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여행
모든 것이 지나고 나면 아쉽고 그리워지는 것이 인생길이다. 따라서 현재 바로 이 시간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더구나 세월은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며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를 잘 알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다보면 결코 돌이킬 수 없는 회한(悔恨)만 쌓이게 된다. 특히 가까이에 있는 가족일수록 소중하게 아끼고 보살펴야 하는 이유이다.
돌이켜보면 성장하는 과정에서 온 가족이 여행 혹은 야유회를 간다거나 특별한 문화행사라도 함께했던 기억이 없다. 당시 대부분의 시골 풍경은 비슷하여 특별한 이벤트가 없었다. 항상 아쉬운 것은 부모님과도 그런 문화 행사에 함께했던 기억이 별로 없다는 점이다. 언젠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당시 세계일주를 한 「김 찬삼」 여행가의 강연을 들었던 일이 유일하다. 선친과 함께 목욕탕에 갔던 기억도 겨우 한 차례뿐 이었다.
오래전부터 온 가족이 함께 모이자는 말이 나왔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다가 아내의 생일에 맞춰 성사가 되었다. 모두 안팎으로 직장에 매어있어 어쩔 수 없이 설 연휴를 활용하는 일정을 계획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서울에서 아들 가족과 동행하고 「산타크루즈」에 사는 딸 가족과 중간 지점인 「하와이」에서 만난 것이다.
사실 엄밀하게 생각하면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일정한 시간 여행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우선 직장 생활에 매달리는 아이들이 휴가를 내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어린 꼬마들도 나름 학원 등의 사정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미국에 사는 딸 가족의 일정까지 고려하다보면 더 어려워진다. 결국 외손들은 학교를 결석하게 되었다.
5박 7일의 일정은 매우 빡빡하였다. 한시라도 아껴 무의미한 공백시간을 최대한으로 줄여서 활동하였다. 도착과 동시에 여장을 풀고 바로 숙소 내의 수영장을 찾아 물놀이를 하였다. 연이어 「Hanauma Bay」에서 스노클링, 비행기로 「아일랜드(하와이 아일랜드)」로 이동하여 「Hawai’i Volcanoes National Park」내 「킬라우에아」 화산 분화구와 「나후쿠」 용암동굴, 「Kilauea Iki Crater」 분화구까지 하이킹, 진주만을 찾아 항복문서를 받아낸 「미주리함」과 일본의 기습공격으로 침몰된 채 그대로 수중에 보존된 「아리조나함」의 관람, 「Atlantis」잠수함을 타고 침몰한 해저의 선박과 비행기 잔해와 수많은 물고기 떼 등을 구경, 「Diamond Head」에 올라 「와이키키」 해변과 동부지역의 경관을 조망하고, 이름만 들어왔던 「와이키키」해변에서 물놀이를 하였다. 두 남매가 세심하게 계획하여 예약한 모든 일정이 그냥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고 말았다.
진주만은 천혜의 군사항구로 전쟁의 아픈 상흔이 곳곳에 남아있는 곳이다. 일본은 제국의 확충에 필수적인 석유자원 등의 자원 확보를 위해 가장 위협이 되는 미 해군력을 제거하기 위해 진주만을 기습하였다. 먼저 지상의 항공기가 거의 전멸하고 다수의 군함이 침몰하면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다행히도 항공모함 그리고 유류저장 시설들은 피해를 입지 않아 곧 재기하여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고 승리할 수 있었다. 일본은 거대한 미국의 잠재력을 무시한 무모한 도발로 자폭하는 자충수를 둔 것이다.
진주만 곳곳에는 이에 대한 자료가 구비되어 그 날의 비극을 일깨워주고 있다. 줄지어 관람하는 미국인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는 호국의 성지이다. 항복문서에 서명을 받아낸 「미주리 함」의 입구에는 해군을 지휘하여 승리에 기여한 「니미츠」제독의 동상이 있고, 함정에도 생생한 장면들이 전시되어 있다. 항복을 받는 「맥아더」 장군이 섰던 위치도 표시되어 있고, 당시에 이 함정에 ‘가미카제’ 공격을 하다가 사망한 조종사를 거두어 수장하는 자료도 있다.
특히, 당시 바다에 침몰했던 「아리조나」 함은 수면 아래에 그대로 보존하여 전쟁의 비극을 망각하지 않도록 기념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전사자의 명단이 있는데 당시 생존 후 나중에 사망한 사람들이 다시 동료들의 곁으로 수장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숙연하게 만들었다.
이번 여행을 활용하여 가족 간에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좋았다.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어린아이들 교육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사실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사유의 폭과 공감의 정도는 차이가 있기 마련인데 대면하여 경청하면 그만큼 더 이해와 관용의 정도가 깊어지기 마련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써왔던 글을 사위와 며느리도 읽도록 하였다. 사실 아들과 딸도 나의 글을 보게 된지도 최근의 일이다. 다행히 어린아이들이 책을 읽는 취미가 있다기에 양서에 대한 세밀한 선별을 해주도록 부탁하였다. 미국국적인 외손들의 병역의무에 대해서는 진즉에 국민으로서의 기본을 다 할 것을 강조해 두었다.
그런데 아들과 딸 세대가 자식들에 대한 대화 혹은 각종 교육 방법이 나와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느꼈다. 용어의 사용이나 대화의 방법 그리고 눈높이에 맞추어 의견을 수용하고 거절하는 형식, 함께 운동이나 게임을 하고 어울리는 방법이 달랐다. 주말이면 적어도 하루는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데 이런 새로운 세대의 교육방식이 창의성이나 인성 개발에 더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국 길 탑승수속 중에 불과 2~3개월이 안된 갓난애를 안고 있는 부부를 보았다. 언뜻 한동안 잠잠하던 원정출산으로 보였다. 교육과 병역 문제와 직결된 현상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가 결국 현재 우리나라가 당면한 극심한 갈등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에 미쳤다. 또한 남북통일에 반대하는 여론이 높은 것은 굳이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이질적인 화합을 원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안보와 경제, 병역과 교육, 계층 간 대립과 균열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해결방안이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누구나 현재가 중요하다고 본다. 흔히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라고 말한다. 원래 사람의 수명은 하루살이와 같은데도 괴로움으로만 가득 차 있는 것이 사실이다. 꽃처럼 피어났다가는 스러지고 그림자처럼 덧없이 지나가는 것이 인생길이다. 따라서 신이 우리에게 선물로 준 인생이라는 시간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값지게 써야 한다. 그래서 평시에 가능하면 온 가족여행의 정례화로 이해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고 본다.
조금 세월이 지나 어린이들이 성장하면 들어갈 틈새가 없다.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일과가 빠듯하여 시간을 내기가 거의 어렵다. 그러다보면 말로만 한 가족이지 그냥 타인처럼 지내다가 석별(惜別)은 순식간에 다가온다. 남은 시간이나마 자주 추억을 쌓도록 노력하고 아이들에게 생활의 지혜와 따뜻한 사랑의 실행을 전해주고 싶다. 그러나 이미 해는 서산에 저물어가고 그저 마음만 바쁠 뿐이다.
(2024.2.16.작성/2.21.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