활에 나아가면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를 체험하게 될 것이 라고 하는데, 오랜 신앙생활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더 좁아지는 듯이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토마스 머튼은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사라질 때, 오히려 내 마음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넘어진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이 소고는 복잡한 관계 속에서도 점점 개인주의화 되고, 편리함 속에서도 많은 것을 누리지 만 정작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고 마음의 병을 알고 있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을 간직하며 살 수 있는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성 베네딕토와 토마스 머튼의 가르침 속 에서 마음이 넓어지는 길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들의 영적 가르침은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인간이 본래 지녀야 할 마음이 무엇이며 우리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마음을 성장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1. "마음이 넓다는 것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마음이 넓다는 것은 너그럽고 이해심이 풍부하고 관대하고 관용을 베풀 줄 알며, 자신의 이익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불필요한 감정적인 제약 없이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적 측면에서 마음이 넓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하나된 상태"를 뜻한다. 그리스도께 믿음을 두고 외부의 자극에 동요 되지 않는 평정심의 상태이며 그분의 자비로운 마음과 사랑의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와 하나된 마음이 될 수 있을까? 사도 바오로는 "그리 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립 2:5)라고 권고한다. 하지만 이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우리 마음은 때때로 옹졸하고 유치해지기도 하고, 다른 사람 들의 비난의 말에 상처 입어 닫혀 버리기도 하며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기도 한다. 또한 하느님의 뜻을 거슬러 죄를 짓게 되면 마음은 온통 죄책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럼 반대로 "마음이 좁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기 중심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하느님과 타 인을 향한 개방성을 잃어버리고 완고해진 상태를 의미한다. 성경에서 이러한 "완고한 마음”(히 브 3:7-8)에 대해 다루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평과 반항하며 하느님을 시험한 것을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다. 완고한 마음은 마음이 미혹 되고 빗나가 하느님의 길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안식에 들지 못하게 하며(시편 95:10-11),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할 만큼 융통성 없이 자기 뜻만을 관철시키는 태도(마르 10:5)이다. 토마 스 머튼에게 있어 좁은 마음은 "거짓 자아"(false self)에 갇혀 사는 것을 의미한다. 거짓 자아는 자기중심적 욕망 안에서만 존재하며 속은 텅 비어 있어 실체가 없는 존재이다. 결국 자신과 사 물을 움켜쥐고 여기에 집착하는 마음이 바로 좁은 마음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완고한 마음, 자기 중심적인 마음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간직하며 자연스럽게 용서와 자비 를 실천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 먼저 토마스 머튼의 마음의 이해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2. 토마스 머튼을 통해 배우는 마음이 넓어지는 길
2.1. 머튼의 마음(Heart)에 대한 이해
토마스 머튼에게 마음은 "모든 사람의 내적 진실의 뿌리요 원천이다" 그는 인격의 가장 깊 은 심리적 근원을 언급할 때 "마음"(heart)을 사용한다. 이것은 단순히 감정적 자리, 혹은 심리적 자아를 마주하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 자신보다 우리에게 더 친밀한 존재이지만 "아직 드러 나지 않은 미지의 심연" 곧, 그리스도를 마주하는 곳이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이 마음은 하느님 안에서만 참된 안식을 누리는 장소이며,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이 내적 중심에 숨겨 져 있다고 보았다. 마음 안에서 숨겨진 사랑의 원천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인정과 성공 등 외적 이미지에 집착하여 마음을 분열시키는 거짓 자아로부터 죽고 참 자아를 회복해야 한다. 따라서 머튼에게 "마음을 발견한다”는 것은 하느님 안에 뿌리를 내린 가장 깊은 자신의 참된 정체성 을 알아차리고 회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이 본래의 자리를 회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바로 회개이다. 회개 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uetávora(metanoia)는 마음이 완전히 바뀌다는 뜻이며, 이는 하느님께 응답하고 되돌아간다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tchshuvah)에서 나온 말이다. 즉, 회개라는 단 어는 자신이 중심이었던 마음을 완전히 바꾸어 하느님께로 되돌아간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회개의 본질은 표면적인 자아로부터 완전히 죽고 참된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며 이것은 "우리 영혼의 변형으로 깊은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머튼이 말하는 마음이 넓어지는 길의 기초이다.
2.2. 머튼의 마음이 넓어지는 길
성경에서 마음을 바꾸어 새로운 인간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알아차림"에서 시작된다. 가령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동행하던 예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졌지만 그 당시에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빵을 떼실 때 그들은 눈이 열려 스승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4:30-32 참조). 그리고 그들은 엠마오로 계속 길을 가지 않고 방향을 바꾸어 예루살렘의 제자들과 합류하게 된다. 마음의 방향이 바뀐 것이다. 이렇듯이 진 정한 영적 쇄신은 마음 깊은 곳에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 그리고 그분의 활동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신앙 생활은 우리의 일상의 삶 속에 다양한 방법으로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발견하고 그분과 함께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삶이기도 하다. 때로는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방식으로 그분께서 우리 곁에 동행하신다. 우리의 신앙은 어둠과 고통 속에서도 믿음으로 예수께 의탁하고 신비롭게 현존하시는 그분을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이며 우리 마음의 깊이는 온 마음으로 하느님께 "예"라고 말할수록 더 깊어진다. 이에 관해 머튼은 “이것이 하느 님의 비밀입니다. 하느님은 제가 "예"라고 말하지 않을 때에도 저의 "예"를 알고 계십니다. 제 삶의 목표는 이 "예"를 발견하여 제 삶이 온전히 하느님께 대한 "예", 즉 전적이고 완전한 동의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관상적 삶은 가브리엘 천사의 질문에 “예”라 고 응답했던 성모 마리아처럼 바로 매 순간 우리의 마음에서 들려 주시는 하느님의 질문에 대한 진정한 응답이요. 이 내면으로부터의 "예"를 통해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이 되어 간다.
우리의 마음이 결정적으로 넓어지는 것은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연결되는 체험이다. 비워지고 정화된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체험은 세상과 우리를 연결시키며, 내적으로 깊어지는 과정에서 “가장 깊지만 방치 되었던 소리를 알아듣게 한다. 예를 들면 머튼은 1958년 3월 18일 루이빌의 거리에서 지나가 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된다. 그동안 자신이 속한 수도원과 가톨릭 교회 안에서 우월적인 마음과 특별하다는 태도는 이 체험으로 한 순간에 무너졌 으며, 그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충만하게 된다. 머튼은 1950년대에 마치 고래의 배 속에 있는 요나처럼 여러 가지 갈등과 번민의 시간을 보냈다. 그 과정에서도 그는 "믿음은 하느님의 빛을 받기 위해 마음의 눈을 여는 것이다”라는 자신의 말처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또한 관상과 활동 사이의 갈등 가운데에서도 "중요한 것은 관상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시련 속에서 참된
고독의 의미를 찾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그가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매일의 "명상 수행은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루이빌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준비하게 했던 것이다!'
"볼 수 있는 눈: 토마스 머튼의 시적, 예언자적 비전"의 저자, 리차드 푸르니에(Richard Fournier) 는 머튼의 관상적 체험은 "숨겨진 사랑의 바탕(hidden ground of love)"과 "숨겨진 온전함(hidden wholeness)"을 깨닫는 방향으로 점차 확장되는 의식의 둥근 원(圓)으로 묘사한다. " 다시 말해, 인간의 마음 안에는 기본적으로 "숨겨진 사랑의 바탕"이 자리하고 있는데, 마음이 자기 중심적 인 상태로 그대로 머물면 좁은 원에 불과하지만, 이기적인 마음을 포기하고 문제를 가지고 사 는 법을 배울수록 "숨겨져 있던 사랑은 자라나 온전함으로 성장하여 보편적 연대와 자비의 넓은 원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머튼이 “보이는 모든 것에는 보이지 않는 풍요로움, 숨겨진 온전함(hidden wholeness)이 깃들어 있다”라고 묘사한 것처럼 인간의 마음이 관상을 통해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완전한 마음과 만날 때 인간의 마음은 그분의 마음이 되어 간다." 이를 다음과 같이 그림으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머튼이 관상에 대해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관상의 목적을 "자기 인격의 바탕을 발견하고, 자기 안의 빛과 지혜, 그리고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인식하는 의식을 활성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의식이 활성화될 때 분열과 분리를 넘어서는 통합적 마음의 상태 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렇게 통합된 마음은 분리보다 관계, 배제보다 연대를 선택하는 내적 자 유를 드러낸다. 머튼에 따르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목적이 오직 하느님뿐(God alone)이 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며, 고요히 그분 앞에서 숨을 들이 쉬며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이라고 말하면서 예수의 이름을 우리 마음 속에 모심으로써 그분께서 우리 마음 속에 자리하길 원하신다는 것을 자신의 온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2.3. 머튼의 “마음”과 “양심”의 관계
머튼은 "양심"(conscience)을 성경에서 말하는 마음의 개념, 즉 개인의 정체성과 관련된 개념 과 연결시킨다. 성경에서 마음은 심장이라는 신체 기관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중심, 즉 정신, 감정, 의지가 모인 존재의 핵심을 가리킨다. 구약 성경의 마음은 생각과 판단, 의지와 결단, 양심과 도덕 등 인간 존재의 중심으로써 사고와 결단의 자리이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 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5)의 말씀처럼 마음은 감정이 아니라 전인격적 헌신과 선택이 일어나는 곳이다. 마음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자리요, 율법 이 새겨지는 곳이고 회개와 불순종이 시작되는 자리이다.
신약에서 마음을 뜻하는 단어, Kapðia(kardia)도 이와 유사하지만, 믿음과 회개가 일어나는 인 격의 중심으로서 마음에 대해 강조된다. 가령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바로 그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태 15:18)라는 구절에서 마음은 죄의 근원이지만,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는다”(로마 10:10)라는 구절에서는 마음은 전적인 응답을 통해 믿음이 이루어지고 의로움과 구원을 얻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 람들!”(마태 5:3),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마태 5:8)이라고 행복선언을 하면서 자신 의 한계를 깨닫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온전히 의탁하는 가난한 마음, 분열되지 않은 깨끗한 마 음,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는 마음은 “하늘 나라를 차지하고 하느님을 볼 것”이라고 선언하 고 있다.
이처럼 마음에는 의로움을 얻고 하느님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만 동시에 악을 선택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인간은 마음 속 양심의 활동을 통해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선과 악을 분별 함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삶을 만들어 간다. 머튼에게 양심은 단순한 선과 악을 식별하는 "도덕 경보기"가 아니라,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 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는 내면의 목소리이다. (머튼은 “죄의식(sense of sin)”과 “죄책감(sense of guilt)"을 구분하며, 양심의 깊이를 존재론적 차원에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죄책감은 "외부로부터 오는 압박감이며, 자신의 악행에 대해 설명하도록 소환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할 때에 느끼는 불안"으로, 외적 도덕법을 어겼다는 심리적 반응에 가깝다. 반면, 죄의식은 "내 안에 있는 악을 의식하는 것"이며, "내가 나 자신의 밖에 있는 법을 어겼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나의 존재 안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법들을 어겼기 때문에 생긴다. 그 법들은 동시에 내 안에 거하시는 하느님의 법들이기도 하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죄의식은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에 깊이 그리고 고의적으로 거짓되게 행했다는 의식" 이며, 그래서 "도덕적 죽음만이 아니라 영적 죽음, 곧 나 자신이 영적으로 죽었다는 깨달음"을 동반한다)
즉, 성경의 마음의 개념처럼 그에게 양심은 하느님 앞에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닫고, 자신의 인간적 한계 앞에 온전히 모든 것을 의탁하는 가난한 마음과 죄로 물든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하느님 앞에 진정한 자아를 회 복하는 자리이다.
2.4. 관상 생활: 내 마음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의 마음과 하나되는 삶
머튼에 따르면, 성령께서 관상을 통해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는 양심과 의식을 신비 롭게 깨어나게 한다. 즉 관상은 마음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찾게 해 주며,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느님의 뜻을 선택함으로써 인간과 하느님이 함께 일하신다는 것을 깨닫 게 된다.' 그는 관상 생활이 우리의 양심을 밝히고 강화시켜 “도덕적이고 신성한 법의 외적이고 기록된 계명을 알고 인식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거룩한 뜻과 완전하고 지속 적인 일치를 통해 구체적인 현실에서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게 한다"고 묘사하고 있다.' 하 느님께서는 우리 양심의 깊은 곳에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며, 인간이 내면을 열고 그 깊은 곳을 들여다보기를 거부하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머튼 스스로도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마음(heart) 속에 하느님 아닌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님(nothingness)을 깨닫기를 간절히 갈망하였다. 이러한 그의 기도는 이슬람 수피, 압둘 아지즈(Abdul Aziz)에게 보낸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엄격히 말해 저는 매우 단순한 기도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현존과 하느님의 의지와 하느님의 사랑에 전적으로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저의 명상은 예언자에 의해 묘사된 다음의 내용과 유사합니다. "마치 당신이 하느님을 뵙 고 있는 것처럼 하느님 앞에 있어라." ... 제 마음 속에는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님(nothingness)을 완전히 인식하려는 커다란 갈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의 기도는 무(無)와 위대한 침묵의 중심에서 위로 올리는 일종의 찬양입니다. 만약 제가 여전히 저 자신의 '자아'에 머물러 있다면, 이것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하느님만이 제거해 주실 수 있는 장애물입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시고자 하는 의지가 있으시다면, 무(無)는 완전히 명료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은 하느님의 자리이며, 그곳에 하느님 외에는 아무도 자리할 수 없기를 갈망하며 바치는 그의 기도는 아직은 알지 못하지만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의 사랑과 일치하고 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담겨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이 자신의 온 마음에 자리 하듯이 머튼에게 하느님은 자신의 마음을 모두 사로잡은 사랑하는 분이셨고, 사랑하기에 더 그 분을 알고 싶어 했다. 동시에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가장 깊이 알고 계시고 사랑하신다는 것 을 믿었기에 그분께 대한 신뢰와 사랑으로 진정 “그리스도 안에 살아 있는 마음"(갈라 2:20 참 조)을 지닐 수 있기를 기도한 것이다. 이것은 결국 자기 중심적 마음을 비우고 하느님으로 채움으로써 하느님의 마음을 알고 더 큰 그분의 마음에 사랑을 드리고자 하는 그의 원의가 담겨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마음으로 살고자 하는 머튼의 갈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마음과 하나되고 자 하는 원의와 같은 것이다. 예수의 마음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사랑 그 자체를 상징하며, 하느님의 신성과 예수의 인성이 만나는 곳이다. 예수 성심은 곧 "하느님의 마음"으로서, “하느 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라는 말씀처럼 사랑 그 자체인 하느님의 마음을 드러낸다. 예수 의 마음은 한 인간 존재의 고통과 슬픔을 못 견디어 하는 마음이며, 상처받았지만 자비로우며, 열정적이면서도 동정적인 사랑을 담고 있다.
이러한 예수의 마음과 하나되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아버지 하느님과 일치하였듯이 예수 그 리스도와 하나됨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가난한 이와 소외된 이들, 병자들과 죄인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의 고통 앞에 측은한 마음을 지녔던 예수의 그 마음을 간직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그분의 뜻에 따라 자신을 비우고 죽기까지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한 예수처럼 익숙한 것, 자기 중심적인 안전 지대를 자발적으로 떠나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는 삶온 우리의 마음을 넓게 한다. 이 과정은 자기 부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내맡기 는 신뢰의 행위이다.
예수의 상처 난 마음이 죄 많은 우리의 마음을 치유하고 구원으로 이끌어 주었듯이 우리도 상처 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예수께 봉헌하며 그분 안에서 자신을 잃어버림으로써 새로운 탄생을 맞아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인간은 마음으로 하느님을 알지만, 삶으로는 하느님을 사랑 하게 된다. 살아 있는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느님을 향한 끊임없는 사랑의 행위"가 된다." 다 시 말해 새로 태어난 아기의 존재 자체가 어머니에게 사랑이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 어난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느님께는 사랑이요,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다. 이때 우 리의 마음은 그분의 마음으로 넓어지고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하느님과 사람들을 사 랑하게 된다.
요컨대, 토마스 머튼에게 마음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심연에 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원천으로 써, 마음이 넓어진다는 것은 믿음과 수행을 통해 정화되고 준비된 마음에 하느님의 영이 계심 을 은총으로 생생하게 알아차리는 관상적 체험과 관련되어 있다. 하느님의 영이 우리 마음 안에 살고 계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깨어날 때 우리의 마음은 거짓 자아로부터 해방되어 그분 의 마음과 하나되고 그분의 마음으로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3. 성 베네딕토에게서 배우는 마음이 넓어지는 길
3.1. 규칙서 안에 나타난 “마음이 넓어진다"는 의미
유럽의 수호자 베네딕토 성인은 자신의 수도 규칙서(RB)에서 “마음이 넓어지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설립하는 데 거칠고 힘든 것은 아무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 바이다. 그러나 결점을 고치 거나 애덕을 보존하기 위하여 공정한 이치에 맞게 다소 엄격한 점이 있더라도, 즉시 놀래어 좁게 시작하기 마련인 구원의 길에서 도피하지 말아라. 그러면 수도생활과 신 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 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니, 주의 가르침에서 결코 떠나지 말고, 죽을 때까지 수도 원에서 그분의 교훈을 항구히 지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수난에 인내로써 한몫 끼어 그분 나라의 동거인이 되도록 하자. 아멘.
베네딕토 성인은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를 라틴어 원문 "dilatato corde inenarrabili dilectionis"의 영어 번역, “our hearts overflowing with the inexpressible delight of love(사랑의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우리의 마음이 흘러 넘침)"은 마음 을 넓게 하는 보다 근원적인 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여기서 "사랑의 형언할 수 없는 기쁨 으로"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와의 깊은 영적 일치를 묘사한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일치는 우리의 마음을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며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마음에서 흘러 넘쳐 형제와 세상을 향하게 한다. 이를 위해서 베네딕토 성인은 규칙서에서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를 가로막는 모든 것을 정화하기 위해 수도자 개인의 행동, 건강한 관계, 자비로운 지도력, 그리고 영적 수행에 관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 무엇보다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가로막는 것은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베네딕토 성인은 규칙서 에서 여러 차례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아무 것도 더 낫게 여지기 말라"(RB 4:21;72:11 참조)라고 강조하고 있다.
한편, 베네딕토 수도 규칙서의 근간이 된 스승의 규칙서에서는 수도생활에 대해 순교, 수난, 내세 등을 강조한 반면 베네딕토 성인이 그리스도의 밝고 기쁘고 감미로운 사랑의 개념 추가 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와 깊은 사랑의 일치를 체험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성인이 생각한 수도생활은 고통과 시련, 고행과 인내 등이 목표가 아니라, 영적 수행을 통해 수도원이 라는 학원에서 수도승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고, 그분과 일치함으로써 사랑의 형언할 수 없는 기쁨 가운데 마음이 넓어지고 영적 자유로움으로 "하늘 고향을 향해 달려 가기"(RB 73:8) 를 희망했다.
3.2. 베네딕토 성인이 말하는 마음이 넓어지는 길
3.2.1.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넓어진다면 좁은 길조차 넓은 길로 여겨진다. 길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변하는 것이다. 이 마음의 변화를 위해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지녀야 할 태도는 바로 “겸손"이다. 베네딕토 성인은 규칙서 7장 "겸손에 대하여"에서 겸손의 12단계에 대해 소개한 후, “이 모든 단계들을 다 오른 다음에 수도승은 곧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게 될것이다"(RB 7:67)라고 가르치고 있다. 성인이 말하는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한 상태는 수도승의 마음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모든 계명을 어려움 없이 자연스럽게 습관적으로 그리고 기쁘게 지키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겸손하게 자신을 온전히 그리스도께 맡긴 수도승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모든 것을 행하기에 그의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 으로 변화된 것이다.
그런데 '과연 베네딕토 성인의 규칙을 따라 사는 모든 수도승들이 수도생활에 나아감에 따 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기쁨으로 흘러 넘치고 있는가?' 자문한다면 그 대답 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더 마음이 좁아지고, 냉소적이고, 미소를 잃어가고, 습관적인 무표정, 혹은 불평으로 살아가는 수도승들도 있다. 수도승만이 아니라, 신앙 생활을 오래한 그 리스도인들이나 성직자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신앙관을 고집하거나 융통성 없는 경직성에 빠져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편협하고 폐쇄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고, 그리스도의 그 마음으로 살기를 다짐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점점 좁아지고 무디 어지는 것은 왜 그럴까?
우선 스트레스와 불안이 밀려올 때, 건강 문제나 형제적 관계의 어려움, 경제적 압박 속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방어적이 되고 움츠러든다. 부정적인 생각과 태도가 자리 잡으면 문제의 원인을 상대방에게 돌리며 비난하기 시작한다. 감정적 충격이나 상실감은 시야를 좁게 만들어 오직 자신의 고통에만 집중하게 만들기도 한다. 고립과 외로움 속에서 무시당하고 무능력하고 무력하다고 느낄 때, 우리는 더욱 자기중심적으로 변하게 된다. 잘못이나 죄, 상처나 미운 감정, 작은 것에 골몰할 때에도 마음은 더욱 좁아지게 된다. 특히 자신의 뜻만 고집하고 자신이 전적 으로 옳다는 왜곡된 생각에 사로잡힐 때, 우리의 마음은 완고하게 굳어지고 만다. 그렇다면 좁아진 마음은 영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마음이 좁아진다는 것은 단순히 심리적 현상이 아니라 영적인 위기이다. 그것은 자기중심적 욕망에 갇혀 하느님과 타인을 향한 개방성을 잃은 상태이며, 거짓 자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처음에 수도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무엇이든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린다. 그러나 수도생활의 중반기에 이르면 수도원의 규칙에 익숙해지고 '자신이 무엇을 좀 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잣대로 수도원과 수도 형제들, 심지어 하느님마저도 저울질한다. 그러 다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기 시작하고 점점 경직된 모습을 갖 게 된다. 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의 때에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자신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 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마음은 텅 비워지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가 이미 자리하고 있었 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동안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성령의 은총으로 이미 내 안에 살고 계신 그리스도를 만날 때 우리는 다시 태어나게 되고,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이 되어 간다. 따라서 마음이 좁아진 그 상태도 그리스도의 마음이 되기 위한 과정이요. 성령께서 부서진 마음을 낫게 해 주시고 사랑으로 충만케 해주시는 날을 기다 리는 마음인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이다. 하느님께서 마음을 넓혀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고 매일매일 자신의 마음을 살피며 성찰과 정화, 기도와 수행을 통해 성령의 오심을 깨 어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핀 작가는 "당신께서 제 마음을 넓혀 주셨기에 당신 계명의 길을 달립니다"(시편 119:32)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넓어지는 것 은 매일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이것을 일깨워주는 사막 교부의 가르침이 있다.
제자가 스승에게 여쭈었다.
"하느님께 도달하기 위해 어떤 수행을 해야 합니까?"
스승이 대답했다.
"만약 네가 하느님께 도달하기를 바란다면 두가지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첫째 하느님께 도달하기 위한 모든 노력은 가능하지 않다.
둘째 마치 네가 첫번째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모든 노력을 해야 한다.
하느님께 도달하는 길은 은총 없이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단순히 바라는 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로맨틱한 이상도 아니다. 매일 반복되는 운동도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길이요, 마음의 태도이며, 영혼의 방향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이 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예수께 온 마음과 온 영혼을 집중해야 한다. 로욜라의 성이 냐시오도 "하느님께 모든 것이 달려 있는 것처럼 기도하되, 모든 것이 네게 달려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라고 역설적으로 말했다.
사실 초심자들은 처음에 온갖 열정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항구하게 계속 수행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게다가 기도와 수행 생활을 하지만 그다지 큰 변화가 없는 듯하고, 메마르고 건조 한 사막과 같은 시간을 보낼 때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든다. 가령 몇 해전에 어느 수녀원 연 피정 지도에서 15년 정도 수도생활을 한 어느 수녀님이 필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제가 지금까지 수도원에 입회를 하여 다양한 기도와 명상법을 수행해 왔습니다. 심지어 다른 종교의 명상도 열심히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초기에는 기도 안에서 뜨거움과 평화를 느꼈는데, 가면 갈수록 기도가 건조해지고 아무런 성과가 없는 듯합니다. 뭔가 큰 깨달음을 얻고 싶은데 안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필자는 미소 지으며 다음과 같이 답을 드렸다. "수녀님, 그것 은 원래부터 안되는 것입니다. 저도 제 힘으로 안된다는 것을 깨닫는데 30년이 걸렸습니다. 하 느님의 은총 없이는 기도조차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힘을 좀 빼셔요. 그리고 기도는 원래 맹물과 같습니다. 아무 맛이 없죠. 느낌을 찾지 마시고, 고요히 하느님 곁에 항구히 머물며 은총의 때를 기다리셔요."
수행 생활에서 한계 상황이나 실패 혹은 무너짐의 체험은 반드시 거치게 되는 과정이다. 일종의 이 어둔 밤의 체험을 통해 '자신을 포기'하는 순간, 깨닫게 된다. 시작하는 것도, 노력하 는 것도, 완성하는 것도 모두 성령의 은총이라는 것을!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게 된다." 그래서 베네딕토 성인은 규칙서 여러 곳에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 이다. 예를 들면 우리의 모든 선행은 하느님의 도움이 없이는 완성될 수 없기 때문에 기도해야 하며(RB 머리말 4 참조), 우리의 본성으로는 수도생활을 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하기 때문에 하 느님의 은총으로 우리를 도와 주시길 간구하라고 당부한다(RB 머리말 41 참조). 또한 은수자 (修)에 관한 설명에서 그들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힘만으로도 육체와 마음의 악덕 과 싸울 수 있다고 설명하며 하느님의 도움을 강조한다(RB 1:5 참조). 베네딕도는 수도승이 불 가능한 것을 명령 받았을 때에도 "하느님의 도우심을 믿으며 사랑으로 순종해야 한다"(RB 68:5) 고 가르치고 있다.
3.2.2. 공동체 생활 자체가 마음을 넓히는 도구
마음이 넓어지기 위해서는 영적 삶의 거룩함이 실재(real)가 될 때까지 그것을 살아 내야 한다. 하지만 베네딕토 성인은 수행 생활을 영적 체육관에서 이루어지는 엄격한 훈련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거칠고 힘든 것은 아무 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 바이다"(RB 머리말 46)라고 한 것이다. 베네딕토 성인이 이상적으로 여긴 수도생활은 은둔자처럼 홀로 사는 것만 이 아니다. 다른 형제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을 “가장 굳센 회(★)수도자"(RB1:13)들이라고 묘사한다. 베네딕토 성인은 수도승 개개인이 영적 수행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으 로 마음이 넓어지는 것을 준비해야 할뿐 아니라 공동체적 차원에서도 "서로 존중하기를 먼저 하고,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잡아 견디며, 서로 다투어 순종하고, 아무도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남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를 것 이미, 형제적 사랑을 깨끗이 드러내라"(RB 72:4-8)고 권고하고 있다.
사실 수도원 안에서 규칙을 지키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 좋을 때도 있지만 힘들 때도 많다. 개인주의화 된 오늘날, 다른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 자체가 수행이기도 하다. 때로는 공동체 생활 안에서 겪게 되는 상처와 자신이 부서져야 하는 노고를 회피하고 자신만의 안전한 공간 을 찾게 되는 경우도 있다. 미국의 유명한 영적 저술가이자 베네딕토회 수도자인 죠앤 치티스 터(Joan Chittister) 수녀는 이와 관련해서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권고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영적 삶에서 자신만의 안전한 공간을 찾는 것은 죽음과 그리 멀지 않습니다.
주방에서 식사 준비를 하는 것보다 매일 미사에 참석하고 기분 좋게 지내는 것이 더 쉽습 니다.
전쟁 중인 세상에 평화를 외치는 것보다 침대에 누워 기도하는 것이 더 편안 합니다...
소란스런 이웃과 함께 인내로이 사는 것보다는 단식이 더 영웅적일 수 있 습니다.
[형제들에게] 부드럽게 말하는 것보다 공동체 밖 사람들에게 평화의 인사를 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함께 하는 공동체 생활이 참된 영적 성장 의 본질이라면 둘 중 하나만 존재하는 것은 분명 기만입니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작은 것에 골몰하고 상대를 비난하며 불평하는 좁아진 마음, 일상의 편안함에 안주하는 마음이, 공동체 형제들과 함께 순종과 겸손과 환대를 실천하는 동안 점진적으로 넓어질 수 있도록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내어 놓아야 한다. 공동체 생활 안에서 갖가지 어려움을 겪는 동안 자신의 약함을 먼저 살피고 그리스도께 의탁하며 그리스도의 그 마음으로 연약한 형제를 품을 수 있을 때, 마음은 더 이상 경직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넓어져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활짝 열리게 된다. 사실 오랜 기간 공동체 안에서 사는 동안 다른 형제를 배려하고 약한 형제들을 돌보며 자신을 포기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함께 살면서 부딪히고 깨지면서 참된 사랑의 마음을 삶으로 터득하게 된다. 공동체 삶 안에서 자신을 발견 하고 하느님을 발견하기까지 "자기 비움"이 필요하다. 따라서 공동생활 자체가 마음을 넓게 만 드는 도구요, 수행이며 성령의 은총을 준비하는 것이다.
또한 공동체 생활은 "인내"와 "십자가”를 필요로 하는 동시에 더 넓은 마음으로 인도해 주고 더 큰 사랑을 배우게 하는 터전이다. 그래서 베네딕토 성인은 공동체 생활 자체의 참된 가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형제들이 한 곳에 머물며 "정주" Stability)하고 힘들더라도 “인 "하는 삶을 강조했다. 앞서 언급한 머리말 45-49절에서도 "도피하지 말 것이다", "결코 떠나지 말고"라고 권고하면서 공동체에 머물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항구히 지킴으로써", "그리 스도의 수난에 인내로써 한몫 끼어"라는 표현을 통해 수도승들이 공동체에 항구히 머물며 인 내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새로운 탄생, 부활을 고대하 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주와 인내의 덕목은 비단 수도자들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와 가정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함께 살아가고 함께 일하다 보면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힘 들게 하는 사람들, 미숙한 이들도 있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해서 인내하지 못하고 쉽게 공동체를 떠나기보다는 베네딕토 성인의 가르침처럼 인내와 정주의 영적 도구를 통해 자신과 상대방이 조금 더 성장하기를 기다리며, 스스로 먼저 그리스도 안에 머물며 그분의 뜻을 먼저 생각한다면 영적 성장과 더불어 더 넓은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공동체에 머물며 함께 사는 삶을 통해 내 마음이 깨지고 부서져야만 진정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건너가게 된다.
3.2.3.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라: 순명.
하느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다양하게 말 씀하시는 그분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베네딕토 성인도 자신의 규칙서를 “오! 아들아 들으라!" 라고 시작함으로써 순명을 수도생활의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느 님의 소리를 듣고 그분의 뜻에 순명할 때 우리의 마음은 그분의 마음을 닮아간다. 예수께서도 항상 "아버지의 뜻"을 먼저 선택하심으로써 순명의 모범을 보여 주셨다. 순명은 결국 자신의 뜻을 포기하는 것이다. 단순히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더 크신 섭리를 믿고 그분 께서 완성하시도록 우리 자신의 사사로운 의지를 포기하는 것이다. '포기'라는 좁을 길을 통해 '사랑'의 넓은 마음으로 들어간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하는 일을 완성하도록 맡겨 드려야 한다. 이렇게 우리 마음이 하느님께로 향할 때, 우리는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 그분의 마음을 닮아 간다.
그러나 자신의 뜻을 내려 놓는 것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께 대한 믿음으로 눈에 보이는 장상에게 순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장상이 편견과 선입견으로 대하거나 사리에 맞지 않는 명령을 할 때 더욱 그러하다. 이럴 경우에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더불어, 앞서 언급한 토마스 머튼의 경우처럼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서로를 신뢰하기에 자신의 뜻보다는 상대방의 뜻을 더 존중하고 따른다. 그 결과가 어떻든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어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정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분께서 원하는 것을 선택하게 되고 설령 그것이 시련과 고통을 수반한다 하더라도 기쁘게 그것을 하게 된다. 그리고 자주 하느님의 뜻을 사랑으로 선택하다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 느님의 그 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자비의 마음으로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며 순명과 사랑으로 장상과 형제를 대하게 된다.
3.24. 겸손은 마음을 넓게 하는 뿌리이다.
베네딕토 성인이 말하는 겸손은 겸양지덕처럼 자신을 작게 만들거나 자신의 능력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참된 자리에 두게 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본래의 자신을 회복하 게 하는 뿌리와 같다. 한마디로 겸손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 넓어진 마음은 이러한 겸손의 뿌리에서 자라는 나무와 열매이다. 성인은 규칙서 제7장에서 겸손의 열두 단계를 제시하면서, 인간 마음의 기본 상태를 위로 올라가려는 교만의 충동과 자기 욕망 에 붙들린 상태로 본다. 겸손은 이러한 충동을 부정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과 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기 중심의 좁은 방에서 나와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일종 의 회심의 자세이다. 따라서 성인에게 겸손은 삶의 태도나 영적 덕목에 관한 것이 아니라, 마 음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여정이다.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기는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갖게 된다.
이러한 넓은 마음에 도달하기 위해 베네딕토 성인은 자신의 규칙서에서 겸손의 첫 단계로 먼저 자신의 잘못된 욕망을 인식하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태도를 지니도록 가르치고 있다. 자신의 내면을 먼저 살피고 스스로의 힘으로 완전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그분께 대한 거룩한 두려움의 자세를 지니는 것을 성인은 겸손의 시작이라고 본 것이다. 이어지는 단계들에서 수도승들은 자신의 비천함을 인식하고, 자기 뜻을 버리며, 죄를 고백하고, 인내하며 순종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자신의 한계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은 다른 이의 약점과 부족함을 기다려 줄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이 생겨난다. 여덟 번째부터 마지막 단계는 겸손을 마음뿐 아니라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는 과정이다. 다른 이를 향하여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강박이 줄어들기 때문에 말이 줄어들고 상대를 존중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마음 속에 다른 이를 향한 수용의 공간이 더 넓어진 것이다. 겸손의 사다리를 모두 오르면 수도승은 “하느 님의 사랑"(RB 7:67)에 도달하게 되고 두려움 없이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습관적으로 지키기 시작"(RB 7:68)한다. 겸손으로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의 뜻을 자주 선택하고 실천함으로써 이제 는 그분 사랑의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행하게 된 것이다. 즉 하느님의 넓은 마음 속에서 자유를 누리며 성령께서 겸손한 영혼을 통해 활동하시는 것이다(RB 7:70 참조). 따라서 겸손은 사랑의 지평과 수용력이 확장되어 무한한 하느님 사랑에 도달하기 위한 기초요, 뿌리이다.
겸손을 통해 마음이 넓어진 이들은 모든 판단의 기준을 하느님께 두게 된다. "내가 옳다"는 확신보다는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어 타인을 재단하거나 판단하는 속도를 늦 추게 되고 경청함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한다. 또한 이들은 상처를 다루는 방식이 달라 진다. 교만한 마음은 상처를 받게 되면 방어하거나 억울한 감정에 휩싸여 되갚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면 겸손한 마음은 상처를 받게 되더라도 곧바로 공격하지 않고 먼저 하느님 앞에 자신 을 성찰하고 침묵 속에서 상대방과 자신을 위해 기도를 바치게 된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고, 상처 준 사람 역시 하느님께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기에 하느님의 때를 기 다리며 관대한 마음을 갖게 된다. 이제 중심이 "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모 든 것을 자신이 통제하려는 욕심을 내려 놓고 하느님의 더 큰 선을 믿으며 설령 자신이 생각 하는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그분의 섭리에 자신을 맡기게 된다. 과거에는 노심초사 일이 잘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일이 잘되지 않으면 마음이 쪼그라들었다면, 이제는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더 큰 마음이 생겨난 것이다. 결국 하느님 앞에 진정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잃어버릴수록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 안에 자신과 이웃을 위한 자리를 더 많이 마련해 주시는 것이다. 참된 겸손은 더 작아지는 것이 아니 라 그리스도 안에서 더 넓어지는 길이며 마침내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게 해 주는 영적 수행이다.
3.2.5. “멈춤과 기다림"을 실천하자
마음이 넓어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과 삶의 방향을 살피는 “멈춤”과 자신과 상대방이 성장하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멈춤의 영적 의미를 잘 보존하고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 의 전통 중에 하나는 “서 있다”는 의미를 지닌 "스타시오”(Statio)이다. 수도승들은 시간 전례나 미사 전에 긴 복도에 자신의 서열에 따라 줄이어 서서 하느님이 계신 성당으로 행렬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침묵 가운데 멈추어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살피고, 하느님 앞으로 가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한다. 또한 공동체가 함께 행렬함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여정은 홀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것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치티스터 수녀는 “스타시오는 다른 것을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를 멈추는 수행입니다. 그것은 시간 사이의 시간입니다. 그것은 바퀴로 달린 문화에서 흔한 회전문 사고방식을 치료하는 것입니다"라고 설명한다. 스타시오는 자신의 것에 대한 멈춤을 배우기 위한 매일의 수행이며, 하느님을 향해 함께 걸으며 형제들에게 자신을 맞추는 마음 비움의 시간이다. 또한 스타시오는 오늘날 수레바퀴처럼 쉼 없이 돌고 달리며 분주함으로 인해 병든 세상 안에 멈춤과 자기 성찰을 통해 삶의 참된 의미를 회복하고 치유하는 치료제이기도 하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는 주변 풍경을 지나치듯 볼 수밖에 없지만, 멈추어 있을 때는 자세하게 사물을 관찰할 수 있다. 영적으로도 우리는 멍충이 필요하다. 시편 작가가 "너희는 멈추고 내 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라고 기도했듯이 우리는 멈추고 그분과 우리를 분리시키는 장벽을 제거해야 한다. 또한 멈추어 서서 삶의 모든 측면에서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형제, 자매들 안에서, 일상의 소소한 일들 안에서, 미사와 기도 안에서, 자신의 내면 안에 서, 아름다운 자연 안에서, 때로는 시련과 고통의 어둠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을 바라보 아야 한다. 이러한 멈춤의 수행은 점차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거룩한 신적 사랑으로 변형(transformation) 되도록 우리 마음을 열어 준다.
"멈춤"과 더불어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수행은 "기다림"이다. 마음은 한 순간에 넓어지는 고무 풍선이 아니다. 서서히 자라는 식물과도 같다. 하느님께서 심으시고, 그리스도께서 가꾸시고, 성령께서 열매를 맺어 주실 때까지 믿음과 신뢰를 가지고 자기 자신과 형제 자매들의 성장을 기다려 주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기다려 주고 계신다. 베드로 사도는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9) 라고 하느님의 침묵은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잘 알려 진 루카 복음의 "어진 아버지의 비유”에서도 집 나간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어진 아버지의 그 마음은 얼마나 애간장이 탔을까? 그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자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 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카 15:20)는 대목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계시는지 에 대해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기다려 주신다. 처음에는 회개하기를 기다리신다. 그리고 그 다음은 우 리의 마음이 당신의 마음이 되기를 기다리신다. 하느님이 아니 계신 듯한 암흑 속에서 믿음으 로 묵묵히 새벽을 기다릴 때, 우리 곁에서 우리가 깨어나기를 기다리시는 주님을 만나게 된다. 하느님은 우리를 눈에 보이는 물질적 수준을 넘어 영적 심연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시며, "하느님은 우리를 그곳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 역시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 느님의 마음으로 자신과 형제의 변화를 기다려 주어야 한다. 이것이 하늘 사랑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바꾸어 놓으실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의 마음을 신뢰하고 사랑한다면 그분의 마음으로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나 악인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게 된다. 머튼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그들도 사람을, 그들이 죄 중에 있다 하더라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지혜나 조작에 의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에 의해서 가능할 것입니다”라고 기다림의 사랑을 강조했다. 사실 우리가 인간적인 힘으로는 악인을 사랑하거나 원수마저도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다. 머튼의 말처럼 무한한 하느님의 자비에 맡겨 드리고 우리 역시 완전히 선하지도 않으며, 악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3.2.6. 마음을 더 넓게: 수도 공동체를 넘어...
베네딕토 성인은 수도승 개인이 영적 수행을 통해 마음이 넓어지는 것뿐 아니라 공동체적 차원에서도 이것이 확장되기를 권고한다. 특히 손님 환대의 장에서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이다”(RB 53:1)라고 언급하면서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들, 순례자들을 맞아들임에 각별한 주의를 세심히 기울이라고 당부한다(RB 53:15 참조). 여기에는 환대의 이중 구조가 나타나는데, 수도 공동체에서는 손님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고, 손님들은 수도원의 환대를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만약 공동체 안에서 소외된 이들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만의 평화나 부유한 이들에게만 마음을 쓴다면 그것은 소위 “공동체가 마음이 좁 은 상태인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넓어지는 것처럼 공동체도 그리스도 사랑으로 열려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주변 세상을 둘러보며 그 가운데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 이 넓어짐의 표시는 기도만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행동으로 열매 맺기 때문이다.
나가는 말
성 베네딕토와 토마스 머튼에 따르면 결국 마음이 넓어진다는 것은 자기 중심적인 마음에서 하느님 중심적인 마음이 되었다는 것이다. 마음 안에 자신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한 공간이 넓어졌다는 의미로써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으로 충만해진 상태이다. 베네 딕토 성인은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를 맛보는 그리스도와의 일치 체험을 통해 우리의 마 음은 자기 중심성에서 해방되고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지고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사랑을 공동체 안팎에서 실천하게 되는 것을 마음이 넓어진 상태로 보고 있다. 토마스 머튼에게도 마음은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이며, 그리스도와의 일치 체험을 통해 이미 우리 마음 안에 존재하는 그분 을 생생하게 알아차리게 되면, 인정에 대한 욕구, 성취에 대한 욕구로 자신을 방어하고 판단하 고자 하는 거짓된 좁은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모든 존재를 그리스도와 함께 연민의 마음 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 마음이 넓어진 상태이다. 결국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가난한 마 음"이 곧 넓은 마음이요,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그분이 품었던 그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넓은 마음인 것이다.
한편, 우리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항상 "넓은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체험 한다. 때로는 마음의 분열이 일어나기도 하고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증오하거나 심지어 분노할 때도 있다. 머튼에 따르면 증오는 사랑의 성장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고통을 외면하고 기다림의 사랑을 모르는 이의 외로움의 표현이요 자신과 상대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부족함의 징표이다. 누군가를 증오하게 되면 마음은 삐뚤어지고 왜곡된 인식을 하게 된다. 결국 증오의 참모습은 약한 사랑이다. 머튼은 이런 경우 “사랑의 하느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자유로워져야 하고 또 자기에게 있는 것이든 자기 이웃에게 있는 것이든 모든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사랑 하겠다는 결심에 대한 책임을 직면해야 합니다”라고 권고한다." 넓은 마음으로 상대를 받아들 이기 위해서는 먼저 “다르다”가 아니라 “같다”는 것을 전제로 다가가야 한다. 이성적인 활동을 중지하고 타자를 있는 그대로, 하느님의 자녀로, 나와 같은 부족한 인간으로 받아들이는 마음 을 가져야 한다. 이 마음을 지니기 위해서는 인간은 비록 내가 보기에는 미숙하고 가치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결국 증오와 분노에 휩싸이는 것은, 앞서 강조했던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기 때 문이다. 다른 사람들에 비춰지는 나의 모습, 자신의 것에 집착하는 마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머튼에 따르면 더욱 위험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이다. "왜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잘못을 다른 사람 안에서 보게 하고 우리 자신 안에서는 볼 수 없게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교정하고 판단하거나 책임을 전가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먼저 살펴야 한다. 선과 악이 교묘히 뒤섞여 있는 자기 자신을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 열어 보 여 드려야 한다. 그리고 타인을 향해 미움과 분노로 공격을 가할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탐욕과 무질서를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 자신을 먼저 정확하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 들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자신과 이웃을 바라보는 수행을 계속하도록 하자. 예수께서 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마태 26:38)라고 제자들에게 고 백하셨듯이 우리도 마음이 감당하기 힘든 쓰라린 괴로움과 두려움 속에 있을 때가 있다. 이때 예수께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며 순명하셨듯이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자. 하느님 의 뜻을 선택하기 힘든 상황이라면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라도 청하자. 그것도 힘들면 잠시 멈추고 기다리자. 그분께서 하실 수 있도록 믿음 가운데 기다리는 마음은 우리의 마음이 조금 넓어지고 있다는 표시이다. 하느님만이 하느님을 아시기에,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이 되려면 어떤 형태로든 조금이라도 하느님의 마음으로 변화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일상 안에서 자주 하 느님의 마음을 묵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고, 성령의 은총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때 우리는 진정 하느님을 위해 살게 된다. 그분의 마음으로 살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