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웅순의 유묵 이야기>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 친필
* 석야, 신 웅 순(시조시인 ․ 평론가 ․ 서예가, 중부대교수)
인제 합강정 휴게소에 세워진 박인환 시비 ‘세월이 가면’ 친필
미륵천 강변 합강정 중앙단 옆에 박인환 시비가 있다. 박인환 원고지 친필「세월이 가면」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1988년 8월 15일 인제 군민 일동으로 시비를 세웠고 시비 아랫단에는 조병화의 송시「장미의 별」이 새겨져 있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1956년 봄 그의 나이 31살, 박인환은 홀로 <동방싸롱>맞은 편 빈대떡 목로주점 <경상도집>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진섭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쓸쓸히 잔을 기울이고 있는 박인환과 합석했다. 박인환은 종이를 꺼내 뭔가 끄적이더니 몇 번을 이리 고치고 저리 고쳤다. 이진섭에게 그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그것을 읽고 또 읽었다. 이진섭은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곡을 붙였다. 이렇게 해서 명동 엘러지「세월이 가면」이 탄생되었다. 이봉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56년 이른 봄 명동 한복판 빈대떡집 깨진 유리창 안에선 새로운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였 다. “자, 다시 한 번.” 상고모리의 박인환이 작사를 하고, 이진섭이 작곡을 하고, 임만섭이 노래를 부르고, 첫발표회나 다름이 없는 모임이 <동방싸롱> 앞 빈대떡 집에서 열리게 되었다. 박인환은 벌써부터 흥분이 되 어 대포잔을 서너 잔 들이키고, 이진섭도 술잔을 든 채 악보를 펼쳐놓고 손가락을 튕기는가 하면, 그 몸집과 우렁찬 성량을 자랑하는 임만섭이 목청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강계순은 이에 대한 숨은 이야기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세월이 가면」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애절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이 시를 쓰기 전날 박인환은 십년이 넘도록 방치해 두었던 그의 첫사랑의 애인이 묻혀있는 망우리 묘지에 다녀 왔다. 그는 인생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랑도, 시도, 생활도 차근차근 정리하면서 그의 가 슴에 남아 있는 먼 애인의 눈동자와 입술이 나뭇잎에 덮혀서 흙이 된 그의 사랑을 마지막으로 돌 아보았다. 순결한 꿈으로 부풀었던 그의 청년기에 아름다운 무지개처럼 떠서 영원히 가슴에 남아 있는 것, 어떤 고통으로도 퇴색되지 않고 있던 젊은 날의 추억은 그가 막 세상을 하직하려고 했 을 때 다시 한 번 그 아름다운 빛깔로 그의 가슴을 채웠으리라. 그는 마직막으로,영원히 마지막이 될 길을 가면서 이미 오래 전에 그의 곁에서 떠나간 여인의 무덤에 작별을 고하고 은밀히 얘기하 고 싶었다.
31세의 짧은 인생을 남기고 떠난 명동의 멋쟁이 박인환. 명동의 댄디보이, 센티맨탈리즘, 모더니즘 등등 그런 수사를 넘어 그는 진정 모더니티한 전후의 리얼리스트였다. 그가 개업했던 서점 ‘마리서사’에서 30년대 모더니즘의 대표적 시인 김광균, 김기림과 후일 모더니즘 시운동을 전개한 임호권, 김병욱,양병식,김수영,이봉구,송지영,조향 등을 만났다. 초현실주의 화가 박일영과도 만났다. 3년 남짓 이 시절은 박인환에 있어서 매우 의미있는 시기였다. 여기에서 많은 시우들을 만났고 시인으로 데뷔하기도 했으며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기도 했다. 마리서사는 그에겐 문학의 산실이었고 인생의 산실이었다. 1953년 환도 후 20여편의 많은 영화 평론을 썼다. 이러한 박인환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세간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테네시 윌리암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번역했고 이를 이해랑의 연출로 공연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1955년 『박인환 선시집』은 박인환의 첫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이었다. 박인환은 서문에서 시는 ‘사회를 살아가는 데에 가장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의 것’, ‘사회와 싸웠고’, ‘본질적인 시에 대한 정조와 신념만을 지켜오면서 살았다’ 고 말했다. 그러나 『박인환 선시집』은 제본소에서 책을 찾기도 전에 그만 화재를 당하고 말았다. 시집은 냈지만 그의 시집을 받아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상 추모의 밤’ 에 시 「죽은 아폴론」을 친구 이진섭에게 써 주고 폭음을 했다. 그것이 원인이었는지 3일 후 그는 심장 마비로 갔다. 그는 풋술이었지 주호는 아니었으며 나약한 센티멘탈리스트, 로맨티스트도 아니었다. 종군 기자로 일하면서 전쟁의 상흔을 리얼리티하게 시에 담았다. 현실에 적극적으로 메스를 가한 준열한 현실 고발자였고 리얼리스트였다. 프랑스의 시인 장콕도의 열렬한 팬이었고 ‘카사브랑카’ 험프리 보카트의 상고 머리를 흉내내기도 했던 영화광이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 시와 노래「세월이 가면」은 명작으로 남아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울려주고 있다.
- 출처:주간 한국문학신문, 2102.10.2(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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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자료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