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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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마포리에서 같이 태어나 그곳에서 같이 국민학교를 다닌 나의 국민학교 동창 박영근은 시인이다. 글을 써서 받는 원고료 외에는 달리 수입이 없다.그와 함께 고향을 방문하기는 이번이 두번째이다. 지난 2월에 고향을 가보고 싶다는 말을 듣고 함께 주말을 이용하여 차를 몰고 내려가 고향을 지키며 농사를 짓는 동창 찬준과 함께 변산 구석구석을 돌아보았고, 해창, 계화도, 돈지 등 새만금간척사업 현장도 둘러보았었다. 그 후 그는 <현대문학> 6월호에 다음 시를 발표하였다.
거기에 늘 어스름 찬바람이 일던 어업조합 창고가 있었다
거기에 칠산바다 참조기 궤짝이 밤새워 전깃불 아래 쌓이던 부둣머리 선창이 있었다
거기에 갯물에 쩔어버린 삭신이 조생이 한 자루로 뻘밭을 밀고 가던 홀몸 조개미 아짐 읍내 닷새장 막차를 기다리던 감나무가 있었고 흉어철이 들수록 밤이면 혼자서 가락이 높던 갈매기집이 있었다 지금은 폐항도 아닌
신작로만 간신히 살아 나를 불러 세우는 마을 바닷속으로 비 이백년 나이를 꺾어버린 팽나무 영당(靈堂)자리에 비 수십킬로 뻘을 질러 간다는 저 방조제 끝이 어딘지를 나는 묻지 않는다 타는듯 붉은 노을이 내려 바다도 집들도 바닷바람을 재우던 애기봉도 온통 환하게 몸 속을 열어보이던 그때를 찾아 천천히 걸어들어갈 뿐이다.
빗속으로 물보라 엉키는 바닷가 철책을 지나 갯벌을 건너
'해창에서' 전문 -- <현대문학> 2001년 6월호
그의 시에는 항상 무너져 내리는 외로운 영혼 속으로 깊이 배어드는 눈물이 있다. 그러나 그의 초기 시에서부터 지금까지 좌절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다. 주체할 수 없는 만신창이의 몸을 끝까지 추스리면서 끝내 제 갈길을 잃지 않는다.
눈물이 많은 시인 박영근이 고향을 처음 찾은 것은 97년 봄의 일이다. 종로에서 초저녁부터 술을 마시던 그는 밤 12시쯤 술자리를 말도 없이 빠져나와 그길로 서울역으로 갔다. 서울역 앞에서 택시를 하나 잡아 타고 전북 부안으로 가자고 했던 것이다. 주머니 속에는 동전 두어닢이 달랑거렸을 뿐이었다. 오직 그가 믿는 것은 우리의 친구 조찬준 뿐. 전주고등학교 1학년 마친 후 학교를 간단히 때려치우고 가출을 하여 노동판을 떠돌던 그의 지친 영혼을 거두어줄 고향은 말없는 옥녀봉과 깨북쟁이 친구 찬준이 뿐이었다. 택시가 동진강을 건너 부안땅에 들어서면서 그는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 후회해도 어쩔 수 없는 일. 그는 새벽 4시경 고향마을에 당도하여 친구 집에 들어섰다. 그런데 친구 찬준은 집에 없었다. 조문을 갔다는 것이다. 택시기사는 여기저기 더투면서 초상집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으리라. 초상집을 찾는 데는 그리 큰 어려움은 없었다. 훤히 불이 켜진 집이었을 테니. 과연 찬준은 초상집에 있었다. 그러나 이미 만취된 상태에서 떠메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흔들어 깨워도 소용없었다. 장거리를 뛴 택시 기사와 이약이약 하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그때의 모습을 그린 시가 다음 '초상집'이란 시이다.
상주도 잠이 들어 차일막엔 죽은 이 옛말도 들리지 않고 마늘밭 자리 비닐막 노름판만 불이 훤하다
술애비 금렬이아재는 만원 한장짜리 개끗발도 붙지 않는지 오늘도 흑싸리 개평꾼
묘자리에 물이 날까 지관 어른은 남몰래 걱정인데 길게 흐르던 별똥별 하나 들판 끝으로 툭 떨어진다
상여엔 두레 울력도 노래도 없구나 이백년 묵은 당산나무가 그 텅 빈 몸통으로 간신히 잎을 피워올리는 봄밤에
'초상집' 전문--97년 <녹색평론> 5, 6월호
그 뒤로도 영근은 한 차례 더 '택시타고 변산행'을 감행했다. 그 때에도 물론 택시비 부담은 찬준이 몫이었다. 그러다 지난 9월에 '택시타고 변산행'이 또 한번 이루어졌다. 창비사에서 창비신인상 1차 심사위원으로 일해주고 받은 돈 30만원이 몽땅 들어갔다. 그 돈이 어떤 돈인가. 겨울을 나는 데 써야 할 돈인 것이다. 나한테 지청구를 들을까봐 얘기를 안하고 있다가 지난번 김치를 주러 그의 집에 갔을 때 내게 고백했었다. 그도 이젠 나이가 40 중반, 나이가 들수록 고향 생각이 나는 것일까. 나의 변산 동행 제안에 그는 선뜻 응했다. 1개월쯤 고향에서 지내다 오고 싶다고도 하였다. 그건 어렵지 않으니 계화도에서 지내면서 갯벌을 주제로 산문을 써보면 어떠냐고 그에게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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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 고속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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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7일 아침 7시. 자고 있을 그를 깨울 겸 전화를 했다. 한참 벨이 울린 뒤에 받는 그의 목소리는 잠에 취해 있다.
"10시에 가면 안되겠니? 내가 이제 막 잠이 들었거든" "안돼, 새벽에 가자고 해놓고는..."
낮과 밤을 바꾸어 사는 사람에게 뭔 말을 또 하겠는가. 전화를 끊고는 천천히 여장을 꾸렸다. 9시쯤 부평4동에 있는 그의 집 대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문을 안에서 잠갔는데 두드려도 반응이 없다. 라이터를 꺼내 그가 자고 있는 창문을 연발로 두드려댔다. 그제사 뿌시럭거리고 일어난다.
"야, 그 소리 소름끼친다." 80년대 운동권의 주모자를 쫓는 형사가 떠올랐다는 것이었다. 1,300만원에 세들어 사는 이 집은 그를 위해 준비된 집이란 생각이 든다. 대지 열댓평이나 될까 하는 단독주택이다. 화장실은 구청의 압력에 의해 최근에야 수세식으로 바꾸었고 작은 방 둘에 부엌이 ㄱ자로 붙어 있으며 손바닥만한 마당도 있다.
"늦었다. 가자" 중동 나들목을 통해 외곽순환고속도로로 들어서니 9시 반이다. "영근아! 이번에는 절대 술을 먹지 않는다잉? "그럼, 제발 그러자" 그도 순순히 동의한다.
지난 2월 여행 때 그의 기행이 생각난다. 금요일 밤에 출발해서 한밤중에 부안에 도착한 우리는 부안에 계신 나의 네째 형님과 함께 늦은 저녁식사를 하며 소주를 대여섯 병 뉘였다. 숙소로 돌아왔으나 발동이 걸린 그의 주벽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담배가 마침 떨어져 담배를 사온다기에 결국 그에게 1만원을 내주었다. 다시 집을 찾아올 수 있을까 걱정을 하였는데 마침내 동이 터올 무렵이 되어 돌아왔다.
"강남 달이 밝아서~~" 예의 그의 주사가 시작되었다. 노래를 읊조리더니 부안의 깡패 열댓명을 제압해버리고 오는 길이라고 큰소리를 치는 것이 아닌가. 이 오밤중에 깡패 열댓명이 촌구석에 모여있다면 사건 아닌가. 퍼뜩 15년 전 녹번동 도원극장 사건이 생각났다. 그 때에도 녹번동에서 음식점을 차린 지금은 목사가 된 친구와 셋이 자정을 넘어까지 술을 마시는데 도원극장에서 기도를 보던 왈자패와 시비가 붙었다. 영근은 그 자와 한참 얘기를 하더니 나중에 그자는 영근이를 형님이라고 부르며 다음에 꼭 다시 들르면 영화는 공짜로 보여드리겠다고 했었다. 귤껍질처럼 거친 얼굴에 쏘는 눈빛, 거기에다가 사회 밑바닥 인생들의 기본 언어를 거침없이 구사하는 그의 말에 압도된 그 왈자패는 기싸움에서 완전히 눌려버린 것이다.
'그런데 열 다섯명씩이나....' 이해가 안돼 물어보았다. 어느 골목으로 들어갔더니 식당에 불이 훤이 켜져 있고 안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그 집으로 들어갔더란다. 소주를 시켜놓고 혼자 마시는데 깡패 대장인듯한 사람이 다가와 앞자리에 터억 앉는데 다짜고짜로 시비를 붙더란다. 그 주위로 너댓명이 더 와서 빙 둘러서는데 그 자리에서 지는 고향이 부안이란 말을 절대 꺼내지 않았으며 다만 김제 평야, 저 대지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왔노라며 노래를 불렀단다. "강남달이 밝아서~~" 그랬더니 그 깡패들이 '아 그러시냐' 하면서 물러가고 여기까지 데려다 주었다고 했다.
그는 가사를 다 외는 노래가 없다. 테레비는 물론 라디오조차 없는 그는 어디 차타고 가면서 주워들은 노래 중 마음을 울리는 노래가 있으면 그 한소절만 기억해두었다가 나중에 술에 취하면 이를 부른다. 깡패 15명의 존재가 하도 의심스러워 이 이야기를 이튿날 모항에서 형진이한테 꺼냈더니 그는 픽 웃으며 부안읍에 택시기사들 밤에 모여 있는 곳일 거라 했다. 그러면 그렇지. 새벽녘에 해장국집에 기사들이 모여있었고 술을 찾아 시인이 그곳까지 흘러들었다. 웬놈이 와서 노래를 부르고 소란을 피우니 기사들이 다가와 손좀 봐주려 했으나 그럴 가치가 전혀없는 불쌍한 인생인지라 가엽게 여겨 만취한 그를 숙소까지 데려다 주는 친절을 베푼 것이리라. 하여튼 이튿날 곰소로 모항으로 돌면서 그의 '강남달'은 계속됐고 '강남 달'에 우리는 하루 종일 시달려야 했다.
'하여튼 술은 절대 먹지 않으리라.' 1시간이 채 안되어 서해대교가 나타났다. "영근아, 이 다리가 세계에서 9번째로 긴 다리라는디 말여. 아 우리 어렸을 때 밭두럭에 나란히 서서 오줌을 싸면서 누가 오줌발이 멀리가는가 겨루면서 싸지않았냐. 그런데 시방 난지도 성산대교 옆에 한강 한가운데에 말여... 분수대가 새로 생겼는디 그놈이 세계에서 가장 높이 물길을 뿜어올린다는디 70억이 넘게 들었대여, 월드컵 경기 때문에 만든 것이라는데 월드컵은 축구를 1등을 하는 것 아니겄냐? 좌우간 우리나라 세계 최고 병은 참 문제여. 동양 최고라도 돼야 직성이 풀린당게. 새만금 방조제도 말여. 세계에서 제일 긴 방조제가 네덜란드의 주다찌 방조제가 32키로인디, 아무리 자대고 그어봐야 32키로 이상이 안나오는거라. 그래서 기존 완공된 군장지구 의 방조제 2키로를 포함해서 33키로로 하기로 한거라. 세계 최장이 그리해서 탄생해각고 시방 선전해대거든. 이 서해대교만해도 세계 최장의 다리가 어디인지는 몰라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게 생겼으니까 걍 9번째에 주저앉고 만 것일 거여"
아산만 중간에 있는 섬 행담도에 있는 휴게소에 들렀다. 휴게소 치고 이렇게 멋들어진 건축양식은 처음 본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은 다른 휴게소보다 훨씬 비싸다. 우동 한그릇이 4500원 한다. 우리는 가장 고급스런 음식점으로 들어가 앉아서 가방을 풀었다. 집에서 가져온 김밥과 두유를 꺼내었다. 김발 4줄에 4천원을 주고 동네에서 산 것이다. 두 줄을 맛있게 먹었다. 밖으로 나와 아산만을 조망하였다. 바다 건너 평택항의 큰 배들이 보인다.
사학자 김성호 박사에 의하면 이곳 아산만은 광개토대왕이 비류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상륙작전을 펼친 곳이다. 예성강 하구 관미성을 깨뜨린 고구려군은 백제의 의표를 찔러 수군을 동원, 이곳 아산만으로 상륙하여 수도인 웅진(오늘의 공주)을 급습하여 함락시켰다. 이에 비류백제는 멸망하고 왕은 식민지였던 일본으로 피하였다. 서기 396년의 일이다. 다음 광개토대왕비문을 보자.
百殘 新羅 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人辛卯年 來到海破百殘@@@羅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利殘國 軍@@首取壹八城 (17개 성 이름).... , (37개 성이름)............ 其國城 賊不服氣 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3개 성이름).... 百殘王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歸王自誓 從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 @迷之御 錄其後順之誠 於是@五十八城 村七百 將殘王弟幷大臣十人 施師還都(@는 해독 불가능 글자)
(백잔과 신라는 옛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으므로 조공해 왔었으나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 @@, 신라를 파하고 신민으로 삼으므로 광개토대왕은 6년 병신년(AD396)에 수군을 이끌고 이잔국을 토멸했다. 처음에 군@@성을 비롯해 18개성을, 다음에 37개 성을 공취했다. 其國城에 당도 했음에도 백잔왕이 대항하자 대노한 왕은 아리수를 건너서 자(刺)로 하여금 3개성을 공격케 했다. 곤핍해진 백잔왕은 남녀생구 1천인과 세포 1천필을 바치고 귀순하여 '지금부터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왕은 이들의 잘못을 용서하고 복종할 것을 기록하게 했다. 이 때 58성과 칠백의 촌락을 공파하고 잔왕의 동생과 열명의 신하를 데리고 도성으로 귀환했다.)
여기서 김성호 박사는 '백잔'은 한성에 도읍한 온조 백제이고, '리잔'은 웅진에 도읍한 비류 백제이며 '왜'는 일본에 있는 리잔의 세력이라고 본 것이다. 광개토대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북상하면서 58개 성을 공취하였으며 한성에 있는 온조백제의 항복을 받고 온조백제의 동생과 신하 10명을 볼모로 잡아 돌아간 것이다. 이처럼 남쪽을 아우른 다음에야 광개토대왕은 북방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산시 인주면에서 남하하여 예당저수지를 지나 27번 국도를 만나 낮은 고개를 통해 차령산맥을 넘으면 바로 공주에 이르는데 거의 직선 거리이다. 고구려군도 이 길을 이용했을 것이리라. 예당저수지 바로 옆에 이 길목을 지키는 임존성이 있다.
당진을 벗어나면서 고속도로는 2차선으로 바뀌는데 차량 통행이 뜸하다. 쏜살같이 서산 홍성 보령 서천을 달려 정오 무렵 우리는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계인 금강을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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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담도 휴게소
아산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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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강과 동진강 |
간척사업을 시작할 무렵 부안 들머리인 동진강 휴게소 앞에 세워놓은 간척사업 안내판 |
금강을 건너 동군산 나들목을 빠져나오면 바로 26번 국도 전군가도로 연결된다. 이 도로는 일제가 쌀 수탈을 위해 이 나라에 처음으로 닦은 신작로이다. 군산방향으로 가다가 29번 국도로 좌회전하여 접어들어 남쪽으로 20여분 달리다 보면 또다시 강이 나타난다. 만경강이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김제시 만경읍이다. 금만경평야의 중심 만경읍은 쌀의 집산지로서 미곡상들의 메카였으나 지금은 쇠락할 대로 쇠락하여 옛날의 영화는 찾아볼 수 없다.
예부터 이 땅을 ‘징게맹게 외배미들’ 이라 불렀다.징게는 김제,맹게는 만경, 외배미는 이 배미 저 배미 할 것 없이 모두 한배미로 툭 트였다는 뜻이다. 광활면에서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광활한 대지 너머로 지평선이 보일 뿐이다. 이곳 만경에서 강 상류 쪽에 있었던 익산 황등제는 김제의 벽골제, 고부의 눌제와 함께 고대로부터 3대 저수지였다. 여기서 '호남(湖南)', '삼남(三南)'이란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만경대교를 건너자마자 차를 세우고 곤하게 자고 있는 영근이를 깨웠다. "야! 여그가 만경강이다. 좀 쉬었다 가자." 구 만경대교 위에는 망둥이를 잡는 낚시꾼들로 붐빈다. 이제 슬슬 물이 들 시간이다. 망둥이 낚시는 들물 때 해야 한다. 썰물 때 햇볕에 노출된 갯벌은 영양분을 재충전해놓아 망둥이 같은 저서생물이 살판났다고 몰려드는 때가 들물 때인 것이다.
만경강은 완주군 동상면에서 발원하여 전주시, 군산시, 익산시, 김제시, 완주군 등지에서 고산천, 소양천, 전주천, 익산천, 탑천의 지천을 거느린 유역 면적 1418.2㎢ 의 전북에서 가장 큰 강이다. 200만 전북 도민 가운데 100만 넘는 1,008,000명이 만경강 유역에서 살고 있다. 이 강은 온갖 생활 하수와 축산폐수를 몰고 와서 드넓은 새만금갯벌에 부려놓는다. 새만금갯에는 백합 바지락 동죽 가무락조개 떡조개 개량조개 농게 칠게 갈게 길게 칠게 콩게 등등등 수많은 생명체들이 살고 있다. 이들이 저 탁한 물을 정화한다. 바지락 1개가 하루 정화시키는 물의 양이 18리터라고 한다. 새만금 갯벌에는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있는가. 도요새 1마리가 하루에 1700마리의 칠게나 갯지렁이 등 먹이를 먹는다고 한다. 갯벌 생태계에서 최상위자인 이러한 철새가 새만금 갯벌에 연 100만 마리가 찾아온다고 한다. 그들에게 먹이를 대려면 갯벌에는 얼마나 많은 생명들의 개체수가 존재해야 하는가. 한국해양수산개발원의 이홍동 박사는 "새만금 지역 갯벌 6천만평은 하루 10만톤 처리 규모의 전주하수종말처리장 40개와 맞먹는 정화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구 만경대교. 다리 위에는 망둥이 낚시를 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어이 친구! 저 똘물을 정화시켜 새만금호의 물을 4급수 이상으로 유지시켜 농업용수로 쓴다니 가능하겠냐? 그리고 기가 막힌 코메디가 있어야. 한번 들어볼래? 작년 10월에 전주 무슨 위성방송국에서 새만금토론회를 한다고 해서 갔는디, 군산대 양아무개 교수가 찬성측 토론자로 나왔는디, 그 자가 그러더만. 저 만경강 물로 시험삼아 농사를 지었는디, 농사가 그렇게 잘 되어각고 동료 교수들이랑 맛있게 나누어 먹었다는 거여. 그런게 그 자의 논리는 저 물을 논에다가 대면 그냥 비료가 된다는 것이여. 같은 찬성측으로 나온 부안군 최아무개 부군수가 맞장구를 치더만. 바로 집앞의 텃논은 집에서 개숫물도 흘러들고 해가지고 유기질이 많응게 그런 논이 예로부터 문자 그대로 문전옥답이라는 거여. 그런디 그 교수가 지난 봄에 엠비시 100분 토론에서 나와각고 또 그 소리를 하는 거여. 그렁게 바라잉? 인자 우리나라는 비료 걱정이 없는 나라 아니겄냐? 저 물 퍼다서 쓰면 되는 거 아니냐? 액비가 바로 저거 아니겄냐? 그렁게 인자 똥이나 오줌 마려우면 우리 국민덜 꾸욱 참었다가 강에 가서 싸야 헌당게"
시화호에서 보듯 저 갯벌의 모든 생명체를 완전 몰살시키는 행위가 새만금 간척사업이다. 흔히 환경보존론자들이 갯벌의 가치를 경제적으로 환산해내고 하지만 그마저 인간 중심의 오만한 발상 아닌가. 자연은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을 훼손한 대가는 부메랑처럼 돌아와 우리 후손에게 꽂힐 것이다.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익산시 왕궁면 근처를 지나다 보면 가축분뇨냄새가 솔솔 난다. 그곳에 대단위 축산단지가 있다. 정화시설이 있기는 하지만 제역할을 하지 못한다. 여름 장마철의 수량까지 정화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설혹 수십 조 원을 들여 하수관거시설을 하고 폐수를 이를 통해 외해로 빼내 1급수를 간척사업으로 생겨날 호수인 새만금호로 유입시킨다 하더라도 그간 갯벌에 퇴적된 유기물에 의해 호수는 썩고 만다는 것이 학자들의 결론이었다. 드러난 뻘 위에 어선들이 갸우뚱 기운 채 늘어서 있다. 저들의 앞날은 어찌 될 것인가.
동진강 하구의 실뱀장어잡이 어선
30여분 다시 차를 달려 동진강에 닿았다. 동진강 휴게소에 차를 세웠다. 이 자리에는 간척사업이 시작되면서 거대한 간판이 4~5년 동안 서 있었다. 새만금지구 개발을 압축하여 나타낸 조감도였다. 그림에는 절반은 공업단지였고 절반은 논이다. 그 옆으로 감동적인 언설로 시 한편을 적어놓았는데 바로 이것이다.
여기 도도히 흐르는 금강과 만경강, 동진강이 호남벌을 적시고 서해에서 만나는 자리 새만금벌이 이제 그 웅대한 터전을 잡고 나섰다
눈을 들어봐도 끝간 데 없는 갯벌 점점이 이어지는 섬떼들이 아름다운 곳 푸른 파도를 교향곡으로 엮은 서녘 바다 천혜의 복받은 새만금 땅이 아닌가
지구 위에 가장 긴 뚝을 쌓고 복지이상향을 세우며 임해산업기지를 만들고 대륙으로 뻗은 국제항의 고동이 들리는 곳 거기 또 관광 휴양지가 들어서 우리를 포근히 감싸주리라
그러나 이것은 완전 사기이다. 처음부터 사업주체인 농림부에서는 공업단지를 만들 계획이 없었다. 이 지역 정치인들이 득표전략을 위해 도민들을 속인 것이다. 수산대학 출신의 어느 선배에게서 들은 말이다. 우리 한반도의 서해안은 공장을 지어도 공해를 배출하지 않는 공장을 지어야 바다를 살릴 수 있다고. 그래서 할 수없이 중화학 공업등 기간 산업이 동남해안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인들이 이를 이용하여 호남 차별론을 내세워 공장만 지으면 개발이 되니까 잘 살게 된다는 미망을 주민들에게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부안의 동쪽에 있는 나루터 동진. 이 곳을 통해 부안사람들은 외지로 나가고 고향을 찾아 부안에 올 때에도 이곳을 지나야 한다. 전북의 많은 도민들이 휴가철에 국립공원 변산반도를 찾을 때에도 이곳을 지나친다. 이 입간판 하나가 전북도민들의 머리 속에 각인되어 도민들 70%는 아직도 새만금사업은 공장 짓는 사업인 것으로 알고서 반대할 생각을 못하고 있다.
둑을 넘어 강가로 내려가 보았다. 염생식물인 칠면초의 군락이 펼쳐진다. 그 위로 실뱀장어 어선이 올라와 앉아 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새끼뱀장어(실뱀장어)는 바다에서 거슬러 오고, 가을에는 강에서 성장한 뱀장어가 번식을 위해 먼 바다로 돌아간다. 뱀장어 알과 새끼는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아 오랫동안 뱀장어의 번식은 수수께끼였다. 이 수수께끼는 20세기 초에서야 비로소 풀리게 되었다. 1922년 덴마크의 어류학자 요하네스 슈미트박사가 이동하는 뱀장어를 뒤쫒아가 서인도제도의 북동쪽에 있는 사르가소 해역에서 부화 직후의 개체를 발견하여 비로소 뱀장어의 번식장소를 알아냈던 것이다. 번식을 위해 무려 5,000km나 이동한 것이다.
우리 나라의 뱀장어도 같은 방법에 의해 타이완이나 오끼나와 동쪽 해안이 번식 장소로 여겨지고 있다. 알에서 깬 나뭇잎 모양의 새끼는 프랑크톤으로 살아가다 2∼3년 걸려서 강어귀로 회귀한다. 이때는 이미 8∼10cm 정도 자란 실뱀장어로 변해 있고, 몸은 희고 투명하며 두 눈만 까맣다. 동진강하구와 만경강하구 어민들은 이러한 새끼뱀장어를 잡아 짭잘한 소득을 올렸었다. 하룻밤에 4~500만원의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방조제로 60%쯤 물길이 막힌 지금 이 황금알을 낳는 실뱀장어는 거의 잡히지 않는다.
'그려 새만금사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잡아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여.' 만경강과 동진강에서 이러한 실뱀장어 어업이 가능한 것은 강 하구에 댐이 없기 때문이다. 바닷물이 거침없이 상류족으로 역류한다. 상류로 갈수록 바닷물이 머무는 시간이 짧아 다양한 염분농도가 스펙트럼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이러한 수역을 '기수역(汽水域)'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곳에는 바다와 강을 오가며 다양한 생물 종이 살아가는 것이다. 영산강 하구둑 가까이에 사는 한 어부의 말에 따르면 하구둑이 완성되자마자 수문의 틈 사이로 흘러내리는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좁은 기수 지역에 기수성 물고기 떼가 몰려와서 서로 몸을 비비고 맞부딪쳐서 떼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러한 하구둑이 없는 만경강과 동진강은 그야말로 강다운 강인 것이다. 안도현의 시를 한번 읽어보자.
서해에 닿기 전에, 만경강과 동진강은 개펄에 이르러 진흙에다 몸을 문지르며 좀 놀았는데요
밤이 되면 물가에 알을 슬어놓고는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는 도둑게들의 발자국 소리를 다 듣고 손바닥만한 대합이 달빛을 한입에 넙죽 받아먹는 소리를 다 듣고 갯지렁이가 허리를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자기 삶을 밀고나가는 소리를 다 듣고 때로는 가까운 바다에서 새우떼가 꼬리로 일제히 세상을 탁탁 치는 소리도 다 들었는데요
그때서야 바다로 스며들어 바다하고 한 몸이 되었다는데요
씨펄씨펄, 개펄이 소리없이 죽어가요 바다는 저만치 물러나서 울음바다
강은 인제 망했어요
'개펄에서 놀던 강' 전문--2001년 <현대문학>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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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강 하구
만경강 하구의 실뱀장어잡이 어선
염생식물 칠면초 군락
동진강 하구
동진대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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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와 미당 서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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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동백나무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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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대교를 건너면 부안땅이다. "선운사 가봤냐?" "응, 작년 여름에 첨으로 함 가봤는데 너 한번도 못가봤지?" "그럼, 내가 언제 그럴 여유가 있었냐?" "좋다. 전주 영화제는 7시부터잉게 충분히 시간이 된다. 계화도는 내일 가면 될 것이고. 고창 선운사로 간다 잉"
부안의 진산 낯익은 상소산이 나타나면서 부안 읍내로 들어섰다. 동문안당산의 할아버지 장승이 반갑게 우리를 맞는다. 읍내에서 주산면 방향으로 차를 달렸다. "여그 동네 이름이 맷돌리여." 661년 봄 신라가 총력을 기울여 주류성 공격에 나섰을 때 신라군과 백제군은 고부천을 사이에 두고 맞섰다. 백제군은 이곳에 진을 치고 저 뒷산을 군량을 쌓아놓은 것처럼 낟가리로 위장해놓고 큰 맷돌을 돌려 식량이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여 신라군의 사기를 떨어뜨려 마침내 승리하였다 한다. 저 오른쪽 산이 바로 뉘역매라고 하는데 삼국사기에는 두량이성이라 한다. 도롱이뫼라고도 하고 한자로는 사산(蓑山)이다. 백제 최후의 왕성 주류성이 어디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나는 부안의 우금산성이 주류성이라고 주장한다.
"영근아 저앞의 산 한번 봐라. 저 산이 배멧산인디 저렇게 채석장 허가가 나서 산을 헐어내고 있잖냐. 저 산에 소산리 산성이 있고 산 너머로는 백제시대 돌발무덤이 수십기가 발굴된 곳이여. 저 산 너머에도 채석장이 있당게. 그러니까 옛날에는 바로 이 산 밑에까지 조수가 드나들던 곳인디 백제가 대양항해를 가능케 한 배를 만드는 즉 배를 메는 조선소가 있던 곳이여. 그리고 사산리 산성과 함께 소산리 산성은 주류성의 전초기지인 셈이지. 이런 유적지를 야금야금 다 파먹고 있지 않냐. 결국 새만금 방조제로 다 들어가는 거 아니냐?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이런 곳에까지 허가를 내주는 이유가 뭐겄냐?"
배멧산 북사면의 채석장
뜻있는 주산면 사람들의 반대로 더 이상의 채석작업은 중단된 상태이다.
나즈막한 잔등을 넘어가니 저 아래로 아담한 저수지가 보인다. '북두지'란 이름의 저수지인데 제방 위로 갈대가 허옇게 덮여 있다. 그림이 참 좋다. 잠시 차를 세웠다. 카메라를 들고 저수지로 접근하니 가창오리떼가 후두둑 놀라 달아난다. 미안한 생각이 든다. 독일에서는 철새들 산란기에 갯벌 출입자체를 금한다는 말을 들었다. 새들을 놀라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새들아 나디 마라 너 잡을 내 아니다' 저런 새가슴들이 있나. 100미터 전방에서 벌써 다 달아나 버린다.
포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지가 20년이 넘은 줄포를 지났다. 작년만 해도 포구였던 흔적이 있었는데 매립으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흥덕을 지나 질마재를 넘어 선운사에 도착하니 오후 3시가 다 되어간다. 박시인이 뚜벅뚜벅 매표소로 가더니 표를 산다. "야 이 뭔일이다냐. 니가 표를 사다니" "얄마 나도 가끔 이럴 때가 있어"
선운사 입구의 좌판대에 나온 범게. 세계에서 우리 서해안에만 있는 종이며 멸종 위기에 처해있다.
마지막 단풍을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오간다. 선운사 골짜기를 따라 늘어선 단풍이 눈이부시도록 아름답다. 선운사 대웅전 뒤의 동백나무숲을 구경하였다. 건물은 단순한 맞배지붕으로 내소사 대웅전의 섬세한 팔작지붕과는 비교가 안된다. 사찰 경내를 나와서 입구에 서있는 미당 서정주 시비를 둘러보았다. 미당 서정주(1915~2000)는 이곳에서 얼마 안떨어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태어났다. 시비에 이렇게 적혀 있다.
선운사 동구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이 시좀 한 읽어봐라. 사람들은 그 이름난 동백꽃 생각하지만 동백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는 것이고 뜽금없이 육자배기 술집 작부가 등장하는 거여. 또 에둘러서 다 낡아빠진 작년 것을 꺼집어내면서 할 얘기는 다 하는구만. 그리고 '골째기', '않했고', '남았습디다' 하는 시어들은 부안, 고창 지방 말의 맛을 가장 잘 살려낸 거여. 과연 탁월한 시인이여." 박시인의 미당 평이 이어진다. "그렇긴 하지만 대표적인 친일 문학을 하지 않았냐" 그는 내선일체를 노골적으로 부르짖고 이 땅의 젊은이들을 대동아 전쟁터로 내모는 '오장 마쓰이 송가'를 쓴 시인이다. 그 시를 한번 보자.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언덕도 산도 뵈이지 않는 구름만이 둥둥둥 떠서 다니는 몇천 길의 바다런가 <중략> 얼굴에 붉은 홍조를 띠우고 '갔다가 오겠습니다' .. 웃으며 가드니 새와 같은 비행기가 날아서 가드니 아우야 너는 다시 돌아오진 않는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중략>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져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伍長}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아아 레이테만은 어데런가 몇천 길의 바다런가
"물론 그렇지. 당시 문단에 친일하지 않은 사람 손꼽을 정도인데 대부분 일본이 망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는 거 아니냐. " 미당의 이러한 죄과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학적 성과는 너무나 커서 따로 평가해야 한다는 박시인의 주장이다. 잔디밭에서 나머지 김밥을 마저 먹고 변산 내소사로 오는 차 안에서 박시인은 미당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했다. "미당 아버지가 이 지방 대지주 인촌 김성수 집안 마름 아니냐. 대지주의 보호 속에서 살아온 집안 내력이 그로 하여금 권력에 추종하도록 했을 지도 모르지. 그래서 그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권력에 추파를 보냈어."
"그려, 이승만 전기를 썼었지. 그리고 5.16 일어나고 쓴 '국화 옆에서'가 그런 거 아니냐?" "맞어, 이승만 전기를 썼다가 어느 한 대목이 이승만 비위에 거슬려 전량 몰수해서 처분됐지. 출신 자체가 놀고 먹는 한량이 무슨 지조 같은 것이 있었겠냐. 또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김지하 선생이 옥에 갇혔을 때여. 문인들이 모인 어느 자리에서 미당은 김지하를 용서할 수 없는 빨갱이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거든. 그런데 나중에 그가 풀려 나오자 문학하는 사람들의 사표로 삼아야 한다고 추켜올렸거든. 그 이중성이 그의 심각한 정신질환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지. 인공 때 그는 인민군의 표적이었거든. 생사를 넘나드는 도피생활에서 오는 강박감으로 정신질환을 앓았다는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만 보자면 이 땅이 낳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시인이여. 보통 시인들은 하나의 시세계로 일관하는데 미당에는 4개의 시세계를 넘나들었거든. 동천, 신라초, 화사, 귀촉도 시대로 정리되는데 이러다보니 미당을 따라하는 소위 '미당류'라는 게 나타나기 힘든 거여. 그리고 60년대 와서 김수영이 나온 이후에야 비로소 문학의 현실참여 문제가 제기되고 리얼리즘으로 발전하면서 소위 순수문학이란 것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비판을 하게 되었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통'이 나왔을 때는 그게 뭐냐. 뭐? 그의 해맑은 미소를 보면 어린아이처럼 천진무구하여 하느님도 보면 웃을 거라고?" 그의 전두환 탄신 56회 축시를 들여다 보자.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중략> 이 나라가 통일하여 흥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쉬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민족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원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이런 측면에서도 파악할 수도 있는데..." 박시인의 말이 이어진다. "소위 김동리 콤플렉스가 잇다는 거라. 김동리가 이사장으로 있는 한국문인협회가 우리 문단을 주도하지 않았겠냐. 박목월마저 육영수 여사를 업고 정점에 서있는데 미당 자신은 늘 2선으로 밀렸던 것이지. 좌우간 지난번 창비에서 말한 고선생의 말이 맞어. 맹목적인 미당 예찬론자들은 고선생을 비판하는데 그들 뭐 잘 모르고 하는 소리여" 80년대 이후 그와 결별을 했던 고은 시인의 말을 들어보자.
"그와 나 사이는 차츰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서로 원경(遠景)이 되었다. 유신 말기를 지나 80년대에 들어서자마자 내 안의 어느 내 장에도 미당은 들어있지 않았다. 미당과 관련해서, 문제는 순수문학으로서의 무죄가 참여문학으로서의 유죄라는 등식이다. 이 경우 한국 현대시의 순수노선은 일체의 정치적 이념적 개입의 문제로부터 격리되어 시의 현실부재를 지향한다. 그런데 여기서 현실의 모순에 대해서 전혀 간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 순수와 체제와의 무갈등 내지 친체제화로 되는 것을 간과하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참여문학은 어떻게 이해되는가. 순수란 문학의 문제로나 인간 또는 종교적인 가치의 문제로나 가장 눈부신 승화단계일 것이다. 그렇다면 순수문학의 노선이 아니라 문학 자체의 순수한 상태, 순수성으로 말해야 한다. 그것은 방법론적이다. 나는 참여만이 문학의 본보기라고 강변하지 않는다. 모든 참여가 진정한 의미의 전율로서의 초월과 끊임없는 상호운동을 할 때 그 문학은 완성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80년대 후반 이래 확대개념으로서의 리얼리즘 또는 참여에 대한 현대문학 100년의 순문예적 성과를 조응시킬 것을 주장하기도 한 것이다. 거기에는 미당시의 일정한 합류도 포함될 수 있다. 그럴수록 미당의 지리멸렬한 예찬들이나 대중적 추앙의 대안(對岸)에서 미당 비판도 변증법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2001/창작과 비평 여름호>
결국 고은 시인은 미당의 순수문학 노선을 추궁하면서도 새로운 큰 틀에서 그의 문학적 성과들을 조용히 수용하고 있다.
선운사 골짜기 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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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안당산
배멧산 남사면의 채석장
북두지의 모습
선운사 입구
선운사 경내의 감나무
선운사 입구에 있는 미당 서정주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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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소 |
곰소염전 |
줄포까지 되짚어 나와서 영전4거리에서 서쪽을 보고 곰소를 향해 달렸다. "아무래도 내소사 들르는 것은 어려울 거 같다. 벌써 5시 다 돼간다. 해가 짧아서 곧 어두워 질 것이고......내소사는 담에 보도록 하고 곰소 들렀다 걍 전주로 가자" 반계 유형원 선생이 은거하였던 우반동을 지나 나즈막한 동령치 고개를 넘으니 바로 곰소 염전이 나타난다.
곰소에는 원래 범섬, 곰섬, 까치섬 등의 무인도가 있었다. 곰섬 앞에는 큰 못이 있었는데 명주실꾸리 하나가 다 풀어져 들어갈 만큼 깊었다 한다. '곰소 둠벙 속 같다'는 이 지방 속담도 있다. 그래서 곰섬을 '웅연도'라 하였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도 '昑毛浦 在扶安懸南熊淵(금모포는 부안현 웅연 남쪽에 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미 곰소로 불려온 것으로 보인다. '熊淵釣臺(웅연조대)'는 변산팔경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줄포항을 통하여 물자를 수탈해가던 일제는 줄포항이 차츰 뻘로 메워져 큰 배가 드나들기 어렵게 되자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에 위의 세 섬을 연결하는 제방을 쌓아 육지로 연결한 다음 항만을 축조하였다. 그리하여 줄포항을 대신하여 물자를 반출해가는 한편 칠산어장의 어업전진기지로 삼았다. 제방 안쪽으로 염전을 만들고 제빙공장도 세웠다. 200여톤 급의 배가 드나들게 되고 1958년에는 어업조합과 부두노조가 줄포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줄포항은 폐항이 되다시피 했지만 곰소항은 군산에 이어 전라북도에서 두번째로 큰 항구로 떠올라 전성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연근해의 어족이 줄어들고 곰소만의 수심이 낮아지면서 곰소항도 줄포항과 비슷한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1987년 1종항으로 승격된 격포항으로 주요 시설들이 옮겨갔다. 특히 하루 두 차례씩 위도를 오가던 정기여객선마저 1989년부터 격포항으로 옮겨가면서부터 곰소항은 활기를 잃기 시작했다.
곰소 염전에 들러 소금 1포대를 8천원을 주고 샀다. 아직 이런 천일염을 생산하는 염전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반갑기만 하다. 소금의 주성분인 염화나트륨은 우리의 신체에서 체액의 삼투압 균형유지, 신경계의 전기적 산도 유지, 혈액의 압력과 양의 유지, 근육세포에 출입하는 물의 조정, 탄수화물과 단백질의 신진대사 등에 필수적인 물질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즉 소금을 섭취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북미 대륙의 태평양 연안의 원주민들은 해조류를 주로 먹었고, 내륙 지방에서는 풀을 태워 그 재를 먹기도 했다. 뉴기니의 고산지대에서는 사탕수수를 태운 재에 물을 통과시켜 간수를 얻고 이 간수를 진흙 가마에 넣어 증발시켜 덩어리 소금을 얻는다.
1997년 정부는 소금 수입을 자유화 하였다. 이후 값싼 중국산 소금이 밀려들고 있다. 화공약품을 만들고 난 폐재료로 가짜 소금을 만들어 팔다 적발된 사례도 있다. 수입소금은 햇볕이 강렬한 지역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빠르게 응결되어 매우 단단하다. 소금 알갱이를 엄지와 검지 사이에 넣고 꾹 눌러서 쉽게 바스러지면 국내산이고 바스러지지 않으면 수입산이라 보면 된다고 한다. 그래서 국산 천일염으로 배추를 절이면 쉽게 물러지지 않아 김치맛을 더욱 좋게 한다. 또한 우리 서해안의 천일염은 칼슘, 마그네슘, 칼륨 등 다양한 양이온을 함유하고 있다고 한다.
칠산어장에서 잡은 조기가 굴비로 가공되는 데에는 많은 소금이 필요하다. 그런데 소금을 굽는 데에는 소나무 장작이 필요하다. 변산의 소나무는 소금 굽는 데 필요한 장작을 대어주었다. 옛날에는 곰소만 주변의 갯벌에 이런 염전이 많았지만 지금은 유일하게 이 곰소염전 하나가 남았다. 곰소 젓갈의 명성은 널리 알려져 있는데 바로 여기서 나는 양질의 소금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곰소 포구로 차를 들이밀었다. 주말을 맞아 관광객들로 좁은 골목은 꽉 막혀 움직일 수가 없어 다시 빠져나와 우회하여 새로 만든 주차장에 차로 주차해 놓고 포구로 나가 보았다. 만조가 되어 바닷물이 곰소만을 벙벙하게 채워 놓았다. 곰소만은 예로부터 어전어업으로 전국에서 으뜸이었다. 어전(魚 )이란 어살을 말하는데 이는 갯벌에 대나무나 싸리나무를 엮어 주욱 늘어놓고 물이 빠지면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고기들이 여기에 걸리면 꺼내오면 되는 일종의 정치망이다. 나일론이 발명되기 이전의 망어업이란 대규모로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면망에 감물을 들여 질기게 하여 그물을 짰는데 터져버리기 십상이다. 그래서 대규모로 고기를 잡는 일은 이런 어전어업에서 가능하였다. 곰소만은 어전어업에 천혜의 조건을 갖춘 지형이다. 어살을 만드는 재료인 대나무와 싸리나무 등이 풍부하고 소나무 장작이 바로 가까이 있어 소금 생산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연안의 고기들이 점점 줄어들어 이런 어전어업은 보기 힘들지만 60년대까지만 해도 보편적인 어로방식이었다. 지금도 마포나 대항리에서 이러한 방식이 남아 있는 곳이 있다. 그러나 간척사업이 시작되고 방조제 밖에서조차 어획고가 현저히 줄어들어 어민들은 빚만 늘어가고 있는 형편이다.
새만금간척사업 이전에 저 곰소만을 틀어막는 '부창공사'란 이름의 간척사업이 추진된 바 있었다. 지금도 농림수산부 어느 서랍 속에 잠자고 있을 그 사업이 언제 다시 부활할지도 모르는 가운데 도로공사에서는 저 바다를 가로질러 변산반도 끄트머리와 고창군을 잇는 다리를 놓겠다고 하고 있다. 제발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무분별하게 이 강토 이 산하를 만신창이로 만드는 일 좀 그만두자. 전국 어디를 가 보아도 마구잡이로 산허리를 자르고 산을 통째로 털어먹는 일을 쉽게 볼 수 있다. 지방자치제 실시하면서 더욱 두드러진 현상이다.
칠산바다를 물들이는 낙조를 보며 차를 달리다 까치댕이를 지나 왕포에 들렀다. 어떻게 해서 '왕포'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주류성이 나당연합군에게 함락되자 백제왕 부여풍은 고구려로 탈출했다고 하는데 바로 이곳에서 배를 타고 왕등도를 거쳐 고구려로 갔을 것이란 추측을 할 수 있다. 옛날 이곳 사람들은 깔끄막진 밭일을 하다가도 새우떼가 몰려 바닷물 색깔이 뒤집어지만 밭머리에 놓아둔 징을 치고 이를 알려 호미를 내팽개치고 그물을 매고 뻘밭으로 나가 새우떼를 포획하였다고 한다. 젓갈 가공으로 그래도 명맥을 이어가던 포구가 더욱 초라한 모습이다. 영광원자력발전소의 영향도 크다고 한다.
해창 부안사람들 농성장에 도착하니 김화선 간사 혼자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다들 전주 영화제에 갔다는 것이다. 벌써 5시 40분, 전주까지 1시간 30분은 걸리는데 7시 30분쯤에나 영화 시작할테니 충분하다. 어둠이 깔린 농성장을 뒤로 하고 전주로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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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소 염전 창고, 박영근
곰소포구 건어물상에 걸린 간갈치. 10마리 한묶음에 5천원
곰소항
곰소만 일몰
생선을 말리는 널대. 쉬파리의 접근을 막기 위해서 높이 올려놓았다. 왕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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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인권영화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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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평화와인권연대, 정보통신연대INP, 온고을영화터, 천주교정의구현전주교구사제단, 전북대학교총학생회 등 5개 단체에서 주최하고 전북의 19개 사회단체에서 후원하는 '제6회 전주인권영화제'가 전북대학교에서 15일부터 열리고 있다. 오늘 마지막날 폐막작으로 이강길 감독의 '어부로 살고싶다(부제-새만금 갯벌을 지키는 사람들)'이 상영된다. 이 작품은 지난 2년 동안 새만금 갯벌에 진을 치고 새만금 갯벌의 가치와 새만금사업 반대운동을 필름에 담아온 이감독의 열정이 담긴 기록 영화이다. 2년 동안 그 무거운 카메라를 혼자 둘러메고 그 고생을 다 하더니 이제야 성과물로 나타난 것이다.
7시가 채 안되어 서전주에 도착했건만 왕복 4차선 도로가 2차선으로 좁아지면서 차들은 거북이 걸음이다. 더구나 길은 외줄기여서 옆으로 빠져서 우회할 방법도 없다. 간신히 물어물어 영화제가 열리는 전북대 학동회관에 도착하니 7시 50분이다. 200석 정도 규모의 소극장에 7~80명 정도가 관람을 하고 있다. 이 정도면 많은 관객이라고 박시인이 말한다. 어둠 속에서 넷째 형님이 우릴 알아보고 반갑게 맞는다.
갯벌에 의지해 살아가는 부안 사람들의 이야기와 삶의 터전 갯벌을 지키려는 계화도 어민들의 눈물겨운 투쟁 기록, 그리고 무모한 간척사업의 허구성을 파헤치는 내용이 이어진다. 새만금사업은 선심성 선거공약에서 태어났다. 관련 행정부처에서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착공을 안하고 있던 것을 당시 김대중 야당 총재의 요구를 노태우 대통령이 수용함으로써 1991년 11월에 기공식을 갖고 매년 1000억 이상의 예산을 배정하여 지금까지 1조 3천억원이 들어갔다. 감사원의 지적에 따르면 논을 만든다 하더라도 5조 9천억원이 들어가며 복합산업단지로 할 경우 28조원의 돈이 들어간다고 하였다. 여기에는 수질개선비용이 들어가지 않았다. 농업용수로 쓰일 새만금호의 수질개선을 위한 비용까지 합한다면 여기에 얼마의 돈이 더 들어갈지 시쳇말로 견적조차도 낼 수 없는 사업이다. 거기에 불보듯 훤한 환경재앙은 어쩔 것인가. 이미 시화호에서 보지 않았는가. 그런데 유종근 도지사는 전북이 잘살게 된다면서 지금도 도민들을 미망에 빠뜨리고 있다. 전북 어민이나 농민들을 다 죽이는 사업이 새만금사업이다. 수질오염원인 인을 줄이기 위해 비료사용을 30% 줄여야 하며 가축사육두수도 억제해야 한다. 또한 주요도시를 그린벨트로 묶어 개발을 제한하겠다고 한다.
지난 5월 25일 새만금 강행 결정이 있던 날 서울에 올라간 순덕아줌마의 절규가 화면에 나온다.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정부종합청사 안으로 들어가려하자 정문을 지키는 경찰이 황급히 대문을 걸어 잠근다. 대문을 부여잡고 외친다. "한갑수 네 이놈 나오너라! 계화도에서 너를 보려고 왔다" 이 긴박한 상황을 놓치지 않고 필름에 육성과 함께 담은 감독 또한 대단하다. 순덕아줌마도 그동안 직접 싸워오셨던 일들을 영화로 보시면서 연신 눈물을 닦으신다.
지도 교수와 함께 인사하는 스텝진
영화가 끝나고 영화제를 준비한 측의 인사가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등학생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온고을영화터 회원들이다. 이들이 바로 우리 미래의 희망 아니겠는가. 문정현, 문규현 신부님을 따라 뒷풀이 장소로 갔다. 명동성당에서 청와대를 향해 수경스님과 함께 3보1배를 하며 광화문까지 가셨던 문규현 신부님은 '새만금갯벌생명평화연대' 공동 의장이시고, 문정현 신부님은 한미행정협정(SOFA)을 반대하는 시위를 줄기차게 해오시고 있고 새만금사업 반대 운동에도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시고 있다. 지난 여름 세계적인 환경단체인 지구의 벗 나바로 의장이 방한하여 새만금전시관을 찾았을 때 유종근 도지사의 항의 서한을 손에 든 도청 직원이 이 장면을 사진찍어 신문에 낼 지방지 기자들을 데리고 전달하려 하자 문정현 신부님께서 호통을 쳐서 내쫒은 일도 있었다.
20여명이 뒷풀이에 참여하였다. 처음 보는 사람들 소개가 있었는데 신형록 대표가 나를 소개하고 나는 박시인을 소개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이며 안치환이 부른 '솔아 푸른 솔아'의 작사자이고 또한 새만금 갯벌에 대해 여러 편의 시를 썼다고 소개하자 많은 박수로 환영하였다. 다 같이 이감독의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고 오늘의 성과를 축하하는 건배를 하였다. "제작 기간이 2년이면 태조 왕건보다 더 길당게" "어깨에 맨 카메라 흔들리지도 않고 그 데모 현장을 찍는 거 보면 숨도 안쉬는개벼?" 남원 출신의 이감독 이젠 갯벌 박사가 되었으리. 70분짜리 오늘의 영화는 그가 그동안 찍은 필름의 극히 일부분을 편집한 것이라 하니 앞으로 주제별로 이같은 영화 서너개는 더 나올 수 있다는 문규현 신부님의 말씀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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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풀이 때 인사하는 이강길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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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합 잔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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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가 넘어 뒷풀이 모임이 끝났다. 부안사람들과 이감독 일행, 그리고 전북환경운동연합 주용기 실장은 이감독의 봉고차와 나의 승용차에 나누어 타고 부안으로 향하였다. 신형록 대표는 순덕 아줌마와 함께 해창 농성장으로 간다며 조금 일찍 출발했다.
밤길을 달려 모두 부안읍 서외리에 있는 부안사람들 사무실에 모였다. 넷째 형님이 미리 부탁해놓은 백합을 김종성씨가 가지고 왔다. 커다란 쟁반 위에 백합을 깨끗이 씻어서 내왔다. 넷째 형님의 백합 강의가 이어진다.
백합은 껍데기에 백가지의 무늬가 있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한국과 일본 중국의 해안에서만 사는데 바다와 강물이 만나는 하구갯벌의 모래가 적당히 섞인 모래펄 갯벌에서 자란다. 새만금 갯벌은 이러한 백합의 생육조건을 잘 만족시키고 있어 우리나라 백합 생산의 80%정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바지락, 떡조개, 가무락조개, 민들조개, 넓적조개 등도 백합과에 속한다. 그러니 백합과는 이매패류(껍데기가 한 쌍으로 된 조개류의 총칭)를 대표하는 조개 집안의 종가집인 셈이다. 그 맛과 향 또한 뛰어나다. 탕으로, 죽으로, 구이로, 횟감으로, 찜으로 요리해 먹는데 철분, 칼슘, 핵산, 타우린 등 40여 가지의 필수아미노산이 들어 있어서 영양면에서도 만점이다. 특히 간에 아주 좋아 장복을 하면 황달이나 간경화도 낫게 한다고 한다.
몇 년전 까지도 5t짜리 배 한척이 나가면 하루 1t씩의 백합을 채취해왔다. 특히 백합은 계화도에서 맨손어업을 하는 어민들의 생명줄이다. 그랭이 하나만 있으면 아이들 두셋 대학까지 가르치는 것은 문제가 안되었다. 벼농사야 일면에 한번 지으면 그만이지만 백합은 물때만 되면 나가서 파오면 되는 것이다.
계화도에서만 해도 하루 15톤 정도의 백합이 출하되었다. 그러나 2000년도 들어 급격히 감소하면서 지금은 예전의 1/3 수준이다. 방조제 공사가 끝나면 갯벌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와 함께 이 아름다운 백합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백합은 그렇다 치고 농사도 짓지 않고 그랭이 하나에 의지한 채 백합 채취로 파서 생계를 유지해 온 맨손 어업을 하는 사람들은 어찌 될 것인가. 보상금 다 받지 않았냐고 하지만 이들이 받은 보상금은 1천만원이 안된다는 말을 들었다.
'안되지 그럴 수 없어. 설혹 방조제를 다 막는다 해도 결국 다시 헐어내게 될 거야.' 칼로 백합을 까서 날로 먹었다. 소주잔이 돌아간다. "영근아 아무리 우리가 술을 안마시기로 했지만 그냥 말 수가 없지? 백합에 대한 예우도 그게 아니고....." 짭쪼름한 소금가가 있어서 간이 딱 맞는다. 순창 산골 출신의 주용기 실장은 날 것을 먹지 못하고 있다가 그냥 물만 조금 붓고 끓인 탕이 나오자 그제서야 달겨든다. 모처럼 백합으로 포식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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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창 농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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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시가 훌적 넘어버렸다. "해창 농성장으로 갑시다" 나와 주용기 실장, 그리고 이감독 일행은 자리를 정리하고 해창으로 향하였다. 술을 마시지 않은 이감독 일행 한 분이 한 분이 운전을 하였다. 농성장에 도착하니 3시가 다 되었다. 전북사람들, 부안사람들 농성장은 새만금 전시관 정문 바로 옆 담벼락 아래에 있다. 부안쪽에서 오는 차들이 이곳을 바로 마주치는 위치이다. 이곳에 걸개 그림과 현수막을 늘어놓고 9주째 주말마다 농성을 하고 있다. 밤이 되면 추워서 고생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불도 켜있지 않다. 문규현 신부님이 주신 발전기가 있는데 틀면 소음이 커서 한밤중에는 꺼놓은 모양이다. 부안 사람들, 전북 사람들은 이미 침낭 속에서 웅크리고 새우잠을 자고 있다.
털보 이재영과 이감독 그리고 주실장이랑 해창 장승벌 기도의 집으로 왔다. 어둑어둑 어둠 속에 장승들이 서 있다. 새만금 방조제가 뻗어나가는 모습이 한눈에 보이는 방조제 바로 안쪽인 이곳은 부안, 전북사람들 뿐만 아니라 새만금 사업을 반대하는 모든 환경단체들에게는 잘 알려진 곳이다. 작년 1월 30일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 속에서 새만금사업을반대하는부안사람들, 전북환경운동연합, 그린훼밀리운동연합, 녹색연합, 환경과공해연구회, 한국YMCA전국연합, 환경운동연합 등 환경단체의 주최로 새만금매향제가 있었다.
매향이란 민중들이 미륵세상의 도래를 기원하며 갯벌에 향나무를 묻는 의식을 말한다. 우리의 옛 선조들은 현실적 고통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미륵신앙과의 결합을 염원하며 바닷가 곳곳에 매향비를 세웠다. 미륵신앙은 현실을 떠난 정토가 아니라 현세위주의 구세기복신앙으로 이 땅에 도래하는 미륵과 함께 부활하여 정토에 왕생하는 기회를 부여받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동해의 삼일포나 충남 당진의 안국사지, 서산 해미읍성, 전남 영광의 법성포, 해남의 맹진 등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매향비의 공통점은 변방 바닷가에 세워졌다는 점이다. 시기적으로는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집중적으로 세워졌는데, 이 시기는 왕조교체기의 혼란기였고, 또 한편으로는 일본의 침입이 잦았던 시기이다. 이러한 어둡고 불안한 시대상황 속에서, 더하여 일본의 치떨리는 노략질마저 극심하자 바닷가의 민중들은 미륵이 주재하는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염원하며 갯벌에 향나무를 묻었을 것이다.
비문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앞> "우리가 선조로부터 물려받았듯이 후대에 물려줄 갯벌이 보전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 비를 세우며 해창다리에서 서북쪽 300걸음 갯벌에 매향합니다" <뒤> 새만금간척사업을 반대하여 갯벌이 보전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뜻을 함께한 이름들을 이 비에 남깁니다.
2000년 1월 30일
새만금사업을반대하는부안사람들 전북환경운동연합 그린훼밀리운동연합 녹색연합 환경과공해연구회 한국YMCA전국연합 환경운동연합
그리고 이어 3월 26일, 새만금사업을반대하는부안사람들, 전북환경운동연합,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풀꽃세상을위한모임 등의 환경단체들이 다시 모여 바다로 간 장승제를 열었다. 이들은 이렇게 선언하였다.
나리님 나라님들이 머리를 모았습니다 바다를 막자고 세계 최대의 똥통 하나 만들자고 국민혈세 펑펑 쓰며 이 산 저 산을 마구 깎아 내립니다 덤프트럭 포크레인 소리가 지축을 흔들어댑니다 바다를 막는 소리입니다 반지락 농발게가 살려달라고 아우성입니다 굴 따고 백합 잡아 자식들 키워 낸 울 엄니 한숨이 길어집니다 세계인들이 비웃는 소리도 섞여 있습니다 나라님들은 세계 최대의 역사라고 자랑합니다 바야흐로 서해안시대가 열린다고 핑크색 칠을 해댑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서해안시대가 막을 내린다는 소리로도 들립니다 보다못한 천하대장군님 지하여장군님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는 바다로 갔습니다 바다를 지키겠다고... 뭇생명을 품고 있는 저 갯벌이 절대로 육지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2000년 3월26 일
설치 예술가 최병수가 기획하고 제작한 70여기의 장승들이 해창 갯벌에 세워졌다. 이 장승들은 반대하는 모든 이들의 염원을 담아 오늘도 이 자리에 퉁방울 눈 부라리며 우뚝 서서 갯벌을 살려야 한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이곳은 장승벌로 불리게 되었다.
지난 4월 8일에는 새만금갯벌생명평화연대의 불교와 천주교 모임은 이곳에서 <대한불교 조계종 해창사>와 <새만금갯벌생명평화 기도의 집> 개소식을 열었다. 각각 콘테이너 박스 하나씩을 설치하고 이곳에서 새만금 갯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주말마다 법회를 보고 미사를 들이기로 한 것이다.
기도의 집에 보일러를 틀고 들어가 나와 멍석을 깐 바닥에 좌정하였다. 이감독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이재영과 소줏잔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그와는 작년 10월에 부사의방장을 같이 오르면서 친하게 된 사이이다. 하서면 의복리에 사는 그는 보상금 받기를 거부한 유일한 사람이다. 그로부터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보상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들었다.
새만금사업이 시작되자 사업주체인 농림부는 어민들에 대한 보상비 지급을 전라북도에 의뢰하였고 전라북도는 조사업무를 다시 군산대 해양학과에 위임하였다. 해양학과 학생들이 나와서 조사업무를 수행하고 보상비 지급액을 정하는 기초자료를 제공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미리 정보를 빼낸 타지 사람들이 양식장을 사들여 투기 바람이 불어 양식장 매매 가격이 급등하기도 하였고, 낡아빠진 배들이 값이 치솟기도 하였다. 바닷가에서 좀 떨어진 마을에서도 어촌계가 급조되었고 심지어 읍내 다방에서 일하는 타지 출신의 아가씨들도 주민등록을 옮겼다. 이 아가씨들도 500~600만원씩 받았다 한다. 보상비는 크게 면허어업과 맨손어업으로 구분하여 지급되었는데 방조제 밖이나 방조제 안이나, 100% 맨손어업에 의지하여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나 농사를 위주로 하면서 가끔 찬거리나 얻는 바닷가에서 좀 떨어진 마을 사람이거나 간에 별 차이가 없었다. 600~800만원 대이다. 억대 넘게 보상비를 받은 사람은 어민들이 아닌 대부분 외지에서 온 투기꾼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4800억원의 보상비 지급은 완전히 끝난 상태이다.
동쪽 하늘이 부옇게 밝아온다. 이재영과는 다음에 더 자세한 얘기를 하기로 하고 부안 숙소로 가기 위해 자리를 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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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화도 |
이 드넓은 습지가 있다는 자체만으로 천혜인 것을... |
"일어나~" 형님께서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1시다. 너댓시간은 잤으니 충분하다. 박시인을 흔들어 깨웠다. 대충 준비를 하고 계화도로 가는 도중 창북리에 있는 식당에 들렀다. 부안에 오면 꼭 여기서 식사를 하곤 한다. 4000원짜리 백반이지만 온갖 인근에서 나는 해산물이 총동원된 듯한 반찬이 너무 걸다. 여름에는 쭈꾸미 숙회가 나왔는데 오늘은 병어회가 나왔다. 밤새 시달린 속을 시원스레 평정하였다. 계화도 간척지가 나타난다. 60년대 간척 사업 이전에 계화도 사람들은 백합을 파서 머리에 고개껏 이고 한 물때에 걸어나와 부안읍에서 팔아 보리됫박이나 바꿔서 다음 물때에 다시 계화도로 들어왔다고 한다. "이 근처에 아마 피조대가 있었을 것이여, 간재 선생이 만들었다고 하던데..." 급한 김에 조금 늦게 개를 건너가려고 나섰다가 중간 쯤에서 불이 불어 막히게 되면 꼼짝없이 수중고혼이 된다. 그래서 중간에 높은 대를 만들어 놓고 조수를 피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리 갯벌로 나가보았다. 갯벌은 항상 자신을 올려세워 맞서지 않고 넓게 드러누운 채로 우리를 맞는다. 지난 여름까지 허리께가지 파묻혀 있던 머구릿배는 죽뻘에 완전히 묻혀버려 눈에 보이지 않는다. 물길이 돌지 않고 바닷물이 정체된 상태에서 부유물이 가라앉아 생기는 뻘이 이른바 죽은 뻘이라는 뜻의 죽뻘이다. 죽뻘에는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다. 죽뻘이 차오르는 하리 갯벌 위로 물떼새들이 무리를 지어 배회하다가 산모퉁이 너머로 사라진다.
저 끝간데 모를 갯벌 너머 하늘과 맛닿은 곳은 수평선인가 지평선인가. 어떤 이는 벌평선이라고도 부른다. 영근이가 지은 다음 시는 갯벌의 생명력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동진강 하구역 강물은 오래 흘러온 길을 갯물에 씻고
물 때가 온다 물골을 트고 갯벌이 논다 농게 참게 능쟁이는 볼볼볼 춤을 추고 드난살이 말뚝망둥어는 알을 슬고, 먼 개를 지나 숭어새끼들은 너울을 타고 솟구쳐 오고 있을 것이다 뻘밑 깊은 곳에서는 백합이 숨 쉬는 소리 한 숨 한 숨 살이 오르는 소리
달과 지구 사이 수만년의 바다가 흘렀을 것이다 천 갈래 만 갈래 살아 넘치는 바다 바람 자면 저물어 멀리 야위는 바다 밀물과 썰물 사이 수만년 산 것들이 물길을 열었을 것이다
갯벌에 강물에
댕기물떼새 한 마리 기진한 허공을 내려와 뻘 한 점을 물고 있다 '물 때' - 전문
이런 생태계의 보고를 궤멸시켜버리고 어찌 재앙이 따르지 않겠는가. 이를 추진하는 과정은 대 국민 사기극이다.
그 옛날, 그리 먼 옛날도 아니다. 3,40년 전만해도 변산반도 해안을 빙 둘러가며 들어선 어촌들은 참으로 가난한 동네였다. 간조기나 간갈치, 새비젓 등을 머리에 이고 몇십리를 걸어 농사짓는 마을에 나가 내다 팔아 겨우 쌀 몇되박 바꾸었다. 오죽했으면 "시집갈 때까지 쌀 서말 못먹고 간다"는 말이 나왔으랴.
그 때만 해도 갯것은 너무 흔전만전하여 왠만한 조개들은 돈을 주고 따로 사먹지 않았었다. 영조때 택리지를 쓴 이중환이 변산에서는 따로 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조개를 먹을 수 있다 하였는데 30년 전만 해도 그랬다. 동네 점빵에 가서 막걸리 소승 한되만 먹어도 안주로 갖가지 해물을 거저 내왔다. 호주머니 사정이 좀 넉넉하면 돼지고기 반근 정도 주문해서 안주로 삼았다. 10여년 전 추석 명절 때 일이었는데 전어가 얼마나 많이 잡혔는지 한 리어카에 2만원 주고 사다가 구워먹으면서 농악을 치면서 북두칠성이 엥돌아지도록 동네잔치를 벌인 적도 있었다.
이렇게 갯것이 싸디쌌으니 어민들이 잘 살 수 있었겠는가. 그 옛날 냉동시설이 있기를 했나, 포장된 도로가 있기를 했나. 그들은 갯것 덕분에 배는 곯지 않았어도 돈을 만져보기가 쉽지 않았었다. 그 시대를 살아온 지금의 노년층들. 그들에게 쌀, 논 등은 평생에 한이 맺힌 것이었다. 농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세워서 공장이 들어서고 길이 나고 그러는데 곡창 우리나라의 곡창 전북에서는 이촌향도가 줄을 잇고 전북의 인구는 300만에서 200만으로 줄었다.
끝까지 고향에 남아 농사를 짓거나 갯일을 하며 사는 도민들에게 선거때 정치인들이 제시한 새만금사업은 그야말로 장밋빛 청사진이었다.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는 서해안 시대가 오고있고 이제 곧 새만금지구는 임해공업단지와 국제무역항이 들어서 대중국무역거래의 교두보가 된다고 하는데 누가 반대를 하겠는가. 감히 나서지 못했다. 이 무렵에는 반대를 했다가는 돌팔매를 맞을 분위기였다.
“몇해 전만 해도 새만금 사업을 반대하면 빨갱이로 몰릴 정도였지요. 반대하면 보상금도 못받는데 누가 나서겠어요.”<한국일보 2000년 6월9일자>
누구 하나 이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오로지 부푼 꿈만 안겨다 주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사업 주체인 농림부에서는 공업단지를 조성할 계획도 없었고, 해운항만청에서는 새만금 국제항을 만들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다. 정치권에서 표를 잡기 위해 풍선을 띄우고 언론이 이를 포장하여 보도한 것이다. 아직도 전북도민의 상당수는 이 미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새만금 간척지구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넓은 갯벌중의 하나이다. 이를 전라북도가 온존히 차지하고 있다. 거기에 강하구를 댐으로 뚜드려 막지않은 자연 그대로의 강 만경강과 동진강이 흘러들며 바닷물과 매일 두 번씩 교접을 한다. 여기에서 온갖 생명들이 태어나 그 끝간데 모를 광활한 갯벌을 생명의 바다로 만들고 연간 수십만 마리의 철새들을 불러오고 있다. 그 종류도 다양하다. 백로, 저어새, 쇠기러기, 해오라기, 개리, 청둥오리, 마도요, 꺅도요, 민물도요, 쇠청다리도요사촌, 무슨도요, 무슨도요, 온갖 도요새들. 한 때는 세계적으로 500여마리밖에 없다는 천연기념물 노랑부리백로도 오셨었다.
거기에 장광80리 소천엽 속 같다는 내변산의 절경은 어떠한가. 직소폭포, 선녀탕, 분옥담, 와룡소, 가마소, 사성폭포, 구시1, 2, 3폭. 월명암에서 내려다보는 내변산의 운해, 낙조대에서 바라보는 서해 일몰. 옥토망월형의 대명당 변산의 최고봉 의상봉에서 바라보는 칠산바다. 과연 고려 때의 문장가 이규보가 말했듯 부안은 천부의 고을이 아닌가.
또한 문화유적은 얼마나 많은가. 동문안당산, 서문안당산, 남문안당산, 서외리당간지주, 월촌리석장생, 돌모산석장생, 죽림리석장생, 대벌리쌍조석간당산, 창북리당산 등등은 민속신앙의 문화유산을 더듬어보는 집합소이고, 남방식지석묘로는 최대의 것이라는 구암리 지석묘를 필두로 지석리 지석묘, 만화동지석묘, 백련리 지석묘, 진동리 지석묘, 남포리지석묘, 실음리지석묘 등의 고인돌이 곳곳에 널려있고,
부여복신장군의 백제부흥의 꿈이 한을 품고 스러진 자취 주류성, 울금바위, 소산리산성, 두량이성 7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판도를 바꾼 백제, 신라, 당, 왜가 참여하여 국제 해전을 벌인 백강전투의 현장 나뭇개 원효의 화쟁사상을 성숙시킨 원효굴 미륵신앙의 발원지 진표율사의 수도처 부사의방장 실학의 비조 유형원이 20여년을 머물며 반계수록을 남긴 우반동 등의 역사유적 또한 즐비하다.
천년고찰 개암사와 내소사의 보물만도 몇 십점이던가.
- 연중무휴로 동죽 바지락 생합 가무락조개 등이 경운기로 실려나오는 세계에서 가장넓은 갯벌 - 내변산의 절경 - 곳곳에 널린 문화유적 - 여기에 태고적 신비로움과 처녀성을 간직한 고군산군도의 섬들
이들을 묶어 관광 인프라를 만드는 것이다. 갯벌에서 온갖 생명체들과 천진난만하게 노는 2세들을 다독여서 내변산으로 들어가 비린내를 씻고 월명암 마천대에 올라 칠산바다를 붉게 태우는 낙조를 본 다음 감칠맛 나는 바지락죽으로 여독을 풀며 까만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세다가 이튿날 역사의 현장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이보다 더 훌륭한 관광지가 또 있을까.
전북갯벌의 60%를 없애고 논으로 만들었을 때는 어떠한가. 전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만경강, 동진강 수역은 새만금호 수질개선을 위해 철저히 관리를 당해야 한다. 소, 돼지 닭을 쿼터제로 마릿수를 배당받아 키워야 할 터이며, 농사짓는 비료도 규제를 당해야 하고 수질 개선비용에 도 재정은 크게 압박을 받을 것이다. 그래도 과학자들은 새만금호의 수질을 장담하지 못하는데 그 물이 다 썩어 들어가면 이 얼마나 무서운 재앙인가. 똘건너 장항이라고 부르며 예로부터 똘물과 함께 살아온 군산사람들은 말한다. 새만금호는 반드시 썩게 마련이라고.
아주머니 한분이 뻘밭에서 나오신다. 한참을 기다려 다가가 보았다. 갓잡은 백합이 5키로쯤 바구니에 담겨 있다. 아침에 교회 갔다 와서 몸이 찌뿌둥하여 뻘밭에 다녀오는 중이라고 한다. 5킬로면 6만원쯤 한다. 과연 '갯벌통장'이란 말이 실감이 난다. 본래 조개를 잡는 일은 아녀자들의 몫이었다. 남정네들은 배를 타고 나가 농어, 민어, 숭어 등 생선을 잡았다. 그러나 물길이 막히고 어획고가 줄어들면서 이웃간에도 경쟁이 치열해졌다. 좀더 빠른, 성능이 좋은 배가 좋은 어장을 차지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지금은 남자들도 체면 불구하고 백합잡이에 나선다는 것이다. 그러나 백합도 갈수록 고갈되어가고 있다. 하루 계화도에서만 15톤 정도 출하되는 백합이 요즘은 3톤도 안된다고 한다. 그나마 다 자라지 못한 조개를 파오게 되어 씨알도 점점 작아지고 있다. 그나저나 800만원 받은 보상금으로 어디 가서 새 삶을 꾸릴 것인가. 그리고 갯일만 해본 사람들은 다른 일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고 한다. 계화도간척사업을 할 당시 섬진강다목점댐으로 수몰된 마을 사람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켜 정착하도록 하였는데 계화도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들이다. 원주민들은 대대로 갯벌에 의지하여 살고 있다.
우리는 계화도 갯벌에서 나와 2호 방조제를 따라 돈지에 있는 설치 예술가 최병수의 작업장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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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뻘
'김정식 노래마당'이 계화초등학교에서 있음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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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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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예술가 최병수의 작업장은 계화도에서 제2방조제를 지나 하서면 돈지에 있다. 그는 작년 3월 해창에 장승 70여기를 깎아 세운 이후 줄곧 이곳에서 새만금사업 저지의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제작해오고 있다. 이 작업장은 농협 창고 건물이었는데 안에 들어가면 그의 대형 작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그의 작업장 마당에 들어섰다. 여기저기 나무토막과 커다란 목재, 깨어진 항아리들이 널려 있는 가운데 마당 한가운데에 우뚝 선 거대한 조형물이 서 있다. 한창 작업이 진행중이다. 곳간 문 같은 문을 열고 들어서니 반갑게 우리 일행을 맞는다. 최근에 월동을 위해 방을 들였단다. 방 한칸 부엌 한칸인데 제법 살림이 갖추어져 있다. 방은 황토흙 위에 짚으로 짠 멍석을 깔았다. 보일러를 놓아 바닥이 따끈따끈하다.
부엌 싱크대 위 수도꼭지에는 백열등이 매달려 있고 여기저기 주방용품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나로서는 도무지 용도도 알 수가 없다. 이름 모를 무슨 연장같기도 하고 작품인 것 같기도 하고 생활용품 같기도 한 것이 벽에 여기저기 걸려 있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판화 '장산곶매'가 한쪽 벽에 걸려 있다. 이 작품을 보고 백기완 선생이 '통일 염원을 이 장산곶매로 다 담아 내었다'고 격찬을 했다 하는데 본인은 그저 왼쪽 공간처리를 위해 별 생각없이 매 한마리를 넣었다고 한다.
중학교를 중퇴한 그는 신문팔이, 중국집 배달원, 선반보조공, 보일러공, 목수 등 안해 본 일이 없다. 80년대 이후 문화운동을 위한 크고 작은 소품을 만들고 무대설치를 하고 그림을 그리는 등 일을 하다 86년 ‘정릉 벽화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불려들어갔는데 여기서 그의 직업난은 경찰에 의해 화가로 기입되어 어쩔 수 없이 화가가 되었다. 스스로 '관제 화가'라고 한다. 87년 6월 시민항쟁 당시 대형 걸개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 제작하였다.
이제 그는 부안 신시장에서 석굴을 자루째 사다놓고 먹어가며 힘을 내어 또 다른 거대한 조각품을 만들고 있다. 작품 이름은 '갯벌의 꿈'이다. 높이 3미터가 넘는 목재는 계화도 갯벌에 떠밀려 온 것을 주워왔는데 인도네시아산 나왕이다. 내년 봄이 되기 전까지 완성할 것이라 한다. 전기 톱날 돌아가는 소리가 몹시도 크다. 그래서 그는 귀마개를 쓰고 작업을 한다. 그 톱날 끝으로 새만금 갯벌이 펼쳐져 있다.
그의 갯벌을 살리려는 정열이 담긴 부안에서 만든 작품들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날이 반드시 오고 말 것이다. 나와 영근이는 우리의 친구 조찬준을 만나기 위해 변산으로 향했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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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곶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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