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 8월 15일
한국 전쟁 당시 국군과 경찰에 의한 양민 학살지...
경산 코발트 광산을 찾기로 한 날은
공교롭게도 8월 15일이었습니다.
코발트 광산에 오르는 그 날 아침의 하늘은 흐릿했습니다.
이 일대에서 한국전쟁 당시 수천 명의 양민들이 학살당했다. 경산 코발트광산과 그 일대의 골짜기들의 모습. 지금은 이 지역에 넓은 골프장이 들어서 있다.
경산 코발트 광산을 향해 걸어가면서 가장 많이 생각한 것은
아무 지은 죄 없이 이 갱도로 쫓겨들어갔던 사람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억울함과 고통...
그리고 그렇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지울 수 없는 한에 대해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를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죄없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전쟁의 시퍼런 광기가 곧 몸에 와닿을 듯 느껴졌습니다.
국립 파리 피카소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피카소 作 <한국에서의 학살>. 세계적으로 알려졌던 한국전쟁의 신천 대학살을 묘사하고 있다. 당시 황해도 신천군에서는 전체 군민의 1/4에 해당하는 3만 5천여명이 학살당했다. 좌우익의 대립 상황에서, 미군의 묵인하에 반공청년단이 벌인 학살이라는 설, 좌우대립 과정에서 서로를 죽였다는 설 등이 있다.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군경에 의해 학살당한 양민들의 유족이 자신들의 억울함에 대해 입을 연 것은 오래되지 않은 일입니다.4.19 직후 유족회를 만들어서 진실 규명과 명예회복을 시도했지만 박정희가 일으킨 5.16 쿠데타로 들어선 군부 독재정권은 유족들이 어렵게 만든 위령탑을 해체시키고 유족들을 잡아 가뒀습니다.반공의 칼날로 모든 민주적 저항을 압살했던 군부 정권들은 이들을 빨갱이로 몰아 연좌제를 적용했습니다. 그저 평범하게 사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합니다. 그러다 2000년 정도가 돼서야 유족들이 본격적인 진상규명 나섰고...2001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통해서 이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게 됩니다.유족들의 끈질긴 진상 규명 운동이 이어졌고 마침내 2009년 12월 11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에서 경산 코발트 광산 사건을 '국가에 의한 양민 학살'로 결론 내렸습니다.학살이 일어난지 60여년 만에 국가가 인정한 것이지요.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촬영팀이 처음 경산코발트광산의 입구를 뚫고 들어갔던 2001년 당시의 수평굴 내부 바닥의 모습. ⓒMBC
구체적으로는
경산, 청도지역 경찰과 경북지구 CIC(국군 방첩대), 국군 제22헌병대가
대구, 경북지역에 살던 3500여명의 양민들을 학살했음이 확인됐습니다.
코발트 광산의 현장을 잘 보존해서
군인과 경찰, 공무원을 비롯해 초중고생과 일반인 등에게 공개하고
평화 인권교육을 강화하는 교육의 장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라고
과거사위는 국가에게 '권고'했습니다.
이것이 2년 전의 일입니다.
과거사위는 이명박 정권 초기 몇몇 언론사, 공공기관들과 함께 사라지거나 장악된
'눈에 거슬리는' 곳 중 하나였지요. 4년여 조사해오던 사건을
해체 직전에 정리해서 밝힌 것입니다.
버려진 역사
2년의 시간 동안 무엇이 달라졌을까.
다시 찾은 이 곳은 진상 규명이 시작되던 10년 전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왼쪽에 보이는 번듯한 건물은 근래 들어선 요양 병원이다. 오른쪽에 쓰레기장 처럼 방치된 곳이 코발트 광산의 입구다. 병원측은 이 광산이 병원 쪽에서 보이지 않도록 파란 철판으로 막아놨다. 내가 갔던 2011년 8월의 모습.
코발트광산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주변의 골짜기에서도 많은 학살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 주변의 산과 골짜기는 지금 골프장으로 뒤덮여 있는데요.
그래서 골프장이 개발될 당시에 유족들은
공사 중단과 현장 보존을 강력하게 요청했지요.
하지만 정부는 인터불고에게 골프장 허가를 내줬고
결국 수차례 학살이 벌어졌던 대원골을 비롯,
보존되어야 할 유골 발굴 장소들은 전부 골프장으로 덮였습니다.
당시 공사중에서 유골이 발굴되었지만, 대충 유골을 수습한 뒤 공사를 강행했다고 합니다.
요양 병원과 골프장으로 개발된 한국 전쟁의 학살지
경산 코발트 광산 옆에서 내려다 본 인터불고 CC
앞서 사진으로 보셨다시피
지금 경산 코발트 광산의 바로 옆에는 번듯한 외양의 요양 병원이 들어서 있습니다.
원래는 이곳에 안경 공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안경공장은 얼마 못가 폐업했는데...
2000년 전후해서는 이 공장 건물이 폐허처럼 남아있었다고 하네요.
'경산 안경공장'은 온갖 괴담이 돌았던 유명한 폐가 체험장이었습니다.
학살당한 사람들의 유골이 발길에 채일 정도로 발견되곤 했기 때문이지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국가의 폭력에 의해 자행된 학살...
누군가에게는 극도의 고통과 슬픔을 안겨준 전쟁의 학살지가
폐가 체험장이라니요.
그 건물을 밀어내고 들어선 것이 요양병원입니다.
코발트 광산은 파란 철판으로 가려진 채 한 귀퉁이에 남아있지요.
마치 지난 역사는 모두 잊을 것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반드시 기억해야할 역사의 장소는
이렇게 외면당하고 버려져있었습니다.
저 파란 차벽 너머에 코발트광산 수평굴 입구가 있다.
학살의 현장
아래 보이는 사진이 코발트광산의 입구입니다.
흉물스럽게 방치된 모습에 마음이 아팠는데...
잠시 서있자니 몸이 시렸습니다.
갱도에서 밀려나오는 서늘한 한기...한 여름의 그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서늘함이 이 곳이 어디인지를, 무슨 일이 일어났던 곳인지를 일깨워주는 것 같았습니다.
이 곳을 기억하려는 사람들이 추모의 의미로 하얗고 노란 끈들을 매어 놨다. 지금은 그마저도 빛이 바래있다.
굴의 내부. 바닥에는 차가운 물이 가득하다.
깜깜한 굴 속으로 한발씩 걸어 들어갈 때
내 몸도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지독한 어둠...바닥에 가득한 물,
똑 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공간을 가득 채우는 침묵.
60여년 전에 총부리를 들이대는 이들의 손에 떠밀려
엎어지고 넘어지고 넘어진 사람을 밟으며
죽음의 공포에 떨며 이곳으로 쫒겨들어갔을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피비린내로 숨막혔을 이 자리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 깜깜한 곳의 끝에 이르렀을때..
수직으로 뚫린 구멍으로부터..
그리고 자신들이 걸어온 길로부터..
울리는 총성, 쓰러지는 사람들..
울부짖는 사람들..
그 아수라장을 생각했습니다.
수직 갱도의 입구. 위치가 전혀 안내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어림 짐작으로 산길을 더듬에 찾아야만 했다. 길이 나있지 않은 산길을 이리 저리 해메다가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추모공원으로 조성되어도 부족할 현장이 이렇게 방치되어 있었다.
이곳이 수직 갱도입니다.아까 가봤던 수평굴의 끄트머리와 이어져있는, 깊은 수직굴입니다.이 앞에 사람을 8명씩 세워두고...총으로 쏴 100미터 깊이의 갱도 밑으로 떨어뜨려 차곡차곡 쌓았다고 합니다.그 수천 구의 시체가 넘쳐서 수평 갱도 바깥으로 밀려 나올 정도였다고 하니..그 끔찍한 현장을... 우리는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발굴이 진행되던 공사 현장은 진상 규명 이후에도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한국전쟁.
도대체 왜 우리 역사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존슨 대통령시절 법무부장관을 지낸 램지 클락이
2001년 6월 코리아국제전범재판에서 수석검사로 참가해 한 말은
한국 전쟁의 본질을 잘 드러내줍니다.
"무려 300만명이 죽은 한국 전쟁은 미국에서는 잊혀진 전쟁으로 불린다.
... 미국의 목적은 한민족의 독립과 자유가 아니라
아시아에서 가질 정치, 경제적 이익을 찾는 것이었다."
일각에서 한국전의 4대 영웅으로 추앙받는
유명한 미국의 장군 밴 플리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 전쟁기간 동안의 한반도는
온갖 신무기들이 실험된 "신이 허락한 은혜의 땅"이었다.
이런 이들의 한국전에 대한 거듭되는 언급을 모아보면
겉으로 내세운 민주주의니, 자유니 하는 명분들은
정치적 수사일 뿐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한국인들이 추앙했던 한국전의 영웅들이다. 왼쪽부터 콜린스 대장, 리지웨이 대장, 밴플리트 대장, 바이어스 소장. 그리고 가장 오른쪽이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이자 한국 전쟁의 영웅이라는 백선엽이다. 백선엽은 이명박 정부 내내 KBS, 중앙일보, 국방부 등에 의해 신격화되었는데, 그의 명백한 친일 행위에 대해서는 그 자신도, 그를 신격화하는 이들도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백선엽은 국가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되었다. 혐의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것, 간도특설대에서 항일무장독립군을 탄압한 것 등이었다. 이런 사람이 청소년들과 국민들이 본받아야할 인물이라며 숭앙받는 것이 2011년의 대한민국이다.
자국의 지정학적 이익을 위한 미국과 소련의 싸움.
이념은 수단이었을 뿐 그 누구에게도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은 이들에게 무엇이었을까요.국가 기구내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강화시켜주는 전리품 같은 의미 아니었을까요.국가에게는 제국주의적 확장을 위한 교두보를 선점하는 의미로...군인과 정치인들에게는 정치권력을 보장해줄 두둑한 전리품 창고로...그렇게 전쟁은 시작되고 전쟁이 일어난 땅의 사람들은 희생됩니다.이들의 논리를 충실히 받들었던 한국 정부의 부역자들에게 우리는 더 큰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국적이 달랐을 뿐 전쟁의 기획자들과 같은 이해관계를 공유했던 이들...전쟁이 나도 죽거나 다칠 염려가 전혀 없었던 안락하게 헬리콥터 타고 다니면서 손가락질만 하면 되었던 이들.이런 자들로 인해 한반도는 전쟁의 포연에 휩싸였습니다.대한민국 정부는 모든 대한민국 국민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우리는 이 말을 상식이라고 생각합니다.하지만 우리의 역사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음을 증명합니다. 다수 국민이 행복하게 잘 사는 것과 자신들이 배불리 먹고 잘 사는 것이 전혀 다른 문제인 극소수의 기득권층에게 권력이 집중될 때비극은 시작됩니다. 경산에 와서 다시 한 번 물었습니다.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지금 우리 손에 있을까.굴 속에서 불어나오는 서늘한 바람의 배웅을 받으며 산길을 내려오는 길에 이 하나의 질문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