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감사만 하면 됩니다.
Text Lk 22,14-20
(14)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16)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7)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9)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1. 오늘은 모든 교회들이 지키는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맥추감사절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초실절, 칠칠절(오순절), 맥추절 등의 절기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출34,22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세말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출23,16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그해 농사의 첫 수확을 거둔다는 의미에서 초실절이고, 그 농산물이 보리 혹은 밀이기에 맥추절이며, 그때가 유월절로부터 7주간을 지낸 후이기에 칠칠절이며 7주간을 지내고 50일이 되는 날이어서 ‘오순절’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또한 민10,10에서 “또 너희의 희락의 날과 너희가 정한 절기와 초하루에는 번제물을 드리고 화목제물을 드리며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시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하신 대로 나팔도 불었기 때문에 나팔절과 관계가 있습니다.
오늘 교회에 오셔서 맥추감사주일을 지키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께서 이 절기를 지키는 자에게 약속하신 복과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맥추감사주일에 함께 은혜받을 성경 말씀은 눅22,14-20절입니다.
2.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는 모습을 보여주는 성경 구절입니다.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앞둔 예수님께서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는 장면은 매우 비장한 순간입니다. 제자들은 무슨 말인지 그뜻을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당신의 몸이라고 하셨고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면서 당신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몸과 피를 나누어주시며 먹고 마시게 하는 그 비장한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잔을 받으실 때나 떡을 떼어 나누어주시기 전에 감사 기도를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당신 생애에 있어 최악의 순간이라 할 수 있는 그 순간을 감사하셨다는 뜻입니다. 또한 당신의 살을 찢어 나누어주시고 피를 짜내어 마시게 하시는 그 고통을 감사하셨다는 말입니다. “(14)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16)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7)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고 하셨고, “(19)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자신에게 닥친 최악의 순간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도리어 감사하신 예수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최악의 순간을 앞두고서 제자들과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에 대한 감사였을까요? 아니면, 더 최악일 수 있는데 이만큼 최악이어서 감사하다고 하신 것일까요? 혹, 당신은 고난을 받으시지만 당신의 고난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으니 감사하다고 하신 것일까요? 그런 감사는 스스로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서 하는 억지 감사로 예수님께 부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진정한 감사는 그렇게 구실을 만들어 붙여야만 설명할 수 있는 그런 감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순간을 추호도 ‘최악의 순간’이라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14-15절에 사도들과 함께 앉으셔서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던 식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19절에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고 하시면서 나눈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간절히 바라고 원하던 일이었기에 감사하셨고 당신을 찢어 나누어 주시는 것이 좋아서 감사하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길이 기념할 일이라고 하시면서 말씀하신 감사였습니다. 본문 어디에도 억지로 구실을 만들어서 하는 감사라는 뜻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구세주로서 구원 사역을 하는 모든 것을 감사하고 계셨음을 우리에게 알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첫 열매를 거두는 때에, 혹은 가을 추수를 하는 때에 하라고 하신 감사는 농산물을 수확하게 하신 것에 대한 감사가 아닙니다. 흉년이 들거나 자연 재해가 발생하여 거둔 것이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감사가 아니란 말입니다. 한 절기의 농사와 한 해의 농사, 혹은 일생 동안의 농사에 대하여 감사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녀 삼고 백성 삼아주셔서 세세 무궁토록 인도해 주시고 책임져 주시며 복을 내려주시는 은혜에 대하여 시작 때부터 수장할 때까지 항상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즉, 맥추절이나 추수절은 거둔 농산물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늘 함께하여 주시는 은총에 대한 감사 명령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신앙은 ‘사랑하는 신앙’입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최고의 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그렇게 답하셨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22,37-40)이라고. 그런데, 이 ‘사랑하는 신앙’에 오르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바로 전 계단이 ‘감사하는 신앙’입니다. 감사가 없이는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에 무한히 감사하는 마음이 온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하고, 이웃이 그저 고맙고 감사하게 느껴질 때에야 비로소 아무 조건 없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조건이 감사로 받아들여지는 믿음이야말로 완전한 믿음에 아주 근접한 믿음입니다.
이 감사가 우리의 감사이기를 기도합니다.
3. 다음, 17절과 19절에서 예수님께서 잔을 받고 감사 기도를 하신 후에 너희끼리 나누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주셨고, 또한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신 후에 떼어 나누어주셨다고 했습니다. 이제 당신이 하신 구속 사역은 완성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받아 나누어 먹고 마시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역사에 대하여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인간은 그 은혜 역사에 대하여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인간은 감사하는 것으로 역사하신 은혜에 참여할 수 있을 뿐이며 그렇게 감사하여 참여함으로써 은혜를 누리는 것만으로도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충분히 응답하는 것이라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17)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9)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또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조치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역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구원 받기 위해 스스로 할 일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조치하시고 예수님께서 온 삶으로 구속하여 주신 은혜를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감사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믿고 받아들인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는 요1,12 말씀이 그 뜻입니다.
그리고 이미 구원받았지만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성도는 예수의 영으로 오신 성령 하나님께 기댄채 오늘을 분투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사도 바울께서 말씀하신 ‘믿음의 선한 싸움’(딤전1,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딤전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을 싸울 때에도 성도는 감사만 하면 충분합니다.
미로슬라브 볼프는 ‘베풂과 용서’에서 ‘믿는 것과 감사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필요로 하는 분이 아니시며 우리의 손으로 그분께 무엇을 새로이 드릴 것도 없는 분입니다. 우리들 성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바르게 살며 바른길로 인도되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 면에서 감사는 성도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고결한 행위이자 하나님의 권능을 끌어내는 힘입니다. 한 송이 카네이션 따위가 키워준 부모에 대한 보상이 될 수는 없지만, 꽃에 담긴 감사하는 마음은 부모를 기쁘게 하고 부모로부터 더 큰 사랑의 역사가 나오게 하는 통로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시50,23에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신앙인은 한 가지만 잘 해도 성공합니다. 감사입니다. 감사만 잘해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합니다. 감사하다고 말하는 0.3초속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본회퍼 목사님은 ‘감사를 통해 인간은 부자가 되어진다.’고 했고, 존 헨리는 “감사는 최고의 항암제요 해독제요 방부제다.”, 데보라 노빌은 “감사하면 개인의 잠재력이 개발되고 인간관계가 회복되고 장수할 수 있다.”고 합니다. 나병이 치료된 것을 알고 돌아와 고쳐주신 주님께 감사한 사마리아 사람은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구원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물고기에게 삼키어졌던 요나가 뱃속에서 감사했더니 하나님은 물고기가 요나를 뱉어내게 하셨고,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의 감사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억울하게 갇힌 중에서도 드린 바울과 실라의 감사에 빌립보 감옥의 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힘들고 어렵습니까? 감사가 하나님께서 권능을 나타내시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는 감사만 하면 됩니다.
4.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감사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신 감사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모든 것을 잊는다 해도 감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8)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재물을 다 잃는다 해도, 건강을 다 잃는다 해도, 감사는 결코 잃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한량없는 사랑을 받은 사람이 우립니다. 예수님의 피 값으로 영생을 얻은 사람이 바로 우리입니다.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는 이유가 우리 성도들 때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삼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때때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믿음으로 해석이 되지 않는 일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하나님이 잘못 일하시는 것이 되지 않습니다. 단지 내가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당신의 아들까지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어쭙잖은 정보를 근거로 오판하지 말고 감사해야 합니다.
두 친구가 나란히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날씨가 화창했습니다. 길가에는 꽃이 아름답게 피었습니다. 하늘에서는 새들이 날고 있었습니다. 들판에는 소와 양들이 풀을 한가하게 뜯고 있었습니다. 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야! 정말 아름답다. 하나님은 위대한 창조주시다. 벌레 하나도 하나님이 세밀하게 창조하셨지. 생각해 봐! 저기 소도 처음에는 작은 송아지였지. 저 새들도 알속에서 나왔지.” 같이 걷던 친구가 말했습니다. “그래 하나님은 정말 위대하신 분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이해하지 못 할 것이 하나 있어.”, “뭐가 이해가 안 되는데?”, “소는 몸집이 크니까 먹을 것이 많이 필요해. 새는 몸집이 작으니까 조금만 먹어도 돼. 그런데 새에게는 하나님이 날개를 주셔서 온 천지를 다니며 먹게 하시고, 소에게는 왜 날개를 안 주셔서 주변에 있는 것만 먹게 하셨을까? 하나님은 이상해.” 그 때 새 한 마리가 그 사람의 머리 위로 날아가면서 똥을 쌌습니다. 그 사람의 이마에 새똥이 흘러 내렸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이 크게 깨닫고 말했습니다. “아! 이제야 알겠다. 하나님의 뜻을 알겠다. 감사하다.” 그리고 똥을 닦았습니다. 만일 소가 날아다니며 똥을 싸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소에게 날개가 없는 것도 감사 거리입니다. 소가 날아다니다가 자동차 위에라도 내려앉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동차 박살나겠지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도 감사하신 주님을 배워야 하겠습니다.