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임실지역사건 종합
[제공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전쟁 전 정치적 피해>
임실에서는 1948년 2월 26일 시위대가 성수지서를 점거했는데, 이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시위대 7명이 사살당했으며 이에 분개한 시위대는 붙잡힌 경찰 2명을 살해했다. 사건 이후 임실경찰서는 무장경찰을 성수지서에 파견하여 주민들을 진압하고 287명을 검거했다.
1948년 12월 1일에는 임실경찰서에 감금되어 있던 박세열과 박훈 등 20여 명의 주민들이 학살당했다. 그리고 이런 사건은 25일에도 저질러졌다. 당시 희생자들은 청웅면 석두리 백길동 등 20여 명이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임실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소집되거나 연행되어 경찰서 임시유치시설에 감금되었다. 이들은 1950년 7월 20일경 임실군 오수면 봉천리 말티재와 임실읍 두만리 모래재에서 살해당했다.
말티재에서 12명이 총살당했다고 하는데, 임실경찰서는 후퇴하기 전 거물급들만 사살하고 나머지는 풀어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 희생자의 수가 22명이라는 주장에서부터, 60여 명에 달한다는 주장까지 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인민군 점령기 인민군 측에 의한 주민피해도 있었다. 1950년 9월 27일 임실내무서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이 군청과 등기소 뒤 방공호 4개에서 희생되었다. 같은 날 관촌분주소에 감금되었던 주민 30여 명이 관촌면 관촌리 오원철교 및 포탄구덩이에서 집단희생되었다.
<11사단 사건>
인민군의 후퇴 후 10월 2일 임실경찰서가 복구되었다. 그러나 10월 말 11사단이 진입하기 전까지 부역혐의를 받아 희생된 주민들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국군 11사단 13연대는 1950년 10월 말부터 11월 초 사이 2대대 7․8중대를 주둔시켰으며, 1951년 3월에는 1대대를 주둔시켰다.
이들이 주둔을 시작하면서 임실읍 정월리 양지마을 신동갑 외 9명이 11사단 화랑부대에 의해 희생당했다. 11월 7일에 11사단은 청웅면 향교리 수풍마을을 공격하였다. 같은 날 국군은 모래재에서 총을 쏘면서 마을에 진입하자 겁에 질린 주민들은 마을 뒷산으로 피신했다. 국군은 진입로 길가에 있던 수풍마을에 먼저 들어와 무 밭에 있던 박영술의 처를 사살하였다.
총소리를 듣고 산으로 숨었던 최재의는 군인들이 이미 마을을 빠져 나갔다고 생각하고 산에서 내려왔으나 채 마을을 빠져나가지 않았던 군인에게 발각되어 마을 안 개천 옆에서 사살 당했다.
1950년 12월 14일 군인들이 덕치면 장암리(암치)에 진입하여 마을 전체를 소각시키면서 부락민을 마을 앞 당산나무에 집결시킨 뒤 주민 40여 명을 학살했다. 같은 날 구담마을에서도 소개작전을 하여 주민 50여 명을 순창군 인계면 사무소 앞에서 학살했다. 순창경찰서도 피난민을 같은 장소에서 학살했다.
11사단은 1951년 3월 2일부터 6일까지 200여 명의 피난민들이 강진면 옥정리 배소고지에서 학살했다. 3월 20일에는 성수면 주민 송주동 등 100여 명을 성수면 왕방리 문바위에서 총살하였다. 당시 지서 주임이었던 오갑수는 주민들 중 수복 이전에 좌익 활동을 했거나 자의든 타의든 관계없이 부역했던 사람들은 모두 지서에 나와 자수하게 하였다.
성수면 주민들은 대부분 당시 오갑수 주임이 부역자들을 처벌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훈방시켜 빨치산과의 관계를 끊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알고 있었다. 그렇게 자수한 주민들은 지서 유치장에 임시로 구금되어 있었는데, 속칭 ‘백골부대’라는 국군 부대가 성수면의 성수산, 그리고 성수면에 접해있는 진안군 백운면의 덕태산, 시루봉(1120m) 등지로 토벌작전을 가기 위해 면소재지를 통과하여 백운면으로 이동했다가 예상하지 못했던 큰 피해를 당하고는 성수면으로 돌아와 그 화풀이로 지서에 구금되어 있던 주민들을 총살한 것이었다. 당시 오갑수는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군인들이 총을 꺼내며 위압적인 태도를 보이므로 힘을 쓸 수 없었다고 한다.
군인들은 감금되어 있던 주민들을 성수면 왕방리의 속칭 문바위로 끌고 가 구덩이를 파게하고는 모두 총살시킨 후 귀를 잘라 그 숫자까지 확인해 갔다고 한다. 사건이 발생했던 1951년 3월 중순 임실군 성수면지역에 주둔하며 작전을 했던 부대는 국군 11사단에 배속되었던 2경비대대(부대장 김병육)였다. 2경비대대는 원래 유격사령부 예하의 제5유격대를 개칭하여 1950년 11월 24일 편성된 부대였다.
이 부대는 1951년 3월 3일 육본작전명령 263호에 의해 11사단에 배속되었고 같은 달 12일에 전주에 도착하였으며 15일에는 임실군으로 이동하여 주둔지 인근을 수색․토벌하다가 19일부터 27일까지 성수면의 성수산과 그에 인접한 진안군 백운면 덕태산에서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당시 희생자 수는 30여 명에서 70여 명, 심지어 100여 명까지 되었을 것이라고 했으나, 희생자 중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던 사람은 23명뿐이었다. 성수지서 오갑수 주임이 치안본부로 신고하여 CIC가 이 사건을 조사했으며 그 결과 백골부대는 해체되고 지휘관이 처벌받았다는 소문이 있었다.
1951년 3월 18일에는 임실경찰서 경찰과 국군이 임실읍 성가리 주민 구복순을 빨치산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운암면 학암리에서 살해하였다. 박세열의 처 구복순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여성동맹에서 활동하다가 수복 무렵 입산하였다. 사건 당시 구복순과 함께 입산하여 활동했던 임실읍 이도리 주민 박순애(당시 22세)는 청웅면 남산리 폐금광에 숨어 있다가 군경의 작전을 피해 폐금광을 나와 구복순 등 다른 입산자들과 함께 운암면 학암리 뒷산으로 피신하였다.
군경의 토벌작전이 학암리까지 이어지자 박순애는 학암리를 빠져나왔으나 구복순은 1951년 3월 18일 학암리 뒷산에서 군경에게 생포되었다. 군경은 생포한 구복순을 살해한 후 시신을 방치하였고, 그 시신은 학암리 주민들이 수습하여 매장하였다. 사건 당시 구복순의 시신은 입산했던 임방규(당시 20세)가 목격하였다.
<경찰토벌 피해>
국군이 임실지역에서 토벌작전을 벌이는 동안 이들의 지휘를 받던 임실경찰서에 의한 주민 피해도 있었다.
임실지역에서 11사단 등 군경의 토벌작전 중 주민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건은 청웅면 폐금광 사건이다. 당시 청웅면 남산리(강진면 부흥리) 폐금광에 피난하던 370여 명의 주민들이 희생당했다.
1951년 3월 14~16일 임실경찰서와 국군 11사단 13연대 2대대 7중대는 청웅면 남산리(강진면 부흥리) 폐금광에 피신해 있던 주민 박완 등을 폐금광 안팎에서 질식사 또는 총살시켰으며, 국군 11사단은 현장 생존자 50여 명을 연행하여 10여 일 후 강진면 회진리에서 총살시켰다.
임실읍이 수복되고 1951년 2월 9일 군경에 의한 회문산 토벌작전이 진행되면서 청웅면, 강진면, 덕치면 등에서 남산리의 폐금광으로 피신하기 시작했다. 폐금광은 청웅면 남산리 방향과 강진면 부흥리 방향으로 난 큰 입구 2개를 포함하여 모두 32개의 입구가 있었고, 내부에는 마치 벌집처럼 많은 작은 굴들이 퍼져 있었다. 피난민들은 가족끼리 모여 마을에서 가져온 식량으로 끼니를 해결하며 군경의 토벌작전을 피했다.
당시 토벌과정에서 연행한 부역주민 가족들을 청웅국민학교에 수용되어 있었는데, 경찰은 이들을 동원하여 함께 양쪽의 굴 입구에서 3월 14일부터 3일간 마른 고춧대와 솔잎을 태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연기를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밖으로 뛰쳐나왔고 이들은 무차별 총격을 받았다.
불이 꺼지고 연기가 가라앉자 경찰은 직접 내부에 들어가 질식사한 사람들은 버려두고 숨이 붙어있는 50여 명의 사람들을 밖으로 끌어내어 함께 작전했던 11사단 군인들에게 인계하였다. 당시 작전에 참가했던 국군은 폐금광에서 살아남은 주민들을 자신들이 주둔하고 있던 강진면 갈담리로 끌고 와 10여 일에 걸쳐 조사한 후, 강진면 회진리 장동마을과 덕치면 회문리 망월마을의 경계부근인 속칭 멧골이라는 곳에서 총살시켰다.
이 사건에 대하여 임실경찰서는 ‘1951년 3월 14일 06시부터 15일 22시까지 청웅면 남산리의 적과 교전하여 217명을 사살하고 24명을 생포하였으며 일부 무기를 포획하였다’며 상부에 보고하였고, 내무부 치안국은 1952년에 『대한경찰전사』를 편찬하면서 ‘회문산의 빨치산이 청웅면 남산리 폐금광에 숨어들어 모두 250명의 빨치산이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한 청웅지서 경찰들이 3월 14일에 작전을 전개하였는데, 4개의 입구를 제외한 나머지 28개의 입구를 폐쇄시킨 후 먼저 무조건 항복을 권고하였고, 빨치산이 이에 응하지 않아 오전 9시부터 입구에서 소나무 가지를 태우는 분화작전(焚火作戰)을 시작하였다. 연기가 들어가자 이를 참지 못한 빨치산들이 출구로 나왔고, 이때 좌우 양쪽 고지에 미리 매복시켜 두었던 경찰들이 집중사격을 가하여 사살당한 시체가 출입구를 폐쇄시킬 정도였다. 당시 경찰은 임실경찰서장 기우대(奇宇大)가 지휘하였고, 전과로는 217명을 사살, 79명을 생포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경찰은 이렇게 빨치산과의 교전 과정에서 대단한 전과를 올린 훌륭한 작전으로 이 사건을 묘사했다. 하지만, 그 큰 전과에 비해 군경 측에서는 사망자는 물론 단 1명의 부상자도 없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작전에 동원되었 한 주민은 “작전이 끝나고 폐광에 들어갔을 때 보초가 갖고 있던 총 한 자루밖에 보지 못했다”라고 증언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청웅지서는 1951년 4월 7일 청웅국민학교에 수용되어있던 석두리 이영자와 백점자를 부역혐의로 청웅면 구고리 청웅국민학교 인근에서 총살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1951년 벌어진 임실 청웅면 폐광사건에 대해 『한국전쟁사 5』는 “2월 25일 07:00 임실경찰서장 송우대(기우대의 오기)경감이 지휘하는 경찰부대는 임실군 청웅면 남산리 주변에 집결한 임실군당, 덕치, 삼계, 청웅, 강진, 면당 등 공비 250명을 확인하고 청웅면에 소재한 금광동굴에 유도하여 기지로서 적이 탈출치 못하도록 28개 통로를 폐쇄하고 4개소에서 장기 유인공격하여 3월 14일 17:00에 적을 완전격멸하는 대성과를 올렸다.”며, 사살 217명 포로 79명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날 살해당한 주민들은 국군 11사단의 토벌작전을 피해 피난하던 주민들이었으며, 위 기록에서 포로로 표기하고 있는 살아남은 주민들은 다시 11사단 국군에 의해 끌려가 모두 총살당했다.
국군의 토벌작전과 함께 이들의 지휘를 받던 임실경찰서에 의한 피해도 잇따랐다. 1951년 3월 30일에는 토벌 국군에 잡힌 월성리 주민 하명호 등 3명이 임실경찰서로 이송된 후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 희생되었으며, 4월 27일에는 임실경찰서로 연행된 신덕면 금정리 주민 김정목이 총살당했다.
각 지서에 의한 주민피해도 있었는데, 1950년 12월 7일 청웅지서는 청웅면 향교리 수풍마을 주민 박완식을 부역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청웅면 구고리 지서 인근 청웅국민학교 뒷산 ‘노루목’에서 총살하였다. 신덕지서는 1950년 12월부터 1951년 3월 사이 치안대와 함께 신덕면 월성리 주민 김막동 등 11명을 운암면과 신덕면 일대에서 사살하였다.
경찰과 치안대는 먼저 홍영표와 하태학을 체포하여 신덕면 수천리 율치재에서 총살하였다. 당시 하태학은 현장에서 사망하였으나 홍영표는 어깨에 총상을 입고 현장을 빠져나와 마을에 돌아왔으나 다시 체포되어 1951년 1월 23일 신덕면 빈채재의 움막에서 총살시킨 후 움막과 함께 불태워버렸다. 경찰과 치안대는 또 황소봉과 그 동생 황중규, 황현규, 그리고 홍영표의 부친 홍범순, 이수복 등이 월성리 뒷산 옥녀봉에 숨은 것을 발견하여 1950년 12월 31일 모두 운암면과 완주군 구이면 경계부근의 속칭 못지라는 계곡으로 끌고 가 총살하였다. 경찰과 치안대가 옥녀봉에서 사람1명을 끌고 나오는 것을 목격한 주민 김막동과 김해성도 경찰과 치안대를 피해 몸을 숨기다가 발각되어 마을 안에서 총살되었다.
<8사단 사건>
1951년 4월 임실지역에서도 11사단의 뒤를 이어 8사단이 토벌작전을 계속했으며, 이에 따라 주민들의 피해도 계속되엇다. 국군 8사단 소속 군인들이 임실 운암면 학암리 광석마을에서 김학식을 연행한 후 학산마을로 이동하여 곽동섭, 신창록, 이막동도 함께 잡아 임실읍으로 끌고 갔다. 이들은 다음 날인 1951년 5월 1일 임실읍 오정리 오정마을 뒤편의 속칭 여시골에서 총살되었다. 이 소식은 곧바로 마을로 전해져 가족들이 현장에 가서 시신을 수습하였다.
(이상 임실지역에서 확인된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