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인천, 문학속 인천을 찾다·26]김동석
근대문학비평의 '금빛 발자국', 北으로 사라지다
2015 세계 책의 수도 인천
목동훈 기자
경인일보 2014-07-24 제14면
|
▲ 김동석은 수필 '낙조'에 월미도 부근 해지는 풍경을 묘사했다. 사진은 인천 앞바다의 노을지는 모습. |
싸리재서 인천 보통·상업학교 학창시절 보내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문예부 출신 경성제대 졸
월미도 해변·애관극장등 지역소재 수필·시 발표
해방이후~1948년 정곡찌르는 평론 왕성한 행보
1949년 월북… 이후 작품활동 알려지지않아
시방 우리는 월미도 다리를 걸어가고 있다. 서에서 북으로 길게 금빛 구름이 걸려있는 것이 꼭 황금다리 같다. (중략) 석양이 막 떨어진 자리는 시뻘겋게 불탔다. 간조였다. 그래도 고랑에는 물이 남아 있었다. 일몰 때는 시간의 흐름을 초일초 눈으로 볼 수 있다. 황금다리가 점점 변하여 구릿빛이 되었다가 다시 이글이글한 숯불이 되었다. (중략) 달이 개고랑 물을 헤엄쳐서 우리가 걷는 대로 따라 왔다. 물이 얕고 좁아서 달은 그 둥근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하늘에는 아직 별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수평선 멀리서 등대불이 반짝 하는 것이 보였다. (수필 '낙조' 중)
인천 출신 시인이자, 수필가이자, 문학평론가인 김동석(金東錫·1913~?, 아명은 김옥돌)이 수필 '낙조'에서 그린 1940년대 월미도 부근에서의 해 지는 풍경이다. 김동석의 수필 '낙조'와 '해변의 시'는 아내(주장옥·朱掌玉)와 함께 월미도 해변가를 거닐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한 작품이다.
지난 18일 오후 6시께 인천 월미도 문화의 거리를 찾았다. 인천 앞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시원했다. 해는 아직도 중천에 있었다. 바다는 은빛 물결로 넘실거렸다. 그 너머로 영종도가 가깝다. 어느새 태양은 눈높이로 낮게 깔렸다. 그 순간 영종도의 하늘은 엷은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이내 석양은 구릿빛으로 변했다.
김동석이 1940년 결혼하고 1942년까지 인천에서 살았던 것으로 미루어 '낙조'는 1940년대 초반에 쓴 글로 추정된다. 이 글을 쓸 당시 김동석은 인천 육지부와 월미도를 잇는 다리(둑길) 위를 아내와 함께 거닐고 있었다.
|
▲ 김동석 작품집들.- 김동석·배호·김철수 공동 수필집 '토끼와 시계와 회심곡'(서울출판사·1946), 평론집 '예술과 생활'(박문출판사·1947), 수필집 '해변의 시'(박문출판사·1946), 평론집 '뿌르조아의 인간상'(탐구당서점·1949) |
첫여름 한나절 햇빛을 받고 월미도 조탕은 고흐의 그림인양 명암이 선명했다. 이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소복한 여인(김동석 아내)과 감색 양복에 노 타이샤쓰를 입은 젊은이(김동석)가 금빛 모래사장에다 나란히 발자국을 찍으면서 걸어간다. 바다와 하늘은 한빛으로 파아랗고……. 젊은이는 이따금 허리를 굽혀 손에 맞는 돌을 집어서는 멀리 수평선을 향해서 쏘았다. 감빛 돛, 흰 돛, 보랏빛 섬들이 그의 시야에서 출렁거렸다. ('해변의 시' 중)
그간 월미도의 모습은 많이 변했다. 당시 월미도는 조탕(潮湯)과 해수욕장, 용궁각(龍宮閣)과 호텔 등을 갖추고 있어, 조선의 관광지로 큰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시설 대부분이 파괴됐고, 그 이후 미군과 우리나라 해군 기지로 사용됐다.
1989년 문화의 거리가 조성되고, 2001년에는 월미관광특구로 지정됐지만 옛 명성에는 못 미치는 듯하다. 국제공항과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영종도 양옆으론 인천대교와 영종대교가 놓였다. 두 큰 다리가 월미도와 영종도 사이의 바다를 감싸고 있는 모양이다.
김동석은 1913년 9월 25일 경기도 부천군 다주면 장의리 403번지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당시 부천군이 시작되는 곳으로, 1936년 인천에 편입됐다. 지금의 남구 숭의동 '평양옥'(음식점) 인근으로 추정된다.
김동석은 1921년 3월 가족과 함께 인천부 외리 75번지로 이사한 뒤, 이듬해 4월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교)에 입학했다. 1년 뒤 다시 인천부 외리 134번지로 이사하는데, 두 곳 모두 '싸리재'에 위치해 있다. 75번지는 현재 배다리사거리 '송월타월' 건물 인근, 134번지는 '고려만물'에서 배다리사거리 방면 옆 건물 자리로 비정할 수 있다.
싸리재는 경동사거리에서 배다리사거리로 이어지는 길이다. 과거 조선인 상권이 형성됐던 곳으로, 배다리사거리 옆으론 기차(현 경인전철)가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
김동석의 부친(김완식·金完植) 직업이 '포목잡화상'이었기 때문에 싸리재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동석이 다닌 인천공립보통학교와 인천상업학교(현 인천고)는 이들 집에서 멀지 않다.
상인천역(현 동인천역)이 인근에 위치해 뒷날 서울 통학·통근도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김동석은 1940년 신혼집을 싸리재 인근 경동 145번지에 마련했는데, 현재 이곳에는 3층짜리 상가주택이 들어서 있다.
김동석의 여러 수필에는 어릴 적 싸리재에 대한 기억이 나온다.
내가 살던 거리에는 왜 그리 시계포가 많았든지 서너 집 걸러선 시계포였는데 그중에 제일 작은 시계를 진열한 가게가 '천시당'(天時堂)이었다. 나는 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천시당 앞을 지날 때마다 이 '일금백원야'라는 정가표가 달린 시계에다 눈독을 들여놨었지만 부친을 암만 졸라야 막무가내였다. ('시계' 중)
애관에서 본 <애국의 나팔>은 제일차대전에서 취재한 영화같은데 불란서 어느 조그만 마을에서 피난하느라고 야단법석인 장면이 있었다. 어린 소녀 하나가 토끼 한 마리 두 귀를 쥐고 서서 울고 있는 정경이 내 어린 가슴에 어찌나 귀엽고 가엽게스리 파고들었던지! ('토끼' 중)
김동석이 '애국의 나팔'을 본 애관극장은 아직까지 싸리재에서 영업 중이다. 김동석은 수필 '나의 돈피화'에서 '내가 처음 가죽구두를 신게 된 것은 중학에 입격한 덕택이었다'고 했는데, 당시 싸리재에는 양화점과 양복점이 성업했다. 지금의 싸리재 길은 한산하다. 양복점 몇몇과 가구점들이 영업 중이지만, 빈 상가가 많다.
김동석은 인천상업학교를 다니던 1930년 1월 학교 강당에서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퇴학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1932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로 편입한 뒤, 이듬해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에 합격했다.
1933년 3월 2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경성제대 예과 문과 합격자 명단에는 김동석, 훗날 그와 함께 수필집을 함께 낸 문인 배호(裵澔), 김동석에게 수필 발표를 권고한 출판인 노성석(盧聖錫), 원로 영문학자 방용구(龐溶九)의 이름이 있다.
김동석은 경성제대 영문학과 졸업 후 대학원을 다니면서 중앙고보에서 영어 촉탁교사로 근무했다. 이후 해방 전까지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에서 전임강사로 일했다. 김동석은 영어·일어·한문에 능숙했고, 외국 문학과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바둑, 음악 감상, 독서를 좋아했다.
김동석은 경인기차통학생친목회 문예부가 배출한 문인 중 한 명이다. 이는 배호가 쓴 김동석의 평론집 '예술과 생활'(박문출판사·1947) 서문에 잘 나타난다.
나는 그를 관찰컨대 16년간의 기차 통학에서 과학을 배우고 의지력을 닦고, 인천 해변가에서 시정신을 기르고, 졸업논문 <매슈 아놀드 연구>에서 비판정신을 배우고, 졸업 후에는 셰익스피어에서 시와 산문의 원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예술과 생활' 서문 중)
김동석은 극작가 함세덕(咸世德·1915~1950)과도 가까이 지냈다. 그는 수필 '시계'에서 함세덕의 고민을 들어줬던 일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함세덕의 희곡집 '동승'에 대한 서평을 신문에 내기도 했다.
김동석은 해방 이후부터 1948년까지 활발히 문학비평 활동을 벌이다, 한국전쟁 전인 1949년 월북한 것으로 추정된다.
|
▲ 김동석이 1921년부터 1942년까지 살았던 중구 경동 싸리재 현재 모습. |
언론인 이혜복(李蕙馥·1923~2013)은 1964년 8월 월간 교양잡지 '세대' 제2권 통권 15호를 통해 '판문점에서 만난 김동석'이란 글을 발표했다.
1951년 12월 판문점에서 열린 휴전회담을 취재하던 중 중앙고보와 보성전문학교 스승이었던 김동석을 만났던 얘기다. 김동석은 왼쪽 가슴에 '공작원'이라고 적힌 헝겊 조각을 달고 있었다. 영어 통역원으로 차출된 것이다.
옛 스승과 한자리에 만나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조국의 장벽'을 슬퍼했듯이 그도 '내 나라 안에 제자와 오래간만에 만나 입을 다물어야 할 현실'을 슬퍼했을런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판문점에서 만난 김동석' 중)
잡지 '세대'에는 김동석과 이혜복이 당시 판문점에서 찍은 사진 한 장도 함께 실렸다. 이혜복씨 가족에게 연락해 "김동석과 관련된 글이나 사진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온종일 사진첩 등을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고 했다.
'황해문화' 2012년 봄호에는 신태환(申泰煥·1912~1993) 전 서울대 총장의 미발표 원고가 실렸다. 글의 제목은 '인천 출신 한 공산청년의 이야기'다. 신태환 전 총장은 인천 출신으로, 김동석과 인천공립보통학교와 인천상업학교를 함께 다녔다.
그는 이 글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김일성이 남로당 인사들을 친미파라고 숙청할 때 없어졌으리라고 했다. 국군의 평양 진격 때 변절을 하고 남하를 한 공산청년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다시 남하를 했다는 소리는 끝내 듣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시집 하나, 소설 열 권, 수필집 셋, 기타 논문 약간을 쓰고 싶다. 그러려면 오늘같이 청명한 밤엔 잠을 자지 않아야 되겠는데 스르르 눈이 감기니 그만 자야겠다. (중략) 겨울에 동면하는 대신 오래 오래 젊어서 쓰고 싶은 글을 다 써야겠는데……. (수필 '나의 서재' 중)
손이 작아 문필을 천직으로 여겼던 김동석. 오래오래 글을 쓰고 싶다는 그의 꿈도 남북 분단과 함께 두 동강 나고 말았다. 김동석의 월북 이후 작품 활동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없다.
김동석 연구자 이희환 박사는 "(김동석은) 인천에서 태어나 성장한 근대 지식인"이라며 "해방 이후 치열한 문학 논쟁의 정점에 서 있었다"고 했다. 또 "상아탑 정신, 양심에 기초해 정곡을 찌르는 문학비평 활동을 했다"고 평가했다.
글 = 목동훈기자
사진 = 임순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