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헨리 조지를 지지한 사람들
(38) 찰스 다윈(Charles Darwin)과는 별도로 진화론을 추론해내어 다윈으로 하여금 결국 책을 출간하게 만든 영국의 박물학자 알프레드 러셀 왈라스(Alfred Russell Wallace, 1823-1913). "헨리 조지의 유명한 책 『진보와 빈곤』이 널리 보급되었기 때문에, 그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제안을 주의 깊게 조사해 보라. 인구가 증가하고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 노동의 생산물은 더 싸진다. 만약 그 반대의 현상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예외적인 조건 곧 어떤 종류의 독점 때문이다. 그러나 토지의 경우, 그 가치의 증가는 사회의 성장 때문이고, 그 변동은 독점과 투기 곧 토지 사용에 대한 제한 때문이다. 인간 노동의 생산물은 사적 재산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 생존의 제일 조건인 토지는 사회에 속해야 한다. 국가는 이제 토지세나 주택세를 징수함에 따라, 오직 '면세 지대'(quit-rent, 역주: 세금을 면제하는 대신 받는 지대)만을 징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수입이 면세 지대로부터 발생할 것인데, 그 면세 지대는 더 유해한 세금들을 면제하고 궁극적으로 모든 세금을 폐지할 수 있게 할 것이다."(“토지 국유화의 이유와 방법”(“The Why and the How of Land Nationalization”, Macmillan's Magazine, 1883년 9/10월호; wku.edu/~smithch/wallace/S365.htm).
(39) 헨리 조지의 사진을 자신의 책상위에 두었으며 기차 안 승객들에게 오로지 토지에만 과세해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던 레프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는 러시아 황제와 전 세계를 향해 이와 같이 말했다. "사람들은 헨리 조지의 가르침을 두고 논쟁을 벌이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그의 가르침을 알지 못한다. 그의 가르침을 알게 되는 사람은 누구나 거기에 동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과 달리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40) 톰 소여(Tom Sawyer)와 허클베리 핀(Huckleberry Finn)의 저자이자 사무엘 클레멘스(Samuel Clemens)라는 가명의 유머 작가였던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은 헨리 조지의 신문 「스탠다드」(THE STANDARD, 1889년 7월 27일자)에 실린 "아르키메데스"(Archimedes)에서 토지사유제를 비판하였다. 두 사람이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자생활을 할 당시 헨리조지는 마크 트웨인의 강연장에서 입장권을 팔곤 하였다. 마크 트웨인은 "토지는 사람들(the people)의 것이다. 나는 단일세(Single Tax, 역주: 헨리 조지가 토지의 지대에만 과세하고 다른 세금은 폐지하자고 제안하여 명명된 세금)라는 복음을 믿는다."고 말했다.
(41) 당시 유명한 시인이었던 엠마 라자러스(Emma Lazarus, 1849-87)는 자유의 여신상에 새겨지기도 한 시구 "자유를 마시길 열망하는 지치고 가난하고 웅크린 이들을 내게 주시오"를 지었다. 그녀는 1883년, 땅의 "비참한 폐물 같은 사람들"(“wretched refuse”)을 향한 연설에서 그들을 아메리칸 드림의 동등한 참여자로 환영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헨리 조지와 그의 단일세를 강력히 지지하였다("애국심의 감춰진 역사"(Patriotism's Secret History), 「네이션」(The Nation) '시민의 자유'(Civil Liberties) 특집호, 2002년 6월 3일, 40쪽. 앨러나 할작(Alanna Hartzok)에게 감사드린다).
(42) 미국 보이 스카우트의 창시자인 박물학자 다니엘 비어드(Daniel C. Beard, 1850-1941)는 "나는 헨리 조지를 믿는다.……나는 오랜 기간 단일세라는 대의를 위해 일해 오고 있다."라고 말했다.
(43) 미국노동연맹(American Federation of Labor)의 창립자이자 헨리 조지를 위해 선거운동을 했던 사무엘 감퍼스(Samuel Gompers, 1850-1924)는 "나는 단일세를 믿는다. 헨리 조지와 같은 친구를 둔 것과 그의 뜻이 뉴욕과 다른 지역들에 전파되도록 도운 것은 큰 특권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44) 대법원판사 루이스 브랜다이스(Louis D. Brandeis, 1856-1941)는 "헨리 조지의 이론을 반대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나는 오직 토지가치에 대한 과세를 믿는다."고 말했다.
(45) 스콥스 원숭이 재판으로 유명한 변호사 클래런스 대로(Clarence Darrow, 1859-1938)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헨리 조지만큼 낙관적이지는 않았을 때, 그는 "토지가 사적 소유권으로 결코 환원되지 말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가 땅의 어떤 부분과 '거기에 충만한 것'에 대해 무조건적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한, 어떤 중요한 사회적 재조정도 결코 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콜리어 백과사전』(Collier's Encyclopedia)).
(46) 독일의 개혁가 실비오 게젤(Silvio Gesell, 1862-1930)은 양대 세계대전 기간 사이에 오스트리아에서 화폐 개혁을 성공적으로 단행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존 메이나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와 어빙 피셔(Irving Fisher)는 국내 통화를 그대로 놔두고 예금자들이 자신의 예금에 대해 인지를 구입하도록 하여 지출을 활성화하고 화폐가 계속해서 유통되도록 한 실비오 게젤의 제안을 인용하였다. 그의 주요 저서인 『자유 토지와 자유 화폐를 통한 자연적 경제 질서』(The Natural Economic Order through Free Land and Free Money)’에서 그는 "땅"과 "피"의 결합을 거부하였다. 즉 토지 전체는 하나의 유기체이고 어디든지 각 사람이 자유롭게 여행하고 정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독점, 국경세관, 식민지배가 없는 세계 개방 시장을 창도하였다. 헨리 조지의 토지 가치에 대한 단일세가 독일에 알려지자 그로부터 영감을 받은 실비오 게젤은 정부가 토지를 구매하여 최고가 입찰자에게 임대하고 과세를 중단하도록 요청하였다. 지대의 규모가 인구밀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지대를 아내들에게 분배하여 그들을 일하는 남편들로부터 해방함으로써, 남편과 아내가 사랑을 위한 관계를 갖게 하려 했다(역주: 아이들을 많이 낳게 하여 인구를 증가시킴으로써 지대의 규모가 커지도록 유도하려 했다는 뜻이다). 실비오 게젤의 개혁은 제3의 길, "자본주의가 없는 시장 경제"(a market economy without capitalism)이다.
(47) 콜롬비아 대학 총장 니콜라스 머레이 버틀러(Nicholas Murray Butler, 1862-1947)는 이와 같이 말했다. "헨리 조지의 경제학이 지닌 불변의 중요성을 갖고 있는 정의감과 주목할 만한 원리의 건전성에 대하여 생각해 보라. 모든 나라의 건전한 경제학자들은 토대(fundamental)로서 경제적 기회를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지지한다." 그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세계 각지에서 혁명이 발생할 당시 비전을 지닌 지도자들은 헨리 조지의 개혁안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48) 현대 중국의 국부인 쑨원 박사(Sun Yat-sen, 1866-1925)는 이와 같이 기술하였다. "헨리 조지의 가르침은 우리 개혁 프로그램의 밑바탕이 될 것이다.……토지세는 정부를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서 대단히 정의롭고 합리적이며 공평한 세금이다. 만주족의 이익을 위한 불규칙한 중과세가 수 세기 동안 진행되면서 중국은 (역주: 토지세를 제외하고) 다른 어떤 조세 제도도 정의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49) 멕시코의 대통령 프란시스코 마데로(Francisco I. Madero, 1873-1913)와 (50) 러시아의 총리 알렉산드르 케렌스키(Alexandr F. Kerenski, 1881-1970)도 동일한 길을 배웠다(역주: 영어 원문의 "leaned the same way"는 "learned the same way"의 오기로 이해된다).
케렌스키를 축출한 (51) 레닌(V. I. Lenin, 1870-1924)은 『진보와 빈곤』을 읽었으나 그것을 거부하고 칼 마르크스에 의한 복음을 지지하였다. 레닌은 "헨리 조지의 프로그램은 개인주의적인 민주주의에는 더할 나위 없지만 이제는 기계 시대가 와서 집산주의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라고 비평함으로써 헨리 조지에게 경의를 표했다(역주: 문맥상 영어 원문의 "complemented George"는 "complimented George"의 오기로 이해된다)(「토지와 자유」(LAND AND FREEDOM), 1942년 7/8월호).
노동계 지도자들과 자본가들 모두 헨리조지의 기치 하에 모여들었다. (52) 은행가이자 투자가이며 작가인 맥스 허쉬(Max Hirsch, 1877-1968년)는 이와 같이 말했다. “특권을 철폐하고 정부에 의한 산업 개입을 폐지하라.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선천적 기회와 무한한 대자연의 창고에 대해 평등한 권리를 주라. 그리하면 부는 정의에 따라 저절로 분배될 것이다. 이것, 즉 헨리 조지의 이상을 우리 국민들 앞에 제시하고자 한다.”
(53) 영국 여왕의 부군인 필립 공(Prince Philip)의 어머니인 그리스의 앨리스 공주(Princess Alice, 1885-1967)는 이렇게 썼다. "나는 헨리 조지를 연구해 보았다. 단일세 사상이 우리나라의 경제재건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아테네 일간지 「새벽」(Proia), 1927년 5월 22일).
사진: 레프 톨스토이(상), 쑨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