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욕계제천중의 해탈문과 게찬 ②
부처님 공덕 중 작은 공덕이라도 받들면 결코 악도에 떨어지지 않아
본래성불이나 견성성불 발원함은 중생이 부처와 달리 살기 때문
부처님 공덕 생각하는 것은 자신에 구족된 공덕 깊이 관함 뜻해
무수한 방편으로 중생 인도하시니 그 방편문이 화엄성중 해탈문
동화사 소장 제석도. 병풍을 배경으로 중앙에 제석천, 좌우에는 일월천자, 천동과 천녀, 그리고 아래에 보살을 배치했다.
어린이날 인기리에 방송되었던 애니메이션 중 ‘머털도사’가 있었는데, 아마 어른들도 많이 보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당시 ‘머털도사’를 본 어린이들은 이미 어른이 되었겠습니다. 줄거리의 자초지종은 생략하고 머털이라는 도사가 가진 도술의 핵심만 말해 본다면, 머털도사가 머리털을 세우면 자기 몸을 자유롭게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머리털이 불에 다 타고 없어지는 사연을 겪기 전까지 본인은 미처 알아채지 못했지만 그것은 스승이신 누덕도사에게서 익힌 것이었습니다. 오랜 고난 끝에 머털도사는 다시 자라난 머리카락을 한 올 뽑아 거기에 생각을 불어넣어서 그 머리카락이 자기 생각대로 변하게 할 수 있는 도술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그 도술로 머털도사는 좋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정확한 비유는 아닐지라도 타화자재천왕의 자재(自在)가 후자의 경우라면, 전자는 화락천왕의 선화(善化)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타화자재가 다른 이를 변화시켜 즐기는 자재이고, 선화는 스스로 변해 즐기는 선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욕계천은 욕락에 매달리는 윤회세계이나, 욕계의 천왕들은 해탈문을 얻어 자유로운 화엄성중들입니다.
‘세주묘엄품’에서 청법대중들은 이미 본 것처럼 제1권에 다 소개되어 있고, 다시 제2권부터 해탈문을 소개할 때와 게찬에서 두 번 더 거론됩니다. 그런데 게찬에서는 이름을 줄여서 부른 관계로 장항(長行)의 이름과는 차이가 나기도 하는데, 가끔은 전혀 다른 이름이 언급되기도 합니다. 예로 타화자재천왕 중에 선목주 천왕은 제1권에서는 그 이름이 묘목주(妙目主)이고 제2권의 장항에서는 선목주이고 게송에서는 묘안(妙眼)으로 되어 있습니다. 세 번 언급된 이름이 다 다른데, 그 이름에 담긴 의미는 상통함을 볼 수 있습니다. 본 법석에서는 동인이명일 경우 선목주 천왕이라 언급한 것처럼 각권의 장항에서 부르고 있는 명호를 사용하겠습니다.
이 선목주(善目主) 천왕은 중생들의 즐거움을 관찰하여 성인 경계의 즐거움에 들어가게 하는 해탈문(觀察一切衆生樂 令入聖境界樂 解脫門)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선목주 천왕이 도달한 불경계를 자재 천왕이 다음과 같이 찬탄하고 있습니다.
세간에 있는 갖가지 즐거움 중에/ 성스러운 적멸락이 가장 수승하여/ 광대한 법성가운데 머물게 하시니/ 선목주 천왕이 이것을 관해 보았도다.
세간소유종종락(世間所有種種樂)
성적멸락위최승(聖寂滅樂爲最勝)
주어광대법성중(住於廣大法性中)
묘안천왕관견차(妙眼天王觀見此)
욕계의 즐거움은 욕락이니 성인의 성스러운 적멸락과는 비교가 안되겠지요. 월천자 또한 다음과 같이 게찬합니다.
중생들은 성스러운 안락이 없어서/ 악도에 빠져 모든 고통을 받거늘/ 여래께서 그들에게 법성의 문을 보이시니/ 안락세간심 천자가 사유하여 이렇게 보았도다.
중생무유성안락(衆生無有聖安樂)
침미악도수제고(沈迷惡道受諸苦)
여래시피법성문(如來示彼法性門)
안락사유여시견(安樂思惟如是見)
청량징관 스님은 ‘화엄소초’에서 성스러운 안락이란 부처님 지혜의 열반으로서 곧 법성이라고 합니다. 이는 중생들이 본래 지녀왔는데 지금은 잃어버리고 없어서 고통 받고 있으므로, 부처님께서 법성의 문을 보여 깨달아 안락을 얻게 해주시는 것이라고 이 게송 내용을 주석하고 있습니다. 본래성불이지만 견성성불을 발원하는 것은 중생들이 현재 부처님과 다르게 살고 있기 때문이겠습니다. 부처님과 중생이 다른 점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겠으나 크게 두 가지 면에서 말해본다면, 부처님에게는 전혀 없는 것이 중생에게는 너무 많이 있고, 반면에 부처님에게는 한량없이 많은데 중생에게는 모자라거나 없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이 부처님과 같게 되려면 부처님보다 많은 것은 없애버리고, 모자라거나 없는 것은 채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없는 것은 무엇이고, 또 많은 것은 무엇인가? 그 하나는 번뇌이고 고통이며, 다른 하나는 보리 공덕이고 적멸락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번뇌는 없애고 공덕은 쌓고, 괴로움은 여의고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욕계의 즐거움은 오히려 고통을 초래하므로 조복해야 할 번뇌에 속합니다.
번뇌로 인한 고통이 사라지면 적멸락을 얻을 수 있고, 또 공덕의 적집에 의해서도 적멸락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해탈 방편인 점에서 다르지 않으니, 이 가운데 어느 한 방편만으로도 적멸락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번뇌 고통은 본래 없으나 본래 없는 번뇌를 일으키는 것도 마음이고, 일으킨 번뇌를 조복하여 없애는 것도 마음이고, 본래 없으니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것도 마음입니다.
만약 여래의 적은 공덕을 생각하여/ 잠깐만이라도 마음으로 오로지 우러르면/ 모든 악도의 두려움이 다 영원히 제거되니/ 지일안 천왕이 이에 깊이 깨달았도다.
약념여래소공덕(若念如來少功德)
내지일념심전앙(乃至一念心專仰)
제악도포실영제(諸惡道怖悉永除)
지안어차능심오(智眼於此能深悟)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가운데 조그마한 공덕이라도 오로지 생각하고 받들면 악도에 떨어지지 않으니, 악도의 두려움은 자연히 없어지게 됨을 지일안 천왕은 깨달았다고, 석가인다라 제석천왕이 게찬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은 중생에게도 본래 구족되어 있으니, 오로지 부처님 공덕을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본래 구족해 있는 공덕을 깊이 관해 봄을 뜻합니다. 그리하여 그 공덕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 또한 마음 작용인 것입니다.
위 게송들을 포함한 욕계제천중들의 해탈문과 게찬에 나타난 욕계 중생들의 문제와 천왕들이 얻은 불공덕의 즐거움에 해당하는 명목을 좀 더 열거해 보겠습니다.
중생이 중생인 문제로서 생로병사·근심·슬픔·고뇌·고통·교만·의혹·성내어 해치는 마음·치암심·마업·업장·반연·집착·방일·두려움·악도의 과보 등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반면 교화의 덕목으로서는 지혜광명·대자·대비·설법·묘음·십력·공덕·복덕·바라밀 정진·법성·원력·여래출현·위덕신·친근제불·견불·관찰여래·적정법·선근·다라니·총지·청정도·변재·법륜·보리심·보리도·보리행·평등·신통·방편 등을 찬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명목에서 화엄수행은 번뇌소멸의 측면보다 공덕 증장이 더 강조됨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부연한다면, 부처님은 시방에 출현하셔서 지혜의 등불로 깨끗한 눈이 생기게 해 주시고, 자비로 중생을 위해 법륜을 굴리셔서 진실한 이치와 청정 법성을 설해주시며, 깊은 신심과 이해를 내게 하시며, 한 모공에 무량겁동안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갖가지 모양을 다 나타내 보이시며, 광대한 바라밀로 정진하게 해주시며, 보리도를 나타내 보이셔서 도에 머물게 해주시며, 공양으로 불과에 이르게 해주시며, 적멸락에 머물게 해 주시는 등 한량없는 공덕을 욕계천왕들이 증득하여 찬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수없는 수행방편이 펼쳐지는 것은 중생들의 번뇌가 많기 때문이고, 또 부처님의 공덕이 한량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으니, 누구든 자신에게 알맞는 해탈문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월천자의 게찬을 하나 더 인용하고 마치겠습니다.
부처님은 허공과 같아서 자성이 없으나/ 중생들을 이롭게 하려고 세간에 나타나시니/ 상호와 장엄이 영상과 같음이라/ 정각월 천왕이 이와 같이 보았도다.
불여허공무자성(佛如虛空無自性)
위리중생현세간(為利眾生現世間)
상호장엄여영상(相好莊嚴如影像)
정각천왕여시견(淨覺天王如是見)
부처님은 허공처럼 자성이 없으나 중생들을 위해 세간에 나타나시니 부처님의 상호와 장엄이 영상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상호 장엄은 장엄염불에서 찬탄하고 있는 아미타불을 떠올리게 합니다. ‘극락당 앞에 떠 있는 보름달이 아미타불의 원만한 모습이고 허공을 비추는 달빛이 부처님 옥호의 금색광명이니, 일념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면 일순간에 한량없는 공덕을 이룬다.[極樂堂前滿月容 玉毫金色照虛空 略人一念稱名號 頃刻圓成無量功]’는 것입니다. 일념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순간,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다 이루게 하는 인연으로서의 보름달빛이 비쳐주는 해탈도를 얻게 됩니다.
이처럼 부처님은 그 공덕세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편으로 중생들을 인도하시니, 그 방편문이 바로 화엄성중들의 해탈문인 것입니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534호 / 2020년 4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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