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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적 없는 젊은이 -4
선출이가 서울에 있는 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게 되자 도시오는 북촌에다 집을 한 채 마련하였다.
후지끼 상과 자주 서울에 오는 도시오는 재산이 늘어 여유가 생기자 서울에서 후지끼 상이 쉬어갈 집을 마련하고 싶던 차에 도부상이 살던 집 한 채가 났다.
옛날에 권문세가가 지은 꽤나 규모 있는 집으로 도부상이 10여년 사용하다가 내 놓은 것을 도시오가 사게 되었다.
웅장한 안채와 사랑채를 비롯하여 주인이 서재(書齋)로 사용하였음직한 별채는 예대로나 행랑채는 도부꾼들의 숙소 창고로 사용하면서 많이 낡았다.
대문 밖에 바깥마당의 넓은 터 한쪽에 생뚱맞게 학생과 부녀자를 위한 잡화점가게가 하나 있었다.
집을 수리하면서 지저분한 행랑채를 수리하면서 필요 없는 창고들은 헐어버리고 메워진 옛 연당과 정원을 복원했다.
도시오는 창바우(김해군 생림면 창암리)서 소작쟁이로 고생하는 처제네 식구를 불러올렸다.
처제 김 서방네를 처갓집 식구들을 부를 때 같이 불러올리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던 것을 북촌에 새 집을 마련하면서 불러올리기로 결단했다.
갓난이가 처제 김 서방네를 데리러갔다.
창바우로 가려면 삼랑진에서 나룻배로 낙동강을 건너야 한다.
창바우 나루에 내리니 땅거미 내렸다.
마을 들입에 있는 김 서방네 집 사립짝을 밀고 들어가면서 김 서방네 큰 딸 순덕이를 불렀다.
헛간 방에서 가마니를 짜느라 사람 소리는 못 듣고 개 짓는 소리에 김 서방이 밖을 내다보니 어두운 마당에 웬 낮선 귀부인이 서 있었다.
김 서방이 “누고?” 하였다.
갓난이가 “김 서방 내요” 하며 헛간 방으로 들어서도 김 서방 내외가 얼른 알아보지 못하고 당황스럽게 처다 봤다.
낮선 귀부인이 스스럼없이 들어오자 놀라 처다 보는 앞에서 “순덕아 내다” 하는 갓난이 목소리를 듣고서야 김 서방 내외가 갓난이를 알아보고 김 서방네가 먼저 “아이고 형님아” 하며 일어나자 김 서방도 따라 일어서며 “처형 오셨군요.” 하였다.
3년 전에 홍수가 나서 흉년이 들었을 때였다.
남쪽지방에 흉년이 들었다는 소문을 들은 갓난이가 남동생을 보내 김 서방 형제들을 위해 돈을 보내 주었다.
그때 많은 돈을 보내준 언니네 집이 아주 잘 산다는 소식은 동생에게 들어 알았지만 부잣집 마나님이 되어 찾아온 모습을 보고 쉬이 알아보지 못했다.
인사가 끝나자 갓난이는 김 서방네 가족을 서울로 데려가려고 왔다며 새벽차로 서울에 올라가자고 했다.
부자 언니가 서울로 데려가겠다고 하자 김 서방네는 반갑기는 한데 새벽차로 갑자기 가려면 밤새 어떻게 이사준비를 하느냐고 걱정을 했다.
동생이 걱정하자 갓난이는 “걱정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하고 김 서방 형제들을 불렀다.
밤이 깊어서야 모인 김 서방 형제들 앞에서 갓난이가 동생네 오막살이집은 집이 없는 김 서방 동생네 주고, 집 앞에 있는 남새밭은 김 서방 형님네 주고, 집안에 있는 세간들은 형제가 나눠가지라고 한 후에 김 서방네 가족들에게 몸만 가자고 하였다.
김 서방 내외는 집과 남새밭과 세간을 형제들에게 나눠주고 몸만 따라가자고 하는 갓난이 처사를 당황스러워하였다.
갓난이는 동생 내외에게 “서울에 가면 순덕이네 살 집도 있고 일할 논밭은 물론 세간도 모두 준비 되었으니 걱정하지 말고 가자” 하였다.
김 서방네 가족들은 갓난이가 하자는 대로 새벽 기차를 탔다.
서울에 도착한 김 서방 가족들은 넓고 웅장한 저택에 어안이 벙벙했다.
김 서방네를 위하여 마련해 놓은 세간만 해도 구경 한번 못해 본 것들이다.
촌에서 언니가 시(媤) 형제들에게 집과 살림살이를 나눠줄 때 아깝게 여겼던 미련이 싹없어졌다.
갓난이는 김 서방네에게 우선 바깥마당에 있는 잡화점을 맡겼다.
평생을 남의 천한 작인노릇만 하던 김 서방네 부부는 잡화점 일을 시켜주자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영리한 김 서방 내외는 언문도 쓸 줄 알아 잡화점 일을 곧잘 익혀갔다.
도시오는 가족들의 이름을 고쳤다.
상전들이 지어준 이름은 누가 보아도 천한 상놈 티가 났다.
성 참봉 밑에 있을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으나 세상에 나와 출입을 하고보니 한심하고 부끄럽기가 짝이 없는 이름이다.
먼저선(先) 날 출(出) 자를 쓰는 선출(先出)이는 먼저 나왔다는 뜻이다.
나중에 나왔다고 후출(後出)이라 하였으니 참으로 한심하게 지은 이름이다.
방금 낳은 아이라는 아내의 이름, 갓난이는 어떤가.......,
어처구니없게도 이름들이 “나는 상놈이요.” 하지 않는가?
도시오는 자기 성이 왜 손 씨며, 어디 손 씨인지도 모른다.
아버지 없이 자란 도시오는 엄마가 손가라고 해서 그렇게 알고 있을 뿐이다.
서울 집을 계약하는 날 옆집에 사는 손수안(孫秀安)씨를 알게 되었다.
도시오와 도부꾼 사이에 손수안(孫秀安)씨가 계약서를 섰다.
술자리를 파하고 나서 도시오가 같은 손 씨 끼리 한잔 더하며 손수안(孫秀安)씨와 같이 청요리 집으로 가서 저녁을 겸해 한잔 나눴다.
동갑으로 금융조합에 다니며 호방(豪放)한 손수안(孫秀安)씨와 친하고 싶었다.
청요리를 시켜 술을 마시며 둘은 친구하기로 했다.
옆집에 살다보니 자주 술자리를 같이 했다.
하루는 건하게 취한 손수안(孫秀安)씨가 집안 이야기를 꺼냈다.
손씨 집안이 대원군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대원군이 민씨 정권에 밀려 청나라로 끌려갈 때, 여흥 민씨의 미움을 받아 조상님들 5대가 나란히 누워있는 선산을 빼앗겼다.
여흥 민씨네 집안에 일진회 간부를 지낸 자가 그의 힘을 믿고 조상 묘소 위에 저희 부모 무덤을 만들고는 손씨네 조상들의 무덤까지 파내라고 하였다.
조선의 관례는 남의 땅이라도 먼저 무덤을 쓴 자의 권리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5대나 되는 묘소를 파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짓이다.
오히려 파내야 할 쪽은 저희들이면서 손수안씨네 조상님의 무덤을 파내라고 윽박질렀다.
손수안씨의 말을 마음에 담아 두었던 도시오가 경시청 회의에 참석차 서울에 올라온 후지끼 상을 별채에 모신 술자리에 손수안(孫秀安)씨를 불렀다.
술을 한 순배 한 후에 도시오가 손수안(孫秀安)씨에게 의도적으로 선산문제를 넌지시 물었다.
손수안씨는 “그렇지, 뭐?” 하고 얼버무리려했다.
도시오는 손수안씨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후지끼 상에게 손수안씨네 선산 이야기를 했다.
조선에서는 남의 산소 위에 묘를 쓰는 것은 아주 나쁜 짓이며 설사 자기들 땅이라도 오래된 산소를 파내라고는 할 수 없다며 손수안(孫秀安)씨네 집안의 억울한 사정을 좀 도와주실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였으나 경찰(警察) 된 후지끼 상의 선후배들이 검사가 되어 조선에 나와 있어 대부분 검사들과 가깝게 지냈다.
특히나 사상범들을 잡는 후지끼 상은 경기도 검사들을 자주 만난다.
도시오가 부탁하자 후지끼 상이 즉석에서 담당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후지끼 상은 이렇게 하여 자기 끄나풀들을 만들고 있었다.
이런 점을 잘 아는 도시오가 고의(故意)로 손 수안씨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후지끼 상의 도움으로 집안에서 걱정하던 일을 해결한 孫秀安씨가 집안 어른들을 모시고 도시오를 찾아왔다.
웅장한 저택에 압도한 손수안씨 집안 어른들이 도시오가 대단한 집안으로 알고 어디 손씨냐고 물었다.
손수안씨가 도시오를 대신하여 도시오에게 들은 이야기를 했다.
고조 때부터 어른들이 단명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유복자였으며 자신은 세 살 때 양친부모를 잃고 집안 젊은 하인의 손에서 자랐다.
가난한 작인의 아들 내외가 열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부모님들이 의원에 데려가 치료받게 하여 살려주고 집안 살림을 맡아 일하게 하였더니 이 하인들이 부모가 죽고 난 후에 자신을 도시오를 돌봐 주었다.
러일전쟁 때 집이 불타버려 집안의 가책이며 모든 문서들이 없어져 겨우 성이 월성 손가라는 것 밖에 모른다고 하였다.
孫秀安씨가 집안 어른들은 도시오 집안 내력을 듣고는 위로를 하면서 월성 손가라면 우리 일가다 하고 좋아 하였다.
도시오의 도움이 고마웠던 손씨 집안 어른들은 도시오 사정을 안타깝게 여겨 “우리 집안에서 곧 가책을 만드는데 자네도 우리 집안 가책에 올려 앞으로 일가로 지내자” 하였다.
도시오도 손수안씨 집안 어른들의 제안이 싫지 않았다.
손씨 집안에서 도시오를 족보에 올리면서 항렬자를 수안씨와 같은 수(秀)자로 쓰자고 하였다.
도시오는 전에 수안씨에게 자기의 조선이름을 용암이라 했다.
천하게 지어진 용방우를 한문으로 고쳐서 말한 이름이다.
용암(龍岩)을 수암(秀岩)으로 고쳤다.
수자 항렬 아래는 진(晋)자라고 하여 큰 아들 선출이는 진하(晋河)로 작은 아들 후출이는 진구(晋求)로 개명했다.
이참에 아내 갓난이 이름도 고울 선(鮮)자 난초 난(蘭)자를 써서 선란(鮮蘭)이로 했다.
도시오는 가족들의 이름에 인격과 주체성을 찾고 보니 자신도 양반이 된 것 같고 손수안씨 덕택에 문중(門中)까지 생겨서 좋았다.
도시오는 이렇게 남의 집 하인의 흔적을 지워나갔다.
1930년 9월 소련에 있어야 할 김단야가 조선공산당이 주로 활동하고 있는 중국 상하이에 나타났다.
【「김단야」는 1921년 3월에 상하이에서 고려공산 청년회 결성하는데 참여하였고, 1922년 4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을 국내로 옮기려고 입국하다가 박헌영 임원근과 함께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징역을 살고 나온 인물이다. 감옥에서 나와 조선일보에서 기자가 되었으나 화요파에 가담하여 박헌영과 함께 고려공산 청년회 활동을 하다가 신문사에서 쫓겨났다. 신문사에서 쫓겨나자 다시 상하이로 가서 조선공산당 기관지 『불꽃』 주필로 활동하다가 1926년 8월 모스코바로 갔다. 1929년 조선공산당을 다시 조직하겠다고 서울에 들어왔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으므로 모스코바로 되돌아갔다. 모스코바에 있어도 서울 경시청은 늘 그의 그림자를 좇고 있었다.】
상하이에서 김단야의 그림자를 표착한 서울 경시청은 후지끼 상을 경부(警部)에서 경시(警視)로 승진시켜 상하이로 보냈다.
도시오가 후지끼 상을 따라 상하이로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내 선란이가 법정 전염병인 장질부사에 걸렸다.
고열이 40도를 오르내리는 아내 때문에 후지끼 상과 같이 떠나지 못했다.
달포가 지나자 갓난이 병세는 차도가 생겼는데 이번에는 도시오가 장질부사가 옮아 앓아누웠다.
평소에 건강하던 도시오가 장질부사에 걸려 반년이 넘게 투병해야 했다.
원기를 회복하는데도 여러 달 걸렸다.
치병 생활을 하면서 도시오는 많은 것을 생각했다.
원기를 회복하는 동안에 중국 명나라 풍몽룡이 편집한 열국지를 비롯하여 많은 서책들을 읽었다.
춘추전국시대 열국의 흥망성쇠처럼 좌충우돌 세계를 정복하려는 일본이 어느 순간에 지금의 강성대국에서 무너지게 된다면 조선의 독립군이나 공산당이 일어나 나라의 주인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자신은 한 세월 잘 보냈지만 아들 진하와 진구가 살아가야할 세상까지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더는 조선인 독립군이나 공산당을 잡는 일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천출로 태어난 도시오는 나라나 민족 따위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조선 사람을 잡는 일본 앞잡이로 악명을 남기게 되면 행여 조선이 독립하는 날 가족들에게 좋을 것은 없을 것 같아 이런 기회에 후지끼와 헤어지기로 마음을 먹었다.
병 후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핑계로 10년을 같이 하며 스승처럼 따랐던 후지끼 상과 헤어지는 마음 한 구석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도시오는 자신의 인생에 신분을 바꾸어놓은 경찰서 일을 그만 두고 시내에서 가까운 동흥리에 진구 몫으로 준비해 놓은 5000평 규모의 과수원에 가족들과 처가 가족들이 살 집을 지었다.
도시오는 이곳에서 생활하며 아내와 같이 자전거로 사천 농장을 오가며 때로는 서울 집에서 아이들과 같이 중년의 행복을 즐겼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즐기던 도시오는 바쁜 와중에도 태공망의 육도삼략과 손자, 오자, 한비자 같은 병서(兵書)를 즐겨 읽었다.
젊을 때부터 읽었지만 삶의 경륜 탓인지 새로운 철리(哲理)가 열렸다.
조선에 태어나 조선을 버리고 일본 사람으로 살아야 했지만 일본 사람들은 자신을 조선 사람으로 보았다.
자신의 정체성을 돌아보면 그저 물 위에 떠다니는 부초(浮草)만 같았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에 조선이 독립하는 날이 온다면 조선 사람들은 도시오네 가족을 그냥 둘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일본을 배신하고 조선 사람으로 살아갈 처지도 아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일본 경찰의 하수인으로 살아온 자신의 무모함과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던 자신의 기구한 팔자를 추슬렀다.
어쩌면 후지끼를 만나 천출을 벗고 이렇게 성공한 것도 천운이다.
과거지사는 덮어두고 이제부터라도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천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도움이 되리라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만일을 생각해서 가족들의 주소지를 서울로 옮기고, 봉화산 아래 중량천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땅을 매입하여 배 밭을 만들었다.
법관이 되려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다니는 큰 아들 진하에게 일본 법관이 되었다가 혹시 일본이 망하고 조선이 독립을 하게 되면 무서운 재앙이 될지도 모르니 공부를 마치는 대로 아버지와 같이 장사를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어보았다.
집안의 아픈 내력을 가슴에 안은 혈기 왕성한 진하는 대학을 졸업하고 검사가 되어 옛 양반님들에게 한바탕 호령해 주고 싶은 야심이 불타고 있었다.
이런 진하에게 아버지의 우려는 마이동풍 같았다.
1931년 여름 방학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한학기만 마치면 대학을 졸업하게 될 진하는 네 사람의 친구들과 사천 평야에 있는 과수원에서 며칠 놀다가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 뜻하지 않는 사고를 치고 말았다.
금촌역을 지날 때 화장실에 갔다 오던 진동호가 통로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잡답을 나누는 일본인 대학생들 옆으로 지나다가 그만 담배를 피우는 친구의 팔꿈치에 부딪쳐서 그가 쥐고 있던 담배를 떨어트렸다.
미안하다고 인사를 하려는 찰나 “멍청한 조선 놈의 새끼가” 하면서 동호 어깨를 잡아챘다.
아악! 비명과 함께 객차 바닥에 넘어진 것은 동호가 아닌 일본청년이었다.
공수도 고수에 다혈질의 동호가 연석이 어깨를 잡아채는 순간 동물적인 본능으로 몸을 피하면서 연석의 턱에 주먹을 날리며 다리를 걷어찼다.
동료가 넘어지자 옆에 서있던 일본 학생들이 일제히 동호에게 달려들었다.
연석들의 주먹에 동호 코피가 터졌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친구들이 일어나 합세하면서 싸움은 패싸움이 되었다.
일본 학생들도 주먹께나 하는 복싱 선수들이라 동호 외에 셋은 주먹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얻어터져 4대 3으로 싸우면서도 수세에 몰렸다.
그때까지 창가에 앉아 구경만 하던 진하가 일어났다.
체격과 힘이 좋은 진하가 주먹을 날리자 일본 청년들이 피를 흘리며 나가 넘어졌다.
어느새 승무원이 달려오고 열차에 타고 있던 일본 헌병들까지 나타났다.
젊은이들의 싸움이라 헌병들이 훈방으로 끝내려하다가 공교롭게도 일본학생 가운데 피투성이가 된 「마스다」 연석이 지난 6월 19일(1931) 서울에 부임한 정무총감 「이마이다 기요노리(今井田清徳)」의 조카였다.
정무총감 「이마이다 기요노리(今井田清徳)」의 조카가 구타를 당한 사건이라 일본헌병들도 그냥 넘어갈 수 없게 되었다.
서울로 연행된 진하 일행은 헌병들의 구두 발에 차이고 가죽채찍에 살이 찢어지도록 맞았다.
헌병들은 조선학생들이 「마스다」가 정무총감의 조카인줄 미리 알고 계획적으로 폭행한 것으로 몰아, 사상이 불순하고 사회질서를 교란하였다고 진하네 학교에도 공문을 내보 제적을 시키라고 하였다.
이럴 때 후지끼 상이라도 있었다면 혹 도움이 될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개성 경찰서도 정무총감의 조카를 폭행한 사건이라 어떻게 하지 못하고 10년간 함께한 도시오의 업적을 들어 헌병 사령부에 선처를 구하는 진정서를 올렸다.
경찰서에서 올려준 진정서 덕택인지인지는 몰라도 가벼운 벌금을 내고 모두 풀려났으나 학교 제적은 끝내 풀어주지 않았다.
진하는 이 사건으로 자기 정체성을 돌아보는 개기가 되었다.
쌍놈으로 태어나 조선의 양반님들에게는 인간 대접을 받아보지도 못하고 상전에게 능욕을 당한 복수심으로 일본 경찰의 하수인이 되어버린 아버지를 따라 자신도 일본인으로 살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조선인이란 이유만으로 헌병대에서 살이 찢어지게 얻어맞고 학교까지 제적을 당하게 되자, 일본인으로 살려한다고 일본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선인도 일본인도 될 수 없는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엄마가 상전 참봉에게 능욕을 당하던 그때부터 진하는 어린 아이가 아니다.
개성에서 보통학교 들어가면서 석이 도련님의 하인이 아닌 당당한 한 사람의 자유로운 학생으로 공부하게 되어 더 없이 행복하였고, 상전의 집 행랑이 아닌 경찰서 관사에 살면서 다른 아이들이 부러워하는 양복을 입고 신발을 신어서 좋았다.
사천강변에 불하받은 땅이 새로운 농장으로 변하면서 큰 부자가 되고, 서울에 마련한 집에서 석이 도련님의 방보다 더 좋은 방을 가지게 되자 어린 마음에 우쭐함을 느꼈다.
경성제국대학교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검사가 되어 양반들 앞에서 당당히 뻐겨보리라는 야망이 있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남들보다 더 배워야 한다는 자의식으로 열심히 공부해왔다.
서울에 있는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 크게 출세하리라는 야망을 품고 공수도와 축구 같은 운동을 하면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은 덕택에 전국의 수재들이 모이는 경성제국대학교 법문학부에 당당히 입학할 수 있었다.
조선인이란 이유로 일본 헌병들에게 하찮은 싸움 문제로 무지막지하게 얻어맞고 대학까지 재적을 당하자 일본인도 조선인도 아닌 자기 정체성에 대한 갈등에 빠졌다.
이 분노를 이겨보려고 과수원에 들어가 일꾼들과 같이 땀을 흘리며 일을 해보았지만 분노는 삭여지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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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양반과 상놈,일본인과 조선인 어찌보면
다를것이 없다는 생각이드네요
한민족이면서도 양반과 상놈이라는
계급사회속에서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고
살아가는 상놈들의 생활이나
일본인에게 짓밝혀 나라없는 서러움속에서
짓밝혀살아가는 조선인들의 고통이나
다를것이 없다는 생각이듭니다
평등한 세상 평등한 나라
모두가 꿈꾸는 이상이 아닐까
싶네요,이제는 지상의 마지막
분단국인 남과북을 위해서
해야할일도 기도가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