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정리: 2002.7.17
04:40직전마을-05:10삼홍소-05:30구계포교-05:55피아골산장 조식-06:30출발-06:45용수암3거리-08:40주능-09:00노루목-09:30반야봉-10:00출발-11:00뱀사골산장중식-12:30출발-13:15간장소-14:00병풍소-14:30탁용소-15:00반선
피아골은 돼지평전에서 뻗어내린 왕시루봉 능선과 삼도봉-불무장등 능선에서 발원한 계곡이다. 그 길이는 섬진강까지 뻗어내린 내서천까지 셈하면 장장 24km에 이르는 실제로 지리산의 최대계곡이기도 하다. 과거 이 피아골과 인근 지리산자락에서 일본군에게 쫓긴 동학 농민군과 의병들이 무참하게 살해되었고, 또한 이념으로 대립한 좌우익의 총성으로 많은 젊은이가 죽어간 안타까운 곳이기도 하다. 역사적인 전환기마다 이 골짜기에서 피바다를 이루었다고 하니, 인간의 혈액과 관계없는 직전마을을 상징하는 식용 피(稷)를 가꾸는 밭, 즉 피밭이 있던 피밭골임에도, 왠지 피아골이라는 명칭에 피(血)가 끓어 오르며, 이곳에 오면 마음이 착잡해지고 숙연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피(稷)를 심어 피를 먹고 살다가 피(血)를 흘린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골짜기. 이 피아골의 산행을 위하여 일행과 함께 직전마을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4시 반이었다.
구례구역에서 피아골 입구인 직전마을까지는 불과 30분이 조금 넘게 시간이 걸렸다. 우리를 내려준 콜밴은 어둠을 가르고 구례로 떠났고, 산행은 편하게 직전마을에서부터 시작한다. 이곳에서 출발하면 시간은 엄청나게 절약. 즉 주차장이 있는 매표소에서 연곡사를 지나 직전마을까지는 깔끔한 포장길로 1시간이 걸린다. 곧 좌측으로 피아골 계류의 암반을 타는 시원한 소리와 함께 산행은 시작된다. 보통 여름날의 이 시간이면 지리산이 어둠에서 벗어날 시간이라고 생각되었건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날이 어둡다. 헤드 랜턴을 쓰고 보조 랜턴까지 켜고 출발한다. 어젯밤 영등포역을 출발하면서 시작된 술이 새벽 3시까지 이어졌고, 잠깐 눈을 붙일 틈도 없이, 이곳까지 이동했으니 정신이 약간 혼미하다. 선두에는 체력 좋은 홍 선생이 앞장을 섰고 오늘도 나는 제일 후미로 빠졌다.
8명의 산꾼은 아무 말 없이 우리의 1차 목표 피아골 산장을 향하여 부지런히 발놀림한다. 아름다운 피아골의 멋진 비경이 어둠에 잠겨 볼 수 없어서 다소 서운하기는 하다. 걷기 좋은 평탄한 길을 버리고, 철 다리를 건너 계곡 우측으로 붙더니 너덜 길이 이어진다. 빠른 행군과 어둠에 묻혀, 가을철 단풍으로 유명한 산홍(山紅), 수홍(水紅), 인홍(人紅)의 삼홍소도 어필할 겨를도 없이 모르게 스쳐 지나간다. 구계포교 근처 또한 넓은 암반과 소가 많아 아름다운 곳인데 역시 어둠에 묻혀 아쉽게도 지나친다. 먹은 술이 굵은 땀방울로 화(化)하여 대기 중으로 방출되고 숨이 가빠와 올 무렵. 깊은 골짝 피아골도 서서히 파고드는 햇살에 속살이 벗겨진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피아골 산장.
지리산의 산장 중에서 가장 인적 없고 호젓한 피아골 산장. 피아골 산장은 가을철 단풍과 함께 어우러져 정말로 아름다운 곳이다. 그래서 유독 가을철에만 고독에서 벗어나는 산장이다. 일행들과 함께 피아골 산장 앞 음수대 앞에 쭈그리고 앉아 휴식을 취하며 돌탑을 바라본다. 함 선생님의 소원은 피아골 산장 자리에 위령탑을 세우는 것이라 했는데, 그 소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 그 돌탑이라도 쌓아서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을 위안한다고 하셨다. 좌우익을 떠나서 이제는 그들의 혼을 달래 주어야 한다는 것이 함 선생님의 철학이었다.
산장 앞에는 1박을 한듯한 젊은 친구들이 잠이 덜 깬 모습으로 아침밥을 하다가 쉬고 있는 우리 일행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갑자기 많은 사람으로 소란해졌다고 느꼈는지 산장 매점에서 낯익은 아주머니가 나온다. 함 선생님의 안부를 여쭈니 어제 노고단에 손님이 오셔서 그곳에 넘어가 계신다고 한다.
2년 전 가을 피아골 산장에서 홀로 머문 적이 있었다. 가을이지만 5시 정도면 하산으로 여유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 시각이 조금 넘자, 수많은 산님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피아골은 곧 정적에 쌓인 절해고도가 되었다. 그때 홀로 남은 나를 보고 이것저것 물으시며 잘 대해주셨었다. 그날 밤 나는 휑한 산장에서 밤을 보내며 함 선생님의 저서 "이곳을 한 번이라도 거쳐 간 사람이라면"을 읽었었다. 그래서 그때의 추억도 그립고 해서 피아골 산행을 앞두고 함 선생님의 그 저서를 다시 읽었다.
피아골 산장의 음료수대에서 시원하게 목을 적시고 수통에 물을 보충하고 조식을 간단하게 해결한다. 샌드위치, 김밥, 떡. 서로의 식성에 따라 먹을 것이 다채롭게 쏟아져 나온다. 홀로 산행 때에는 식사의 즐거움을 맛보지 못했었다. 최근 들어 동료들과 산행을 가끔 하면서 그 행복감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귀찮더라도 동료들을 위하여 식사는 거르지 말고 제때 해야지. 덕분에 피아골 산장에서 40여 분간을 여유 있게 보낸다.
피아골 산장에서는 일단 등로가 나누어지는데 좌측의 깊고 깊은 협곡을 따라 올라가면 바로 질매재이다. 그 질매재에서 다시 남측으로 하산하면 문바우등을 지나 왕시루봉에 이르고, 직진하면 문수골로 빠진다. 우측의 북쪽 오름길은 문수대를 거쳐 노고단으로 가거나 돼지평전을 향하여 오르는 길이다. 일행은 피아골 산장 우측 산죽으로 엮은 울타리에 난 문을 지나 임걸령을 향하여 오른다. 오늘 오름 시간이 예상외로 빨랐고 모두 빠른 걸음으로 시간도 많이 단축되었다. 잘하면 반야봉도 올라 조망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10여 분 후 일행들을 임걸령으로 보내고, 홍 선생과 용수암 골로 빠져든다. 용수암 골은 험준한 루트라 홀로 오르려고 했는데, 홍 선생이 뜻밖의 동행을 해준다.
수풀이 우거진 우측의 길을 따라 계곡으로 향해 약간 내려가니 바로 용수암 골. 즉 피아골의 최상류 모계곡이다. 이 용수암 골은 임걸령과 노루목 삼도봉과 그 줄기에서 내려오는 골짜기인데, 정식 등로가 아니라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10차례나 계곡을 자주 건너야 하니, 여름철 비가 많이 올 때는 출입을 삼가야 하고, 어느 정도 지리산을 많이 다닌 산님에게나 가능할 것이다.
용수암 골은 수량이 풍부하다. 지리산의 잘 알려지지 않은 동부의 골짜기처럼 깨끗하다. 휴짓조각, 깡통 하나, 비닐 하나 구경하기 힘들다. 산꾼들이 잘 찾지 않는 숨겨진 비경의 용수골은 지리산 속의 또 다른 속살이다. 잘 노출되지 않아 긴 세월 동안 자신의 처녀성을 숨겨왔건만, 최근 들어서는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고 산님들이 가끔 찾는 곳이기도 하다. 울창한 나무숲, 너덜지대와 짙게 이끼가 낀 바윗돌 틈 사이로 억겁의 세월을 쉬지 않고 흘러내렸을 옥류. 이 비경에 감탄사가 어찌 나오지 않을 수 있으랴.
등로는 확실치 않으나 색바래고 눈에 띄지 않는 오래된 표지기를 간신히 찾아내며 방향을 잡고 오르다 그만 길을 잃고 만다. 지리산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우측을 바라보니 삼도봉에서 불무장등으로 뻗은 능선이 가깝다. 갈림길을 살피며 계곡을 따라 트래킹을 하다가 주 능 쪽으로 방향을 틀어잡고 무조건 치고 오른다. 정면 방향으로 하늘과 맞닿은 능선이 훤하게 보였기도 때문이다. 온몸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쉬지 않고 흘러내린다. 길이 없어 치고 오르는 만큼 우리 앞을 가로막는 것은 바위, 산죽, 숲. 뒤따라 오는 홍 선생도 체력 하나는 대단한 사람이다.
앞으로 고꾸라지기도 하며. 돌 틈에 발이 끼고 나뭇가지에 이마를 부딪쳐가며 산행은 이어진다. 그 때문에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다. 주능 근처에 붙을수록 고사목과 조릿대 숲이 많아지더니 줄이 길게 이어져, 그 줄을 잡고 계속 십여 분 올라가니 임걸령과 노루목의 중간쯤이다. 아까 일행들과 헤어지면서 반야봉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들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혹 반야봉에서 우리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지나 않을까. 능선을 치고 오르면 노루목 부근에 오르지 않을까 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길 아닌 곳을 뚫고 2시간가량을 치고 올라와 겨우 주능길을 만나 조금 오르니 전망 좋은 바위에서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과 헤어진 지 불과 2시간 지났는데, 거지꼴을 하고 올라온 우리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더니 의아해한다. 그 이유를 말해서 무엇하랴.
지금의 시각이 9시도 못 되었으니 일행 모두 반야봉을 오르기로 한다. 주능 길에서는 이따금 산님들도 만나 지나치며 인사를 나눈다. 반야봉 아래 삼거리에 배낭을 고이 모셔놓고 반야봉을 올랐다. 날씨가 워낙 좋아 지리산이 찬란하며 눈부시다. 역시 반야봉에서의 조망은 압권이다. 일행들에게 사위를 살펴 가며 천왕봉을 중심으로 지리산의 봉우리와 능선을 보이는 데로 알려준다. 가까운 왕시루봉과 삼도봉 사이는 온통 구름바다이다.
일행들과 반야봉에서 약간의 간식을 먹고 몇 장의 기념사진을 찍고 뱀사골 산장을 향한다. 이곳 반야봉에서 산장까지는 지척이건만 그래도 1시간 거리다. 삼도봉을 지나 급경사의 나무계단 길을 걸어 내려가니 곧 화개재. 최근 들어 목통골도 통제가 심해졌다고 들었다. 물론 국립공원관리공단의 현실적이고 합법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지리 산꾼들은 아쉽다. 쉬쉬하며 숨 고르고 오르는 게 요즘 지리 산꾼들의 습성이 되어 버렸다. 물론 인터넷 동호회나 안내산악회에서 많은 구성원을 구성하여 정규 등산로 아닌 통제구역으로 지나치게 들어가는 것은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지리산을 조용히 사랑하는 산꾼들의 진정한 바람이기도 하다.
뱀사골 산장에 도착하니 많은 산님이 휴식을 취하며 중식 준비에 여념이 없다. 우리도 그들 틈에 끼어 그늘에 자리 잡고 앉아 음식을 내놓고, 고기도 굽고. 산행을 자축하며 소주잔을 정겹게 나눈다. 어제 기차 안에서 제법 술을 마셨건만 또 술이 넘어간다. 산에서 마시는 한잔 술이 얼마나 좋은지. 나는 그 참맛을 안다. 옛날. 꼬마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산행을 다니던 나는 아버지께서 산에서 술을 드시는 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나는 참 못된 아들이었구나 하고 매번 반성하며 후회를 한다.
맛난 점심을 먹고 하산 길에 접어든다. 뱀사골 산장부터 반선 마을까지는 지리산에 가장 순한 길. 뱀사골은 지리산의 아름다운 대표 계곡이다. 연일 내린 비에 뱀사골은 더욱더 그 값을 발휘한다. 산장을 출발하여 얼마 되지 않아 만난 곳이 간장소. 그 널찍한 화강암반에 짐을 풀고 일행 모두 탁족을 즐긴다. 반선 정류장에 오후 3시까지만 도착하면 남원에 나가 목욕도 하고 역 앞에서 맛난 콩나물국밥을 먹을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이 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뱀사골의 한여름 경치를 만끽하며 병풍소와 탁용소, 와운마을 갈림길을 지나 반선 마을에 도착한다. 전적기념관을 모두 헐어 버리고 무엇을 새로 지려는지 공사를 위한 소음이 요란하다. 오늘 산행은 예상시간과 실제의 일정이 너무나 깔끔하게 일치하였다. 터미널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막간을 이용하여 또 하산 주로 동동주 두 잔을 마셨다. 땡볕과 함께 취기가 오른다. 이제 곧 여름 휴가철이 시작되면 뱀사골 주변은 커다란 홍역을 치를 것이다. 이런저런 지리산에 대한 단상과 함께 버스는 인월을 지나 남원을 향해 지리산을 떠나며 나의 마음에 울림을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