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뿌리를 찾아서 - 반여동 상리마을
여산송씨 원윤공파 동주공종중 지서문중을 찾아서
여산(礪山) 송씨 시조 송유익(宋惟翊)은 고려 진사(進士)로 여산군(礪山君)에 봉해지고 은청광록 대부추밀원부사에 추증되어 여산을 본관으로 삼고 있다.
4世 송례(松禮)는 고려 무단정치(武斷政治)를 종식 시킨 왕정복고 공신(功臣)으로 문하시중상장군중찬 여랑부원군에 봉해지고 시호(諡號)는 정렬공(貞烈公)이며 식읍(食邑) 일천 호를 하사받았으니 이로써 여산송씨 문중의 기틀이 다져졌다. 5世 염(琰)은 동생 분(玢)과 함께 아버지 정렬공을 도운 업적으로 낭산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염의 세 아들은 원윤공(元尹公), 밀직공(密直公), 소윤공(少尹公)파로 그리고 낙랑부원군에 봉해진 분의 두 아들은 지신공(知申公), 정가공(正嘉公)파로 분파되었다.
원윤공(元尹公) 송운의 손자 8세 송극명(宋克明)은 단종의 비(妃) 정순왕후(定順王后) 송비(宋妃)의 족친(族親)으로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불사이군 절의로 1455년경 동래(東萊) 동대촌(東臺村) 보덕산(寶德山) 기슭에 은거하여 자호(自號)를 동주(東洲)라 하고 마을 앞 사천(絲川, 수영강 중류)가에서 낚시와 시(詩)로 마음을 달래는 한편 인근 사람들에게 학문을 가르쳤으니 동래 사람들은 동주 선생이라 불렀으며 여산송씨 동래입향조(東萊入鄕祖)가 된다.
9世 봉훈랑(奉訓郞) 송윤희(允熹)는 학문으로 인근에 널리 알려져 울산훈도(訓導)를 지냈으며, 6남 2녀를 두어 이후 후손들이 크게 번성(繁盛)하여 승서(承緖, 生員公派), 승효(承孝, 末尾派), 승환(承翰, 回川派), 승보(承寶, 釜谷派), 승륜(承輪, 機張派), 승원(承源, 東下派) 여섯 아들이 동주공종중 6파의 시원(始原)이 된다.
10세 송승서는 조선 개국 후 350년이 지난 당시까지 동래의 유일한 과거급제자였음이 1740년 동래부지(東萊府誌)에 기록되어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족 송상현 부사와 함께 동래읍성 전투에서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버린 무과급제(武科及第, 1576년, 선조9) 출신의 송봉수(宋鳳壽), 송백(宋伯)과 결사 항전한 행(行)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 증(贈) 병조참의(兵曹參議), 송남생(宋南生)을 비롯하여 송계남(宋繼男), 송의남(宋義男), 송광익(宋光益) 등 여러 임란공신(壬亂功臣)들은 충렬사와 종중 사당인 회동동 세덕사(世德祠)에 배향(配享)되어 매년 동래유림에서 충절을 기리며 향사(享祀)하고 있으며 또한 12世 송의인(宋依仁, 宜仁)은 임진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동래뿐만 아니라 대구 팔공산, 창녕 화왕산성 등 영남 일원 여러 전투에 참전하였음이 각종 옛 기록에 남아 있으며 선조 31년(1598년) 양반들의 명부인 향안(鄕案)에 수위(首位)로 입록 되었다.
송극명의 다섯째 손자인 송승륜(宋承輪, 기장파조)의 후손들은 대대로 동래구 명장동에 세거하다가 1600년대 초 기장군 철마면으로, 1700년대 말~1800년대 초 13세 송지서(宋之瑞)의 후손인 18세 송치호(宋致浩), 송치문(宋致汶) 형제는 대연동(못골, 석포)으로 송치수(宋致洙), 송치윤(宋致潤) 형제는 오래전부터 문중 선산과 위토(位土)가 있었던 수영강 건너 반여1동 상리마을로 이거(離居)하여 지서문중을 이루고 있다.
1950년 한국동란이 끝난 후 국방부 조병창(현 풍산금속)을 건설하면서 농사짓던 전답들이 거의 빼앗기다시피 수용되었다. 1963년엔 미국 켐텍스와 합작으로 섬유회사(현 태광산업 반여공장)가 들어서며 또 전답이 편입되면서 우로는 조병창 좌로는 섬유공장으로 둘러싸여 외부에서는 마을이 있는지조차 모르게 단절된 형국이었으며 1996년엔 마지막 남은 문전옥답(門前沃畓) 마저 농산물도매시장이 들어서며 대부분 수용되었다. 낮은 보상가에 삶의 터전이던 농토가 수차례 수용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대연동의 큰집과 반여동 작은집 자손들을 구성원으로 1965년부터 문중체제를 갖추고 선영을 수호(守護)하며 선대의 덕행(德行)을 이어받아 후손들이 서로 배려(配慮)하고 화합(和合)하며 살아가고 있다.
상리마을 영모재(永慕齋)는 지서문중의 168위(位) 선조님을 모시는 자리이며 아울러 연중 문중의 각종 모임과 행사를 개최하는 문중재실(齋室)로 대지 면적 1,540㎡에 재실 영모재, 서재(書齋)인 감은정사(感恩精舍)와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복궁, 창덕궁, 해인사, 부석사 등 궁궐과 고찰(古刹) 복원의 도편수로 참여한 해운(海雲) 김창희(金昌熙) 대목장이 건축을 맡아 1989년에 상량(上樑)을 하였으며 동래지방의 문중 재실건물로는 규모가 있는 전통 목조건축물이다. 영모재는 문중의 제례(祭禮)뿐만 아니라 잘 가꾸어진 정원을 활용하여 문중원과 지역민을 위한 음악회, 경로잔치, 어버이날 행사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는 등 문중유산의 지역사회 활용방안을 널리 찾아가고 있다.
(자료제공 : 지서문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