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이의 법칙
제18회 작품상
안혜자
화분 옆 작은 질그릇에는 열대어인 구피가 살고 있다. 반려견을 키우고 싶어 하는 막내와 귀찮은 일을 감당해야 하는 내가 한창 다투던 때였다. 어느 날 마트에 갔다가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남편과 아들이 투명한 비닐봉지에 구피를 담아 들고 나타났다. 귀찮은 일을 나눠서 하기로 약속 하며 키우기 시작한 물고기이다.
두어 달에 한 번씩 물을 갈아주면 집안을 어지르는 일도 없고, 냄새도 덜한 착한 애들이어서 큰 불만 없이 식구가 되었다. 이틀에 한 번씩 먹이를 줄 때면 어찌 알고 가까이 가기만 해도 야단법석이다. 먹이를 향해 뻐끔거리는 물고기에게 말을 걸고 한참을 들여다보면 노는 모습이 참 귀엽다. 어항 속을 꼬물꼬물 헤엄치는 작은 물고기가 일상의 무료함을 달래 준다.
어항의 물을 갈아 주는 일은 조금 귀찮다. 이 일을 도와주던 막내가 군대에 간 후로는 온전히 내 몫이 되어버렸다. 물을 갈아주려면 구피를 다른 그릇으로 옮겨야 한다. 이 일이 난관이다. 구피들은 세상 난리가 난 듯이 파닥거리며 잡히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침침한 눈으로 작은 새끼까지 다 옮기려면 다리에 쥐가 날 지경이다. 혹시라도 찌꺼기와 함께 하수구로 흘러가지나 않을까 온 신경을 집중한 탓이다. 그래도 가끔 못 건진 녀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눈 밝은 아들의 도움이 절실하지만 멀리 있으니 조심할 밖에.
좀 더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려는 주인의 마음도 모르고 필사적으로 숨기에 바쁜 구피들이 미울 때도 많다. 하긴 녀석들에게는 잡히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험한 순간이었을 게다. 모든 과정을 끝내고 맑은 물에서 헤엄쳐 노는 구피들을 들여다보면 내가 목욕을 한 듯 기분이 상쾌해진다.
깨끗해진 물에서 잔뜩 움츠리고 사태를 관망하는 구피들을 보며 인터넷에서 알게 된 신기한 물고기가 떠오른다. 관상어 중에 ‘코이’라는 특이 한 물고기가 있다. 코이는 작은 어항에서 기르면 5~8센티미터 밖에 자라지 않지만, 커다란 수족관이나 연못에 넣어두면 15~25센티미터까지 자라고, 강물에 방류하면 90~120센티미터까지도 성장한다. 같은 물고기지만 어항에서 기르면 피라미만 하게 자라고, 강물에 놓아두면 대어가 되는 신기한 물고기의 특성을 빗대 사람들은 ‘코이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자라는 환경에 따라 몸의 크기가 달라지는 이유는 물의 상태를 파악하고 보다 좋은 환경으로 변할 때까지 성장을 보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어진 환경에 따라 자신이 해낼 수 있는 최대치를 발휘하는 코이처럼 사람도 환경이나 생각에 따라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코이의 법칙이다. 사람은 누구나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어떤 꿈을 꾸고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인생도 달라진다.
우리 집 구피가 물을 갈아줄 때마다 숨바꼭질하고 숨어있기만 한다면 깨끗한 물에서 살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코이가 작은 어항에 숨어 주는 먹이만 먹고 살면서 넓은 세상을 거부한다면 대어가 될 수 없다.
막내가 2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사회로 돌아왔다. 아직 대학 생활이 남아 있지만 학업을 마치기 전에 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해 보려고 준비 중이다. 바쁜 세상에 세월을 낭비한다고 입방아 찧는 사람도 있지만 지금이 아니면 다시 올 수 없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긴 인생 1, 2년 쉬어가도 급할 거 없다.
어항의 물을 갈아주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일은 부모의 몫이다. 이제까지 아이보다는 내 욕심으로 지나치게 깨끗한 물로, 혹은 너무 많은 양의 먹이로 아이를 괴롭혔는지도 모른다. 어항 속이 안전하다며 틀 안에 가둬놓고 성장을 방해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이제 아이는 부모의 관리를 떠나 넓은 세상으로 나가려고 한다. 스스로 삶의 환경을 만들어가야 한다.
마냥 아이 같아 보이던 막내였는데 사는 장소가 바뀔 때마다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일이 무척 즐겁다. 대학에 들어가며 가족을 떠났을 때 혼자 겪어야 하는 일들에 두려움이 있었지만 잘 해냈다. 군대 가기 전에는 피할 수 있다면 도망가고 싶다고 말했지만 해내고 나니 자부심도 생겼다고 한다. 이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먼 나라로 떠나려고 한다. 열심히 준비했지만 낯선 곳에서 예기치 못한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을 것 이다. 다만 어렵고 두렵다고 숨지만 않으면 된다.
코이는 더 큰 물고기가 되기 위해 낯선 강으로 가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성장한다. 막내도 코이처럼 넓은 세상에서 더 큰 생각과 마음을 가진 청년으로 성장하여 ‘코이의 법칙’이 완성되길 빌어본다. 넓은 강에서 맘 껏 헤엄치는 커다란 물고기의 비릿한 냄새가 나는 듯하다. 대어가 된 코이의 힘찬 파닥거림에 강물이 분수처럼 튀어 오른다. 흩어지는 물방울 속에 아들의 건강한 모습이 함께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