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cafe.daum.net/1107/Y4PX/1936
아래에 적는 글은 위 링크 글 답글란에 올리려고 오늘 아침에 타이핑한 글입니다. 번거러워 게시글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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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도 집단 재세례파는 유아 세례를 반대해 칼빈주의자들에게 죽임을 당했는가?
https://www.baptistnews.co.kr/mobile/article.html?no=6256
[요한의 제자들이 받은 세례에 대한 칼빈의 이해] 답글란 둘째 댓글에 이지끼을 님이 링크하신 위 주소를 방금 클릭해 봤습니다. 둘째 댓글에 옮기신 글은 ‘{침례신문} 침신대 역사신학 김승진 교수 <16세기 주류 종교개혁운동의 한계>’에 적힌 글이군요. 이지끼을 님이 옮기신 김승진 교수 글, 역사 전체를 읽지 않고 서술하신 음해 글을 옮깁니다.
결국 정치적인 이유에서 국가교회 혹은 시교회를 지향했던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은 유아세례 전통을 고수하였고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였다. 갓난 아기가 태어나면 행정관청에 출생신고를 하였고, 동시에 그 행정관청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던 교구교회(Parish Church)에서 유아세례를 받도록 함으로써 교적신고를 하였던 것이다. 유아세례는 교회와 국가 및 시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의 역활을 했던 것이다.
이지끼을 님이 ‘말 못 하는 젖먹이더라도 그들은 그들 언어(방언)인 옹알이로 “호산나!” 하며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다.’(마 21:15~16)와 “하나님의 씨”(요일 3:9)에 관한 계시 의존 사색에 따른 분별력이 있으셨다면, 이 글을 수박 겉핥기로 읽으시더라도 이 사상누각의 음해 글에 숨은 오류들을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또한 김승진 교수 글 “유아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유아 세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신약성서의 가르침이다.”를 유심히 보셨을 것입니다.
이지끼을 님이 [요한의 제자들이 받은 세례에 대한 칼빈의 이해] 마지막 세 문단에 서술하신 글에 담긴 음해를 살펴봅시다. 옮깁니다. 세 문단이 아닌 한 문단이어서 한 문단으로 옮깁니다.
말씀드렸듯이, 재세례파는 종교개혁을 반대하는 카톨릭을 지지하던 관료들 뿐만 아니라 칼빈 등 각각의 종교개혁가들을 지지하던 관료들에 의해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했는데, 카톨릭을 지지하던 관료들보다 칼빈 등 각각의 종교개혁가들을 지지하던 관료들에 의해 더 많이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종교개혁가들을 지지하던 관료들 중에서 칼빈을 후원했던 관료들은 바로 위와 같은 칼빈의 신학을 근거로 재세례파를 핍박하고 죽였던 것입니다.
“칼빈을 후원했던 관료들”…. 이지끼을 님 이 말이 뜻하는 것은 칼빈 선생님이 살아계실 때 칼빈주의 관료들이 “재세례파를 핍박하고 죽였던” 학살 사건들이라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유아 세례 거부’는 ‘출생 신고 거부’와 같았습니다. 즉, 정교일치 사회였던 그 당시 유아 세례는 교회 일원이 됨과 동시에 국가 시민으로 등록되는 행정 절차였습니다. 그러므로 재세례파가 유아 세례를 거부한 것은 오늘날로 치면 ‘국민으로서 의무와 시민권을 거부’하는 행위였습니다. 즉, 이는 위정자들에게 ‘국가 존립 기반을 흔들어 해체하려는 무정부주의자들의 반역 행위, 체제 전복 행위’로 간주됐습니다.
∎ 1509년: 칼빈 선생님께서 태어나신 해입니다.
∎ 1536년: {기독교 강요} 초판을 출판하신 해입니다.
∎ 1536년: 기욤 파렐 목사님 강권으로 제네바에서 목회를 시작하신 해입니다.
∎ 1538년: 성찬 및 교회 권징 문제로 제네바 의회와 갈등 뒤 제네바에서 추방당하신 해입니다. 또한 스트라스부르에서 목회를 시작하신 해입니다.
∎ 1540년: 칼빈 선생님께서 결혼해 두 아이 아빠로서 가정을 이루신 해입니다.
∎ 1541년: 제네바 의회 간곡한 요청으로 가족들과 함께 제네바로 귀환해 목회를 시작하신 해입니다.
1509년과 1541년, 이 기간에 재세례파와 칼빈 선생님께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1534년에 독일에서 재세례파 뮌스터 반란이 있었습니다. 뮌스터는 프란츠 폰 발데크 로마교 주교 영지였습니다. 재세례파 중 극단주의자들이 독일 뮌스터시를 점령하고 “새 예루살렘”을 선포해 반대파 남자들을 불신자로 간주해 학살하는 체제 전복의 반란 사건이 있었습니다. 반대파 남자들을 얼마나 학살했는지,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더 많게 되자 광란에 휩싸인 그들은 이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일부다처제를 도입해 결혼 적령기 여자들에게 결혼을 강요했습니다.
“새 예루살렘”을 선포한 재세례파 교주, 반란 수괴 얀 판 라이던은 자신을 “시온의 왕, 다윗 왕의 후계자, 하나님 왕국의 통치자”로 자처하며, 구약 족장들이 여러 아내를 뒀다는 사실을 근거로 ‘일부다처제’를 신성한 법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프란츠 폰 발데크 로마교 주교 군대와 루터교 제후들 군대가 합세한 연합군이 반란을 진압하기까지 1 년이라는 반란 기간 동안 아내 16 명을 뒀습니다. 신학만이 아닌 도덕에서도 타락한 바로 이것이 그 당시 재세례파 극단주의자들 실체였습니다.
이 재세례파 극단주의자들 체제 전복 반란 사건은 유럽 전역에 ‘재세례파 집단=사회를 파괴하는 광신도들’이라는 공포를 심어줬습니다. 그러므로 재세례파 극단주의자들 뮌스터 반란 뒤 온건한 재세례파가 존재함에도 그들에 대한 탄압은, 신학 논쟁이 아닌, 치안(생명 보호)과 사회 윤리와 국가 안보 차원에서 이뤄졌습니다. 그러므로 제네바에서도 재세례파를 추방하거나 구금했습니다.
칼빈 선생님께서는 그들을 죽이려 하시지 않았습니다. 토론을 통해 교정하려 하셨습니다. 그 대표 인물이 벨기에 출신 온건한 재세례파 지도자 ‘장 스또르되르(Jean Stordeur)’입니다. 그는 아내 이델레트와 함께 박해를 피해 스트라스부르로 도망쳐 왔습니다. 그곳에서 칼빈 선생님 강설을 듣고 마음이 열려 칼빈 선생님과 토론하며 개혁신앙(칼빈주의)으로 개종했습니다. 칼빈 선생님께서 그와 끈질기게 대화해 결국 그를 개혁신앙인으로 개종하게 하신 것입니다.
1540년 유럽을 휩쓴 흑사병으로 장 스또르되르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납니다. 홀로 남겨진 이델레트와 두 아이를 안타깝게 여기신, 칼빈 선생님 동료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처(Martin Bucer) 목사님께서는 숫총각 칼빈 선생님께 결혼을 권유하십니다. 이델레트와 스또르되르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신 칼빈 선생님께서는 이델레트에게 청혼하십니다.
짧은 기간(1540년 8월~1549년 4월) 동안 칼빈 선생님 돕는 배필이셨던 ‘이델레트 드 뷔르’ 사모님…. 칼빈 선생님께서 이델레트 드 뷔르 사모님 소천 뒤 “내 생애 가장 훌륭한 조력자”라며 슬피 우셨던, 세계 개혁 교회 신앙의 어머니이십니다.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공감합니다.
재세례파는 교리와 신학에 오류가 있었고, 국가 사회와의 관계에서 당시의 금도를 넘어서 마찰을 일으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