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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02. 11
언젠가부터 한국 프로야구 스프링캠프와 마무리캠프에 감독이나 코치가 아닌 또 다른 지도자들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단기간에 선수들의 야구 기술을 다듬고 매만지는 ‘인스트럭터’들이다. 언뜻 보면 코치와 비슷한 일을 하는 듯하지만, 사실 역할은 엄연히 다르다. 코치들은 선수들의 야구와 관계된 부분은 물론 팀 내에서의 역할 분담이나 사생활, 인성 문제까지 1년 내내 담당 선수들 전체를 아우르고 관리해야 하는 책임자 역할을 한다. 인스트럭터는 보통 캠프 기간 동안에만 선수들을 지켜보면서 철저하게 특정한 기술 향상에 초점을 맞춰 지도한다. 학교 담임선생과 족집게 과외선생의 차이라고 보면 된다.
▲ 한화는 지난해 11월 오키나와 마무리캠프에서 일본 ‘잠수함 투수’ 와타나베 스케를 초빙한 데 이어 이번 고치 스프링캠프에서도 일본인 인스트럭터 두 명을 초빙했다. 왼쪽은 그중 한 명인 가와지리 데쓰로. / 사진출처=와타나베 스케 블로그
# 인스트럭터, 잘 활용하면 약 된다
인스트럭터를 초빙하는 일은 무척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칫 기존 코치들의 기술적인 능력을 무시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어서다. 야구 관계자 A는 “실제로 인스트럭터들을 처음 데려오기 시작했을 때에는 기존 코치들의 반발이 컸다”며 “다들 지도자로서의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에 어차피 시즌이 시작되면 인스트럭터의 지도 내용과 관계없이 다시 자기 스타일대로 선수들을 바꿔 놓곤 했다”고 귀띔했다. 한국에 오는 인스트럭터들이 주로 이견의 여지없이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스타플레이어 출신들인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 관계자는 “팀에 몸담고 있는 원래 코치보다 선수 경력이나 지도자 경력이 월등하게 좋은 인물이어야 코치도 한 발 물러나 받아들일 명분이 선다”며 “메이저리그나 일본 프로야구에서 인정받은 인물이라면 또 모르지만, 국내 출신의 인스트럭터들은 이런 이유에서 거의 쓰기 어렵다. 역대 최고의 투수였던 선동열 전 KIA 감독과 포수 조련사로 명성을 떨친 조범현 kt 감독처럼 독보적인 경력을 지닌 분들 정도가 돼야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물론 인스트럭터는 잘만 활용하면 선수단의 기량 향상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야구 관계자 B는 “지금은 은퇴한 한 야구해설위원은 현역 시절 마무리캠프와 스프링캠프에서 일본인 인스트럭터를 만난 후 타격에 눈을 떴다는 평가를 받았다. 스스로도 그 인스트럭터에게 고마워하고 있다”며 “똑같은 지도를 받아도 선수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흡수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또 “일본 출신 인스트럭터들은 특정 분야에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는 인물이 많다. 펑고를 자로 잰 듯 잘 쳐서 아예 펑고만 쳐주는 일을 직업으로 갖고 있는 전직 선수들도 있을 정도”라며 “세밀한 부분을 파고드는 데 있어서는 확실하게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선수들에게만 국한된 얘기도 아니다. 야구 관계자 C는 “코치들도 조금만 열린 마음으로 인스트럭터가 어떤 지도를 하는지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다. 좋은 점은 흡수하고 나쁜 점은 버리면 되는 것”이라며 “무엇보다 인스트럭터가 어떤 부분을 전수했는지 알아야 시즌 중 그 선수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함께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 단기 속성 과외와 같은 단점이 있다
다만 캠프 때 참여하는 인스트럭터는 짧게는 1~2주, 길어야 한두 달 정도만 선수를 지켜볼 수 있다는 게 단점이다. 벼락치기 공부는 반짝 효과를 볼 수는 있어도 머릿속에 오래 남기는 어렵다. C 관계자는 “모두가 알고 있듯이, 불펜피칭 때 아무리 좋아도 실제 마운드에서는 전혀 다른 공을 던지는 투수들이 많다. 캠프 때 잠깐 본 인스트럭터의 조언은 수박 겉핥기식이 될 수 있다”며 “인스트럭터들의 평가가 맞는 말도 많지만, 지나친 극찬이나 장밋빛 평가는 걸러 들을 필요도 있다”고 지적했다. 앞서의 A 관계자 역시 “웬만큼 유능한 인물이 아니라면 인스트럭터의 효과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또 아무래도 인스트럭터는 선수 한 명에 대한 책임감이 코치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어서 선수들도 인스트럭터와 기존 코치의 지도 방식 사이에서 갈팡질팡할 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지속성이 떨어지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최근에는 구단들이 한국 프로야구에 대해 잘 아는 전직 용병들을 아예 ‘코치’로 고용하는 사례가 늘었다. 해외에서 명성이 높았던 외국인 인스트럭터를 잠깐씩 데려오는 것보다 장기적으로 훨씬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 레오 마조니가 일으킨 반향
한국 선수들을 지도했던 특급 인스트럭터 가운데 가장 화제를 모았던 인물은 2006년 LG의 하와이 캠프에 함께 했던 레오 마조니였다. 당시 볼티모어 투수코치였던 마조니는 1990년대 애틀랜타를 ‘투수 왕국’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메이저리그에서 ‘투수 조련의 대가’로 명성을 떨치던 지도자였다. 그해 KIA도 플로리다에서 조 바브라 타격코치를 포함한 미네소타 현역 코치 세 명을 인스트럭터로 초빙했고, 현대 역시 플로리다 캠프에 피츠버그 산하 루키군 코치 두 명을 고용했지만, LG가 ‘모셔온’ 마조니 코치의 명성에 비할 바가 못 됐다.
당시 마조니 코치가 LG 캠프에서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LG도 팀 내 젊은 투수들에 대한 마조니 코치의 평가를 연일 홍보했다. 마조니 코치는 신재웅, 우규민, 김기표, 민경수, 심수창, 송현우를 ‘여섯 명의 영 건’으로 묶어 “빅리그에서도 쉽게 찾기 힘든 투수들이다. 이들을 발견한 스카우트들이 대단하다”고 칭찬했고, 이 가운데서 특히 신재웅을 ‘마조니 주니어’라 칭하면서 “존 스몰츠와 톰 글래빈을 가르칠 때처럼 가슴을 뛰게 하는 선수다. 볼티모어 소속이라면 전반기는 트리플A에서 경험을 쌓게 하고 후반기에 4~5선발로 올릴 것”이라고 구체적인 활용 방안까지 내놨다. 결과적으로 ‘마조니 주니어’라는 꼬리표는 신재웅에게 오히려 독이 됐지만, 마조니 코치의 방문은 LG가 본격적으로 특급 인스트럭터 초빙에 공을 들이는 계기가 됐다.
이듬해인 2007년에 LG는 사이판과 오키나와 캠프에 재일교포 김일융(일본 이름 니우라 히사오)을 투수 인스트럭터로 투입했다. 김일융은 1968년부터 1983년까지 일본 요미우리에서 뛰었고, 1984년부터 1986년까지 3년간 삼성에서 통산 54승 3세이브, 방어율 2.53을 기록한 명투수다. 특히 1985년에는 무려 25승을 해내면서 김시진 전 롯데 감독과 함께 삼성의 전후기 통합우승을 이끌었다. 은퇴 후 일본에서 야구 해설가와 평론가로 활동하던 김일융은 모처럼 한국의 후배들에게 현역 시절의 노하우를 전수했다.
이뿐만 아니다. 2011년에는 ‘대마신’이라는 별명으로 위용을 떨친 사사키 가즈히로를 오키나와 스프링캠프 인스트럭터로 영입했다. 메이저리그와 일본에서 최고의 마무리투수로 활약했던 사사키가 은퇴 후 처음으로 공식 인스트럭터를 맡은 팀이 바로 LG였다. 사사키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였던 포크볼 던지는 법을 LG 투수들에게 전수했고, 선수들에게 마운드에서의 정신적인 부분에 대해 많은 조언을 하고 돌아갔다. LG는 그해 사사키와 더불어 명포수 출신인 이토 쓰토무에게 포수 인스트럭터도 맡겼다. 세이부 감독 출신이었던 이토는 2012년 두산에서 수석코치를 맡았다가 지바롯데 감독으로 부름을 받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을 정도로 거물급 포수였다.
▲ 2006년 LG 하와이 캠프에 함께했던 ‘투수 조련의 대가’ 레오 마조니. 오른쪽은 2007년 LG 사이판과 오키나와 캠프에 투수 인스트럭터로 투입됐던 재일교포 김일융(왼쪽). / 사진제공=LG 트윈스
# 거물 인스트럭터 릴레이는 여전
안타깝게도 LG는 거물 인스트럭터 영입에 쏟은 정성을 성적으로 보답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화려한 경력의 스타 인스트럭터들이 종종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NC는 지난해 미국 애리조나 캠프에서 메이저리그 올스타 출신 토미 데이비스 인스트럭터에게 열흘간 단기 지도를 맡겼다. 데이비스는 1959년 LA 다저스에서 데뷔해 18년간 메이저리그에서 뛰면서 세 번이나 올스타로 뽑혔고, 두 차례 내셔널리그 타격왕에도 올랐던 왕년의 스타다. 데이비스는 일부러 NC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듣지 않은 채 캠프지에 왔는데, 간판타자 나성범을 보자마자 “최상위권의 타자다. 타격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인상적이고 즐겁다”고 칭찬해 화제를 모았다. 데이비스는 정확하고 빠르게 배트를 컨트롤하는 방법과 타격의 기본기를 지도했다.
한화는 일본을 대표하는 언더핸드 투수였던 와타나베 스케에게 ‘잠수함 인스트럭터’의 특명을 내리기도 했다. 와타나베는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한국전에만 두 차례나 선발 등판했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2009년 제2회 WBC에도 일본 대표팀 멤버로 출전했다. 일본 선수지만 한국의 야구팬들에게도 이름이 친숙한 이유다. 특히 2005년에는 15승(완투 8회, 완봉 3회 포함)에 방어율 2.17을 기록한 것은 물론, 그해 일본시리즈 1차전에서 무4사구 완봉승을 거두는 괴력을 뽐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일본의 정상급 스타 투수였다. 와타나베는 지난 시즌이 끝난 뒤 오키나와에서 진행된 한화 마무리캠프에 참가해 한 달 가량 ‘매의 눈’으로 한화의 젊은 투수들을 살폈다. 한화 김성근 감독이 2005년 지바롯데에서 타격 인스트럭터로 일할 당시 지바롯데 에이스였던 와타나베와 인연을 맺은 게 계기가 됐다.
한화는 이번 고치 스프링캠프에도 일본인 인스트럭터 두 명을 초빙했다. 고바야시 신야 외야 수비 인스트럭터와 가와지리 데쓰로 투수 인스트럭터다. 고바야시는 지난해 스프링캠프에 이어 2년째 한화 전지훈련에 합류했지만, 가와지리는 새로 왔다. 사이드암으로 140km대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였고, 한신 시절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경력이 있다. 와타나베의 바통을 이어 받아 한화의 젊은 잠수함 투수들을 집중적으로 살피게 된다.
사실 가와지리 인스트럭터는 현역 시절 한국과 악연을 맺은 기억이 있다. 한화에서도 코치 생활을 했었던 이종범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이 1997년 일본 주니치에서 뛸 때, 한신 투수였던 가와지리가 몸쪽 커브를 던져 이 위원의 오른쪽 팔꿈치를 맞혔다. 이 위원은 뼈가 부러져 3개월 가까이 경기에 나서지 못했고, 이후에도 몸쪽 위협구에 부담을 느껴 한창 가파른 상승세를 타던 페이스가 반대쪽으로 꺾였다. 가와지리는 이후 이종범 위원의 집을 직접 찾아가 사과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배영은 / 스포츠 자유기고가
일요신문 [제1239호]
빅리그 화제의 인스트럭터
저스틴 시걸 ML 최초 여성 코치‘금녀의 벽’ 허물었다
100년이 훌쩍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메이저리그에서는 오래 전부터 인스트럭터의 존재가 보편화됐다. 많은 구단이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의 레전드 플레이어들을 스프링캠프에 종종 초빙한다. 단순히 야구 기술을 전수하고 배우는 것을 넘어, 과거에 한 팀의 역사를 만들었던 대선배들과 같은 유니폼을 입고 함께 훈련하는 것만으로도 선수들의 팀에 대한 소속감과 자긍심을 더 높일 수 있어서다. 팀에 애착이 깊은 은퇴 선수들 역시 현역 후배들의 훈련을 돕고 싶다며 스프링캠프 방문을 자청하기도 한다. 명문구단 뉴욕 양키스의 명 투수였던 앤디 페티트도 은퇴 후 스프링캠프지로 날아와 배팅볼을 직접 던졌을 정도다.
▲ 저스틴 시걸은 지난해 10월 애리조나 메사에서 진행된 오클랜드의 교육리그에 내야 수비 인스트럭터로 초청돼 선수들을 지도했다./ AP=연합뉴스
최근에는 일본인 타자 마쓰이 히데키가 메이저리그 친정팀 양키스에서 스프링캠프 인스트럭터를 맡아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마쓰이는 일본과 미국 양대 리그에서도 최고의 명문팀에서만 선수 생활을 한 거물 타자였다. 1993년부터 2002년까지 요미우리 4번타자로 활약한 뒤 2003년 양키스와 계약하면서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2012년 은퇴할 때까지 핀스트라이프 유니폼을 입었다. 일본에서는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 홈런왕, 타점왕을 무려 세 번씩 해냈고, 미국에서는 아시아 선수 최초로 월드시리즈 MVP에 선정되는 영광까지 누렸다.
특히 마쓰이의 양키스 캠프 방문은 2014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또 다른 일본인 ‘괴물’ 투수 다나카 마사히로와의 인연 때문에 더 화제였다. 마쓰이는 다나카가 양키스와 계약하도록 조언하고 설득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양키스는 엄청난 기대 속에 첫 스프링캠프를 치르는 다나카에게 마쓰이의 존재가 큰 힘이 될 것으로 여겼고, 실제로 마쓰이는 양키스 인스트럭터와 다나카의 팀 내 적응을 돕는 조력자 역할을 모두 훌륭히 해냈다. 또 다나카가 팔꿈치 수술을 하고 회복 중이던 지난해 스프링캠프에도 다시 나타나 후배를 격려하고 세심하게 살폈다.
물론 역대 가장 놀라운 인스트럭터 가운데 한 명은 메이저리그 사상 최초로 ‘금녀의 벽’을 허문 저스틴 시걸이다. 시걸은 지난해 10월 애리조나 메사에서 진행된 오클랜드의 교육리그에 내야 수비 인스트럭터로 초청돼 선수들을 지도했다. 메이저리그 전체가 놀란 사건이었다. 시걸은 이미 2009년 미국 독립리그팀 브록톤 록스에서 1루 코치를 맡아 처음으로 남자 리그에서 1루 코치를 맡은 여성으로 기록됐다. 이어 2011년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 기간 동안 오클랜드, 클리블랜드, 탬파베이, 세인트루이스, 휴스턴, 뉴욕 메츠 등의 팀에서 배팅볼 투수로 활약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이번에야말로 진짜 메이저리그 구단의 정식 일원으로서 선수들과 같은 유니폼을 입겠다는 꿈을 현실로 이룬 것이다. 시걸의 열정과 능력을 높이 산 오클랜드 빌리 빈 단장의 용단이었다.
시걸은 스포츠심리학 박사 학위를 보유하고 있다. 오클랜드는 캠프에서 시걸에게 야구 경기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심리적인 상황들을 컨트롤하는 법에 대해 강의해달라는 주문도 했다. 그러나 시걸의 역할은 그저 ‘여성 멘털 코치’가 아니었다. 시걸은 내야수들과 직접 그라운드에서 부딪히면서 수비 기술을 지도했고, 다른 코치들과 함께 타격 훈련과 피칭 훈련을 모두 보조했다. 한 명의 인스트럭터로서 당당하게 인정받은 것이다.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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